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여덟 ‘남자 과부’의 과부촌 엿보기 <녹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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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열애뎐-녹두전>은 ‘장가가기 싫은 사내와 기생이 되기 싫은 처자’의 이야기다. 17세기 조선, 한 사내가 도망을 친다. 18세인 자신과 고작 다섯 살밖에 안된 신부를 결혼 시키려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가출한 것이다. 그러다가 한 소녀를 만난다. 소녀 ‘동주’는 어려서부터 기생 교육을 받으며 기방에서 자랐으나 기생이 되기 싫어 가출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사극 드라마처럼 묵직하게 느껴지지만 <녹두전>은 여장 남자가 주요 설정인 코미디다.

 

그림1(녹두전)

 

아버지가 보낸 추적자를 따돌리기 위해 사내는 신분을 감추고 18세 젊은 과부 ‘녹두’로 변신한다. 이왕 변장 하는 것 여자로, 여장을 할 바엔 쉽게 안 건드릴 과부로, 어차피 과부 행세를 할 거라면 과부촌에 숨자고 결심한 것이다. 녹두는 과부촌에 숨어들다가 여인들의 목욕을 훔쳐보는 변태를 잡은 공으로 연화기방에 머물게 되는데 보름 전 마주친 적이 있는 동주가 있는 곳이다.
동주는 처음 화초를 올리고 정식으로 기생이 되려 한다. 그러나 그 첫 상대가 하필이면 이미 한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던 ‘변태’ 박 영감이다. 우연히 이 이야기를 알게 된 녹두는 동주를 그냥 둘 수 없다. 결국 자신의 위치가 발각될 위험을 무릅쓰고 집안의 권력과 돈을 써서 동주를 돕는다.
녹두와 동주는 서로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둘 다 자기를 구속하는 운명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운명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녹두는 도망쳤고 동주는 받아들인다. 동주는 도망친 녹두를 한심한 겁쟁이라고 생각한다. 사내들에게 웃음을 팔며 살아야 한다고 평생을 배웠는데 어찌 다른 인생을 꿈꾼단 말인가. 어디로 도망치고 도망친다 한들 무엇이 변하겠는가. 동주의 태도는 얼핏 적극적으로 보이지만 팔자에 따라 몸을 맡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녹두는 바꿀 힘이 없어 도망은 쳤지만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바꾸어 낸다. 삶에 대한 이 다른 태도가, 또 녹두와 동주에게 숨겨진 이야기들이, 두 남녀를 엇갈리게도 이어지게도 할 것이다.

 

그림2(녹두전)

 

<녹두전>은 작가 혜진양의 전작들에 비해 훨씬 단단해졌다. 작가 혜진양의 전작 <미호 이야기>나 <한 줌 물망초>는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액자를 액자에 담은 다소 복잡한 구성 때문에 어렵다는 지적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혜진양은 모든 등장인물마다 숨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각자 따로 떨어진 것 같았던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것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그 재능이 잘 드러난 것이 <미호 이야기>와 <한 줌 물망초>로 이어지는 전생과 인연에 대한 이야기다. <녹두전>은 스토리 라인이 뚜렷하고 구도가 선명하다. 과한 복선을 간결하게 정리함으로써 작품에 힘이 생긴다. 그러면서도 혜진양이 전작에서 보였던 큰 장점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림체도 더욱 깔끔하고 예뻐져서 내놓았던 작품들 중 정점을 찍는 느낌이다. 이제 겨우 두 번째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고 앞으로 나올 이야기가 더 많지만 <녹두전>은 혜진양 표 만화가 꽃피우기 시작하는 전환점이 되리라 기대한다.

동주를 양녀로 들이면서 두 살 차이의 계모와 딸이 된 두 주인공 녹두와 동주가 이어갈 달달한 이야기가 중심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잔재미가 기대되는 것은 인물들의 뒷이야기다. 녹두를 돕는 황태는 어떤 인물인지, 녹두네가 어느 정도의 권력이 있는 집안인지, 동주는 왜 기방에서 자라게 되었는지, 기방을 운영하는 행수인 백설기와 고사리, 매화수 사이에 숨은 이야기들이 어떻게 엮이고 풀어질지 흥미진진하다.

그림3(녹두전)

 

<녹두전>은 등장인물들의 이름만으로도 ‘깨알 재미’를 선보인다. 전녹두와 동동주는 이름만으로도 이미 찰떡궁합. 녹두는 숨어 지내야 하니 가짜 이름도 하나 짓자고 결심하는데, 음식 이름으로 지으면 오래 산다며 주막에서 나온 음식으로 우연히 지은 이름이 ‘녹두’와 ‘황태’다. 배경이 과부촌이자 기방이니 여자 인물이 많은데 모두 음식 이름이다. 백설기, 임오이, 박열무, 고사리 등이다. ‘매화수’에 ‘이슬’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작가는 아마 애주가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가장 즐기는 술은 물론 ‘동동주’겠지만.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인물의 이야기만큼이나 이름이 궁금하다.

이대연

출판사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만화책 사는 것이 거의 유일하게 취미. 웹툰에서 다음 이야기를 먼저 만나보시라는 꼬임에 빠져 핸드폰으로 결제 한도까지 가봤음. 최근엔 마블과 DC코믹스를 사 모으면서 월급을 탕진 중. 집에 가져가면 소박맞을까봐 사무실 책상 밑에 고이 모셔 둠. 졸라맨 수준의 실력으로 신티크를 탐내고 있으나 이혼 당할까봐 엄두를 못 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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