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상_ <시구루이> 파시즘을 극복하는 “이미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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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에서 사람 목숨보다 덜 질긴 것은 없다. 질기고 모진 게 사람목숨이라는 옛말은 이미 옛말이다. 사람이 들가의 잡초 뽑히듯 죽어나가는 만화 <시구루이(シグルイ)>처럼 우리는 변하고 있다.

<시구루이>는 난죠 노리오(南條範夫)의 원작소설 <스루가성 어전시합(駿河城御前試合)>을 제1화 <무묘사카나라레(無明逆流れ)>를 중심으로, 야마구치 타카유키(山口貴由)가 재구성한 만화다.

 

딱딱한 꼬추가지고 놀아봤자, 가장 딱딱한 죽음만 남을 뿐
“시구루이”라는 제목은 일본의 부시도(武士道)를 주제로 한 책 <하가쿠레(葉隠)>의 한 구절인 “武士道は死狂ひなり。一人の殺害を数十人して仕かぬるもの(부시도란 시구루이다. 사람 하나 죽이는 데 수십 명이 덤벼도 당하지 못할 때도 있다.)”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 시구루이란, 현대어로는 “시니모노구루이(死に物狂い)”, 즉 “죽을 각오로 임한다”는 의미다. 시구루이란 질기고 모진 게 사람 목숨이니, 죽을 각오로 덤비면 못할 것이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만화 <시구루이>에서는 “죽을 각오로 덤볐기에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고 그들이 맞이한 결과는 “잔혹한 죽음” 뿐이다.

야마구치 타카유키도 난죠 노리오도 “잔혹함”으로 유명한 작가다. 난죠 노리오는 본래 정경학부 교수로, 정치경제뿐 아니라 역사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일본 사회를 한 줄로 요약하며 ‘봉건사회의 완성형은 소수의 사디스트와 다수의 마조히스트로 구성된 것’이라고 말했다. 잔혹함이야말로 일본 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며 “시스템의 잔혹함을 육체로 표현”하는 것이 그의 백 여 권이 넘는 “잔혹시대물”에 관철된 테마였다. 잔혹함은 야마구치 타카유키의 테마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는 <전략인간병기 가쿠고>, <오공도> 등 “BDSM”과 “잔혹한 신체 파괴를 통한 신체의 확인”라는 신체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많다.

둘의 공통점은 신체의 파괴에 있지만 그 목적은 서로 다르다. 난죠 노리오는 <시구루이>의 부록으로 제공된 해설에서 ‘인간이 본래 잔혹하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 대립하지 않도록 잘 조정하는 사람도 있다. 온화하며, 잔혹함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사회도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다. 이는 정치의 목적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는 ‘인간의 감정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잔혹함이 태어난다.’고 말한다.

스토리는 감정의 움직임이 없이는 성립하지 못한다. 인간의 웃음과 울음에 대해, 도올 김용옥은 자신의 ‘몸 이론(body theory)’으로 ‘인간의 문화와 자연이 서로 갈등을 일으킬 때 감정이 일어난다’고 지적한다. 인간의 문화, 즉 시스템이 자연을 억압할 때 일어나는 잔혹함(=감정)이 난죠 노리오의 테마이자, 문학의 목표인 인간을 그린다를 이루기 위한 목표였다. 사회와 인간의 관계로 인간을 그리려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반면 야마구치 타카유키는 모순에 빠져 있다. 그는 인간을 인간으로 그리려 한다. 난죠가 언어로 이루어진 시스템인 사회를 마찬가지로 언어로 이루어진 소설로 다루는 이점이 있는 반면, 그는 그림을 통해 인간을 그려야만 한다. 그가 잔혹한 묘사를 그리는 이유는 잔혹함을 통해 인간의 신체를 그려내기 위함이다. 브레히트의 잔혹극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잔혹하게 파괴되는 신체 덕분에 낯설어진 온전한 우리 자신의 신체를 음미한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잔혹극이 사회주의적 계급차별 등의 사회적 시스템을 난죠와 마찬가지로 잔혹하게 파괴되는 신체로 표현한 것이라면 야마구치의 잔혹함은 자기 자신의 신체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갈등에서 비롯한다.

야마구치는 그 자신이 “시구루이”다. 그는 여러 가지 무술과 검술을 익혔으나, 강인한 신체를 타고나지 못해 강해지지 못했다. 강인한 신체를 타고나지 못한 자가 신체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빠지는 모순이 “시구루이”한 고행이다. 고행은 연약한 과거의 신체를 고통을 주어 극복한 뒤 강인한 신체로 탈바꿈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딱딱함”이라는 강함의 이데아를 신체가 받아들이게 된다. 이 과정은 가학-피학적 자위행위나 다름없다. 그가 작품 속에 BDSM을 두드러지게 넣는 이유는 “이상화된 신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상화된 신체란 이데아와 결합된 신체로, 도올이 말하는 “몸(mom)”과는 다르다. 몸은 육체와 정신과 감정이 모두 한 덩어리다. 유연하게 변화하고, 구체적이며, 동시에 추상적이다. 반면 이데아는 “딱딱”하다. 변화하지 않고, 추상적이며, 딱딱하고, 감관으로 다가갈 수 없다. 야마구치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몸이 더 “딱딱”해져 신체가 되도록 고행을 거듭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욕망을 억눌러야만 한다.

야마구치는 갈등에 빠져 있다. 그가 그리는 폭력은 대부분 폭력을 가하는 데서 오는 쾌감이 아니다. 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황홀이다. 폭력을 다루는 많은 작가들―이시카와 켄(石川堅), 하라 테츠오(原哲夫), 모토미야 히로시(本宮弘志) 등이 묘사하는 폭력은 마초적이고 도취적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감정이다. 야마구치가 그리는 폭력은 폭력을 행사하는 자와 폭력을 받아내는 자가 동시에 존재하는 “자해”의 감정이다. 사람의 몸이 “자해”를 하면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베타엔돌핀, 세로토닌 등 뇌 내 진통제가 분비되고, 우울증 등 심리적 스트레스가 경감된다. 자해를 하는 사람은 죽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심리적 고통이나 스트레스를 견뎌내기 위해 자해한다. 야마구치가 그리는 잔혹함은 이 지점에 존재한다.

난죠와 야마구치가 그리는 잔혹함을 나는 “시구루이 파시즘”이라고 부른다. 시구루이 파시즘이란 “남근과 오나홀(オナ─ホール)의 관계”다. 오나홀이란 여성의 성기 모양을 본뜬 남성용 자위기구를 이르는 일본어다. 둘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딱딱하고, 추상적이고, 불변하는 페니스는 상대적으로 물렁하고 변형되며 구체적인 오나홀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 오나홀은 물건이고 의지가 없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페니스는 오나홀을 필요로 하면서도 오나홀을 증오한다. 오나홀을 이용한 페니스는 발기가 풀려 “물렁”해지고, 오나홀의 속성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시구루이 파시즘은 조금이라도 더 길고 크고 딱딱한 남근이 상대적으로 물렁한 자를 오나홀로 간주해 마음대로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강간의 봉건제도”다. 폭력을 행사하게 되면 일시적으로 남근은 오나홀과 마찬가지로 “물렁”한 존재가 되며, 이 갈등이 “엑스터시”를 낳는다. 남근은 엑스터시를 통해 자신의 단단함을 확인하며, 동시에 지속적으로 물렁해지는 갈등을 겪는데, 단단함의 엑스터시는 자신의 것으로, 물렁해지는 수치는 오나홀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체제가 유지된다. 단단한 것이 물렁해질 때, 변형될 때 쾌감을 느낀다는 묘사가 <시구루이>에서는 계속해서 등장한다. 대표적으로는 후지키 겐노스케(藤木源之助)가 오른팔이 잘려나가 수술을 받는 장면이다. 생으로 절단된 오른팔의 튀어나온 뼈를 마취도 없이 톱으로 잘려나갈 때, 후지키는 사정한다. 엄청난 양으로. 그의 육체는 톱이라는 단단함에 의해 불구라는 변형된 존재, 오나홀이 된 것이다. 한편 오나홀은 남근의 부름을 받는 순간 다른 물렁한 존재와 구분되는 “단단한 존재”가 된다. 남근의 단단함을 이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엑스터시를 느끼게 된다. 오나홀은 남근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며, 오나홀 간에는 스스로를 얽매고 감시한다. 이처럼 지속적인 잔혹한 종적 폭력-강간과 횡적 시선-강간으로 유지되는 시스템을 나는 시구루이 파시즘이라고 명명한다.

시구루이 파시즘에서 종적 폭력-강간은 “오나홀로 대로변에서 자위하는 소년”이자 “저항하지 않는 엄마를 때리는 소년”이다. 폭력-강간을 시도하는 소년은 절대 자기 방에서 자위하지 않는다. 폭력-강간은 힘의 확인이며, 힘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해주는 시스템 내의 타인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발기 상태를 과시하며 얼마나 거칠게 오나홀을 다루는가”지, 자위 그 자체가 아니다. 저항하지 않는 엄마를 때리는 소년은 엄마가 자신에게 보복을 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저항하지 않는 엄마는 오나홀이다. 의지가 없는 도구다. 만일 엄마가 저항하는 순간 엄마는 더 이상 오나홀이 아니라 남근이 되려는 것이고, 이는 자신의 남근을 빼앗긴다는 거세환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철저히 잔혹한 폭력이 뒤따르게 된다. 상대가 아무 반응도 없기에 폭력은 점점 폭주하게 된다. 그 폭주의 끝은 죽음이다.

그리고 횡적 시선-강간은 “엄마의 보복”을 미연에 막기 위해 수직관계를 철저히 지키도록 강요하는 폭력이다. <시구루이> 후반부에서 이를 묘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토쿠가와 타다나리(徳川忠長)는 두꺼비 검법을 구사하는 쿠츠키 간노스케(屈木頑之助)를 사로잡아, 먹이를 주듯 여자 내주고, 그가 잔혹하게 강간하는 것을 구경한다. 여동생이 쿠츠키에게 당한 것에 원한을 품은 젊은 사무라이 하나가 뒤에서 그를 공격하자, 충실한 늙은 부하가 막아선다. 타다나리는 단숨에 젊은 사무라이를 베어버린다. 늙은 부하의 팔과 함께. 늙은 부하는 이에 대해 아무런 반항은커녕 “훌륭한 솜씨”라는 말을 할 뿐이다. 그는 팔이 잘렸지만 “주군의 목숨을 지키고 주군이 직접 팔을 잘라주셨다”는 엑스터시만을 허락받는다.

시구루이 파시즘은 감관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세계를 감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에서 나타난다. 감각으로 파악하려는 세계는 환상이다. 환상을 환상으로 정의하고 경계를 긋기만 하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 시구루이 파시스트는 이 경계를 넘으려고 시도한다. 이데아를, 본질을, 근원을 추구한다. <시구루이>에서는 등장인물 안에서 문화성과 자연이 갈등하며 본심이나 핵심이 드러나는 감정의 순간에는 옷을 입고 있음에도 나체로 그려진다. 심지어는 그 안의 내장이나 뼈와 같은 구조가 그려진다. 그림을 통해 본질을 그리려는 즉물적(=감관)의 시도다. 감각으로 이데아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엑스터시를 가져온다. 이 엑스터시는 완결되지 않고 계속된다. 자신이 경계를 넘기 직전까지 단단했음을 확인한 동시에 물렁해져 단단함의 속성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이 함정에 빠졌다. 보디빌딩을 통해 “스스로 단단해지는” 고행을 겪고 난 뒤, 그의 작품세계는 변했다. 그 기점이 <금각사>다. <금각사>에서 불구나 장애를 가진 자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시구루이와 같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타고나지 못해, 감각과 육체의 힘으로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를 얻으려 하는 자들이다. 일본의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통해 미시마가 여성적 감각의 미에서 남성적 논리의 미로 승화했다고 평한다. 금각사야 말로 아름다운 남근이며, 이 남근을 불태우려는 시도야 말로 엑스터시를 확인하려는 행위다. 그는 <철과 태양>, <우국> 등 가장 단단한 남근인 “일본도”를 통해 가장 추상적인 존재인 “태양”으로 가려고 시도했다. 그 결과는 할복자살이었고, 머리만이 남았다. 야마구치는 미시마를 의식하고 있다. <시구루이>의 마지막 장면에서 죽은 뒤 머리가 잘린 이라코 세이겐(伊良子清玄)의 수급(首級)은 미시마 유키오의 수급과 닮아 있다. 시구루이 파시즘이 게걸스럽게 집어삼킨 딱딱한 감각의 끝은 가장 딱딱한 신체의 상태, 시체로 귀결된다.

<시구루이> 내에서 시구루이 파시즘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이룬다. 먼저 3개의 단절이 존재한다. 성별의 단절, 언어의 단절, 시간의 단절이다. 그리고 이 둘을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남근이 유방과 검이다. 위치관계는 서로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무언가보다 위에 있는 존재는 남근이 되고, 아래에 있는 존재는 오나홀이 된다.

시구루이 파시즘 내에서 가장 아래에 존재하는 자는 일반 백성, 여성 등 저항할 수 없고 저항할 힘도 없는 자들이다. 작품 속에서는 스승 이와모토 코간(岩本虎眼)의 명령에 “오나홀적으로” 따르는 코간류(虎眼流)의 제자들을 두고, 딸 이와모토 미에(岩本三重)가 “꼭두각시(傀儡)”라고 부르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모두 “꼭두각시”다. 이들과 사무라이(侍) 사이에는 성별의 단절이 존재한다. 남근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사무라이부터 허락된다. 이들 사이에 단절을 넘을 수 있는 것이 유방이다. 유방은 여성의 신체 중에서 클리토리스와 함께 “발기”하는 곳 중 하나며, “기능적인 오나홀(=남근의 시선으로 볼 때 예쁜 오나홀)”을 상징한다. 유방을 허락받은 존재는 이라코를 헌신적으로 따르는 이쿠(いく)와 미에뿐이다. 이들은 두 사람이 검을 뽑아들 때 “가슴이 부풀면서” 엑스터시에 빠진다.

사무라이의 세계는 남근의 세계다. 이 세계의 남근은 검이며, 검을 다루는 근육이다. 근육은 신체 중에서 단단해지는 부분이다. 가장 단단한 근육을 가진 자가 검도 잘 다룬다. 그 중에서도 코간류는 아테미(当て身, 맨손 격투)를 사용한다.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부위는 손등의 단단한 부위인 호권(弧拳) 등 뼈처럼 “단단한” 부위다. 실제로 우에치류 카라테(上地流空手)라는 류파가 있다. 중국의 팡가이눈(半强煉)이라는 권법에서 유래했는데, 주먹이 아니라 관절이나 손끝, 발끝, 정강이 등 뼈를 단련해 무기로 사용한다. 카라테는 검을 금지당한 자들이 만든 무술로 스스로를 검으로 만들려 했다. 코간류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검을 이용해 단절을 넘으려 했다. 그 단절은 언어의 단절이다. 여기서 언어란 추상적인 시스템을 말한다. 바로 일본의 유교적 봉건주의다. 검을 잘 다루는 자는 이 세계로 넘어갈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기회뿐, 언어적 이데아를 갖추고 있는 신체만이 그 세계에서 살 수 있다. 이와모토 코간은 손가락이 여섯 개라는 이유로 중심부로 진출하지 못했다. 물론 이는 선천적인 것이나, 그가 기회를 얻지 못한 이유는 이를 감추었고 그 행동이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능력했다고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토요토미는 육손이였다.) 그는 검에 매달린 나머지 이데아적 신체를 갖지 못하고 “변형”되었던 것이다.

시구루이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검으로 인해 변형된 존재다. 검이라는 남근에 대해 스스로 오나홀이 된 존재다. 본래 기형이었든, 아니었든 상관없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환상이 된다. 후지키는 평범한 몸으로 엄청난 괴력을 구사하고, 후에 팔이 잘린다. 우시마타 곤자에몽(牛股権左衛門)은 스스로 거세했음에도 엄청난 근육을 유지하고 있다. (거세하면 남성 호르몬이 나오지 않아 근육이 유지되지 않는다.) 야마자키 쿠로에몬(山崎九郎右衛門)은 연모하던 사제가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의 남근을 입으로 자위하는 오토펠라티오(autofellatio)를 한다. (매우 커다란 남근을 가졌거나, 비정상적일 정도로 유연하지 않은 보통의 남성은 갈비뼈를 부러뜨리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들은 모두 검과 윗사람이라는 남근에 스스로를 꼭두각시이자 오나홀로 전락시키고 몸을 변형당한 자들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봉건제도에서 절대 넘을 수 없는 또 다른 단절이 있다. 바로 시간의 단절이다. 여기서 시간이란 과거, 혈통을 의미한다. 내가 아무리 신체를 남근에 가깝게 만든다고 해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존재하는 단절이 이를 넘지 못하게 만든다. 봉건제도 안에 편입된다 하더라도 혈통이 없이는 쇼군(将軍)이 되지 못한다. 혈통이야 말로 가장 “길고”(=역사적) 가장 “딱딱한(=추상적)” 남근인 셈이다. <시구루이>에서 가장 강한 남근을 가진 토요토미 타다나가 조차, “장유유서”라는 유교의 언어적 단절과 시간의 단절을 이기지 못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는 검술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그려진다. 그조차 검을 이용해 시간의 단절을 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는 자신보다 아래에 “엎드려 있는 오나홀”을 향해 광기에 찬 검을 찔러 넣는 폭력-강간이었다.

이미 말한 바, 딱딱함의 추구가 마주하는 결과는 죽음이다. 시체야말로 신체가 가장 검에 가까운 상태, 가장 딱딱한 상태기 때문이다. 여기서 죽음은 신체적인 죽음이기도 하고, 시간적인 죽음이이기도 하다. 시간적 죽음이란 과거다. 과거는 변형될 여지가 없고 완전히 단단하기 때문이다. 유교와 같은 봉건주의가 과거 회고적이며 죽은 자의 영혼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과거야 말로 완전한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인물이 “현재”를 살 때는 남근처럼 단단하지 않았다. 그들은 삶에 적응하기 위해 변형되고 말랑말랑해져왔다. 이러한 과거는 모두 남근의 신화로 거세되고 철저히 이상화된 과거만이 남게 된다. 과거회귀와 동시에 과거의 살해이기도 하다. 과거의 살해는 현재 살아 있는 오나홀의 몫이다. 시구루이 파시즘의 귀결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삶에 받아들이고 살면서 죽으려고 하는 갈등에 있다. 여기서 잔혹함이 탄생한다.

시구루이 파시즘의 세계에서는 오나홀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 스스로 검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오나홀이 되기를 거부한 사람은 미에다. 소설에서 미에는 후지키와 결혼을 약속했기에 살아남는 반면, 만화에서 미에는 자결한다. 타다나가의 명령에 따라, 구토하면서도 후지키가 죽은 이라코의 수급을 베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왜 미에가 자살했는가?”, “자살하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라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나는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한다. 미에는 누구보다 시구루이 파시즘의 세계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한 사람이다. 이를 위해 완벽한 오나홀로 이라코에게 충성을 다한 이쿠와는 달리 그녀는 스스로 일어서려 했다. 그녀가 이라코를 처음 사랑했던 이유는 이라코가 누구보다도 파시즘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절대적인 남근을 휘두르는 자아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이라코는 코간의 명령으로 후나키(舟木) 쌍둥이를 베고 난 뒤 구토한다. 살인을 한 자신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타인의 명령으로 살인을 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해서다. 그녀가 후지키를 사랑하게 된 것은 후지키가 팔이 잘리는 거세를 당하고 나서부터다. 후지키는 더 이상 위의 명령에 따라 검을 휘두르는 존재가 아니라, 이라코를 이기겠다는 자아를 가지고 난 뒤, 그녀는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런 그가 다시 오나홀로, 꼭두각시로 변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검 두 자루가 동시에 부러지고 만 것이다. 그런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스스로 시체가 되어 검이 되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절대적인 세 개의 단절을 넘을 힘이 그녀에게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구루이 파시즘은 외부의 존재, 절대적인 오나홀로 전락시키는 존재를 죽음으로 내몰면서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그 사실을 엑스터시로 느낀다. 자신이 휘두른 남근의 결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구루이 파시즘은 매우 위험하다. 난죠는 이 사실을 끊임없이 지적해온 작가다.

반면 야마구치가 시구루이 파시즘은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나는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전략인간병기 가쿠고>의 결말은 여성성을 스스로 받아들여 시구루이 파시즘을 극복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가쿠고의 형 하가쿠레 하라라(葉隠散)는 스스로 거세하고 여성성을 받아들인 남근이었다. 그리고 그는 세상의 재생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반면 <시구루이>에서는 그런 면이 보이지 않는다. 난죠의 원작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시구루이 파시즘을 부정하면서도, 시구루이 파시즘에 매료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다행인 것은 그가 이 환상을 철저히 환상의 경계가 그어진 만화 속에서만 펼친다는 것이다. 미시마는 자신의 환상을 현실 사회로 끌어들였고, 모순을 일으킨 끝에, 자살했다.

나는 이 나라에서 시구루이 파시즘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위 ‘일간베스트’니, ‘인터넷 우익’이니 하는 것이 이러한 시구루이 파시즘의 사생아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팩트라는 이름의 언어적 남근을 마구 휘두르면서, 팩트가 정말 팩트인지 검토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이상화된 과거로 정제된 팩트를 오나홀에 휘두르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이들은 횡적 시선-강간을 스스로 원하며 “인증”을 해댄다. 이들은 이승만에게 “검”으로 권력을 빼앗은 박정희와 전두환을 숭배하며, 비록 현 대통령인 박근혜는 여성이지만 혈통의 남근을 가지고 있기에 인정한다. 그녀의 남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다른 “물렁한 존재”를 철저히 깎아내려야만 한다. 그들의 남근을 정당화하기 위해 ‘전라도’와 ‘여성’, ‘이주민’ 등 그들이 “물렁한” 존재로 여기는 자들을 오나홀로 격하시킨다. 더 큰 힘을 가진 “미국”을 숭배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종적 폭력-강간을 휘두르고 서로 “상타취(평균 이상)”, “일베로”를 받으려 한다. 일베뿐 만이 아니라 이 나라 여기저기에서 시구루이 파시즘을 확인할 수 있다.

시구루이 파시즘을 막기 위해 또 다른 파시즘을 꺼내야 할지도 모른다. 독으로 독을 제압한다는 논리다. 공권력이라는 “검”으로 강제적인 처벌을 가하는 방법이다. 더 큰 남근을 이용해 상대적으로 그들을 오나홀로 전락시키기 위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분명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시구루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문제는 “단단함”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그 반동으로 더울 “물렁”해진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변형시키고 불구로 만든다는 것이다. 더 큰 힘을 이용하면 이용하는 측에게도 반동이 일어날 수 있다. 남근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있다.

라깡은 “오나홀-미성숙한 남근”의 관계를 대상 a를 벗어나지 못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했다. 나는 이에 동의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끊는 것을 라깡은 “아버지의 이름(in the name of father)”라고 했다. 여기서 아버지란 언어로 이루어진 추상적인 세계, 상징계다. 그리고 언어적 규칙으로 이루어진 사회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언젠가 대상 a가 너희 것이 될 것이라 약속하고 유보시킨다. 오나홀을 빼앗는 대신 그들에게 사회적인 규칙―노동, 경제활동, 정치활동, 사교활동 등을 하면 언젠가는 너희의 파트너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이다.

시구루이 파시즘을 막기 위해서는 파괴적 남근만으로는 무리가 있다. 언어라는 남근과 동시에 타인을 위하는 연대가 동시에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오나홀이 더 이상 오나홀이 아니라 하나의 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구루이 파시즘 속에 있는 자들이 스스로가 오나홀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를 포기해야 한다. 남근이 있건 없건 그는 주체라는 점을 깨닫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머니의 이름은 어머니가 더 이상 “젖을 주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거부하는 데서 시작된다. 검을 든 어머니다. 힌두 신화의 칼리 여신처럼 그녀는 도취되어 춤을 추고, 남편 시바를 발 아래에 짓밟는다. 칼리 여신은 시바신과 마찬가지로 명상의 신이기도 하다. 그녀는 많은 수행자의 번뇌를 잘라주었다. 19세기 인도의 성자 라마크리슈나는 작은 칼리 사원을 관리하는 브라만이었는데, 칼리의 환각을 보며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는 조현병(調絃病)에 시달렸다. 탄트라 수행자 토타푸리는 그에게 칼리 사원을 나와 환각에서 벗어나라고 말했다. 라마크리슈나는 환각인 칼리에게 자신을 해방시켜달라고 애원했다. 토타푸리는 환각이 자신을 끊으라고 할 리가 없다고 했으나, 놀랍게도 환각 속 칼리는 라마크리슈나의 번뇌를 자르고 스스로에게서 해방시켜주었다. 칼을 든 어머니는 자립한 존재이며, 자립을 돕는 존재다.

어머니를 때리는 어린 아이는 어머니가 저항하는 순간 힘을 잃는다. 처음에는 더 심하게 폭력을 휘두를지는 모르지만, 폭력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스스로 폭력을 포기한다. 이 과정 중에 분명 더 큰 남근(=공권력) 등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이 남근은 남성의 성기라는 이미지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남근(=올바른 언어)과 함께, 이미지의 힘도 동시에 필요하다. 그 결과 누구든 마음대로 “물렁해졌다”, “단단해졌다”를 반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어머니가 들어야 할 검은 다른 이를 오나홀로 삼지 않는 한계를 가진 언어다. 이 순간 더 이상 언어는 남근이 아니라, 남근도 여근도 아닌 가능성, 궁극의 물렁한 존재가 된다. 이 물렁함으로 오나홀-환상의 경계를 확실히 하고, 환상을 오직 환상으로만 소비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스로가 어머니도 아버지도 자식도 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야마구치의 작업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그의 선은 매우 딱딱하고, 그가 그리는 대상도 모두 딱딱하다. 그러나 만화는 이미지, 상상력을 이용하는 세계다.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고, 물렁해질 수 있는 세계다. 나는 그의 다음 작품에서 그가 더욱 “물렁한” 작품을 그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 순간은 그가 그 자신의 신체가 가진 한계를 인정하고 화해하는 순간 찾아올 것이다.

손지상

소설가, 만화평론가, 칼럼니스트, 번역가.

주요 출간:
단편집 [당신의 苦를 삽니다], [데스매치로 속죄하라 - 국회의사당 학살사건], [스쿨 하프보일드], [일만킬로미터 너머 그대. 스토리 작법서 [스토리 트레이닝: 이론편], [스토리 트레이닝:실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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