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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주목하는 만화들 중의 하나로 하나자와 켄고의 <아이 앰 어 히어로>가 있다. 전형적인 좀비물로서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가 문명의 종말로 내몰리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만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좀비들이 합체하여 어떤 새로운 존재를 이루려 한다는 점이다. 좀비들이 건설하려는 새로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여기에는 뭔가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욕구가 배어 있다. 종말 이후의 세계를 그저 황폐한 불모지로 남겨두려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독자적인 가치관과 질서가 등장하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세계의 종말을 다룬 일본 만화들은 유럽이나 북미 등 다른 문화권의 작품들과는 달리 생동감의 밀도가 유난히 높은 화려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다. 마치 종말을 갈망한다는 본심을 주체하지 못해 텍스트 표면으로 비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몇몇 작품들을 살펴보면서 그런 혐의를 고찰해보자.

 

그들은 리셋reset을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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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구치 카이지의 만화 <태양의 묵시록>에는 사실 앞에서 언급한 혐의를 그대로 자백하는 대사가 나온다. 미증유의 대지진이 연속적으로 엄습하여 아수라장이 된 일본, 시커먼 연기에 뒤덮인 폐허의 동경에서 주인공 미사오는 말한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드디어 내 미래가 열렸구나.’

 

성경에 묵시록이 없었더라도 ‘세계의 종말’이란 테마는 인류 문화사에서 진작부터 깊게 뿌리를 내려왔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 양립할 수 없는, 혹은 오히려 양립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의 상반된 입장이 존재한다. 심판으로서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전복.

SF의 하위 장르들 중에서 ‘재앙 이후(post-apocalyptic)’라는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재앙의 원인은 다양하기도 하거니와 역사에 따라 트렌드도 바뀌어왔다. 냉전 시대에는 물론 핵전쟁이 가장 많았고, 가끔은 외계인의 습격이란 탈을 쓴 적대국, 또는 ‘불순’한 이데올로기의 침입도 있었다. 그러다가 환경오염이나 자원고갈, 생태계 이변 등이 새롭게 부상하더니 지난 세기말에는 인공지능의 반란이 상종가를 쳤다.
그런데 일본은 그런 종말의 위협을 현실에서 가장 생생하게 반복 경험해오고 있다. 세계의 주요 단일문화권으로는 아마도 유일할 것이다. 20세기 중반에 핵폭탄을 맞고 국가 이데올로기의 좌절을 겪었으며, 21세기 접어들어서는 거대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 붕괴라는 재난에 다시 직면했다. 일상의 차원에서는 버블 경제의 붕괴도 있었다.

재앙 이후를 다룬 서사라면 대부분 심판의 성격을 띤 혼돈과 위기 극복의 드라마틱한 묘사가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만화를 비롯한 일본의 재난 서사들은 그에 더해서 파국을 은근히 열망하는 이야기들이 적지 않다. 왜 그럴까?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은 SF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자 미덕이기도 하다. 기존의 사회, 세계 질서, 가치관이나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SF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작품에 공통적으로 적용되겠지만, SF는 단순히 시적 차원의 포착이 아닌 실질적 설계의 단계까지 나아간다는 차이가 있다. 실질적 설계란 그 세계가 판타지처럼 과학적, 합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공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구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구체성을 가진 것처럼 설득력을 준다.)

그러다보니 SF작가는 자기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 일단 기존의 질서를 깨뜨려야 한다. 그리고 철저한 절망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닌 이상 새로운 세계의 희망이나 긍정성의 부각은 당연하다. 이렇게 되면 SF에서 묘사되는 세계의 파국은 결코 암울하고 비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 셈이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 위한 사전 작업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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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묵시록>에서 주인공이 일본의 재앙을 반기는 장면도 바로 이런 맥락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일본의 재앙 만화들이 파국을 애호하는 것도 ‘지우고 다시 쓰는’ 리셋을 하려는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작가마다 구체적 동기는 다르다. <태양의 묵시록>을 쓴 카와구치 카이지는 <침묵의 함대>, <이글>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지금보다 더 강하고 뛰어난 일본, 일본인’의 구축에 관심이 많다. 한편 <아이 앰 어 히어로>의 좀비들은 이미 어떤 새롭고 이질적인 휴머니티의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반면 미네타로 모치즈키의 <드래곤헤드>처럼 철저한 파국으로 종결되는 이야기도 드물게 있지만, 대개는 우메즈 카즈오의 <표류교실>처럼 아무리 황량한 환경에서라도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이밖에도 숱하게 많은 일본의 작가들은 분명 자기만의 세계 멸망 판타지를 품고 있을 것이다. 심판이 아닌 새로운 시작으로서.

 

그러면 ‘새로운 시작’을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반길까? 엔도 히로키의 만화 <에덴>에서 사람들은 각자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어떤 ‘우주적 집단지성체’의 한 일원이라는 새롭고 이질적인 존재양식을 택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인간으로 남기를 택한 사람들에게도 아무런 불이익은 없다. 그러나 거대하고 초월적인 존재와 그것이 줄 수 있는 광대한 가능성을 일단 깨닫고 나면, 그 사실을 무시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야말로 감당하기 힘든 또 다른 정신적 재난으로 남는다. 이건 아마도 인간이 겪는 인식론적 철학의 재난 상황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재앙이 선물한 이질적 유토피아
새로운 시작은 필연적으로 ‘재앙 이후에 더 살기 좋아진 세상’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재앙 이후의 아나키적인 세계상을 일종의 유토피아로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튼 이런 주제의식을 품은 SF작품들은 적지 않다. 물론 일본의 재앙 만화들도 포함해서.

 

4그중에 대표적인 작품으로 아시나노 히토시의 만화 <카페 알파>를 들 수 있다. 상당 부분 물에 잠겨버린 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로봇과 사람들이 잔잔하게, 그야말로 목가적으로 느긋하게 생활하는 풍경을 담은 이 작품은 14권까지 가도록 갈등이라고 할 만한 사건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지만(기억나는 갈등이라고는 주인공이 카페 문을 일찍 닫을까 말까 고민하는 정도?) 독특한 정서와 그림체 등으로 많은 열성 팬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클리포드 시맥Clifford D. Simak의 SF소설 <도시City>(1952)에서 모티브를 취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도시>에서는 인간들이 모두 어디론가 떠난 미래에 지능이 발달된 개와 로봇들이 목가적 문명을 이어간다는 설정을 취하고 있다.

로봇이나 개들의 낙원이 어째서 유토피아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SF작품들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를 왜 서사의 주인공으로 함께 끌어들이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나 해러웨이는 1985년에 발표한 기념비적인 에세이 ‘사이보그 선언A Cyborg Manifesto’에서 인류 문명 전체가 기계와 융합되는 ‘사이보그 문명’으로 진행해가고 있다고 설파했다. (오시이 마모루는 <공각기동대>의 후편인 <이노센스>에 등장하는 사이보그 여성 범죄학자에게 해러웨이라는 이름을 붙여 오마주했다.) 즉, SF작가들이 전망하는 인류의 미래상은 더 이상 인간중심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을 뿐더러 인공생명체,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종생물들까지 유기적으로 결합된 새로운 지적 문명의 탄생을 하나의 필연성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이라는 기획은 이렇듯 그 확장의 폭이 넓다. 그리고 그 첨단에 자리 잡은 작품이 바로 니헤이 츠토무의 만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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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적 미래를 다룬 니헤이 츠토무의 만화 <바이오메가>는 상당히 불친절하다. ‘깨알같은’ 감상을 요구하는 그림체에다 극도의 절제 미학을 구사한 설정 및 스토리는 한 번에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다. 그런데 그런 진입장벽을 넘어서면 이 작품은 아이디어와 영감의 자극으로 넘쳐나는 놀라운 아트워크임을 깨닫게 된다. 작가 니헤이 츠토무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열광적인 추종자를 거느린 컬트 만화가 중 한 명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31세기 초의 미래. 이미 인류는 생물공학의 발달 등으로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다른 이질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우주에서 유입된 바이러스에 의해 다시금 위기에 처한다. 세계를 움직이는 슈퍼파워는 기업, 또는 재단의 형태로 군림하고 있는데, 혼란스런 상황을 통제하려는 집단들의 갈등 과정에서 하드보일드 테크노 액션의 진수라 할 만한 장면들이 이어진다.(좀 다른 이야기지만,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하드보일드’라는 스타일 자체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과 매우 끈끈하게 연결된 유기적 정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기존 체제에 대한 전복적 상상, 혹은 공상을 품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에 반하는 현실의 지루함에는 무심하고 냉정하게 대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캐릭터의 타고난 성격이나 기질 등 여러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하드보일드라는 미학의 일부는 이런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이오메가>의 설정은 그 자체가 재앙의 중첩 상황이다. 이미 호모 사피엔스가 종말을 맞고 다른 별종의 인간들이 일상을 영위하는 상황에서 다시금 새로운 재앙이 닥친다는 설정인 것이다. 물론 수사적으로는 재앙 서사가 반복 투사되는 것이지만 어쨌든 이야기의 표층 차원에서는 재앙의 역사적 항상성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원래 건축학도 출신인 니헤이 츠토무는 <브레임>이라는 작품으로 먼저 알려졌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시대를 앞선 놀라운 작품성을 선보였으나 그만큼 난해하기도 했다. 그에 비해 <바이오메가>나 그 다음 작품인 <시도니아의 기사>는 좀 더 쉽고 친절한 편이다. 아무튼 니헤이 츠토무는 재앙 서사라는 분야에서 현 시대 만화 미학의 정점에 가장 근접한 작가 중 하나이다. 작화, 설정, 스토리, 연출 중 어느 한 분야만이라도 이만큼 이룩한 작가는 많지 않다. 모든 분야의 창작물을 아울러 놓고서 고만고만한 생각의 틀 밖으로 성큼 내딛어 나간 작품을 논한다면 도저히 제외할 수 없다.

 

무엇이 파국을 갈망하게 만드는가
일본 SF만화에 담긴 재앙 서사들이 유난히 파국을 갈망한다는 해석에 대해 바깥에서 보는 편견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워낙 SF라는 장르 자체가 그런 속성이 있기도 하고, 세계 다른 문화권의 SF만화들에도 분명 그런 경향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 평가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 SF만화들이 보여주는 재앙 서사의 치밀함은 명백하게 독보적인 경지에 올라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서 걸러지는 공통된 정서는 이론의 여지없이 ‘파국을 갈망한다’는 심리이다. 그것이 현대사에서 일본이 겪었던 특유의 재난들과 그 기억의 상처에서 기인한 집단 무의식의 발로이든 아니든, 그런 심리는 어떤 현실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현실, 그것은 바로 현대 산업기술문명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핵심은 거기에 도사린 거대한 부조리이다. 21세기 들어 더더욱 가속도가 붙고 있는 과학기술과 그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휴머니티간의 불균형이라는 부조리.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은 이 부조리에서 기인한다. 아마 인류는 이 부조리를 해결하려고 허덕거리느라 21세기를 소진할 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부조리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낳고, 그 갈등은 결국 파국에의 열망이라는 하나의 수렴으로 나타난다. 일본은 어쩌면 그런 부조리와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부각되고 있는 현장인 것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예전에 장르문학 전문잡지 [판타스틱]의 창간 편집장과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의 대표를 맡은 적이 있다. SF전문가 코스프레로 살아가는 오덕이라는 의혹이 있다. 일본 SF만화의 꽤 열렬한 팬이며 그런 배경을 믿고 [critic M]의 편집위원단에 겁 없이 끼어들었다. 초등학생 딸에게 SF만화를 마구 권한 결과 순정만화를 보지 않으려는 부작용이 나타나 당황하는 중이다. 가급적 오래 살고 싶은데 그 이유는 변화하는 세상의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 SF스러워지나 궁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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