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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라이의 이론화: 논리가 웃음을 낳는다

논리가 웃음을 낳는다. 언뜻 떠올리기에 웃음은 기괴한 행동을 하고 엉뚱한 짓을 하기만 하면 되지, 논리 같은 게 굳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뇌는 자신의 예측과 벌어진 상황이 다를 때 이러한 실패를 제대로 기억해 다음에 대처하려고 한다. 상황에 대처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이때 감정이 부산물로 일어난다. 이 과정을 예기 실패(expectation failure)라고 부른다. 웃음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예측을 위한 ‘논리’가 필요하다.(1)

오와라이의 경우 크게 두 가지 이론의 조합으로 ‘네타(ネタ)’가 탄생한다. 여기서 네타란 본래 씨앗을 의미하는 타네(種)에서 유래한 말로, 특정 업계의 전문인들이 속어로 말을 뒤집어쓰던 과거 습관에서 유래한다. 현재 네타에는 신문기사나 소설, 영화 등 다양한 작품의 소재, 코미디언이 가지고 있는 개그나 콩트 혹은 만자이 작품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2) 네타 만들기를 이론적으로 접근한 데에는 매뉴얼의 필요성도 한몫했다. 과거에는 야쿠자모노 답게 스승 밑에 제자로 들어가 잔심부름을 하며 어깨너머로 재주를 익혔으나, 게닌이 소속된 거대 기획사가 독자적으로 게닌을 양성하는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3) 양성소에서 배우는 이론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긴장과 완화, 또 다른 하나는 서파급 구성이다.

 

오와라이 방정식 = 긴장 × 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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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과 완화 이론을 만든 2대 카츠라 시자쿠. 생전에 “동쪽의 신쵸(志ん朝) 서쪽의 시자쿠”라 불릴 만큼 칸사이의 카미카타 라쿠고(上方落語)를 대표하는 라쿠고카였다. 카미카타는 칸사이를 의미한다.

긴장과 완화는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도 이야기한 바 있는 웃음 이론으로, 긴장이 이완되면서 방출되는 에너지로 웃음을 설명한다. 오와라이에서 긴장과 완화를 이론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일본의 라쿠고카(落語家) 2대 카츠라 시자쿠(桂枝雀)다.(4) 특히 그는 기준이 없이 이름만 붙여 11 가지로 난잡했던 기존의 라쿠고 결말부인 사게(下げ) 혹은 오치(落ち)를 두 종류 웃음과 네 종류 유형으로 압축해 분류했다.

1. “에이, 바보 같아(そんなアホな)” 웃음: 긴장-비일상-자극-웃음. 우리나라에서 최근 등장한 ‘병맛’과 통하는 구석이 있다. 

1.1. 반전(どんでん) 결말: 완화→긴장. 관객이 논리적으로 예측한 결말이 끝에 가서 뒤집혀 긴장을 일으키며 끝나는 결말이다.

1.2. 기괴(変) 결말: 긴장. 일본어로 ‘이상하다’와 ‘우습다’는 오카시이(おかしい)로 같다. 우리말로는 ‘우스꽝스럽다’와 비슷한 어감으로, 마지막에 갑작스럽게 이상한 결말로 방향을 틀어 웃음을 만드는 결말이다.

2. “아하, 그렇구나(なるほどな)” 웃음: 완화-일상-안심-웃음. 납득하면서 느끼는 안심감과 이완이 해당한다. 

2.1. 해결(謎解き) 결말: 긴장→완화. 관객이 논리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수수께끼(謎)가 풀려(解き) 납득게 만들어 재미를 유발한다.

2.2. 맺음(合わせ) 결말: 완화. 서로 다른 이야기의 흐름이 한 곳에서 만나 납득하게 만들어 재미를 유발한다.

 

긴장과 완화는 오치 외에도 콩트나 만자이의 역할 분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콩트의 후리와 코나시, 만자이의 보케와 츳코미, 더블 액트의 스트레이트맨과 바나나맨은 각각 긴장과 완화에 대응한다. 콩트에서는 후리가 설정에 맞춰 무리한 요구를 해 긴장을 만들고, 코나시가 이를 수행해 완화를 만든다. 만자이에서는 보케가 엉뚱한 말을 하면 츳코미가 이를 지적하고 반응해 완화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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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닌 콤비 <야성폭탄>의 보케 담당 카와시마 쿠니히로(川島邦裕). 작곡, 연주, 미술 등 다양한 예술적 재능과 보케 능력으로 동료 게닌에게 천재라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부조리함과 넌센스, 과격한 폭력묘사, 화장실 유머 등 극도로 긴장을 높이는 스타일로 인해 호불호가 갈린다.

한편, 시자쿠는 긴장이 과하면 불쾌감을 줄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너무 과한 긴장은 긴장을 해소되기를 기대하더라도 상황 자체를 견디지 못하게 만든다. 논리 형성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일본 개그 망가 중 일부가 받아들여지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여기에 있다. 간혹 오와라이 게닌 사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으나 대중의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게닌도 있는데, 마찬가지 이유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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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우스타 쿄스케의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 속 한 장면. 후리/보케인 재규어와 코나시/츳코미인 사케토메가 한 컷에 담겨있다. / 우: 보케와 츳코미가 한 화면에 들어있는 또 다른 예, <궁극 초인 아~루>의 한 장면이다. 여기서 츳코미는 즛코케의 형태로 나타난다.

개그 망가에서는 보통 네타가 콩트처럼 후리와 코나시의 상호작용으로 흐름 있게 진행되다, 절정 부분에 가면 만자이처럼 보케와 츳코미로 나뉘어 상호작용의 회전을 높인다. 이때 중요한 기법 중 하나가 절정에서 보케와 츳코미를 한 컷에 담아 그리는 것이다. 한 컷에 두 역할의 상호작용을 담아 맺음 결말에 들어간다.(5)

 

일본 전통 엔게의 기본 개념: 죠하큐

죠하큐(序破急)큐는 일본 전통 음악 등 다양한 엔게와 무예에 공통되는 개념이다. 서서히, 완만하게라는 의미의 죠(序), 갑작스럽게 흐름이 변화하는 하(破), 그리고 급작스럽게 결말을 맺는 큐(急)의 흐름을 말한다. 칼을 뽑아들 때, 노래를 부를 때, 작곡할 때 등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나타내는 기본 개념이다. 또한 긴장과 완화는 죠하큐의 하와 큐에 각각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완화(죠)→긴장(하)→완화(큐)의 흐름이다.

서사(스토리)는 정보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서사를 전달하는 콩트, 라쿠고, 만자이 등 오와라이 엔게는 죠하큐의 구성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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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게에서의 역할과 서사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흐름을 합치면 다음과 같은 그래프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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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기승전결도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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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을 끌어올리는 것이 후리/보케의 역할이고 긴장을 끌어내리는 것이 코나시/츳코미의 역할이다. 여기서 말하는 긴장은 일상적인 상식과 벗어난 정도를 말하며 단순한 감정의 전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부록: 개그 망가에 자주 등장하는 오와라이 업계 용어

그 외에도 오와라이에는 우리나라에서 그냥 수입된 다양한 업계 용어가 있다. 이를 간단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천연(天然, 텐넨): 텐넨보케의 준말. 일반적인 상식과 엇나간 발언이나 행동을 자연스럽게 해 그 자체로 보케가 되는 사람을 말한다. 착각이나 무지로 인해 계산하지 않은 행동으로 웃음의 긴장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자기도 모르게 안경을 쓰고 안경을 찾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경우를 이른다. 콩트의 달인이자 1980년대 중반까지 오와라이의 정점에 섰던 하기모토 킨이치(萩本欽一)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스베루(滑る): 미끄러진다는 뜻으로 개그나 보케가 먹히지 않고 실패하는 상황을 말한다. 우리나라 번역물에서는 흔히 “미끄러진다”라는 식의 직역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캬라(キャラ, 캐릭터): 우리나라에서는 특정한 개성을 의미하나, 개그망가를 포함한 망가의 경우 보통은 보케, 츳코미 등 역할분담을 이르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남들에게 츳코미 당하기 쉬운 이지라레캬라(いじられキャラ, 괴롭힘당하는 캐릭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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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전 세계 코미디에 공통되며 모든 웃음을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웃음을 만드는 논리는 수용자 각각이 살아온 경험에 의존하는데 문화마다 생활환경이나 경험이 다르기에 완전히 공통되는 논리는 생리적 공통점을 다루는 소위 화장실 유머로 한정되고 만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면서 웃음을 만드는 논리의 공통점을 찾고 이를 고유한 특정 문화권에 적용할 때 작은 범위의 이론은 충분히 가능해진다. 또한 웃음의 공통점은 심리구조에 의존하기에 추상적인 수준에서라면 다룰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또다시 낯짝 두껍게 광고하자면 졸저 <스토리 트레이닝: 이론편>과 <스토리 트레이닝:실전편>, 그리고 도올 김용옥의 <아름다움과 추함>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으니 더 깊은 논의가 궁금한 분은 참고하기를 바란다.

2. 마술이나 수수께끼에 숨겨진 비밀도 타네라고 부르는데, 비밀을 밝히는 행위를 “밝게 비춘다, 드러낸다”라는 뜻의 아카시(明かし)를 붙여 타네아카시(種明かし)라고 부른다. 여기서 유래해, 영어로 스포일러(spoiler)를 “들키다”라는 뜻의 바레루(暴露る)를 붙여 네타바레(ネタバレ)라고 한다.

3. 대표적인 양성소는 1982년부터 요시모토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에서 만든 요시모토 종합 예능학원(New StarCreation, 통칭 NSC)로 상당수의 게닌을 배출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4. 칸사이 지방 라쿠고를 대표하던 라쿠고카로 라쿠고와 오와라이를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너무 심한 지적 활동으로 신경쇠약에 걸려 깊은 우울증 병세를 앓았고, 59세 자살한다.

5. 이는 성룡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투브 채널 ‘every frame of painting’을 운영하는 영화감독 토니 주(Tony zhou)는 성룡의 액션을 분석하며, 그가 코미디와 액션을 결합하는 데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액션과 리액션이 한 프레임에 담겨 개그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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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에마논_표지

 

박상준의 일본 SF 다이어리

ㅡ츠루타 겐지의 <추억의 에마논>

 

이야기 이어가기 놀이를 해 보자.

싱글 남성이자 SF 애독자인 당신은 훌쩍 떠난 여행에서 우연히 젊은 여성을 알게 된다. 좀 불량소녀 이미지인데다 묻는 말에 대꾸가 없기 일쑤이다. 하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그런 그녀가 말한다.

“SF 팬이군요? 그럼 어떤 황당무계한 이야기라도 받아들일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겠네?”

자, 이다음에 그녀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추억의 에마논_만남

 

이 여자는 자기 이름이 에마논(Emanon)이라고 한다. 영어로 ‘노 네임(no name)’을 거꾸로 한 것이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역사부터 문화, 정치와 경제, 스포츠, 과학 등등 모르는 것이 없다. 그러다가 문득 입을 다물고 얼굴이 심각해질 때가 있다. 지금 어디 가는 길인지, 나이가 몇인지 물을 때이다.

…어렵게 에마논은 자신을 말한다. 지구 생명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30억 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어머니에서 딸로, 인간으로서 육신은 계속 바뀌지만 기억은 조금도 잃는 일 없이 삶의 경험들이 그대로 더해져서 이어진다고. 때가 되면 방랑의 길을 떠나고, 그러다가 남자를 만나 딸을 낳으면 그 갓난 아이가 다시 에마논이 되고, 엄마는 텅 빈 껍데기가 되어 잊히고 사라진다고.

추억의 에마논_정체

에마논은 자신이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도대체 자신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어째서 그 엄청난 기억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지. 이젠 지쳤다고도 말한다. 당신은 SF 팬답게 우주와 지구의 관점에서 열심히 가설들을 내놓는다.

“인류의 새로운 영적 진화를 위해 때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일종의 방아쇠 역할을 하기 위해 말이지.”

하지만 맥주에 취해 불콰해진 얼굴로 그녀는 다시 말한다.

“어때, 내 이야기 SF 만큼 독창적이었어? 아하하….”

당신은 그렇게 불량소녀의 말장난에 놀아났다고 여겼지만, 다음날 그 여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방랑의 에마논_표지

<추억의 에마논>은 원래 SF 작가 카지오 신지가 쓴 소설을 츠루타 켄지가 만화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츠루타 켄지는 펜선만을 고집하는 독보적인 스타일의 작화가로 유명하다. 작업 속도가 느려 작품이 얼마 없음에도 불구하고 열광적인 팬 층을 거느리고 있다. 80년대에 나왔던 원작을 만화로 각색해 내면서 새로운 붐을 일으켜 원작과 만화 시리즈가 계속 이어졌는데, 원작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만화는 <추억의 에마논>에 이어 속편인 <방랑의 에마논>까지 한국판이 나와 있다.

에마논의 이야기는 몇몇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 <방랑자>나 리처드 쉔크만의 영화 <맨 프럼 어스>. 만화 <피터 히스토리아>의 주인공도 에마논과 비슷하다. (<피터 히스토리아>는 어린이 교양만화라는 딱지 때문에 저평가된 숨은 걸작이다! 꼭 일독해 보시길 강력 추천한다.) 모두 다 일종의 관조적 아웃사이더들이 등장하는, ‘미시적 삶의 거대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수작들이다.

만화 속 등장인물을 현실에서 딱 한 사람만 만나볼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에마논을 꼽겠다. <추억의 에마논> 남주인공도 그랬다. 그로부터 13년이 흐르고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일상을 살던 중에 정말 우연히 에마논과 마주친다. 하지만 그녀는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에 그녀의 어린 딸이 눈을 빛내며 다가온다. “날 기억하고 있었구나. 고마워.”

그 짧은, 기묘한 재회를 끝내고 다시 헤어지며 에마논이 고하는 작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가 뭘까.

추억의 에마논_재회이별

에마논은 흔히 지구를 상징하는 신격인 가이아(Gaia)나 ‘머더 어스(mother earth)’와는 다른 존재이다. 가이아의 품 안에서 태동한 ‘생명’의 대변자이다. 에마논은 얼핏 보기엔 ‘중년 SF 팬 남성의 판타지’라는 시니컬한 시선을 받기 쉽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의미심장한 레토릭을 담고 있다. 미토콘드리아로 이어지는 모계 유전이라는 과학적 함의 못지않게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서 생명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모든 주제들이 츠루타 켄지의 그림과 참 잘 어울린다. 너무 진지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추억의 에마논>은 삶을 살아 낸 연륜이 쌓일수록, 그러면서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의문을 계속 키워 온 사람일수록 와 닿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거대한 의문 앞에서 좌절을 예감하는 사람에게 선물같이 다가갈 수 있는 작은 위안이다. 지구 생명의 윤회라는 업을 온몸으로 지고 사는 여인. 현실에서 에마논을 만나고 싶다.

 

 

예고 : ‘일본 SF만화 다이어리’에서 앞으로 얘기할 작품들

콘 사토시의 <세라핌>
야마구치 타카유키의 <만용인력>
오치아이 나오유키의 <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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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몸으로 행하는 엔게: 와게(話芸)

이전 연재에 이어, 망가에 영향을 준 오와라이 장르를 골라 독단으로 체계를 잡아 분류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 분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특정 오와라이 장르나 형태가 어떻게 개그 망가에 영향을 주었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무대에서 행하는 예능을 나는 크게 연극을 의미하는 시바이(芝居)와 말만 사용하는 와게(話芸)으로 나눈다고 했다. 시바이에 이어 이번 글에서는 와게를 다룬다.

와게는 시바이와 달리 기본적으로 연기를 사용하지 않고 말로만 재미를 끌어낸다. 크게 라쿠고(落語), 만담(漫談), 그리고 만자이(漫才) 혹은 샤베쿠리만자이(しゃべくり漫才)로 나눈다. 개그 망가에 영향을 준 대표적인 와게는 라쿠고와 만자이다.

 

개그 망가 구성의 기본이 된 라쿠고

라쿠고는 에도시대에 성립한 전통 엔게로, 간단한 몸짓을 곁들여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며 현재도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이야기 결말에 뚝 떨어진다는 뜻의 사게(サゲ, 下げ) 혹은 오치(落ち)라는 엔딩이 붙는 특징 때문에 떨어뜨리는(落) 이야기(語)라는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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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도 일본문화 전파의 일환으로 때때로 라쿠고가 공연되고 있다.

라쿠고는 마쿠라(マクラ), 혼다이(本題), 오치(落ち) 혹은 사게(サゲ)의 순서로 구성된다. 마쿠라는 자기소개나 이야기의 흐름을 정하는 잡담을 의미한다. 혼다이는 본래 이야기다. 오치는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특정한 양식이다. 마쿠라에서 관객의 긴장을 풀고 라쿠고카와 친근하게 만든 다음, 본론인 혼다이로 들어간다.

라쿠고는 개그 망가에 다양하게 영향을 주었다. 우선 길이가 비교적 짧고 압축적이어서 분량이 짧은 개그 망가에 적합하다. 내용도 다양하다. 사람 사이의 정을 다루는 닌죠바나시(人情噺) 외에도 현대의 장르 구분으로 보면 과학소설(SF)이나 공포에 해당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내용의 구성은 콩트와 마찬가지로 개그망가 플롯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오치는 망가에서 중요한 용어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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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쿠고카 슌푸테이 류쇼(春風亭柳昇)는 친분이 있는 만화가 유우키 마사미의 <궁극초인 아~루>에 야나기쇼(柳昇) 교장선생님으로 패러디되어 등장한다. 애니메이션 판에서는 본인이 목소리를 담당.

라쿠고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대표적인 작가는 <패트레이버>의 유유키 마사미(ゆうき まさみ), <도라에몽>의 후지코 F. 후지오가 있다. 대부분 개그에만 의존하지 않고 전체 구성을 갖추어 스토리로 부드러운 재미를 주는 작풍을 구사하는 작가가 많다. 또한 데뷔 초기에는 개그 망가를 그리다가, 스토리를 만드는 데 더 집중하게 되어 장편 연재로 넘어가면서 탄탄한 스토리 위에 일종의 문체와 같은 개성을 보이는 작풍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후지코 F. 후지오가 그러하다.

‘저는 라쿠고를 좋아합니다만, 같은 이야기라도, 소위 명인이라 불리는 분이 이야기하면 신인과는 달리 전해오는 재미가 완전히 다릅니다. 즉 표현 기술에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후지코 F. 후지오. <후지코 F. 후지오 자선집 도라에몽 上>에서)

 

현대 오와라이를 대표하는 만자이

만자이 혹은 샤베쿠리만자이라 불리는 엔게는 한국에서는 만담이라고 불리는데, 따로 깊이 다룰 예정으로 이 글에서는 간단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고전 예능 만자이(萬歳) (1)에서 유래한 현재의 샤베쿠리만자이는 요시모토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가 이름을 붙이고 형식을 완성했는데, 무성영화 시절 변사가 사회자를 보며 입담으로 재미를 주던 ‘만단’에 만자이와 미국식 만자이인 ‘더블 액트(double act)’ (2)의 영향을 더해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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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오와라이 제2세대를 이끌었던 만자이 콤비 [투 비트(ツービート)]. 보케 담당 비트 타케시(ビートたけし)는 후에 일본 오와라이의 거물이 되었다.
만자이는 기본적으로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보케(ボケ)와 이를 지적해 웃음을 유발하는 츳코미(ツッコミ)로 나뉘며, 두 사람이 박자 좋게 대화를 나누어 웃음을 준다. 라쿠고의 마쿠라처럼 처음 등장할 때는 개그나 특정한 대사를 이용해 웃음을 유발하고 관중의 긴장을 푼다. 이를 붙잡는다는 뜻인 츠카미(つかみ)라고 부르는 데, 본래 개그가 탄생한 이유와 목적과 유사하다. 츠카미 이후에는 츳코미가 후리를 넣고, 보케가 보케를 한 뒤, 츳코미가 이에 반응해 츳코미를 넣는다. 이후 보케와 츳코미가 서로 상호작용을 반복해 진행된다.

보케는 일본어로 치매, 멍한 상태를 뜻하나, 본래는 ‘딴청 부린다’는 뜻의 ‘토보케루(惚ける)가 줄은 말이다. 보케 역할뿐 만이 아니라, 보케가 하는 엉뚱한 소리나 행동도 보케라고 부른다. 이는 만자이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버라이어티 방송이나 콩트, 심지어는 일상생활에서도 모두 통용되는 표현이다. 우리나라 인터넷에서 빈칸을 채워 넣어 웃음을 유발하는 ‘열도의 제목학원’은 본래 일본의 SNS 유머 사이트 보케테(http://bokete.jp)를 번역한 것으로, 사이트 이름대로 특정한 만화나 사진을 보고 ‘보케’를 하는 게 목적이다.

츳코미는 일본말로 ‘푹 찌르다’는 뜻으로 ‘캐묻다, 지적하다’는 뜻도 있다. 상대방의 보케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사람 혹은 행동을 이르는데, 보케와 마찬가지로 널리 쓰이는 표현이다. 일본에서는 츳코미가 없으면 웃음이 완결되지 않는다고 본다. 다음 연재에서 자세히 다룰 ‘긴장과 완결’ 이론 때문이다. 보케가 만든 긴장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으면 관객이 혼란스러워 할 뿐 상황을 납득해서 웃음을 유발하지 못한다. 비트 타케시, 타모리(タモリ)와 함께 ‘오와라이 BIG 3’로 꼽히는 아카시아 산마(明石家さんま)는 ‘좋은 츳코미란 관객의 반응에 0.5초 빨리 반응해 더 쉽게 납득하게 하는 만드는 츳코미’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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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의 판소리와 유사한 형태의 노래나 타령을 하는 엔게로 악기와 함께 진행되었다. 타령을 하는 타유(太夫)와 북을 치며 장단을 맞추는 사이조(才蔵)로 구성된다. 이는 판소리의 소리꾼과 고수의 역할과 유사하다.

(2) 더블액트는 콩트의 후리와 코나시처럼 진지하고 상식적으로 보이는 ‘the straight man’과 우스꽝스럽고 엉뚱한 ‘the banana man’으로 역할이 나뉜다. 대표적인 더블액트 코미디언으로는 애벗과 코스텔로(Abbott and Costello)가 있다. 더블액트 코미디언은 보통 수트를 입고 무대를 서고 빠른 말로 진행한다. 비트 타케시는 만자이의 유래를 고전 만자이가 아니라 더블액트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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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몸으로 행하는 엔게: 시바이 (芝居)

이전 연재에 이어, 망가에 영향을 준 오와라이 장르를 골라 독단으로 체계를 잡아 분류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 분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특정 오와라이 장르나 형태가 어떻게 개그 망가에 영향을 주었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무대에서 행하는 예능을 나는 크게 연극을 의미하는 시바이(芝居)와 말만 사용하는 와게(話芸)으로 나눈다. 이번 글에서는 시바이를 다룬다.

시바이의 대표 장르는 콩트(conté)가 있다. 본래는 프랑스어로 산문 예술형식 중 하나다. 단편 소설보다 짧은 분량 속에 인생에 대한 유머•풍자•기지가 담는 게 특징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엽편(葉篇), 장편(掌篇)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오락을 위주로 하는 가벼운 대중 연극인 희극적인 경연극(輕演劇)을 가리켜 콩트라고 부른다. 분량에 따라 크게 요시모토 신희극(吉本新喜劇), 콩트, 쇼트-콩트로 나눈다.

 

개그 망가의 토대가 된 요시모토 신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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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신희극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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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사회현상으로 개그 망가의 기존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현재의 형태로 바꾸어버린 [꼬마 경찰]
가장 긴 요시모토 신희극 은 일본의 거대 예능사무소 요시모토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2007년 9월까지 요시모토 흥업)에 소속된 게닌 20~30여명이 연기하는 경연극이다. 게닌 각각이 가진 개그를 중심으로 엮은 슬랩스틱 넌센스 콩트로, 희곡 작가가 연출을 겸하며, 보통 3막 구성에 50분 정도 길이다. 스토리 보다 개그를, 연기 보다 캐릭터성을 중시하나, 2막에 연애 등 진지한 플롯이 진행되고, 3막에서 플롯이 개그로 해소된다.

요시모토 신희극은 강렬한 캐릭터와 개그로 진행되는 콩트라는 점에서 개그 망가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칸사이(関西) 오와라이의 특징인 샤베쿠리(しゃべくり)와 도츠키(ど突き), 그리고 즛코케(ズッコケ)가 현저하다. 샤베쿠리는 ‘수다스럽다’는 뜻으로 칸사이 지역색으로 꼽힌다. 도츠키는 ‘때리다’라는 뜻으로 슬랩스틱 코미디의 일환으로 자주 상대방을 때리는 모습을 보인다. 상대방이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하면 바로 머리를 때리거나 발로 차는 등 때려서 반응 하는 경우가 칸사이 지역색이 강한 오와라이에서 흔히 보인다. 즛코케는 ‘넘어진다’는 뜻으로 누군가가 개그를 하면 거기에 반응해 다 같이 무대 위에서 넘어지는 시늉을 한다.

개그 망가는 요시모토 신희극에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개그 망가에서 강렬한 캐릭터의 개그와 다른 인물의 도츠키 혹은 즛코케 반응은 그 자체로 기본문법이다. 그 중에서도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한 개그 망가로는 1970년대 일본에서 사회현상을 일으킬 만큼 인기를 얻은 슬랩스틱 개그 망가 <꼬마경찰(がきデカ)>이 있다. 작가 야마가미 타츠히코(山上たつひこ)는 요시모토 신희극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개그 망가는 종이 위의 콩트

쇼트-콩트는 수 초~수십 초 정도의 짧은 콩트로 우리나라 예능방송의 즉흥 상황극이나 <개그 콘서트>에서의 짧은 콩트와 유사하다. 만자이(漫才) 등 다른 양식에도 도입되는 경우도 많다.

콩트는 보통 2~3인이 15~25분 정도 길이로 보이는 경연극으로, 의상, 화장, 도구, 세트 등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본래 유래는 1950년대 초반 스트립 극장이라 불리는 유흥업소에 경연극 배우가 막간 여흥으로 보이던 간단한 연기와 상황극이다. 그래서 길이가 길어질수록 연극적인 경향을 보인다. 연극 무대뿐 만이 아니라, 텔레비전 방송에서도 오래 전부터 콩트를 주요 내용으로 삼아왔고, 개그 망가에서는 플롯을 구성하는 전범으로 삼았다. 본래 개그 망가는 종이 위에서 벌이는 콩트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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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 망가에서 볼 수 있는 콩트 구조의 예. [개그 만화 보기 좋은 날]의 한 장면. ‘쇄국 중이던 일본에 미국 제독 페리가 흑선(黒船)을 타고 와 개국을 요구했다’가 설정, 부관 콘티 대위가 ‘후리’, 사령관 페리가 ‘코나시’가 된다.
콩트는 설정을 바탕으로, 후리(フリ, 흔들다 혹은 상대를 향해 던진다)와 코나시(コナシ, 해낸다)의 상호작용으로 진행된다. 설정은 특정한 상황을 말한다. 설정을 바탕으로 후리는 코나시에게 무리한 요구를 밀어붙인다. 보통 ‘괴롭히거’나 ‘결점을 지적’한다. 코나시는 후리의 무리한 요구를 수행하며 웃음을 유발하는 연기를 한다. 이때 발생하는 분위기와 스토리를 세계관 으로 부른다.

콩트 구조가 두드러지는 작품은 후지코 F. 후지오의 <도라에몽>이다. 미래에서 온 로보트가 신기한 도구를 준다는 게 설정, 무리한 요구를 하며 도구를 달라고 하는 노진구(노비 노비타)가 후리, 이에 대응해 도구를 주고 사건에 휘말리는 도라에몽이 코나시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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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의 일본 SF 다이어리

ㅡ 니헤이 츠토무의 <아바라>

 

니헤이 츠토무를 아는가, 모르는가.

나는 이것이 ‘진짜배기’ SF 만화 팬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고 믿는다.
혹시 작가 이름이 생소하다면, 작품 제목들은 이렇다. <블레임!>, <바이오메가>, <아바라>, <시도니아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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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한 컷 한 컷을 그대로 오려내어 액자에 넣고 싶다!’

니헤이 츠토무를 처음 접했을 때 든 생각이었다. 그림 때문만은 아니다. 극도로 절제된 대사와 무시무시한 하드보일드 스타일, 그리고 특히 하드한 설정의 디테일까지. 겉으로 드러난 그림 이면에 쉽게 가늠이 안 되는 거대한 콘텍스트가 느껴졌다. 그 강렬한 아우라는 가벼운 독서가 아닌 진지한 심미자의 자세를 요구할 정도였다. 단 한 컷만을 놓고도 오래오래 쳐다보며 배경 이야기들을 상상하고 음미할 수 있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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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작이자 초기의 대표작인 <블레임!>은 전 10권의 적지 않은 분량에다 설정이 복잡하고 대사도 거의 없어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꽤나 힘들다. 니헤이 츠토무를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2권으로 완결되는 <아바라>가 입문용으로 적절하다. 그나마 덜 불친절하면서도 작가의 초기 스타일이 집약된 농축액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림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밀도나 하드보일드 액션, 깨알 같은 디테일이 모두 살아있다. 그 다음 작품인 <바이오메가> 중간에서부터 그림체가 변하더니 최근작인 <시도니아의 기사>는 많이 부드러워졌다. 사람에 따라 호오가 갈린다고 하는데, 이미 작가의 광팬이 되어 버린 필자로서는 아무래도 좋다. 이 작가는 그림 못지않게 디테일한 설정과 스토리텔링의 매력이 한결같기 때문이다.

니헤이 츠토무 작화의 특징은 단연 배경의 압도적인 묘사에 있다. 건축설계사 출신답게 거대 구조체나 건축물의 데생이 장인의 경지이다. 작가 자신도 인물보다 배경 작업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는데, 아마도 작품들마다 내뿜고 있는 그 고밀도의 카리스마는 배경의 디테일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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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의 작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같은 설정, 같은 서사의 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당히 먼 미래. 인류는 정체불명의 생명체에 의해 존립이 위태롭다. 외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괴생명체는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다가 일단 발현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팽창하여 거대하게 몸집을 불린다. 마치 기생체처럼 사람 몸에 들어가 잠복해있기도 하는 이 괴생명체의 정체나 의도는 오리무중이다. 주인공은 이에 대적하여 영웅적인 활약을 펼친다.’

이러한 기본 얼개가 <블레임!>이나 <아바라>뿐만 아니라 <바이오메가>, 그리고 가장 최근작인 <시도니아의 기사>에도 사실상 반복된다. 그냥 상투적인 영웅담 플롯처럼 보이지만, 이 작가의 작품들은 만화라는 시각 매체의 장점이 최고도로 구현된 스토리텔링 아트워크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그가 서양 문화권에서도 열광적인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이유는 SF미학의 시각적 탐색이라는 면으로 볼 때 세계SF 만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블코믹스에서 그를 초빙하여 ‘울버린’ 작업을 맡긴 것도 그런 연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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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이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들은 불친절하다. 독자들이 이미 SF라는 장르에 익숙하다는 것을 전제로 다짜고짜 이야기가 전개된다. 하지만 그 관문을 잘 넘기면 그때부터 니헤이 츠토무의 기묘한 마력이 시작된다. 인간 비슷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들끼리 냉혹하기 짝이 없는 액션들을 펼치는 암울한 미래를 끝없이 동경하게 되는 것이다.

SF 만화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고픈 독자라면, 꼭 니헤이 츠토무를 도전해보시기 바란다. 주저 없이 ‘SF 만화의 미래’라고 부를 수 있는 작가이다.

 

 

예고 : ‘일본 SF만화 다이어리’에서 앞으로 얘기할 작품들

야마구치 타카유키의 <만용인력>
오치아이 나오유키의 <철인>
사무라 히로아키의 <할시온 런치>
콘 사토시의 <세라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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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독단으로 분류한 개그망가에 영향을 준 오와라이 장르

오와라이를 포함해, 예능을 일본말로 재주(芸)를 선보인다(演)는 뜻을 취해 엔게(演芸)라고 부른다. 일본에는 다양한 전통 엔게나 새로 개발된 엔게가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다. 이를 모두 다루기에는 지면도 부족하고, 본래 테마인 ‘개그망가와 오와라이의 관계’와 벗어난다. 따라서 망가에 영향을 준 오와라이 장르를 골라 독단으로 체계를 잡아 분류해 소개하고자 한다. 이 분류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특정 오와라이 장르나 형태가 어떻게 개그망가에 영향을 주었는가를 이야기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엔게: 개그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재주를 선보이는 게 가능한 경우, 대부분 맨몸이나 전문적인 특정한 도구 외에 상황이나 맥락에 관계없이 선보일 수 있는 게 특징이다. 다시 말해 스토리나 맥락 등 전체적인 흐름보다는 단발로 순간순간 비일상을 보여주어 재미를 주는 게 목적이다. (이를 나는 ‘전이’라고 부르는데, 자세한 논의는 졸저 <스토리 트레이닝: 이론편>에서 다루고 있다.) 전통 엔게 중에는 떠돌아다니다 길거리에서 좌판을 벌이고 마술이나 곡예, 차력 등 특정한 재주를 보여주는 다이도게(大道芸)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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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오와라이에서 대응하는 재주는 성대모사나 형태모사를 뜻하는 모노마네(物真似), 짧고 반복 가능한 개그(ギャグ)가 해당한다. 특히 개그는 개그망가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망가에 큰 영향을 준 오와라이다. 1960년대 망가가 월간지에서 주간지로 중심을 옮겨가 회 당 분량이 대폭 줄어든 사정이 배경에 깔려있으며 스토리 보다 개그가 짧은 분량 안에 관심과 재미를 끌고 기억에도 쉽게 남는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망가의 주 독자층인 어린이들이 따라 하기 쉽고 재미있다는 이유로 개그를 선호했다. (1970~80년대에는 마니아 독자가 스토리의 본선 보다 패러디를 즐기기 쉽다는 이유로 개그를 선호하게 된다.)

 

Gag, 개그, ギャグ의 차이

본래 개그는 영어로 숨이 막히다, 재갈 물리다 라는 뜻이나, 이름의 유래는 생각하다 숨이 막혀서가 아니다. 서양에서 대중연극 공연 중 주의가 산만해진 관객을 집중시키기 위해 ‘관객에게 재갈을 물리듯’ 스토리와 관계없이 짧고 단 번에 재미가 전달되는 재주, 유행어, 몸동작 등을 즉흥적으로 혹은 반복적으로 집어넣었던 데서 유래한다. 짧고 특정한 상황이나 연출도 개그라 부른다. 대표적인 예는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The Simpsons)>에서 매 화마다 등장하는 ‘카우치 개그(couch gag)’로, 소파(카우치)에서 보여줄 수 있는 우스꽝스러운 행동, 상황, 대사는 25년을 넘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행동이나 상황 등의 개그는 러닝 개그(running gag)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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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코미디의 대표적 개그인 맹구의 ‘배트맨’

일본에서 개그의 의미는 지역차가 있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칸사이(関西) 지역에서는 짧고 우스꽝스러운 말이나 표정, 몸동작 등을 개그라 부른다. 한편 도쿄를 중심으로 하는 칸토(関東)에서는 조크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칸사이에서 말하는 짧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이나 몸동작은 따로 한방 개그(一発ギャ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는 이를 보통 유행어라 부르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과거 <봉숭아 학당>의 캐릭터 맹구가 선보인 유행어 “(손으로 마스크 모양을 흉내 내며) 배트맨!”이 한방 개그에 해당한다.

특히 한방 개그는 망가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과자, 장난감 회사가 마케팅 전략의 일환으로서 어린이용 개그망가를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으로 바꾸면서 특히 어린아이가 따라 하기 좋은 개그를 넣어 수익을 올려왔다. 한방 개그를 주로 사용하는 게닌끼리는 서로 농담 삼아 ‘갸가(ギャガー, gag+er)’라고 부른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코미디언을 개그맨이라 부른다. 둘은 언뜻 보기에는 같은 말 같으나, 일본의 갸가와 우리나라의 개그맨과는 의미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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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개그가 2조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대표적인 ‘갸가’, 만자이 콤비 의 보케 담당 하라니시(原西). 애니메이션 [프리큐어] 시리즈의 열렬한 팬으로도 유명해 작품에도 본인 역으로 출연해 개그로 프리큐어를 위기에서 구한다.

개그맨/개그우먼(gagman/gagwoman)은 전유성이 만든 조어다. 우리나라의 개그맨은 코미디언이나 게닌과 동의어인 범주가 큰 말로, 개그만이 아니라 상황극 (일본에서는 쇼트-콩트, 미국에서는 즉흥극-improvisation) 등도 소화한다. 우리나라는 단순히 재미 혹은 재미있는 무언가를 도매금으로 부를 때 개그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냥 일본말의 ‘개그’를 한국말의 ‘개그’로 이해하면 오해가 생긴다.

개그망가 작가는 계속해서 새로운 개그를 고안하기 위해 고뇌해왔는데, 오와라이 게닌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작품을 만드는 셈이다(1). (실제로 개그를 고민하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우리나라에 알려진 대표적인 개그만화는 <멋지다 마사루>나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우당탕탕 괴짜 가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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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탕탕 괴짜가족] 캐릭터 ‘진엄마(仁ママ)’. 일본의 전통요괴 귀녀(鬼女)를 패러디한 외모와 행동이 모두 ‘개그’다.

개그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은 개그망가를 이해가 어렵고 황당무계하며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비슷한 예로,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입소문(viral)을 탄 일본 광고가 있다. 개그망가와 마찬가지 이유로 일본 광고계는 개그망가나 오와라이를 답습한 개그-광고를 오랫동안 만들어 왔고, 개중에는 다른 나라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워 오히려 주목을 끄는 경우가 많다. 이는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개그라는 장르의 인식 차이 때문이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도 비슷한 맥락에서 인기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짧고, 강하고, 부조리한 짓

다른 나라에 비해, 일본의 개그는 과격하고 부조리하다. 이유로는 이전 연재에서 이야기한 타자화 외에도, 폐쇄된 환경인 일본 텔레비전 업계 내에서 오와라이가 자체적으로 발전해온 것과 1970년대 카운터 컬처 운동으로 인해 언더그라운드 예술이나 전위 예술과 영향을 주고받은 것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일본은 부조리하고 특이한 행동을 전부 개그라 부르고, 조건반사적으로 웃는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다. 그래서 일본 개그는 이상해, 재미없어, 불쾌해 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우리나라에는 상당수 있다. 이러한 감상 자체는 문제 될 게 없으며, 오히려 나도 일정 부분 공감하는 바다.

그러나 이 글에서 문제 삼는 점은 본래 영어 개그(gag)의 의미와 가까운 것은 한국의 ‘개그’가 아니라 일본의 ‘개그(ギャグ)’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개그=코미디=유머로 사용하고 있지만, 본래 의미대로라면 개그⊂코미디⊂유머다. 유머는 익살과 해학을 통칭하고, 코미디는 유머를 유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희극이며, 개그는 코미디의 방법론 중 하나다. 이 구분이 명확하지 않기에, 우리나라에서는 간혹 개그망가를 받아들일 때 당황하게 된다. 개연성이 없다, 황당하다, 부조리하다 등 반발도 나온다. 여기에 내가 개그망가를 위해 작은 변명을 하자면 원래 그걸 의도로 만든 것이 일본 개그라는 점이다. 인터넷에서 ‘양키 개그 센스’, ‘일본 개그 센스’라는 말로 다른 나라와 우리나라의 웃음이 다른 가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 인식’의 차이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망가는 주간지로의 이행으로 인한 지면 제약과 오와라이의 사회적 인기를 반영해 적극적으로 개그를 받아들여 개그망가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여기서 개그란 우리나라의 ‘개그’보다 더 특수한 형태이며, 우스꽝스러운 표정, 몸동작, 대사, 행동을 짧고, 강렬하게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이 개념을 알고 있으면 개그망가에서 느끼는 생경함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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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닌의 경우 무명시절 개그나 오와라이에 대해 과도한 고민을 한 끝에 정신적 건강을 크게 해쳐 우울증이나 조현병이 발병하는 사례가 상당히 잦다. 이런 상황을 오와라이 게닌은 일본말로 병들었다는 뜻의 얀데루(病んでる) 라고 부르는데, 개그망가가 전성기를 이루던 1970년대 많은 개그망가 작가가 비슷한 상태가 되어 절필하거나 휴재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픽 노블의 다채로운 세계 들여다보기>의 마지막 여정이다. 그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그래픽 노블을 소개했지만,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한국 그래픽노블을 소개하고자 한다. 보통 그래픽노블은 미국, 유럽 만화로 인식되기에, 한국 만화가 그래픽노블이라는 사실이 낯설 수 있다. 하지만 그래픽노블이 주류 만화와 어느 정도 긴장감을 가지며, 또한 보다 자유로운 표현의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래픽노블에 한국 만화가 포함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금 소개할 ‘수신지’ 작가의 <스트리트 페인터> 역시 이러한 그래픽노블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전작 <3그램>은 작가의 일러스트 경력, 자전적 요소, 실험적 작화 등 그래픽노블의 일반적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다. 반면 <스트리트 페인터>의 경우 그래픽노블의 전형성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 이 작품은 2015년 올레마켓에서 연재된 웹툰을 책으로 엮은 것인데, 엄밀히 말하면 ‘그래픽노블’보다는 ‘웹툰’에 가까운 작품이다. 그럼에도 <스트리트 페인터>를 소개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 있다. ‘웹툰’과 ‘그래픽노블’의 관계는 한국 그래픽노블의 독특한 특성이며, 이 또한 다양한 그래픽 노블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스트리트 페인터 클리어 하기

주인공 ‘아랑’은 대학 졸업을 앞둔 회화과 학생이다. 그녀는 4년 내내 미술학원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이번에는 전공을 살릴 수 있는 다른 일이 하고 싶다. 그러던 중 그녀는 우연히 인물화를 그리는 ‘거리의 화가’에 지원하여 합격한다. 이제 주인공은 ‘스트리트 파이터’ 아닌 ‘스트리트 페인터’가 되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며 삶을 배워 나간다.

거리에서 낯선 타인을 그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인공 역시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그녀는 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해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그림을 무조건 실물보다 예쁘게 그려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기도 한다. 물론 그림만 잘 그린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손님이 필요하다. 그래서 주인공은 처음과 달리, 사람들의 관심을 끌 그림을 전시하고, 주요 고객인 아이들을 위한 공간도 마련하며 손님 맞을 만반의 준비를 한다.

준비 3

이제 주인공은 사람을 모으는데도, 그림을 그리는데도 익숙해졌다. 최종 라운드가 남았다. 진상 손님과의 대결. 자신과 닮지 않았다고 돈을 지불하지 않는 손님, 아이를 그리게 한 후 자기 볼일이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 손님 그리고 술에 취에 시비 거는 손님까지, 그들 모두를 주인공은 상대한다. 그녀는 어느새, 어엿한 거리의 화가로 성장해 있다.

진사 손님 1진상 손님 2

 

20대 여성의 사회 초년생 이야기

<스트리트 페인터>는 20대 사회 초년생 이야기다. 일이란 결국 인간관계다. 그 인간관계에는 단순히 손님뿐만 아니라 일을 함께 하는 동료까지 포함되어 있다. <스트리트 페인터>의 경우 여려 명의 중년 남성 화가가 주인공의 동료다. 그들은 주인공에게 적대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우호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그들은 주인공을 동등한 동료라기보다는 나이 어린 학생 정도로 생각한다. 첫 기념 식사 때, 화가 중 한 명이 “우리 막내가 메뉴를 고르면 어때요?”라고 묻자, 주인공은 조심스레 “패밀리 레스토랑은 어떨까요?”라고 답한다. 하지만 리더를 자처한 다른 화가가 ‘날도 추운데 뜨끈한거 먹으러 갑시다’라고 말하며 논의를 일방적으로 끝내버린다.
화가 동료이 같은 젊은 세대의 관한 시선, 특히 20대 여성에 관한 시선은,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공공장소가 거리화가의 영리 장소로 쓰인다고 항의하는 민원이 들어온다. 구청에서는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화가 1명을 줄이기로 결정한다. 화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한다. 그러던 중, 화가 한명이 갑자기 주인공에게 “아랑 씨야말로 딸린 가족도 없고 우리보다 낫지 않아?“라고 말한다. 이에 그녀는 ”아니요. 저도 학자금 대출 상환 시작돼서 매달 내야 할 돈이 얼마인데요. 저도 안 돼요….“라고 맞선다.

일단 여기까지는 젊은 세대의 어려움을 명확히 보여준다. 하지만 이후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의 단호한 대응이 무색할 정도로, 갈등은 허무하게 봉합된다. 화가들은 저녁까지 손님이 가장 적은 사람이 나가는 걸로 합의한다. 이때 실패를 거듭하다 이제 막 화가를 시작한, 그리고 주인공에게 친절한 화가에게 일이 생긴다. 그는 응급실에 실려 간 아들 때문에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다. 탈락자가 자연스레 결정될 상황이다. 주인공은 고민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나갈게요.” 이유가 어찌 되었든, 결국 20대 여성인 주인공은 그림 그리던 거리를 떠난다.
나가기

세계의 다양한 그래픽노블은 궁극적으로 보편적 삶을 이야기하지만, 세부적으로는 각 나라의 독특한 경험과 정서를 이야기한다. <스트리트 페인터>도 예외는 아니다. ‘거리의 화가’라는 특수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그 안에는 한국 젊은 세대의 한 단면이 반영되어 있다. 아르바이트가 삶의 일부분이 된 학생과 이들이 경험한 사회의 모습. 이런 점에서 <스트리트 페인터>의 낙관적 결말은 수긍하기 힘들 수 있다. 젊은 세대의 가장 첨예한 갈등이 가장 비현실적으로 해결됐기 때문이다. 결말이 아쉽다. 하지만 굳이 옹호하자면 모든 작품이 <송곳>일 수는 없다. 따뜻한 위안을 주는 작품이 필요할 때도 있다. <스트리트 페인터>는 그런 작품이다. 때론 힘들 때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잘해낼 수 있다며, 지친 마음을 토닥토닥 다독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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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전성기는 언제였죠? 만약 비틀즈에게 묻는다면, 미국 JFK 공항에서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의 서막을 열었을 때일지 모른다. 아니면 최고의 앨범이라 평가받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발표했을 때 일수도 있겠다. 비틀즈가 20세기 대중문화에 각인시킨 절대적 영향력을 고려하면 그들의 전성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말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제 막 10대를 넘긴 비틀즈가 독일 함부르크에서 공연했을 때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의미 없던 시기는 아니었다. 수많은 공연을 통해 그들의 역량이 쌓여가던 때였다. 하지만 화장실 옆, 그것도 창문도 없는 좁은 방에 생활하고, 이후 석연찮은 이유로 추방당했던 이 시기가 전성기일 수는 없을 것이다. <베이비스 인 블랙>은 이렇게 일반 사람들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는 독일 함부르크 시절의 비틀즈를 이야기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비틀즈 이야기는 아니다. 탈퇴 멤버 ‘스튜어트 서클리프’와 그의 연인 ‘아스트리트 키르허’의 이야기다.

만남 1

 

비틀즈의 탈퇴 멤버 ‘스튜어트’와 그의 연인 ‘아스트리트’

리버풀의 다섯 청년은 독일 함부르크로 떠난다. 고향 리버풀보다는 급속도록 경제가 발전한 독일의 함부르크가 더 많은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비틀즈 멤버는 4명이 아닌 5명인데, 존 레논, 폴 메카트니, 조지 해리슨은 그대로지만 나머지 두 명이 지금과 달랐다. 그 중 한명이 바로 <베이비스 인 블랙>의 중심인물인 ‘스튜어트 서클리프’다. 스튜어트 서클리프는 검은 선글라스를 즐겨 끼며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남자다. 원래 그의 주요 관심사는 미술이었지만, 친구 존 레논의 권유로 비틀즈에 합류해 결국 먼 이국땅 독일에까지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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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스튜어트 서클리프와 아스트리트 키르허

‘아스트리트 키르허’는 노동자 도시 출신 비틀즈와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의사 아버지를 둔 중산층 출신으로, 시, 음악, 미술에 조예가 깊으며 무엇보다 사진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비틀즈의 공연을 보자마자 그들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러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 사람들은 한마디로 내가 찾던 바로 그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 사진을 꼭 찍어야겠어.”라고 결심하며 비틀즈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비틀즈와 우정을 쌓으며, 무엇보다 예술적 감성을 공유하는 ‘스튜어트’와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이 후 스튜어트와 아스트리트 두 인물의 삶은 실화가 아니라면 거짓이라 할 만큼 극적으로 전개된다. 처음 그들은 서로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심지어 만나지 2개월 만에 약혼을 한다. 이어 스튜어트는 미련 없이 비틀즈를 탈퇴하고 미술 공부를 시작한다. 다음 해, 뇌출혈로 그는 사망한다. 너무나도 짧은 시기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죽음을 맞이한 스튜어트 본인은 물론 그의 연인 아스트리트 그리고 아직은 그저 그런 밴드인 ‘비틀즈’의 나머지 동료까지.

비틀즈 사진
아스트리트가 찍은 비틀즈의 사진

 

흑백 영화처럼

<베이비스 인 블랙>은 ‘스튜어트’와 ‘아스트리트’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독자는 두 사람의 예정된 결말을 알고 있다. 스튜어트는 죽고, 그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 그래서 <베이비스 인 블랙>은 흐린 하늘처럼 어둡고 무겁다. 인물과 배경의 선은 간결하고 정적이며, 또한 각 장면은 어둡게 채색되어 있다. 어떠한 격정적 감정도 없다. 심지어 스튜어트가 죽음을 맞이할 때조차도. 쓸쓸함만이 짙게 배어있다.

흑백 1

<베이비스 인 블랙>의 관조적 정서는 두 연인의 비극적 사랑을 담담히 그려 낸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같은 절제된 연출은 <베이비스 인 블랙>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한다. 주인공과 작가의 거리가 멀리 떨어질 경우, 보다 객관적인 작품이 될 수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다소 건조하고 딱딱한 작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베이비스 인 블랙>은 60년대 함부르크의 하위문화를 재현하는데 한계를 보인다. 비틀즈의 격동적인 무대도, 함부르크의 퇴폐적인 문화도, 단지 흑백의 배경으로만 처리되었을 뿐이다. 또한 스튜어트와 아스트리트 사이에서 오갔을 수많은 감정 역시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섬세한 떨림, 격정적인 열정은 생략되고, 오랜 시간 흐른 후 남은 담담한 감정만이 머물러 있다. 흑백 영화처럼 <베이비스 인 블랙>은 생동감 넘치는 컬러, 즉 눈부신 청춘의 날은 담아내지 못하지만, 대신 두 연인의 아련한 추억을 조심스레 소중히 담아낸다.

한 인물의 인생을 온전히 조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가능할지라도 이야기로서는 의미가 없다. 만약 그러한 시도를 하다면, 이야기는 엉키고, 캐릭터는 일관되지 않으며 흐름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결국 실화를 다룬다는 것은 한 인물의 복잡하고 때로는 모순된 삶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지 결정하는 행위이며, 이것은 곧 이야기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다. 가령 또 다른 비틀즈 이야기인 <다섯 번째 비틀즈>의 경우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눈을 통해 매혹적인 비틀즈의 신화를 보여준다. 반면 <베이비스 인 블랙>의 경우 <다섯 번째 비틀즈>와는 또 다른 길을 걷는다. 아직 스타가 되기 전, 그래서 여느 청년처럼 불안하고 위태한 비틀즈와 그의 친구들 이야기. 작가 ‘아르네 벨스토르프’는 비극적 결말을 인지한 채, 스튜어트와 아스트리트 두 사람의 모습을 쓸쓸히 바라본다.

마지막


<대면>의 ‘마누엘레 피오르’는 나른하면서 몽환적인 색채가 돋보이는 작가다. 그는 전작 <엘제 양>과 <초속 5000킬로 미터>에서 작가 특유의 색채로 주인공의 실존적 위기와 각 유럽 도시의 독특한 분위기를 매혹적으로 그려낸다. 지금 소개할 SF 만화 <대면> 역시 비록 흑백으로 채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누엘레 피오르의 매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각 장면은 안개처럼 엷게 펼쳐진 검은색과 이에 대비되는 선명한 흰색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흑백의 경계는 명확하기보다 흐릿한데, 이 같은 표현은 인간 심리의 미묘함, 인간관계의 모호함, 다가올 미래의 불안함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한다. <대면>은 이렇게 무채색의 세계에서 인간의 정신인 내(內)우주를 섬세히 탐구한다.

삼각형 1

 

인류의 새로운 도약

<대면>은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한 ‘사회 진화’의 이야기다. 그래서 <대면>의 주인공 ‘도라’와 ‘라니에로’는 각각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를 상징한다. 도라는 ‘새로운 협약’의 젊은 여성멤버로서 기존 질서에 반하는 인물인 반면 라니에로는 정신과 의사인 중년 남성으로서 기존의 질서를 고수하는 인물로 설정된다.

도라와 라니에로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로 처음 만난다. 여기서 도라는 “<새로운 협약>은 감정적이고 성적인 비독점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이에 라니에로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은, 특히 우리 세대에게 그렇죠.”라고 답한다. 두 사람의 소통은 쉽지 않다. 하지만 상황이 반전된다. 상담 중 도라가 라니에로의 비밀을 정확히 말한 것이다. 그동안 라니에로는 자신이 목격한 정체불명의 삼각형 빛을 비밀로 하고 있었다. 이어 도라는 자신과 라니에로가 외계 존재에 선택받은 사람이며, 빛의 신호는 텔레파시를 전하기 위한 메시지라 말한다. 라니에로는 혼란스럽다. 진실인 건 알지만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결국 라니에르는 도라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강렬한 동일시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 순간 삼각형 빛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도라 또한 세상을 변화시킬 텔레파시 능력을 각성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다. 어느새 130세의 노인이 된 도라가 사람들 앞에 선다. 그녀는 현대 텔레파시 사상의 창시자, 행성 간 통신 센터 소장으로 소개된다. 텔레파시의 발현과 외계 문명의 접촉. 마침내 인류는 새로운 세계로 도약한다.각성 1

 

한국 사회에 던지는 SF적 상상력

도라와 라니에로는 대립하고 화해하며 이어 세계는 고차적으로 발전한다. 이 같은 두 사람의 존재와 행위는 철학적 관점에서 변증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면>을 지금의 현실 속에 위치시킨다면 두 주인공의 대립은 한국의 극심한 세대갈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사이에는 거대한 단절이 존재한다.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는 같은 공간을 공유하지만, 마치 다른 시간대에 머물고 있는 듯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한다. 가령 다양한 스펙트럼을 고려하더라도, ‘인권’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두 세대의 시각은 너무나 상이하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특정 세대의 비난을 넘어, 우리 사회가 이 시대에 적합한 윤리와 규범을 도출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대면 2
그런 점에서 <대면>에서 보여준 두 세대의 교감과 이를 통한 새 시대의 도약은 현재 상황에서 의미 있는 주제다. 같은 사회에 살고 있는 이상, 사회적 합의를 위한 소통을 배워나갈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같은 당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감정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대면>의 미래가 도달 가능한 이상향이라기보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새로운 세계는 사람들이 서로 열려있고 신뢰할 때 가능하다고 도라는 말하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세대 간의 갈등을 완화하고 신뢰를 쌓을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특히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채로 누군가를 완전히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인간의 근원적 한계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대면>의 SF적 예언을 일방적으로 냉소할 필요는 없겠다. SF는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변화하는 사회의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상의 답을 제공하는 장르기 때문이다. 대신 보다 열린 마음으로 현재의 모순을 이해하고,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상상하면 어떨까.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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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뎅은 어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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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오뎅 (오른쪽) 카마포코

오뎅은 어묵이 아니다. 흔히 일본말 ‘오뎅(おでん)’ 대신 우리말 ‘어묵(魚묵)’으로 순화해 쓰자는 말이 많다. 실제로 오뎅은 비표준어이니 어묵을 쓰라고 맞춤법에서도 권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어묵은 이름대로 ‘생선 살을 으깨 소금 따위 부재료를 넣고 익혀 응고시킨 음식’, 다시 말해 생선으로 만든 묵이다. 일본어로 생선으로 만든 묵은 ‘오뎅’이 아니라 ‘카마포코(蒲鉾)’다. 오뎅은 본래 ‘산초의 순을 으깨어 섞은 된장을 두부에 발라 구운 음식, 꼬치 안주’다(1). 나중에 포장마차에서 술을 팔면서 안주로, 국물에 오뎅을 담궈 익힌 음식을 내놓게 되는데, 푹 끓였다는 뜻의 니코미(煮込み)를 붙여 니코미오뎅(にこみおでん)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값이 싸고 잘 상하지 않는 어묵(카마포코)를 주재료로 오뎅을 만들었고, 결국 오뎅=어묵이 됐다. 이와 마찬가지 오해가 야쿠자(やくざ)라는 말에 똑같이 생겼다.

 

야쿠자모노에게는 야쿠자모노만의 규칙이 있다

일본말로 야쿠자모노(やくざ者)는 야쿠자+모노(者, 사람) 이라는 뜻인데, 단순히 조직폭력배만이 아니라 수상하고 쓸모없는 사람을 통칭한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조직폭력배를 지칭한다.) 반대말은 카타기(堅気)로 ‘성실한 기질’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신분이 확실한 직업을 갖고 일하는 사람을 말한다. 야쿠자모노에는 게이샤, 떠돌이 침술사, 폭력배, 예능인까지 포함된다. 일본에서는 인세 등 고정수입이 없는 자유기고가나 소설가가 자조적으로 스스로를 야쿠자모노라고 부르기도 한다. 야쿠자모노는 무숙인(無宿人)이 되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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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일본인이 떠올리는 무숙인의 모습

무숙인은 호적 없이는 사람을 말하는데, 보통 떠돌이와 유의어로 사용한다. 조선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에도시대(1603~1868년) 당시 무숙인=범죄자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마바라 반란(島原の乱)을 일으킨 기독교도를 완전히 근절하기 위해 단카(檀家)제도를 만들었는데, 백성에게 각 지역 절에 강제로 호적을 등록케 하고 지금의 동사무소처럼 절이 호구조사와 인구 관리를 담당하도록 한 제도다. 호적이 없거나, 범죄 등을 저질러 쫓겨나거나, 카타기에 맞지 않아, 소위 ‘팔자가 드세’ 쫓겨난 사람은 무숙인이 되지 않으려고 양자로 받아주는 곳에 가야만 했다. 당시는 연좌제가 있어 무숙인의 친지도 벌을 받게 되기에, 강제로 호적에 넣으려 들기도 했다. 이런 무숙인을 받아주는 호적이 야쿠자모노가 모인 조직이었다.

야쿠자모노 사회도 카타기 사회의 그림자나 다름없기에, 에도시대 일본 사회와 마찬가지로 유교를 기반으로 한 가부장제 유사가족 형태를 보이고, 서열은 나이로 결정된다. 이 때 나이는 태어난 나이와는 관계없이 야쿠자모노 사회에 ‘데뷔’를 기준으로 삼는다. 야쿠자모노 사회에 들어온 이상 과거의 자신은 죽고, 야쿠자모노로서 새롭게 태어나 가족 구성원이 된다. 그래서 일본의 조직폭력배 두목을 부모 역할이라는 뜻의 오야붕(親分, 오야분), 부하를 자식 역할이라는 뜻에 꼬붕(子分, 꼬분)이라고 부르고, 조직원끼리 형님 아우 한다. 스모, 가부키, 게이샤, 배우나 가수 혹은 오와라이 게닌(お笑い芸人, 코미디언) 같은 연예인도 모두 야쿠자모노에 해당한다.

 

야쿠자모노 = 신 혹은 물건

타자화란 물건 취급을 받거나 신으로 숭배 받거나 같이 서로 상반된 현상으로 나타나기 쉽다. 가수, 배우, 아이돌, 게닌 등 카타기 사회가 사랑하고 숭배하기까지 하는 직업군도 야쿠자모노 세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타자화의 주체인 카타기 사회는 야쿠자모노를 자신과 다른 별종, 타자로 여기고 그들만의 다양한 관습과 규칙이 아무리 부조리해도 “그쪽 문제는 그쪽이 알아서”라는 태도를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2016년 1월 13일 있었던 SMAP 해체 소동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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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8일 SMAP 공개 사과 생방송 모습

소위 갑질 논란으로 우리나라에서 보도된 이 사건은 예능계라는 야쿠자모노 세계의 관습과 규칙에 따라, 그동안 당한 부당한 계약조건이나 착취에 반발한 괘씸죄로 공개처형을 당한 사건이기도 하다. 분명히 헌법이나 노동법 위반과 관계된 문제이나, 공공기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입법부인 정치계에서 야쿠자모노의 관습과 규칙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는 “야쿠자모노는 카타기와는 다르다”는 타자화 된 인식이 무의식에 있기 때문이다. 남의 가족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식으로 우리나라에서도 가정폭력에 공권력이 개입하려 들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는 문제와 유사한 사고방식이 바탕에 깔려있다.

카타기와 야쿠자모노를 구분하고 게닌을 야쿠자모노에 집어넣는 인식이 일본 코미디 오와라이와 우리나라나 미국 등 다른 나라 코미디를 구분 짓는 가장 큰 인식 차이다. 일본의 카타기-대중은 게닌을 자신들과 다른 존재로 타자화하고, 일반상식과는 다른 행동이나 사고를 보여주길 기대한다. 게닌 스스로도 마찬가지다. 게닌이면 게닌답게, 일부러라도 일반상식에 크게 어긋나더라도 게닌 세계만의 규칙과 관습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이라면 사회적, 윤리적 상식에 벗어나는 불쾌한 행동이나 발언도, 일본인은 야쿠자모노를 타자화해 자신과 분리시키기 때문에 마치 공포영화 스크린 위에서 벌어지는 살인을 즐기는 관객처럼 웃어넘기게 된다.

 

또 다른 야쿠자모노,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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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와라이 게닌 텟켄은 치바테츠야상 수상경력이 있다. 스케치북으로 페이퍼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는 스타일의 코미디가 특기

안타깝게도 일본인 중에는 만화가 또한 야쿠자모노로 여긴다. 만화가는 독립적으로 일하기에, 다른 야쿠자모노처럼 폐쇄적인 조직 문화를 바탕으로 특별히 누군가의 호적에 들어가는 식의 조직 논리나 상하서열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정기적인 수입이 없는 경우가 많고 사회에서 비껴 나온 사람들이 많이 도전하는 직업이라는 이유로 야쿠자모노 취급을 받는다.

오히려 이런 면이 일본 망가(漫画)의 표현을 다양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 망가에 등장하는 잔혹한 표현, 부조리한 넌센스, 폭력적인 슬랩스틱 개그 등 다른 나라 사람이 보기에 과격한 묘사가 허용되는 배경에는 야쿠자모노에 대한 타자화 된 인식이 한 몫 한다.

스스로 ‘아웃사이더’라고 자각한 청소년과 젊은이를 오와라이나 망가를 통해 위로받아, 오와라이 게닌이나 만화가를 지망하는 경우도 많다(3). 만화가는 자신이 재미있게 보고 영향 받은 오와라이 혹은 자신이 게닌이 됐다면 선보였을 오와라이를 그림 위에 선보인다(4).

일본의 개그망가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오와라이와 망가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피드백 관계만이 아니라 배경에 깔린 사회의 무의식적인 인식을 이해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언더그라운드에 머무는 과격한 표현을 구사하는 개그망가가 유독 일본에서만은 일종의 전위예술로 발전한 데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회로부터 타자화를 당한 만큼 반대로 표현의 자유가 생긴 것이다. 다만 그 자유가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에서 영주가 가장 신분이 천한 광대를 자기 곁에 두고 무슨 말이든 자유로이 하게 둔 것과 마찬가지의 자유라고 폄하할 수 도 있다. 그러나 대중을 위한 엔터테인먼트이자 카타기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내는 거울 역할도 담당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오와라이 게닌 텟켄의 단편 애니메이션 <시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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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에 농악처럼 일본에서도 농악이 있는데, 모내기할 때 노동요를 부르며 춤을 추는 덴가쿠(田楽)다. 점차 대중예술로 변해 잔치나 놀이로 변했고, 이때 먹는 새참으로 두부나 토란 따위를 먹기 좋도록 꼬챙이나 칼로 한가운데를 찔러 꿰는 꼬치를 먹었고, 찌른다는 뜻의 사시(刺し)를 붙여 음식 이름을 덴가쿠사시(田楽刺し)라고 불렀다. 한편 일본말 습관에는 존칭이나 물건, 사람 이름 등에 ‘오-(御)’를 붙이는 습관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일본말 속어로 돈을 오까네(お金)라 부르는 유래도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덴가쿠사시에 오가 붙어 오덴가쿠사시가 되고, 이 말이 줄어서 오뎅으로 변했다.

2. 일본의 인기 아이돌 SMAP 멤버 네 명이 소속 기획사 자니스(Johnny’s)에서 독립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가, 5일만에 팬이나 연예계, 정치계에 이르는 다양한 압력으로 해산이 무산되었고, 멤버 다섯 명이 생방송으로 사과한 사건이다.

3. 물론 반대인 경우도 많다. 오와라이 게닌 텟켄(鉄拳)은 치바테츠야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으나, 만화에 좌절하고 방황하다 게닌이 되었고, 그림 실력을 살려 스케치북에 페이퍼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보여주는 스타일의 코미디로 인기를 얻었다.

4. 여담이지만, 과거 일본 과학소설 작가 중에는 코마츠 사쿄나 츠츠이 야스타카처럼 만화가로 데뷔한 경력이 있거나, 스스로 그림을 못 그린다고 자각하여 과학소설 작가를 목표로 변경한 사람이 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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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 스토리는 대개 이런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현재의 불행을 해결하기 위해 과거로 가서 원인을 없앤다.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지만 미래와 현재, 과거를 열심히 오가며 틈을 메우다 보면 결국엔 해피엔딩을 맞는다.’ 생각해봐야 할 점은 과연 이 해피엔딩이 진짜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