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다’ ‘자유롭다’ _ 강도하 <발광하는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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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하의 <발광하는 현대사>를 ‘발기하는 현대사’로 읽는다. 이 만화에서의 ‘발광’은 발기에 이르는 광적인 행위이며, 이것이 곧 현대사의 동력이라는 것이 제목이 은폐하고 있는 의미이다. 이때의 ‘현대사’는 이 만화의 주인공 ‘현대’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현대 인류의 역사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이 만화의 주인공 ‘현대’의 의식과 행위는 메타포적이다. ‘현대’의 의식과 행위가 그 개인 차원을 넘어 인류 전체에 대한 메타포적인 의미를 띤다면 그를 읽어내는 일은 단순한 ‘바라보기’가 아니라 ‘보여지기’의 일환으로 간주할 수 있다. 내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보여질 때 욕망은 끊임없이 변주되면서 일정한 생산성을 담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만화의 초점이 ‘현대’에게 있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섹스’의 문제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인간에게 섹스는 식욕과 함께 가장 본질적인 욕망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식욕에 비해 섹스는 훨씬 복잡한 문맥을 거느리고 있다. 그것은 섹스와 같은 성욕이 인류의 문화나 문명과 긴밀하게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섹스는 단순한 실존의 문제를 넘어 인간의 이성에 의해 통제되고 조절되는 문화사와 문명사의 한 장으로 존재해 온 것이 사실이다. 프로이트, 마르쿠제, 푸코 등이 제기한 성은 모두 문명에 의한 억압의 산물이지만 그것이 늘 문명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온 것만은 아니다. 마르쿠제처럼 그것을 해방하여 문명의 새로운 동력으로 이해한 이도 있다. 하지만 성의 해방과 문명과의 억압 없는 화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어쩌면 프로이트와 푸코가 이야기한 것처럼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의 성은 터부시 되거나 권력과 지식의 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성의 해방 문제가 오랜 시간 온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논쟁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성에 대한 복잡성과 보수성을 말해준다. 성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태도를 견지해 온 예술의 경우에도 그 문제는 늘 논란의 대상이었던 점을 상기한다면 <발광하는 현대사> 역시 여기에서 비껴갈 수 없을 것이다. 시작부터 작가는 이 만화의 의도가 ‘섹스’에 있음을 밝힌다. 만화가 ‘현대’와 ‘민주’의 익숙한 섹스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이들 혹은 우리의 삶에서 그것이 새롭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비록 섹스를 부부의 침실로 국한시키기는 했지만 그것은 일상만큼 익숙한 인간의 삶의 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섹스에 무슨 고상하고 숭고한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 오히려 그것을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화 속 ‘현대’는 이러한 억압에 저항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의 저항성은 성의 상품화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섹스 탐닉적인 데가 있다.

‘현대’의 섹스 파트너는 무차별적이다. 그는 결혼을 통해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섹스 파트너인 아내(‘순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2년 동안 섹스 파트너로 지내온 ‘민주’와의 관계를 끊지 못한 채 끊임없이 그녀에게 섹스를 요구하고, 자신의 강의를 들으러 온 ‘주부 학생’과 스스럼없이 섹스를 할 뿐만 아니라 대학 후배인 ‘미정’, 화랑 관장인 ‘영희’는 물론 카페 아르바이트생인 ‘민중’과도 섹스를 한다. 프로이트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는 섹스 고착증 환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는 섹스 해방론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섹스 탐닉은 탐닉 그 자체로 보이기도 하지만 보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이 탐닉을 넘어서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주부 학생’과의 섹스를 사랑이 아니라 섹스 그 자체일 뿐이라고 단호하게 일갈하는 장면이라든가 ‘민주’와의 결별하고 나서도 계속 섹스하자고 하는 장면, 또 ‘영희’, ‘미정’, ‘민중’과 그때그때의 느낌에 따라 행동(섹스)하는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섹스 탐닉자로 인식하게 한다.

이러한 인식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 섹스 탐닉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의 섹스 탐닉이 집착을 넘어 고착의 상태로 넘어간 경우는 ‘민주’를 제외하고는 없다. 그가 ‘민주’와 이별을 하고서도 끊임없이 그녀와의 섹스에 집착하는 데에는 섹스 그 자체의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행위에 대한 탐닉만이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이 물음은 가령 『감각의 제국』에서 두 남녀의 섹스에의 탐닉이 섹스 그 자체의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행위에 대한 탐닉으로만 해석될 수 있을까? 하는 사실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의 두 남녀의 죽음에 이르는 섹스에의 탐닉은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발광하는 현대사>에 은폐된 그의 섹스에의 탐닉을 읽는 것은 어떨까? 그의 섹스에 대한 탐닉은 ‘민주’와의 관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다른 이들보다 ‘민주’와의 관계에서 그의 섹스에 대한 탐닉은 집착이나 고착의 상태로 나아간다.

‘현대’의 ‘민주’와의 섹스에 대한 집착은 만화 전편에 걸쳐 나타나지만 특히 말미에 와서 절정에 달한다. 그와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에 있는 ‘춘배’의 호출을 받고 무지막지하게 몽둥이세례를 받아 죽어가면서도 ‘민주’와의 섹스를 상상하는 장면은 그것이 단순한 탐닉을 넘어 강한 의도와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민주’일까? ‘민주’에 대한 집착이 ‘현대’ 개인의 섹스 취향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작가의 의도성이 강하게 개입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민주’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섹스 파트너로 선택한 대상이 ‘민주’라는 사실은 그녀와의 섹스를 통해 그것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게 투영된 것으로 읽어낼 수 있는 어떤 개연성을 말해준다. 만화에서 그와 ‘민주’와의 섹스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존재는 ‘춘배’이다. ‘춘배’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현대’와 ‘미정’을 길들이고 이들의 미래까지도 통제하고 조절하는 절대 권력자이다. 이 사실은 ‘현대’가 그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의 ‘춘배’에 대한 저항은 그의 조교이자 그의 아이를 낳은 ‘미정’과의 섹스를 통해 구체화되기 시작하고, 그의 마초성의 집적체인 ‘민중’(‘춘배’와 ‘미정’ 사이에서 태어난 딸)에 와서 극에 달한다. ‘춘배’에게 ‘미정’은 ‘현대’가 닿을 수 없는 권력의 정수에 놓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범했다는 것은 그 권력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볼 수 있다. ‘춘배’가 ‘현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현대’의 권력에 대한 저항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진정한 복수는 ‘미정’과의 섹스를 밀실이 아닌 ‘방송실’에서 전국민을 대상으로 생중계하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민주’와 ‘현대’는 섹스를 중계하면서 그것을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갈 것을 약속한다. 이들은 육체와 정신 혹은 몸과 마음이 분리된 상태에서의 불완전한 섹스가 아니라 이것들이 하나가 되는 온전한 섹스를 한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섹스는 몸 따로 마음 따로 인 상태에서 행하는 이전의 섹스와도 다르고 또 부부지만 늘 불안정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영희’와 ‘철수’, ‘현대’와 ‘순이’와의 섹스나 동거하면서도 섹스 없는 섹스를 하는 ‘훈이’와 ‘민주’ 그리고 종속 관계에서 학대와 피학대 상태에서 행하는 ‘춘배’와 ‘미정’, ‘현대’와 ‘주부 학생’과의 섹스와도 다르다.

 

현대사_중간삽입출처: <발광하는 현대사> 애니메이션

 

‘현대’와 ‘민주’가 한 몸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한 2년간의 섹스는 서로의 몸만 탐닉한 그런 섹스였다고 볼 수 있다. ‘현대’가 결혼을 하게 됐다며 ‘민주’에게 이별을 통보했을 때 그녀는 ‘넌 아내와 섹스하면 되고 난 다른 수컷 찾으면 되’니까 ‘몸만 바뀌는 것’일 뿐 ‘서로 섹스는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은 섹스의 공허함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들이 보여준 이러한 섹스의 공허함은 결혼과 불륜이라는 제도적인 구속에 의해 생겨난 것이지만 이들은 그 제도가 행사하는 권력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적당히 타협하고 순응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성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섹스의 자유와 해방은 몸의 자연스러운 발기 혹은 발광에서 비롯되며, 제도와 제도화된 권력은 그것을 왜곡하고 터부시하여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를 꺾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섹스의 자연스러움이 자유로움으로 이어질 수 없다. 섹스에 대한 자유는 그것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권력에 저항하지 않고서는 결코 획득할 수 없다. ‘현대’는 그것을 죽음의 순간에 깨달은 것이다. ‘춘배’의 권력에 죽음으로 저항하는 순간에 그의 발광은 끝나지만 섹스는 완성된다. 섹스가 그 안에 삶과 죽음을 함께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죽음을 통한 삶의 역설 혹은 자연스러움에서 자유로움으로의 이행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가 된다. 섹스에 대한 발광 혹은 발기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할 때 그것이 하나의 역사가 된다는 인식은 이 만화가 은폐하고 있는 의미이다. 내러티브와 이미지의 결합이라는 만화의 특성상 섹스에 대한 ‘현대’의 발광 혹은 발기가 몸에 돋는 붉은 잎의 촉수로 강렬하게 표현됨으로써 섹스의 자연스러움에 대한 욕망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섹스의 자유로움에 대한 욕망은 ‘현대’와 ‘민주’의 의지가 투영된 대사나 표정을 통해 드러나는데 특히 ‘현대’가 죽어가면서 ‘민주’를 애타게 부르는(원하는) 장면이 글자의 점층적인 크기의 조절과 기호의 추가적인 삽입의 방식으로 표현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그러나 섹스에 대한 이러한 자연스러움의 표현과 자유로움의 표현이 얼마만큼 상호침투적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하기가 어렵다. 이것은 자연스러움에서 자유로움으로의 이행을 매개하는 과정이 치밀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화에서 ‘현대’가 카페에서 ‘춘배’의 딸인 ‘민중’을 만나 섹스를 하는 장면이라든가 어떻게 ‘민중’이 ‘춘배’와 ‘미정’ 사이에서 태어났고 자신의 딸과 ‘현대’가 섹스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과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이런 경우 그 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사건이나 배경에 대한 암시가 주어지지만 여기에서는 그것이 빠져 있다. ‘현대’와 ‘민중’과의 섹스와 여기에서 비롯된 ‘춘배’에 의한 ‘현대’의 죽음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민중’이라는 이름이 은폐하고 있는 메타포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민중’이 ‘춘배’의 딸이고 그 딸이 ‘현대’의 섹스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춘배’로부터 ‘민중’을 해방시켰다는 것인지, 아니면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이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는 것인지 여기에 대한 구체적이고 치밀한 근거와 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섹스는 그 안에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 둘은 상호침투적이여야 하며, 이런 관계에서는 섹스의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것은 곧 자유로움에 대한 강조가 된다. 작가가 <발광하는 현대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섹스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방식은 권력에 의한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그의 자유로움에 대한 의지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가 보여주는 온전한 몸을 통한 섹스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자유에 대한 의지를 간과한 채 자연스러움만을 본다거나 반대로 자연스러움을 간과한 채 자유에 대한 의지만을 본다면 그것은 이 텍스트를 제대로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발광하는 현대사>에서 섹스에 대한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발견하고, 그것이 다양한 시각과 방식으로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는 일은 우리 만화의 잠재태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 섹스에 대한 금기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향유하면서 그 속에 은폐된 자유 의지를 발견하는 자에 의해 깨질 수밖에 없으며, 만화의 대중성과 통속성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어떤 가능성을 내재한 대표적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만화 속 ‘민중’이 드러내는 의미와 ‘현대’와 ‘민주’ 등의 인물들이 드러내는 섹스는 각각 만화의 대중성과 통속성에 대한 메타포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발광하는 현대사>가 지닌 의미는 단순함을 넘어 중층적이며, 이것은 곧 이 만화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재복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로 활동한지 이십여 년 된다. 문학 못지않게 미학과 철학을 좋아하며 ‘몸’이 내 비평의 화두다. 그동안 [몸] [비만한 이성] [한국문학과 몸의 시학]을 출간했고 곧 [몸과 그늘]을 출간할 예정이다. 몸이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토대라는 인식하에 그것을 준거로 하여 이 시대의 문화와 문명에 대한 글쓰기를 수행하고 있다. 인간의 몸은 에코와 디지털이 교차하는 실존의 장이며, 인류의 문화와 문명은 그러한 몸의 자장 안에서 실존적인 지평을 열어 보일 것이라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늘 몸을 모시고 공경하면서 그 소리를 들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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