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로맨스 < 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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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성장물을 유난히 좋아했던 시절이 있다. 그게 영화든 소설이든 주인공은 대체로 청소년이거나 청년이기 마련이었다. 소설 <데미안>이나 영화 <허공에의 질주>는 이 분야의 대명사였다. 주인공이 겪는 질풍노도의 갈등에 감정이입하고 그 끝에 이른 좌절 또는 깨우침에서 나의 성장을 꿈꾸었나 보다. 때론 장르라는 게 편의적인 구분이라고 여겨지지만 성장물이란 분류는 매우 무모하고, 나아가 무지한 방법이라는 걸 어느 순간부터 절감하기 시작했다.

스토리로 풀어낸 모든 창작이 성장물이기 때문이다. 기승전결이라는 건 주인공이 떠안게 된 갈등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뒤 어떻게 극적으로 풀어내 변화를 이뤄내느냐는 흐름이다. 갈등과 변화의 진폭이 클수록 대중적 호응이 비례하기 쉽다. 이를테면 <명량>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이순신이 마주한 현실과 그의 선택이 치명적인 결과를 예고하고 있다는 쪽으로만 흐른다. 그러다가 막바지에 극적으로 그 위기를 이겨내는데, 그 과정을 한국영화사에 찾아보기 어려웠던 해전의 스펙터클로 보여준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역시 마침내 성장했을 터이다. 아들조차 믿기 힘들었던 자신의 선택과 근거가 거대한 변화를 이뤄냈을 때 이순신의 내부는 훨씬 거대하고 단단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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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물 역시 성장물이다. 사랑이란 감정을 둘러싼 주인공들 사이에 크고 작은 장애물이 생기고 마침내 이를 이겨냈을 때, 그들 자신과 그들의 관계는 한 단계 성장한다. 다만 한 번의 연애(성장)로 인생을 깔끔히 마무리하긴 어렵다. <건축학 개론>이 대표적인 성장 로맨스 아닌가. 차버리든 차이든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결과를 얻어냈다면, 연애는 할수록 더 좋은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HO!> 역시 성장 로맨스의 길로 착실히 나아가고 있다.

로맨스가 야들야들하니 쉬워 보이지만 만들기는 결코 녹록치 않다. 두 남녀가 각기 지닌 본연의 결여점부터 남달라야하고, 이들이 서로 마주치는 충돌지점은 더욱 새로워야하며, 연인이 풀어야하는 공통의 숙제(또는 악당) 역시 차별적이어야 한다. 가장 어려운 지점은 이 세 꼭짓점을 연결해가는 디테일이 능수능란해야한다는 것이다.

<HO!>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세 꼭짓점을 이어가는 솜씨다. 원이 찌질남에서 벽에 부딪혀 깨지고 넘어가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대목들은 마치 로맨스가 아니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앞으로 이 부분은 오히려 약점이 될 수도 있을 듯한데, Ho가 지닌 장애라는 결여에 비해 원이란 캐릭터의 결여는 여전히 모호하기 때문이다. 원이 화자로 등장하고, Ho에 비할 바 없을 정도로 많은 에피소드를 쏟아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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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남은 이야기에서 최대의 관전 포인트이자 이 작품의 고비는 원이 스스로 깨닫는 궁극의 결여가 무엇인지, 그것이 Ho와 어떤 충돌을 빚어낼지에 있을 것이다. 특히 Ho는 청각장애라는 것 말고는 자기 내부에 어떤 갈등을 갖고 있는지 아직 드러낸 바 없다. 원의 통과의례적 사랑으로 등장하는 무진조차 보여준 것이 많은데도 말이다.

장애가 등장하는 사랑 이야기에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헤어짐으로 끝났고, <러스트 앤 본>은 재결합으로 마무리했다. 무거운 분위기가 지속되다가 사랑의 출발로 끝나는 <러스트 앤 본>이 해피엔딩이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절망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러스트 앤 본>은 두 남녀가 각기 지닌 내부의 약점이 무엇인지 명확했고, 그 약점들이 서로에게 어떻게 작용, 반작용을 불러오는지 잘 보여줬다. 여자에 이어 남자가 장애인이 되면서(주먹 쓰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자가 그 주먹을 못 쓰게 됐으니 장애가 맞을 터다) 둘을 잇는 끈의 윤곽을 확실히 드러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는 남자(츠마부키 사토시)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이렇다 할 갈등 지점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 본게임에 들어선 Ho와 원이 어떤 삼각형을 그려나갈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성욱

한겨레신문과 씨네21에서 영화, 연극, 출판 등 주로 문화부문 취재를 한 인연으로 만화잡지 [팝툰]과 씨네21북스 편집장을 하게 됐다. 만화라는 콘텐츠 기획, 제작을 하면서 그 가능성이 매우 큼에도 정작 시장은 작다는 딜레마를 어떻게 풀 수 있을지 숙제처럼 안고 왔다. 현재는 (주) 스토리컴퍼니에서 만화제작을 하는 동시에 (주)롤링스토리에서 한국만화의 북미진출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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