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장소로 읽기]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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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과 공포의 흔적을 안아든 문화 공간

SBA 서울애니메이션센터와 남산 일대

 

서울시민의 명소,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N서울타워다. 나기만 서울서 났지 성장기를 오롯이 지방에서 보낸 내게 서울 한복판에 높이 솟은 방송탑 구조물은 그야말로 꼭 올라가 보고 싶은 곳 1순위였다.

지금이야 서울 높이 500미터가 넘는 건물도 세우겠다는 마당이지만 ‘서울서 손꼽히는 높은 자리’란 대도시 풍경에 익숙지 않던 내게는 꽤 로망이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케이블카도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고 원형 전망대도 바닥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식당도 멋있었고 남산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서울 풍경도 우와, 우와 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정작 서울 토박이인 아내는 남산을 나와 만나서 처음 가 봤다고 해서 추억 속 두근거림이 지방 촌놈의 선망일 뿐이었나 하는 씁쓸함이 뒤따르긴 하지만, 여전히 N서울타워의 옛 세칭인 ‘남산타워’를 들을 때면 예의 ‘높고 멋있는’ 이미지가 떠오르곤 한다.

이렇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은 남산은 어느 사이엔가 내게 만화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상 자주 오가야 하는 되는 자리가 돼 있었다. 바로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때문이다. 서울 명동에서 시작해 남산을 한 바퀴 도는 순환도로 한 자락에 자리한 이곳은 각종 만화 전시와 애니메이션 영화제 등이 열리는 장소면서 동시에 양대 만화계 단체인 한국만화가협회와 우리만화연대가 입주해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두 단체가 입주해 있는 건물에는 ‘만화의 집’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만화의 집 안에는 만화 도서관이 들어서 있기도 하다.

그 외에 각종 지원 사업이나 만화상의 심사장,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저렴한 입주 공간으로도 쓰였으니 그야말로 서울시 안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과 관련한 공공시설로서는 손에 꼽히는 곳이라 하겠다. 2014년엔 명동 일대에 재미랑이란 이름으로 별도의 전시 및 캐릭터 상품 판매 공간이 들어섰고 서울애니메이션센터로 올라오는 진입로를 재미로라는 이름을 붙여 만화거리화 하는 기획도 진행되었다. 국내의 대표적 만화 잔치인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도 2013년부터는 이 일대를 중심으로 열리고 있다.

유명 국산 만화와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장식돼 있는 입구 담벼락자리에서부터 동글동글한 마스코트 캐릭터가 반겨주는 푸른빛 건물 외벽까지 밝고 친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실제로도 주말이면 부모 손잡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놀러오고 사진 찍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거니와 ‘꽃피는 춘삼월’이라는 양력 4~5월 무렵에는 남산에 꽃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으니 꽃놀이를 겸해 놀러 오기도 좋다.

한데 서울애니메이션센터와 그 주변이 보통 사람의 문화 공간이 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하물며 이곳은 밝기는커녕 남산에 서린 치욕과 억압의 역사 한 가운데에 서 있는 공간이다.

 

남산, 신성한 산에서 일제 침략의 근거지로
Web_02_남산에서바라본서울전경N서울타워 앞에서 바라본 서울 전경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서 있는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에서 회현동 1가를 아우르는 지역은 일찍이 도성의 성벽을 수비하던 군인들이 무예를 닦던 군사훈련장인 ‘무예장’이 있던 자리다. 예장이라는 이름은 이 무예장의 앞 두 글자를 딴 표현으로, 고을의 준말인 ‘골’을 붙여 예장골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다.

예장은 남산 기슭을 끼고 있는데, 본래 남산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새로 나라를 세우고 풍수지리에 따라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때 북쪽 현무 북악산, 서쪽 백호 인왕산, 동쪽 청룡 낙산과 더불어 도성의 남쪽 주작 역할을 부여받았던 산이었다. 조선 왕조는 이 산들의 능선을 따라 성을 쌓고 북악산 기슭에 궁궐을 짓고는 그 맞은편에 자리한 산을 남산(南山)이라 부르며 집터 맞은편(앞쪽)에 서는 산을 일컫는 안산(案山)으로 삼았다.

풍수지리에서 안(案)이란 임금이 방석에 기대 나랏일을 살피는 책상과도 같은 형상을 말하며, 안산은 집터나 묏자리에 재앙이 닥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따라서 남산은 새 나라의 도읍이었던 한양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산으로서 신성시되었다. 태조 실록에는 “백악(주 : 북악)을 진국백(鎭國伯),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경대부(卿大夫 : 고위 관리)와 사서인(士庶人 : 일반 백성)의 제사를 금했다”란 대목이 등장하는데 이 목멱대왕을 모신 사당을 목멱사(木覓祠)라 했다. 이 사당은 다른 말로 나라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 하여 국사당으로도 불렸다.

한편 남산에는 전국에서 오는 봉화가 한 곳에 모이는 봉화대가 설치돼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도 한성부에서는 목멱사에 관해 “도성 남산 꼭대기에 있으니 소사(小祠 : 작은 제사)다”라 하는 한편, “봉화가 다섯 곳 있으니……(후략)”라면서 각 봉화가 어느 지역에서 올라온 봉화에 응하는지를 적고 있다. 다시 말해 남산은 도읍을 지키는 신성한 산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조선 팔도의 소식을 임금에게 전달해 나라를 지키게 하는 목적으로도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게다가 이곳은 앞서 언급했듯 본래 군사 훈련장이었던 예장이 있던 자리기도 했거니와, 세종실록에 명나라 사신이 목멱산에 올라 역사에게 씨름을 시켰다는 기록이 연거푸 등장할 만큼 힘이 한껏 뭉쳐 있던 곳이었다.

조선 건국 초기 나라의 도읍을 지키는 산이자 백성은 함부로 오를 수 없는 신성한 산이었던 남산은 임진왜란을 맞아 외세에 짓밟힌다. 1592년 선조가 백성을 버려둔 채 도망가자, 한양에 들이닥친 왜군은 예장 터에 진을 치고 일본식 성을 쌓았다. 이를 왜군들은 왜성대(倭城臺) 또는 왜장대(倭將臺)라 일컬었다. 임진왜란에서 패하고 물러간 지 292년 뒤 일본은 다시 이 땅을 집어삼킬 야욕을 본격화하며 마치 자기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땅이란 듯이 왜성대에 자리를 잡는다. 일본은 1884년 갑신정변 때 일본공사관이 불탄 책임을 따져 물은 끝에 녹천정(綠泉亭) 자리를 거의 강제로 빼앗아 그 자리에 새 공사관을 세웠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은 이듬해인 1906년 공사관을 한국통감부 통감관저로 썼으며, 한국통감부를 그보다 조금 더 윗자리에 세웠다. 한국통감부는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망하자 조선총독부가 되었다.

 

Web_21_조선총독부청사(왜성대)조선총독부 증축 전 모습

Web_23_남산통감부건물앞에서연설하는이토오통감강제 병합 전 한국통감부였던 건물 앞에서 연설 중인 이토 히로부미

Web_24_남산왜성대에있었던통감관사통감관저 모습

Web_11_통감관저터통감관저 터

 

한편 남산과 그 주변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완전히 일본인들의 자리가 되고 말았다. 일본은 1897년 3월 17일 일본인 거주자들의 휴식 공원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예장동 일대 3천여 평을 영구 임차해서 그해 7월 왜성대 공원을 열더니, 1898년엔 남산에 남산대신궁을 세우고 1916년 5월 22일 경성신사로 개칭했다. 1925년엔 남산 꼭대기의 국사당을 이름자 중 제사를 뜻하는 사(祀)자를 스승 사(師) 자로 바꿔 무학대사 사당으로 축소한 채 인왕산으로 쫓아내고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워 일본 신화의 주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데려다 놓았다. 남산성곽 일부는 헐려 조선신궁을 세우는 데에 쓰였다.

 

Web_25_남산국사당현재 팔각정 자리에 있었던 남산의 목멱사(국사당) 내부 사진. 이성계, 무학대사, 최영을 비롯해 여러 호신신장을 모시고 있었다. 일제는 조선신궁을 지으며 신궁보다 위에 자리했다는 이유로 인왕산으로 옮겼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한 을미사변(1895) 당시 자객에 맞서다 희생당한 이들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일본인 거주지 동쪽 끝자락에 장충단을 세우며 일본에 마음으로나마 각을 세웠는데, 일본은 그 윗쪽에 조선 초대 통감이자 식민지화의 원흉이던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사당인 ‘박문사’를 세우며 조롱했고, 장충단 자체도 1910년 없앤 후 1920년 무렵엔 공원화하고는 상하이 사변에 전사한 일본 군인들인 이른바 ‘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이도 모자라 러일전쟁 당시 사령관이자 메이지 천황이 죽자 그 뒤를 따라 할복했다는 노기 마레스케(乃木神社)를 기리는 노기 신사가 서는가 하면 통감관저 터에 조선공사를 지냈던 하야시 곤스케의 동상이 서기도 했다. 조선 건국부터 부여받은 남산의 신성한 역할을 생각한다면 일본은 남산을 그야말로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유린한 셈이다.

남산 기슭에서 시작된 국권 침탈의 흐름은 결국 나라를 집어 삼켰고, 남산 아래까지 내려가 일본인 중심의 번화가를 탄생시켰다. 일본인들은 지금의 충무로에서 명동에 이르는 자리를 중심지를 뜻하는 혼마치(本町)라 불렀다. 그리고 혼마치를 포함해 일본인 거주지는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북쪽과 구분해 ‘남촌’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지금은 남산골 한옥마을이 돼 있는 충무로 옆 근처 자리는 헌병통치의 중심지였던 헌병사령부 터다. 충무로라는 이름은 일본을 무찌른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 붙인 것이어서 마치 혼마치였던 시절을 지우려는 듯한 인상도 준다. 하지만 명동 일대는 사실상 일본 관광객에게 점령당한지 오래고 최근엔 중국인도 가세하고 있어 옛 풍경이 이러했을까 하는 심정이 들기도 한다.

 

Web_19_불야성명동거리늘 불야성을 이루는 명동 거리 풍경

Web_03_일본어가능합니다안내명동 거리에서 쉬 볼 수 있는 안내문 “일본어 가능합니다(日本語できます)”를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참 묘해진다.

Web_26_한일합방직전의한국주둔헌병대본부한일 합방 직전에 찍힌 한국 주둔 헌병대 본부. 이후 조선 헌병대 사령부이자 현재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

 

그렇다면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이 가운데 어떤 자리에 서 있는 걸까? 다름아닌 한국통감부와 조선총독부가 있던 자리다.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숭의여자대학은 경성신사 터였고, 또 그 옆에 자리한 리라초등학교를 지나면 있는 사회복지시설 남산원 입구 근처엔 노기 신사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남산, 일제의 근거지에서 독재의 근거지로
조선총독부의 첫 자리였던 지금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는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의 흥례문을 철거(1916)한 자리에 새로운 청사를 세워(1926) 이전하면서 이듬해 은사기념과학관(恩賜記念科学館)이라는 이름을 단 과학전시관으로 바뀌었다(1927). 은사기념과학관이란 이름에 담긴 은사(恩賜)는 ‘임금이 은혜로써 신하에게 물건을 내려주던 일’을 뜻하는 표현으로, 여기서 임금이라 함은 일본 천황을 뜻했다. 동아사이언스 기사(<83년 전만 못한 서울과학관… 초라한 한국 과학의 그림자>, 2010.04.11)에 따르면 기록에 제반 경비로 5만 엔을 하사했다고 나온다. 일본 요미우리 TV 아나운서인 미치우라 토시히코가 소속 방송국 아나운서 공식 웹페이지에 싣고 있는 신 언어 사정(新 ことば事情) 코너 2012년 7월 31일자 글에 따르면 이 시기 일본인의 임금이 소년공이 10엔, 대졸 초임자와 숙련공의 경우 50엔이고 요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엔이 1만 엔(약 10만 원) 정도라 하니 당시로서는 꽤나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던 셈이다. 이 과학관은 광복 이후엔 국립과학박물관이 됐다가 1948년 국립과학관이 됐으나, 1950년 한국전쟁을 겪는 통에 전소됐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처럼 남아 있던 이 자리에, 역시 전쟁통에 정동 청사가 폭파돼 임시 방송 체제를 유지하던 KBS(중앙방송국)이 1957년 사옥을 지어 올렸다.

하지만 마치 터가 문제였다는 듯 KBS는 몇 년 안 가 또 한 번 군홧발에 짓밟힌다. 명색이 민주주의를 내걸고는 종신집권을 위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가 4·19라는 시민혁명을 얻어맞은 이승만이 하야를 선언하고 도망간 지 1년여 만인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의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군인들이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이날 새벽 4시경 KBS 남산 사옥에 총을 들고 들이닥친 군인들은 숨어 있던 아나운서를 끌어내 혁명의 당위를 설명하는 문서와 6개항으로 이뤄진 혁명공약을 발표케 한다.

폭력으로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박정희 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깡패 소탕령을 내려(1961.05.21) 정치 깡패로 소문난 이정재를 비롯해 폭력배들을 거리에 끌고 다니며 망신준 뒤 처형(1961.10.19)하는가 하면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몰락한 원인이었던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물어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을 역시 교수형으로 죽인다. (1961.12.21.)

이러한 일련의 사건 사이에 국가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중정)이 들어서는데(1961.06.10), 재밌는 건 바로 한국통감부 통감관저 자리 옆에 본관을 뒀다는 점이다. 나라를 망하게 하고 백성을 엄혹한 식민통치로 몰아넣은 경술국치의 장소 바로 옆에 독재 정권의 유지를 위해 납치, 고문, 용공 및 간첩 조작, 도청 등 온갖 폭압적 수단을 동원하는 기관을 세웠다는 점은 박정희 군사 독재의 의식적, 역사적 맥락이 일제 강점기와 강하게 연결돼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중정의 설립은 박정희와 함께 군사정변을 일으켰던 김종필이 주도하였으며, 이후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은(1979.10.26) 혼란기를 틈타 또 다시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세력의 손으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되어 명맥을 이어간다. 중정과 안기부 시기에 ‘남산’은 그 이름 자체로 공포 정치의 대명사였으며, 수많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본관 건물과 주변에 자리한 부속 건물들로 끌려들어가 끔찍한 취조와 고문을 당했다. 이 건물들에서 인민혁명당 구성원들을 북한 지령으로 국가사변을 기획했다는 혐의로 기소해 사형판결 확정 후 18시간 만에 처형한 제2차 인혁당 사건을 비롯해 동백림 사건, 최종길 타살 사건, 민청학련 사건, 김대중 납치극,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 다양한 인권침해 사건이 제조되었다. 이 기관들에서 정보권력, 집권자의 칼, 공포정치 구현의 선두에 섰던 부장들 상당수가 좋지 못한 말로를 걸었다는 점도 웃지 못할 비극이다.

1995년 안기부가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안기부에 관련한 일부 건물은 폭파돼 사라지고 일부 건물은 서울시 소유가 되어 용도가 바뀌었다. 본관 건물이었던 곳은 서울유스호스텔이 되어 젊은이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고, 행정과 고문, 감청 등이 진행된 건물들은 서울소방방재본부, 서울시균형발전본부, TBS, 대한적십자사 등으로 쓰이고 있다. 옛 중앙정보부장 관저는 문학의 집으로 바뀌었다. 경술국치의 현장인 한국통감부 통감관저 터를 지나 중정과 안기부 건물로 굽이져 들어가는 진입로 벽에는 공포에 질려 끌려 들어가 모진 고문을 당했던 민주화 인사들의 고통을 기억하자는 듯 세계인권선언문 전문이 걸려 있다.

안기부는 이후 국가정보원으로 개편되었으며, 최근들어 원초적 본능을 못 이기고 대선 개입을 비롯한 권력형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

 

Web_12_서울유스호스텔(옛중정·안기부본부건물)중정과 안기부 본부가 자리하고 있던 건물. 고문의 현장을 시민 교육장으로 활용하자는 주장이 많았으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이곳을 유스호스텔로 바꾸었다.

Web_14_서울유스호스텔진입로-세계인권선언문동판민주화 운동을 하다 잡혔던 이들이 치를 떨며 끌려들어가던 진입로 벽에는 현재 세계인권선언문이 걸려 있다.

Web_15_안기부이전준공표지판안기부가 있던 자리였음을 보여주는 표지석. 하지만 ‘무엇’이 이전했다는 내용은 없고 오로지 옮겼다는 표시만 남아있다.

 

‘안기부 터’가 된 서울애니메이션센터 건물…… 외벽에 박정희의 글씨가 있는 이유
박정희는 친일 경력과 좌익 경력을 덮기 위해 이승만 이상으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국시로 삼았고 대중문화를 철저히 검열·통제했다. 만화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여기서도 중정이 나서는 대목이 있다. 1959년 등장해 인기를 끈 한국 SF 히어로 만화 「라이파이」의 작가 김산호는 1960년대 중반 미국으로 건너갔다, 표면적인 이유는 “선진 만화기술을 배우기 위해”였지만 실제로는 중앙정보부에서 라이파이와 인민해방군과 싸우는 장면에 그려진 붉은 별을 보고 용공사상이 있다면서 1주일을 조사한 데에 환멸을 느껴서였다고 전한다.

김산호는 오마이뉴스와의 2002년 인터뷰(<“단군모습, 신선 아닌 씩씩한 기마족”>, 오마이뉴스, 2002.08.22)에서 “몇 십 년이 흘러 서울애니메이션센터와 우체국 등에서 내 그림을 전시하고 우표에 사용한다고 해서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주변을 방문했는데, 그 자리가 옛 안기부 터였다. 나를 조사한 안기부 옛 터에서 내 만화 원판을 전시한다고 하니 기분이 묘하더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인터뷰에서는 안기부라 나오지만 1966년이라는 시기상으로는 중정인데, 당시까지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에 KBS 사옥이 있었던 터라 김산호가 조사를 받았던 곳은 지금 유스호스텔이 있는 중정 본관 또는 그 주변 건물일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울애니메이션센터 건물도 1986년부터는 안기부 관할이 되어 취조 장소 등으로 쓰였다. 아닌 게 아니라 서울애니메이션센터 관계자와 입주인들 사이에서는 귀신 목격담이 매우 흔하다. 당직자들은 밤이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과 고문 받는 소리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 일대가 중정에서 안기부 건물로 쓰이는 동안 각 건물에는 본부에서 연결되는 지하통로가 있었다는데,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도 그 통로가 연결돼 있다는 ‘소문’이 있지만 현재 지하실이 폐쇄돼 확인할 길이 없다.

KBS 사옥에서 안기부 시기 사이에 이 자리는 국토통일원이라는 기관이 쓰기도 했다. 국토통일원은 지금의 통일부다. 국토통일원은 1969년 3월 1일 발족한 이래 자유센터 일부 건물을 임대해 써 오다가 KBS가 여의도에 새 건물을 지어 1976년 10월에 옮겨가자 같은 해 11월 29일 그 빈 자리로 이전해 왔다. 박정희는 이듬해인 1977년 2월 1일 이 건물 바깥 벽에 ‘國土統一(국토통일)’이라 쓴 친필 휘호를 가로 1.5m, 세로 4m 짜리 화강암에 새겨 붙이고 제막식을 열고 5·16 군사 정변 당시 새벽에 6개항으로 이뤄진 혁명공약을 처음으로 내보낸 제7스튜디오를 순시했다. 당시 국토통일원은 스튜디오를 혁명 당시 형태로 보존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박정희는 나라를 빼앗은 그 순간을 되돌아보며 희열을 느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국토통일원이 1986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로 이전하면서 이 건물은 안기부 관할 건물로 쓰이다 1999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들어서고야 비로소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이 건물에 붙어 있는 박정희의 육필은 현재 새로운 구조물에 가려 잘 보이진 않지만 입구 옆 담벼락 자리에 올라서 보거나 리라초등학교 쪽에 올라 건물 벽 사이를 찾으면 볼 수 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국토통일원 측은 “남산을 내왕하는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통일의 염원을 되새기게 하는 남산의 명물이 될 것”(<원형보존된 혁명방송실>, 동아일보, 1977.02.02)이라 밝혔다 한다. 현재 센터의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건물에 가려 그늘 속에 묻혀 있는 모습이 독재정권기의 음울한 유산다운 면모로 보이기도 하니 그 또한 기묘하다.

 

Web_06_국토통일이젠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지만, 서울애니메이션센터 건물에는 박정희의 육필이 큼직하게 남아 있다. 이곳이 국토통일원 자리였음을 보여주는 국토통일 글씨

Web_07_국토통일리라초등학교 쪽으로 올라가 벽 사이를 찾으면 글자를 볼 수 있다.

Web_27_국토통일원(대한뉴스제1120호)1977년 2월 4일자 대한뉴스 제1120호에는 국토통일원에서 열린 제막식 풍경이 나온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출범

질곡의 역사를 끌어안은 채 시민을 맞이한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서울시가 출연한 서울산업진흥재단의 첫 중소기업 지원 사업을 통해 1999년 5월 3일 설립됐다. 말하자면 서울시가 설립을 맡고 서울산업진흥재단이 책임운영을 맡은 형태다. 이 때문에 출범 당시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정확한 명칭은 ‘서울산업진흥재단 서울애니메이션센터’였다. 재단이 2005년 3월 서울산업통상진흥원으로 바뀌어 SBA라는 영어 약칭을 얻자 ‘서울통산산업진흥원(SBA) 서울애니메이션센터’라는 명칭이 쓰였다. 서울통상산업진흥원이 2014년 다시 서울산업진흥원으로 사명을 변경하였기에 현재는 ‘서울산업진흥원(SBA) 서울애니메이션센터’라는 명칭을 쓴다. 「모래시계」 김종학 PD의 제이콤에서 애니메이션 본부장으로 일하며 애니메이션 「망치」 제작을 준비 중이던 김병헌이 공개 채용을 통해 기술지원부장이라는 직함으로 첫 수장 역할을 맡았고, 컴퓨터 아티스트 최은경이 과장 직책으로 팀장을, 한국에 자생한 1세대 오타쿠로 정평이 나 있던 김세준이 자료 담당을 맡아 출범했다.

 

Web_04_서울애니메이션센터전경서울애니메이션센터 전경

 

당시의 보도자료를 살피자면,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한 종합적인 지원과 육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산업에서 문화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복합 다기능 지원센터’를 표방했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자료에서 작품 제작에서 판매까지 진행할 수 있는 비즈니스 지원실과 전문도서관 기능을 담은 정보실, 만화·애니메이션 문화저변 확대에 기여하는 교육실, 신진 기획·창작 인력의 발굴과 육성을 위한 창작지원실로 구성돼 있다는 한편으로, 개장 이후 상설 기획전시를 꾀하고 국가별 애니메이션 영화상영전, 만화·애니 제작 지원, 남산입구에서 김구광장까지의 남산 소월길을 애니로드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는 독립 만화지 『화끈』 팀과 「아치와 씨팍」 제작사 조범진팀 등 다양한 만화·애니메이션 창작팀/창작사가 개장 초기 입주하였으며 애니충격전을 비롯해 전 세계의 중단편 신작 애니메이션을 만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제가 진행되었다. TV에서 보기 어렵거나 극장에서 빨리 내려가기 일쑤인 애니메이션들도 비교적 오래 틀어주었다. 이후 각자 만화계에서 한 족적을 남기게 되는 작가들인 최규석·석정현·변기현 작가가 ‘삼단변신’이라는 이름으로 입주해 작품활동을 하기도 하였으며, 극장판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을 제작한 ‘연필로 명상하기’도 이곳에서 작업을 진행했다. 만화 도시를 표방한 부천이 1998년부터 부천만화정보센터를 세워 만화 지원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지만, 부천이 만화 창작지원실을 개관한 시기가 1999년 9월이니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시기상으로 조금 더 앞선다.

그런데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의 개장 과정은 상당히 고난의 연속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서울형 산업 육성 정책으로서 애니메이션 산업 지원을 검토하기 시작한 게 1996년 3월인데 세부 운영 계획과 운영위원회, 실무위원회가 구성된 게 1998년 7월. 센터의 마스코트 캐릭터 ‘애니동자’와 제호가 나오고 부서별 운영계획이 수립된 게 1999년 1월이다. 다시 말해 검토를 시작한 시기와 실제 업무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기간과 개장 시기가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어 준비 과정이 쉽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이와 관련해 수장 노릇을 했던 김병헌에 따르면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고건 시장(1998.07~2002.06 제31대 서울시장 재임)이 이른바 ‘서울형 사업’으로써 새로운 고부가가치 도심형 사업인 애니메이션을 꼽고 비어 있던 안기부 건물을 활용케 하자 결정을 내렸는데, 막상 사람을 뽑아놓고 준비를 시켜놓고는 개장 일정을 잡는데 다소 뜸을 들였다고 한다. 결국 업계와 학계, 전문가들이 전략적으로 어떤 것을 할 것이라는 점을 브리핑하여 개장을 관철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이름이 ‘서울애니메이션센터’인 탓에 개장 행사부터 시작해 만화가들의 참여를 끌어내기가 쉽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기술직책부장이라는 수장의 직책명에서 볼 수 있듯 당시 서울시가 지원하고자 하는 방향 자체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서 마치 기계 부품처럼 맞춰 돌아가 고부가가치 결과물을 생산해낼 수 있다는 식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곳이 서울산업진흥원 산하로 설정돼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당시 서울시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하며, 실무단에서는 실질적으로는 만화 정책들이 많고 도서관과 창작 지원실 등도 있다는 식으로 만화가들을 설득했다고 했다. “만화라는 말을 뺀 채 서울애니메이션센터라고 부르는 데 대한 만화계의 아쉬움을 해소해,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생산적 결합을 이끄는 문제도 털어내야 할 숙제다”(<안기부 옛 터가 한국만화 새 터로>, 한겨레, 1999.12.21)라는 기사 내용에서 당시 만화계의 분위기와 우려를 엿볼 수 있다.

한편 현재 센터 본관 건물 왼편에 자리하고 있는 만화의 집 자리엔 본래 미국 유명 시사만화가 래넌 루리(Rana-n.R.Lurie)의 박물관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이 기획 자체는 고건 시장보다 앞선 1997년 조순 시장 시기에 언론을 통해 발표되었는데, 이 때 계획은 아예 현재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 전체를 ‘서울 만화광장’으로 지정하고 래넌 루리 만화관을 만들자는 형태였다. (<루리 만화전시관 등장>, 매일경제, 1997.06.06) 래넌 루리가 1997년 5월 9일 조순 전 시장을 만난 자리에서 제안해 약속됐다 하고 1997년 10월 28일 시민의 날에 맞춰 개장을 추진하였지만, 조순 전 시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직무대행을 맡았던 강덕기 서울시장 직무대행이 1997년 9월 22일 백지화를 선언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백지화 이유는 “루리 만화관 백지화 결정은 ‘국내에 우리 만화와 만화가들을 위한 변변한 공간이 하나도 없는데 외국 만화가를 위해 전시장을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는 여론을 수용한 것”(<서울시 “루리 만화관 없던 일로”>, 동아일보, 1997.09.23)이었다고 한다.

이후 고건 시장 시기에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개관을 했고, “무형 자산을 활용하는 프로젝트들을 진행하면 시에 큰 효과가 난다”는 설득으로 센터가 본관 옆 건물의 관리 권한을 얻어냈다. 센터는 이에 따라 해당 건물을 ‘만화의 집’으로 정하고 만화 박물관과 역사관, 도서관을 차려 넣고 한국만화가협회와 우리만화발전을위한연대모임(현 우리만화연대) 등 만화가 단체들을 유치했다. (1999.12) 현재 서울애니메이션센터와 그 옆에 자리한 만화의 집이 자리한 구도는 이렇게 완성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산업’ 기조만 강조 말고 조금 더 문화적, 역사적 공간으로 쓰이기를
어찌 보면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지난 역사의 아픈 상처들을 고스란히 안은 건물을 어떻게든 활용하려 한 행정적인 필요와 1990년대 후반 “애니메이션 한 편 잘 만들면 자동차 몇 만대”로 대표되는 굴뚝 없는 산업 추진 기조가 맞물려 탄생한 이질적인 공간이다. 서울애니메이션센터는 시작부터 ‘문화’라기보다 ‘산업’에 방점을 찍었고, 행정 측의 이해 부족으로 문화의 장르 구분도 다소 모호하게 출발한 여파가 지금까지도 어느 정도는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최근 재미랑과 재미로를 비롯해 센터 주변으로 공간을 확장해 나가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 점은 많이 긍정적이다.

 

Web_16_재미로재미로

Web_18_재미로_카툰앤아트마켓명동역에서 남산으로 올라오는 골목길 일대를 재미로라는 만화 거리로 지정해 만화 캐릭터 등을 장식해 놓고 있다. 명동역의 광장에는 카툰&아트 마켓이라는 이름으로 예술인들의 장터를 열기도 한다.

Web_17_재미랑전시 공간과 캐릭터샵 등이 들어서 있다.

 

다만 재미로를 비롯해 주변 공간을 만화와 애니메이션 테마 거리로 명확하게 꾸미기란 서울시 측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성과를 내가 쉽지 않다. 대부분 건물주가 아닌 일개 임차인들에 지나지 않는 상인들에게 협조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SICAF가 2013년부터 센터 본관을 비롯해 주변 명동 일대를 활용해 열리고 있고 재미로와 재미랑이란 공간 또한 적극 활용하려 하고 있지만 여전히 일대 거리의 맥락이 만화스럽다고 읽히진 않는 까닭이 다른 데 있진 않다. 게다가 명동 일대가 왕년의 혼마치 시절을 떠올리고 싶다는 듯 일본인 관광객들 중심으로 상권이 바뀌고 있는데다 최근엔 중국인 관광객들도 급증하고 있는 와중이라 다소 구석진 지점까지 문화 공간으로서 일반 시민들에게 널리 회자되기란 참 쉽지 않다.

그렇다면 발상을 바꿔 역사성과 맥락성을 함께 전달할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의 상설 운용 등으로 방향을 바꾼다면 어떨까. 서울애니메이션센터와 남산 주변만큼 이야깃거리를 눌러 담고 있는 공간도 드물다. 그렇다면 단지 공간을 산업 지원 측면이나 저렴한 임대 차원에서만 활용하기보다 오히려 역으로 공간이 담고 있는 역사성으로 주변 뿐 아니라 사방 천지의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그 전달 수단으로서 만화와 애니메이션 장르를 적극 활용하는 편이 이 공간을 좀 더 의미 있게 쓰는 방식이리라 본다. 끝내 가리지도 버리지도 못한 센터 본관 벽면의 박정희 육필을 비롯하여, 이 공간과 주변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아픔과 이야깃거리들이 세월과 함께 풍화해간다면 못내 아쉬울 것이다. 현재 센터 본관 건물이 1957년에 지어졌으니 근대문화유산 지정 등은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센터 건물과 주변이 좀 더 역사적 문화적 견지에서 해석될 여지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여기엔, 그만한 이야깃거리들이 있다.

Web_08_태권V와N서울타워서울애니메이션센터 담벼락 자리에 서 있는 태권V

 

<후일담>

1. 드라마 「커피 프린스 1호점」의 남 주인공 ‘한결’(공유분)의 집으로 등장했던 곳이 만화의 집 옥상에 있다. 건물 안전 문제 등으로 말미암아 세트는 철거되어 있지만 드라마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 올라가서 일대를 내려다보는 것도 좋다.

Web_10_만화의집옥상-커피프린스촬영터

 

2. 서울애니메이션터 둘레는 담장이 아닌 철제 구조물이 설치돼 있고 제호와 캐릭터들이 붙어 있다. 퐁피두 센터의 구조물을 따 왔다고 한다.

3. 남산 하면 떠오르는 음식은 돈까스. 왜성대가 있던 곳 답게 일본인들이 즐겨 먹는 일본식 개량 서양 음식이 명물로 남았다. 이곳엔 1박 2일과 무한도전 등 유명 TV 예능 프로그램에도 등장한 바 있는 돈까스 전문점들이 서로가 원조라며 즐비하게 서 있다. 중앙정보부장으로 악명을 떨치다 형체조차 찾을 수 없는 죽음을 당한 김형욱의 생전 별명이 남산 돈까스였다는 게 살짝 호러다.

Web_20_남산돈까스

 

4.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담 아래엔 한국통감부, 조선총독부 터라는 표식과 김익상 의사 의거 터라는 표식은 있으나 그 이후 KBS와 안기부 터에 관한 표식은 담고 있지 않다. 옛 안기부와 중정 본부가 있던 유스호스텔 자리에 이명박 전 서울시장 명의로 안내가 적혀 있을 뿐이다. 아이와 부모는 물론 바로 옆의 학교에 다니는 여러 학생들을 위해서도 이 공간을 거쳐 간 곳들의 중요한 흔적을 빠짐 없이 남길 필요가 있다고 본다.

Web_13_서울유스호스텔표지석 Web_09_김익상의사의거터표지석 Web_09_한국통감부·조선총독부표지석

 

5. 남산 케이블카는 매년 4~5월 무렵이 절경이다. 그런데 남산이 벚꽃 구경하기 좋은 곳이 된 데에도 아픈 역사가 있다. 일본인들이 땅을 사실상 빼앗아 왜성대 공원과 한양공원을 만들고 벚꽃 수백그루를 옮겨 심었는데 이게 퍼져서 지금 형태가 됐다고 한다. 반대로 애국가에도 나올 만큼 유명한 ‘남산의 저 소나무’ 풍경이 지금은 상당히 줄어 있는 상황이다.

6. 이승만은 광복 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올랐으나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아닌 임금, 황제와 같은 위치를 꿈꿨다. 이승만은 인왕산으로 쫓겨난 국사당을 제 자리에 돌리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자기 아호를 딴 ‘우남정’을 세우고 그 앞에 자기 동상을 세웠고, 임금의 자리였던 경복궁 경회루에 역사와는 상관 없는 개인 낚시터 하향정을 세워 아내와 노니며 종신 집권의 야욕을 불태우다 3·15 부정선거(1960)를 저지른 끝에 4·19혁명(1960)을 맞아 하야 성명을 내고 쫓겨난다.

이 때 이승만 동상은 시민들 손에 끌어내려져 새끼줄에 묶여 끌려다녔는데,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를 조선 공사 하야시 곤스케 동상과 함께 묶어 “남산은 살아 있는 자의 동상을 용납하지 않았다”라 촌평한다(한겨레21 제777호 <돌아온 산, 남산> 중). 한편 전우용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호센터 교수는 팔각이 오래도록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도형이었다면서, 이승만이 국사당 자리에 팔각 정자를 지어 자신의 아호를 붙임으로써 신성을 부여하려 한 것에 관해 “빨리 죽어 귀신이 되라는 뜻일 수도 있음을 알기는 했을까”라 말하기도 한다. (<서울은 깊다> 중)

한편 목멱사 터였던 남산 꼭대기는 이승만 정권기 국회의사당 신축부지로 선정되어 1959년 5월 15일 기공식을 하였으나, 박정희가 군사정변을 일으키며 백지화했다. 현재 그 꼭대기에 서 있는 N서울타워는 본래 명칭이 ‘서울 남산 전파탑’으로 남산의 높이와 탑의 높이를 합쳐 해발 고도 479.7m전파를 뿌리기 위한 안테나와 그 아래 전망대, 회전 식당을 비롯해 각종 편의시설 등을 갖추고 1980년 10월 일반에 공개됐다. 전망대에선 날 맑은 날이면 북한의 개성까지 보인다고 한다.

7. 남산의 명칭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충돌하고 있다. 하나는 궁궐 남쪽에 있다 하여 남산이라 불렀다는 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본래 남(南)이라는 한자가 방향으로서의 남쪽이 아니라 나 또는 집, 도성을 기준으로 할 때 앞쪽을 뜻하므로 ‘궁궐 앞쪽에 자리하고 있다’하여 앞 산이란 의미를 담아 남산이라 불렀다는 설이다. 같은 맥락에서 남산의 우리말 고어 표현인 ‘마뫼’의 ‘마’가 ‘앞’인지 ‘남’인지에 관해서도 설이 갈린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도읍을 정할 당시 풍수지리에 입각해 남산을 집 터 맞은편(앞쪽)에 서는 산을 일컫는 안산(案山)으로 삼았다는 점과 전국에 남산이란 산 이름이 서른한 개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남(南)=앞이란 설도 그리 신빙성이 없지는 않아 보인다. 실제로 사방신 중 청룡과 백호의 배치는 ‘좌청룡’에 ‘우백호’지만 기준점이 남쪽이기에 동쪽이 청룡, 서쪽이 백호가 된다.

8. 남산은 조선 건국 당시부터 매우 신성한 산이었지만 임진왜란 때엔 관우가, 고종 시기에는 제갈공명이 들어와 앉았다. 임진왜란 당시 출정한 명나라 장수들이 군신으로서 관왕을 모신 사당을 세우고 선조에게 참배를 요구한 곳이 남관왕묘(남묘), 선조의 참배 이듬해에 동대문 바깥에 새로 세운 곳이 동관왕묘(동묘)다. 고종 대에 이르러서는 북묘와 서묘(숭의묘)가 더 서고, 관왕을 관제로 올림으로써 이들 묘는 관왕묘에서 관제묘가 되었다. 서묘와 비슷한 시기에 제갈공명을 모신 와룡묘도 등장했다.

9. 2014년도 SICAF에서 특별전 작가로 초청받아 재미로 근방에서 전시를 연 일본의 대표적 공포 만화가 이토 준지는 행사 관련 인터뷰에서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라는 초대형 망언(?)을 남긴 바 있다. 행사의 주무대였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건물과 그 주변이 유명한 심령 스팟이라는 걸 알았다면 공포만화 작가로서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10. 2015년 2월부터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연재 중인 강풀의 「무빙」은 16화부터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 무렵의 안기부를 무대로 삼고 있다. 배경미술에 등장하는 건물이 바로 이 시기의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자리.

서찬휘

만화 칼럼니스트이자 만화정보저널 사이트 '만화인' (http://manhwain.com) 운영자. 글쓰기와 만화를 좋아하던 프로그래머 지망생이었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만화와 얽힌 글을 쓰면서 만화 정보를 묶어내는 컴퓨터 프로그램들을 짜고 있다. 자생한 1.5~2세대 한국형 오덕으로 덕업일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내츄럴 본 프리랜서. 칼럼, 연구, 비평, 강의, 방송, 캘리그라피 등 만화와 관련해서는 오는 의뢰 안 막는 자판기형 용병의 삶을 구가 중이다. 최근엔 열심히 애 아빠로 클래스 체인지 시도 중. 봄이야, 힘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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