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비, 짧은 꿈 – 김혜린의 < 아라크노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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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라크노아>: 왜, 저주받은 작품인가
김혜린. 언젠가는 그녀의 작품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아마 이번 기회가 아니라면 또 뒤로 물러서지 않았을까. 1983년, 10대로써 <북해의 별>을 만났을 때 주인공을 오려내기 위해 동네 만화방들을 전전했었다. 만화책 소장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절, 지금처럼 이미지를 소유한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시대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사진기나 복사기도 원활하지 않았던 때, 보고 또 보기 위해선…훔칠 수 밖에. 머릿속에서 움직일 것만 같은 주인공에게 더 생생함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 이미지를 가져야만 했었다. 책 도둑만 도둑이 아닌 것이 아닐 터, 소유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작품이 어찌 수작인가하고 뻔뻔하게 굴어본다. 당시 수없이 많이 오려진 페이지들, 심지어는 몇 페이지들을 통째로 잘라낸 대본소 만화책들은 흔한 문화였다.

그때부터 죽 탐독해왔기 때문일까, 비평이라는 잣대로 그녀의 작품을 보고 싶지 않았다. <북해의 별>부터 시작하여 <광야>까지, 그 아련한 세계에서 뛰쳐나와야 하다니. 한 작가쯤은 그냥 순수한 독자로써 남아있고 싶은데. 글을 쓰는데 속도가 나지 않았다. 마감을 며칠이나 미루고 나서야 뭐 어떠냐, 나갔다가도 다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위로하며 겨우 마음을 잡았다.

이번 작업은 <아라크노아>가 왜 걸작인가를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다. 그건 당연한 것이고, 왜 ‘저주받은’ 것인지 설명해야 한다. 작가의 개인적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던 원인들로 인한 작품의 가치평가절하, 또는 평가를 받을 기회 자체의 박탈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아라크노아>는 후자이다. 월간지 <르네상스>에 1992년 2월부터 연재를 시작했고, 1994년 9월까지 약 2년 반 동안 연재했다. 4년 후인 1998년 9월 1일 대원출판사에서 1권과 2권을 함께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일간엔 잡지 폐간 때문에 중단된 작품이라고 하나, <르네상스>가 1994년 12월호까지 발간되었으니 폐간 이전에 이미 중단된 작품이다. 이 하나의 사실을 확인하기엔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웹상의 자료들은 서로 어긋나고, 국립중앙도서관은 자료가 2권밖에 검색되지 않고, 그나마 디지털만화규장각이 이 잡지를 소장하고 있었지만 연재작품리스트들이 첨가되어있지는 않았다. 소장하고 있는 호수의 작은 표지사진을 일일이 확인한 결과이다. 여하간. 폐간 때문에 연재를 중단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폐간 때문에 돌아올 곳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다. 작가의 의지와 무관하게 연재공간이 사라져버림으로써 연속적인 완결의 기회를 잃은 작품이다.

그렇더라도, <불의 검>은 유사케이스지만 결국 완결되지 않았던가. 격주간지 <댕기>에 1992년 3월(통권 7호)부터 1996년 8월 1일호까지 약 3년 반을 연재했다가, 9월에 잡지가 폐간되는 바람에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2000년 <화이트> 11월호부터 연재 재게를 했다가 2001년 3월호 폐간될 때까지 5회를 연재했다. 2003년부터 WE6 웹진에 연재한 후 2004년에 마지막 단행본 12권을 출간함으로써, 1992년부터 12년간의 기나긴 장정을 마쳤으니까 말이다. 가장 단순하게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연재분량의 차이일 것이다. <아라크노아>는 월간지 2년 반, <불의 검>>은 격주간지 3년 반으로 월간지로 치면 7년의 분량이다. 어느 작품을 미완결로 남겨두는 것이 더 아까운지는 뻔하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작가의 작화 스타일도 변한다. 장편 완결단행본만을 보자면, 단일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은 <테르미도르>이다. 김혜린의 작품 전체를 정치하게 다루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대략 구분하자면, 그녀의 작화 스타일은 대략 세 시기로 분류가능하다. 초기가 아주 가늘고 섬세하며 날카로웠다면, 절정기에 들어서면 섬세함은 살아있으면서 선이 훨씬 더 부드러워지고 탄력적으로 변한다. 이 시기의 작화 스타일이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가장 순정만화(마음에 드는 적절한 장르명칭은 아니지만 일단 이리 통용되니 써 보자)라는 장르의 규칙에 어울린다. 완숙기로 들어서면 선이 약간 풀어진다. 미장센도 좀 큼직해지고, 인물들의 시각적 매력도 절정기에 비하면 떨어진다. 아래 <표 1>의 구분은 아주 정확하진 않은데, 대략 시기를 구분할 수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배열했다. 좀 더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선 잡지연재를 거치지 않고 단행본으로 출간했던 작품들의 원고작업시기와 잡지 연재시기의 작품들을 전체적으로 비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표1

 

이미지 1~3은 작화 스타일을 비교하기 위해 각 시기에 해당하는 작품에서 남자주인공들이 처음 제대로 등장한 순간의 클로즈업을 배열한 것이다. 주인공의 첫 등장, 독자와 만나는 첫 순간은 당연히 아주 중요하다. 대부분의 경우 좋은 인상을 주기위해 상당한 공력으로 제시하므로, 스타일을 비교하기에 적절할 것이다. 이미지 1만 하더라도 상당한 고민 끝에 인물의 얼굴선들을 그었고 잔선들이 그를 보충하고 있다. 이미지 2에선 단 한 번에 그은 것 같은 선에도 이미 강약이 살아있다. 펜선이 능숙할 뿐 아니라 아주 편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미지 3은, 이미지 2의 특성이 사라지고, 그렇다고 이미지 1과 유사하지도 않은 다른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에 대해선 몇 가지 추정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변화를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이렇게 길게 설명한 이유는, <불의 검>이 이미 연재 중에 완숙기의 시기에 진입했던 것에 비해 <아라크노아>는 절정기의 시점에서 연재 중단이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분리시켜놓고 보면 시각적 차별성이 두드러지지만, <불의 검>의 경우 그 변화가 천천히 진행되어서 감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아라크노아>는    연재공간의 폐쇄라는 저주에 이어 세월의 저주까지 받았다. 설사 지금 <아라크노아>를 위한 연재공간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이 작품을 이어나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스타일이 조금씩 변화된 <불의 검>보다 훨씬 더 급격한 시각적 변화를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보고>에서 <광야>를 연재하고 있지만, 그것이 가능한 이유-비록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닐지라도- 중의 하나는 이 작품이 이미 완숙기의 시각적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연재분도 완숙기의 작화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표2

만약이란 표현은 웃기지만, 만약, 이 작품이 완결되었더라면 김혜린의 장편서사 작품들 중 좀 다른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이는 단지 개인적 차원의 스펙트럼만이 아니라 순정만화의 영역을 좀 확장시키는데 기여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런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 작품은 진정 저주받은 걸작일 것이다.

 

2. 실패한 영웅과 확장되는 인간애 : 이야기 측면에서 본 <아라크노아>

 

나의 아이들아. 우리들은 인간이다.
그것은 결점만큼 장점도 있는…그것은…‘사랑할 줄 아는 모래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우주여행이 원활한 시대. 정확한 연대설정은 없다. 현재 40대로 추정되는 지구연맹 최고의 천재라고 추앙받던 리안 프로크너 박사는 젊었을 때 인공생명 실험에 참가한다. 실험을 폐기하고 실험체들을 없애라는 명령에 저항하여 크리슈나와 쌍둥이 제이, 케이를 데리고 탈출한다. 그 와중에 제이를 놓치고, 원자력에 노출되어 시력과 건강을 심각하게 잃는다. 애인이었던 세라는 친구인 맥스와 결혼했고, 맥스와 리안은 서로의 가치관을 인정하지 못하면서도 종종 필요상의 거래를 한다. 탈출 이후의 과거는 아직 다뤄지지 않았지만, 불완전한 초능력을 지닌 케이가 한번 폭주하여 도시의 일부를 파괴시켰던 일이 있었고, 여러 군데 떠돌다가 현재 화성의 빈민거리에 정착하여 ‘아라크노아’라는 이름으로 해결사 노릇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작품은 경찰간부후보생 ‘지나 박(17세)’이 화성지국에 연수생으로 왔다가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을 케이와 크리슈나가 구해주며 시작한다. 알고 봤더니 우주경찰 상급자들이 범죄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후보생들을 미끼로 활용한 것. 살해된 부모 때문에 정의를 수호하는 경찰이 되어야겠다고 노력해왔던 그녀는 그들의 비인간성에 질려하는 한편, 아라크노아에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리안이 맥스와 거래를 통해 그녀를 경찰에 복귀시켜주었으나, 그를 포기하고 새로운 멤버가 되면서 주인공 그룹이 완성된다. 이것이 첫 번째 장(章)인 ‘지나 박, 화성에 가다’이고, 이제 이들이 나머지 장들을 견인한다. 다음 장은 ‘캡틴 아라크네라는 사람’, 세 번째는 ‘기타맨’, 네 번째는 ‘제인’이다. 기타맨은 지구연맹의 개발주의에 저항하는 가수 블라디미르의 별명이고, 몸을 바꿔가며 생명을 연장하는 노회한 범죄조직의 총수에게 안드로이드처럼 길러진 제인이 바로 케이의 쌍둥이 누나인 제이이다.

이미지 5-1 이미지 5-2

 

주인공들이 만나게 되는 주요인물들, 기타맨과 제인을 차례로 보여주는 단행본 표지를 보면, “김혜린의 SF만화”라고 되어있다. 이 작품을 SF만화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까? 이 질문은 아마 이 작품의 주제가 무엇일까라는 질문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을 것이다. 분명 이 만화는 시대배경이 미래이고, 안드로이드, 인공생명, 우주여행 같은 현재엔 불가능한 다양한 소재들을 활용하고 있다. SF의 정의에 대해 전문적으로 논의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가장 중요한 본질 같은 것이 있다면 지금까지 경험하지 않았던, 잘 알 수 없지만 왠지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미래세계에 대한 과학기술적 접근일 듯하다. 작품을 탐독하고 나면, ‘아, 그러한 미래도 가능하겠구나’ 라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 하지만 이 작품은, 아무리 많은 SF장르적 기술들을 차용하더라도 핵심은 오히려 표지위의 표기처럼 “인간성 회복의 메시지”에 더 맞춰져 있다. 작가의 관심 자체가 과학기술의 발전이 야기한 사건들이 아니라, 그러한 시대에 살아가는 ‘실패한 영웅과 그를 둘러싼, 그리고 그들 주변으로 확장시키는 인간애’인 것이다.

사실상 김혜린의 대부분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일종의 실패한 영웅이다.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과 탁월한 외모를 지닌 이들은 심지어 도덕적인 자질마저 출중하다. 평범한 독자들이 봐도 질투가 날만 하건데, 가상세계 속의 동료들은 어떠하겠는가. 물론 주인공도 인간인 이상 실수도 한다. 이 실수는 결국 대다수를 차지하는 덜 도덕적이고 덜 정의로운, 때로는 사익에 가득한 무리들이 주인공을 어떻게든 축출하거나 배척하게끔 하는 도화선으로 작용한다. 리안, 캡틴 아라크네는 전도유망한 천재과학도였다. 그가 한 실수는, 젊은 시절 과학적 욕심 때문에 불안한 구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공생명 프로젝트에 손을 댄 것이었다. 자신의 치명적 실수를 반성하며 아이들을 구출해 탈출하지만, 덕분에 지구연맹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지구연맹을 이끌 수 있는 전도양양한 천재과학자의 지위를 버리고, 부모도 배우자도 자식도 없이 화성 뒷골목에서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아이들을 키우며 최대한 조용히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그에 대해 맥스가 던지는 비판은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 지구연맹의 입장을 보여준다. “불쌍한 낭만주의자, 자만심에 가득 찬 아나키스트.”

하지만 이 축출되고 실패한 영웅은 여전히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며 살아간다. 영웅이 구한 소년들은 당연히 그의 영향을 받고, 그 어떤 혈연관계도 없지만 더 이상적인 부자관계, 단순한 경제공동체가 아니라 일종의 사상-무한한 개척욕구가 아니라 그 안의 인간들의 삶을 돌아봐야한다는-적 공동체를 구축한 것처럼 보인다. 이 섹트에 지나가 끼어든다. 이들은 모두 혈육이 결핍된, 또는 그만큼 결핍된 부분을 갈구하는 인간들이다. 독신이므로 자식이 없는 캡틴, 어릴 때 부모님이 살해당했고, 지구로 돌아가도 어느 한군데 발붙일 곳 없는 고아 지나, 초능력 정자은행을 통해 탄생한 완전인공수정체인 케이와 크리슈나. 당연히 부모와 가족이 없다. 이들 중 누구도 혈연으로 이어져있지 않지만, 하나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그려낸다. 번번이 등장하는 가족이란 단어는 이들이 “금속성의 인스턴트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을 먼저 헤아리는 따뜻하고 안정적인 세계를 지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사상공동체 주변에 기타맨이라 불리는 블라디미르, 김혜린의 작품에 자주 나타나는 참여시인이 등장한다. 지구연맹의 개발주의에 반기를 들고, “절대 자유에의 추구라는 죄명 아닌 죄명”을 가진 그는 총탄세례를 받고 죽기 직전, 계속 노래하고 싶다며 리안에게 사이보그로 개조해달라고 부탁한다. 불행히도 이 때문에 그는 이후 지구연맹의 실험행성에 잡혀 끊임없이 해체실험을 당하고, 심하게 망가진 자신이 가진 것은 죽을 자유밖에 없다며 아라크노아를 찾아온다. 10년 전, 케이와 크리슈나를 노래로 위로했던 그는 이들의 도움으로 마지막 콘서트를 가지고 먼지로 돌아간다. “사람들의 힘”을 꿈꾸며 인간에의 무한한 애정을 가졌던 진짜 시인은 결국 세상에 남지 못한다.

블라디미르가 찾아오며 아라크노아의 과거 일부가 밝혀진다면, 제이의 등장 역시 그러하다. 어릴 때 자신의 탈출캡슐을 구해 준 범죄조직 총수를 아버지라 따르고 있고 옛날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상태이다. 이 가짜 아버지의 명으로 어쩌면 진짜 아버지와 오빠일 수 있는 캡틴과 크리슈나를 납치한다. 이들을 구출하려고 케이와 지나가 달려든다. 자신에게 납치되고 총을 맞으면서도 자신을 다정하게 부르는, 꼭 다시 만나자고 하는 이들에게 제이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슬픔과 공감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당혹스러워 한다. 이처럼, 캡틴 아라크네를 중심으로 한 가족적 사상공동체는 마치 거미가 방사형의 거미그물을 지어나가듯이 점차 확대되어나갈 예정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이들의 과거가 점점 더 밝혀지는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중요한 점 하나는 다른 작품에는 항상 등장하는 유형이 이 작품에선 없다는 것이다. 바로 실패한 남성영웅의 여성파트너, 헌신적이며 지속적인 사랑을 주고받는 유형 말이다. 이 지점이 바로, 만약 이 작품이 완결되었더라면 현재의 <광야>보다도 먼저 김혜린의 새로운 스타일-더 이상 ‘순정만화’라고 부르기 힘든-의 작품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하는 부분이다. 장르의 확장 또는 전환을 통해 한국만화의 스펙트럼이 넓어졌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순정만화라고 불리는 장르의 관습에 따르자면, 주인공들의 러브라인은 사건을 구성해내는 핵심축이다. 이 핵심축을 잘 구축하기 위해 불가항력적인 상황과 배경을 제시하는 관습은 <북해의 별>부터 그녀의 모든 장편에 존재한다. 실패한 영웅과 그의 불멸의 애인이라는 충실한 사랑 구조는 이 작품에선 부재한다. 물론 리안은 옛 애인이었던 사라라는 이름을 자신의 컴퓨터에 부여하긴 했지만, 그녀가 다시 이야기의 중심으로 등장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유일한 여성주인공인 지나와 케이 사이의 애정선이 그어지고 있긴 하지만, 이는 일종의 서브플롯 정도로 그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이 작품이 리안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과도 상관적이다. 사상공동체의 4명의 아라크네들이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설명하거나 독백을 덧붙임으로써 우리는 <아라크노아>라는 허구세계와 그 속의 주인공들, “사랑할 줄 아는 모래알” 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나가고, 그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비록 4개의 챕터를 나누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편의상의 구분일 뿐 커다란 의미는 없어 보인다. 챕터별로 화자가 특별히 달라지는 것도 아니며, 각 챕터를 구성하는 방식은 거의 동일하다. 단지, 아라크노아에 가장 늦게 결합한 지나가 이 구성원들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에서 독자들과 가장 가까운 위치를 지니므로, 그녀를 통해 이들을 가장 많이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지나를 가장 대표적인 화자로 볼 수 있다.

 

3. <아라크노아>의 서사적 매력, 멜랑콜리

 

심장에 피가 모자라 혀는 굳고 노래는 거칠어질 뿐, 아름다워지질 않는다.
결국 끝까지 살 수 없고 노래 또한 끝맺지 못할 것을,
오, 나의 기타여! 나는 첫 코드를 누를 때부터 알았다…

 

이 작품을 읽고 있으면, 좀 슬프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오열 같은 것은 아니고, 뭐랄까, 비극적 결말을 예견하고 있으면서도 그 끝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인물들에 대한 애잔함이다. 비극적이긴 하지만, 영웅의 완벽한 몰락은 아니다. 비록 육체는 사라지지만 그 정신은 계속 이어지는, 지금의 세계에서의 잠시의 패배, ‘언젠가는’ 이라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 적어도 우리만은 주인공들의 진심을 알고 있기에, 이들이 실수를 저지르고 그로 인해 평생을 벌을 받더라도, 또는 결국 그것 때문에 죽음에 이르더라도, 우리는 이들이 참으로 애뜻한 것이다. 이 작품들에서 훌륭한 비극의 여건, 독자들과 유사한, 또는 조금 뛰어난 수준의 도덕성을 지닌 주인공이 (저지를 수도 있는) 실수 때문에 인생이 파괴될 때, 독자들이 가장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의 적절함을 느끼는 것은 과하지 않다. 이런 애잔함은 물론 김혜린의 세계에서 익숙하다. <북해의 별>에서는 주변부의 인물들에게서 주로 나타났다면, <비천무>와 <테르미도르>에서는 주인공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하면서 훨씬 더 강도가 강해졌었다. <비천무>의 마무리 시기와 <테르미도르>와 <아라크노아>의 창작기가 모두 김혜린의 ‘시각적 절정기’에 속해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섬세하고 비현실적인 작화 스타일과 이 비극적 가상세계들의 상호의존성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달리 말하자면 이 아련하고 서글픈, ‘멜랑콜리’라는 감성적 상태를 야기하고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시각적으로도 아주 섬세하고 조화롭고 이상적인 작화스타일과 연출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이 멜랑콜리한 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을 보자. 다른 장르의 만화들도 그러하지만, 특히나 순정만화는 양면페이지를 함께 분석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시지각의 가장 큰 단위이기 때문이고,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의 결합방식 역시 감안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양면페이지의 경우 왼쪽 페이지의 세로형 시선배열은 오른쪽으로 넘어오면서 가로형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오른쪽 페이지의 칸9는 여전히 왼쪽의 어두운 색조를 유지하며 두 페이지 사이의 연결성을 강조한다. 왼쪽 페이지는 선과 붓질이나 먹선이 함께 보이고, 오른쪽은 일반화된 선과 스크린톤을 병행하고 있다. 151페이지가 세 번째 챕터인 “기타맨”의 시작페이지이므로, 154페이지까지 죽 컬러채색이었을 것이다. 현재의 단행본에선 흑백으로 실려 있다. 컬러채색이건 아니건, 단편 <우리들의 성모님(1987)>에 실렸던 것과 유사한 먹선 느낌은 이 페이지에서도 아주 편안하게 다가온다. 절정기의 양면페이지들은 거의 대부분 10개의 칸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이 역시 완숙기와는 달라지는 부분인데, 완숙기에는 10개 이하의 칸 배치 페이지의 비율이 더 많이 나타난다.

 

6-1 6-2

 

 

바로 직전 양면페이지에서 악몽에 시달리던 케이를 크리슈나가 깨운다. 진정제를 가지러 나가면 캡틴이 깬다며 담배를 피워 물던 케이는 위에 지나가 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작은 칸의 옆얼굴 클로즈업이다(칸 1). 둘이 이층침대의 1층에 자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칸 2는 부감 쇼트이며, ‘지나도 깬 거 아냐?’라는 말풍선, 그리고 둘의 위치가 보일만큼 큰 칸이다(칸 2). 케이의 시선과 질문에 대답하듯이 크리슈나의 얼굴과 대답이 보이고(칸3), 다음엔 크리슈나의 시선이 향하는 것처럼 케이의 모습이 포착된다(4). 다음 단, 둘을 한꺼번에 포착하여 옆에서 보여주고, 악몽의 원인과 크리슈나의 위로를 듣는다(5).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뿐”, “내가 무섭다”는 케이의 발화는 오른쪽 페이지로 이어진다(6~9). 계단위의 2층 침대가 작게 나타나고(10), 마치 시선이 아래층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 이제 위에서 내려 보는 것처럼(11), 마지막에 상대적으로 커다란 지나의 옆모습과 말줄임표가 들어있는 말풍선이 있다(12). 이러한 칸의 배열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의 시선이 지나로 접근하기 전까지 시간을 끌음으로써 사실은 그녀가 지금 막 깬 것이 아니라 케이와 크리슈나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둘의 대화(1~9)와 지나의 엿들음(10~12)이라는 두 가지 다른 행위는 칸들의 분리만이 아니라 어두운 색조와 밝은 색조로 구분한다. 칸 11에 등장하는 사진액자 속의 환한 미소 그리고 이 양면페이지에서 누구보다 크게 비춰지는 지나의 얼굴(12)은 지금은 어두운 색조가 훨씬 더 강하지만 결국 지나의 밝음이 어둠을 쫓아낼 것이라는 암시가 아닐까.

아래 페이지는 절정기 양면페이지 연출의 전형성, 그리고 왜 주된 화자가 지나인지, 묵설법과 독백이 어떤 스타일로 독자들에게 작가가 원하는 해석을 전달하는지 잘 보여준다. 블라디미르가 죽은 지 얼마 후, 아직 슬픔에서 헤매던 케이와 지나가 사무소로 돌아오자 케이와 똑같이 생긴 누군가가 캡틴과 크리슈나를 납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라는 그것이 제이일 수 있다고 가르쳐주고, 지나는 어쩔 줄 모르는 케이를 진정시켜 그들을 구출하러 출발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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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하고 있는 케이를 농담으로 무장 해제시킨 지나는 오른쪽 페이지에서 케이를 잠깐 보며 침묵말풍선을 보인다(칸 7). 시선을 돌려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8), “그녀 너랑 어쨌건 남매가 되는 거네. 누나니? 어쩌다 헤어졌어?”라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러나 지나가 진짜 걱정하는, 과연 네가 누나랑 싸울 수 있겠니 라는 질문은 우리 독자들만 알 수 있다(9). 보통 타자가 듣지 못한다는 차원에서 독백도 동일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만화는 이처럼 ‘생각’도 연극에서의 독백, 더 정확히는 방백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그녀의 생각은 이어지는 4개의 칸에서 계속된다. 그녀의 질문에 대해 케이가 답을 하는 동안, 그녀는 케이를 바라보며 자신의 생각을 계속 방출한다. 마치 칸 9의 그녀가 더 커지고 희미해진 것 같은 오른쪽 구석 페이지의 지나는 만화적 기법이다. 카메라의 왕복처럼 대화자들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방식만이 아니라, 이처럼 지나가 케이를 보고 있는 장면인데도 둘의 얼굴을 독자가 모두 인지하는 경우가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런 방식을 통해 그녀의 독백은 사실상 이 양면페이지 전체, 또는 이 순간을 통해 독자가 파악해야 할 메시지를 전달한다. “완전 인공수정이란 게 아주 드문 일은 아닌데도. 왠지 이것저것 그저 알아지는 기분. 캡틴의 뒷모습도 너희들 눈의 물기도… 아라크노아라는 이름의 묘한 의미도…”

이 작품의 첫 페이지에서 아라크네 신화에 대한 ‘나’의 언급은 실패한 영웅, 리안의 것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스 신화가 너무 잔혹하고 슬프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데, 그 중에서도 아라크네가 더욱 그렇다. “신에 필적하는 솜씨를 저주”로, “자신을 사랑하는 본능을 죄악”으로 되돌려주는 신들. 비록 저주받았으나 아라크네들이 계속 실을 잣는 것은 “생존과 항거의 몸짓”이다. 이 작품에서의 신들은 인공생명을 파괴하려는 지구연맹이다. 개별자들이 어찌 해볼 수 없는 폭압적 사회시스템이다. 이런 사회에서 생존 자체가 바로 항거이다. 거대구조에 대한 소수의 저항은 단숨에 파급력을 가질 수 없다. 우선 급한 것은 생존이며, 규모가 작으니만큼 질적 친밀도는 높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 친밀도의 핵심은, 강력하고 폭력적인 세상이 엉터리라고 생각하지만 어찌 해볼 수 없는 무력함, 결코 항복할 수 없기에 예정된 패배를 예감하는 자들의 슬픔의 공유이다. 그래서 “웃음 뒤에 눈물, 눈물 뒤에 웃음”이 일상화되어 있으며, “시작할 때부터 끝까지 노래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는 것이다.

블라디미르의 이 노래가사처럼, 김혜린도 <아라크노아>를 끝까지 노래하지 못할 것을 어느 시점에선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이유로 그녀가 <아라크노아>를 통해 투사하는 세계에 대한 자신의 멜랑콜리가, 미완결로 완결된 것은 아닐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한상정

현재 상지대학교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크리틱 M의 편집위원들 중 유일하게 여성형태를 띄고 있다는 이유로 편집위원장이라는 무한 권력을 쟁취해냈다(그래서 매번 회의록 작성해야 한다나?). 일요일 일찍부터 일어나서 마당을 쓸고 닦고 나면 그제야 어머니의 허락 하에 아버지, 두 남동생과 함께 탐독하던 만화책들의 기억으로 만화사랑을 실천중이다. 이런저런 만화들을 골고루 보는 편이지만, 성별과 상관적으로 (이 대목에서 어떤 이들은 말도 안 된다며 구박한다) 꽤 오래 순정만화를 탐독하고 연구했다. 요즘은 장르 불문. 그러나 너무나 섬세해서 (거기, 얼굴 돌리지 마시고!!), 과다한 유사코드 반복 작품들은 3분도 견디지 못한다. 뭐라도 ‘새로운’것이면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니, 모더니즘으로 회귀 중 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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