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_ 아버지를 향한 파도: 만화가 윤태호가 한국의 아들에서 아버지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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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호의 아버지 서사
윤태호가 1993년 데뷔한 이후 발표한 많은 만화 중에서도 유독 아버지의 관계가 돋보이는 작품들이 있다. 야후, 이끼, 미생, 파인이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두 글자의 제목을 갖게 되었을 이 작품들을, 나는 윤태호의 ‘아버지 연작’이라 부른다. 아버지 연작의 ‘아버지들’은 주인공에게 근원적 물음이 되어, 행동의 동기를 마련하고 몇 가지 선택지를 던져주곤 한다. 즉 작중의 부자 관계는 윤태호 작가가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는 셈이다. 상기한 작품 안에서 ‘주인공과 아버지의 관계’는 점진적으로 변화하는데, 조금씩 각도가 틀어진 둘의 관계만큼 관계가 그려내는 이야기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구체적인 장면들을 살펴보기에 앞서 관계가 그려내는 서사가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살펴보자.

‘야후’에서 김현의 아버지는 눈 앞에서 사망해 김현이 이해나 극복을 할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이끼’는 류해국의 부친상으로 시작하는데, 류해국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이해 못 할 사람이던 아버지가 그야말로 한 세대 전의 자신이었음을 확인해 나가면서 종국에 모든 일을 해결하게 된다. ‘미생’에서는 아버지는 돌아가셨으나 유사 아버지 – 멘토인 오 과장을 만난 장그래가, 세상을 배우고 한계를 느낀 뒤 함께 대안을 찾는다. 지금 연재 중인 ‘파인’은 미생의 거울상으로, 오희동의 아버지는 살아있지만 대체된 아버지인 삼촌을 따라 불법의 세계를 거칠게 체험하는 이야기이다. 약간은 작위적인 희망 같은 미생의 마무리로 보아 ‘파인’에서는 인간군상이 빚어내는 파국을 조망하게 될 듯 하다.

작중의 ‘아버지관’은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화해 간다. ‘미생’이 다소 대중적이자 가족 중심적인, 개인사를 반영한 예외적 작품임을 참작하더라도 그렇다. 윤태호라는 이야기꾼이 일종의 반골 기질을 발휘하는 대상의 중심에는 항상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었지만, 최근작 ‘파인’에서는 추한 욕망들의 장에서조차 삼촌은 오희동에게 믿음직한 아군이자 따르고 배워야 할 인물이다. (글이 발표되는 시점에선 이미 반목을 시작했지만.)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이뤄져 왔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를 복기하기 위해서는 작품들의 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사람 모습을 한 짐승, 야후
‘야후’는 아버지 연작의 첫 작품이다. 주인공 김현은, 일요일 오후 전국 노래자랑을 시청하며 박장대소하는, 촌스럽기 짝이 없는 보일러 수리공인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돈을 아버지의 지갑에서 뻔하게 훔치고선 어떻게 아들을 의심하냐며 부정을 호소하다가도, 아버지가 자신의 기대처럼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내뱉었을 때 없어졌던 돈을 흔들어대는 김현의 위악적인 행위는 비뚤어진 방식으로 관심을 갈구하는 행태이다. 김현의 태도는 이전 세대에 대한 경멸이나 증오보다는 소통의 불가능성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그런 김현의 발악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 마저, 늦은 밤 몰래 방에 들어와 매를 맞은 자리에 약을 발라주는, – 김현이 깨어있다는 걸 알면서도 성공적인 부정의 증명을 위해 피차 자고 있는 셈 치는 – 여전히 낯 뜨거운 행위에 불과했다.

따라서 건물 붕괴 현장에서 눈 앞에서 압사당할 때도, 뻔한 한마디를 던지고 간 아버지에게 김현이 되돌려 주는 말은 “욕이라도 해주고 가란 말이야!” 일 수밖에 없었다. 김현이 이해하는 언어로 아버지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고, 죽어버렸기에 극복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혹자들은 ‘야후’가 두 젊은이를 관통하는 굵직한 역사가 어떻게 개인을 바꿔놓는지에 대한 얘기라고들 하지만, 나는 김현이 한국 현대사의 특정한 자리들을 스쳐 지나가며 끝없이 원초적인 질문과 마주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김현은 애초부터 규정된 사람이었고, 그가 보여주는 일련의 행동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일 뿐만 아니라, 확대된 아버지인 윗 세대 모두에게 말을 건네는 외침이다. 살인과 테러마저 더욱 규모가 커진 채로 벌어지는, ‘뻔한 돈을 일부러 훔쳐서 기어이 혼나고 마는 위악’의 연장이다. 김현이 청계천 지하에 대량의 연막탄을 설치해 공권력을 당황케 하고 모두의 머리 위에서 그들을 비웃는 장면에선 역시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인 수경대장 최윤수는 묻는다. “이게 네가 원한 혼란이냐?”

앞의 요약에서는 생략했지만, 야후를 논할 때 신무학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다. 신무학은 여러모로 김현과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이나,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수완가인 졸부 아버지가 여전히 이해 불가능한 대상일 뿐이라는 점에서 김현과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 이런 소통 불가능이 계급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시사하는 캐릭터라고도 볼 수 있겠다. 촌지를 요구하는 선생이나 선생의 부당한 요구에 비굴하게 고개 숙이는 학생으로 완성되는 학교라는 질서 자체에 아무렇지도 않게 의문을 가지는, 그래서 반기를 드는 김현을 부러워하며 그의 뒤를 쫓는 신무학의 행적은 다시 한 번 독자에게 김현의 행동을 설명해 나가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수경대에 들어가 일시적인 안정을 찾은 김현이 결국 폭발할 것을 암시하면서, 이야기의 중심은 김현과 그를 쫓는 신무학으로 천천히 양분된다. 모자랄 것 없는 부잣집 아들 신무학이 폭력이 난무하는 야생의 세계에서 큰 상처를 꿰매고 나서 “나…달라 보이니?” 라고 물을 때, 그 질문은 사실 김현을 향한 것이었다. 이후에 김현을 수경대에서 발견하고 뒤따라 지원한 뒤 부대 안에서 김현을 만난 신무학은, 고등학교 때부터 겨우겨우 김현의 출발선을 따라잡고 나서야 김현이 출발조차 하지 않았음/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좋았던, 혹은 힘들었던 기억으로부터 안녕을 고하’였으나 도달할 자리는 도무지 발견하지 못했다. ‘안녕’은 다른 한 시절, 세대, 장소를 떠남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에 입장하는 인사말이지만, 불가해한 아버지들과 아들들이 그저 톱니바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최윤수 – 공권력의 동조자이나 또 그 자체는 아닌 – 가 김현과 신무학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작별은 실패한다. 때문에 85년에 고등학교를 다니던, 69년 생 윤태호의 또래였던 두 청춘은 작중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젊은이로 남은 채 윤태호의 과거 안에서 그대로 산화해버린다.

 

음습한 과거를 덮은 이끼
다음은 ‘이끼’다. 지면에서 연재하다 웹으로 옮기게 된 작품이자 본격적으로 윤태호 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알린 작품이다. 야후의 연재가 끝난 2003년 이후 (본인의 다른 작품들을 가뿐히 제치고) 4년 만에 아버지 연작을 잇는 후속작이기도 하다.

이끼의 서사는 야후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아버지를 둘러싼 무엇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을따른다. 주인공 류해국은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아버지가 마지막 생을 보냈던 장소로 향하는데, 불편했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걷어내려 간 그곳에서 신경을 긁어대는 토착민들을 굳이 피해버리지 않음으로써 일련의 사건들이 시작된다.

이끼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음습한 곳을 뒤덮고 있는 비리와 야만을 간직한 원시적인 사회인 ‘시골’은 문명이 이뤄낸 제도와는 다른 역학으로 움직인다. 그야말로 잘 보전된 이전 세대를 대표하는 장소인 것이다. 그 원시 구조의 재생산, 즉 지속 가능한 비리와 착취를 끊임없이 꿈꾸는 이장과 그 뒤를 따르는 젊은 사람들 역시 구세대적 가치의 옹호자이며 대변자이다. 야후가 단절로 인한 세대갈등을 다루었다면, 이끼에서는 조금 더 나아가 구세대 자체가 아닌 ‘구세대가 누리고 원하던 것’으로 조준이 틀어진다. 따라서 류해국의 적들 또한 나이와 관계없이 ‘구세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자들’로 변환되었다.

아버지들이 통과한 시간과 그 시간이 여전히 머물러 있는 곳에서 류해국은 자신의 성격 탓에 약간의 의구심을 품는다. 처음엔 본인이 가진 예민하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성격과 그로 인해 겪게 된 불화들을 소개하며 얼마간 자조 섞인 짜증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작은 의구심이 큰 위화감으로 확대되고, 작은 사건이 큰 사건으로 옮겨가며 진상이 밝혀지는 동력 역시 아버지를 빼다 박은 그 성격이다. 결국 ‘서울’에서 온 타지인 류목형, 류해국 부자에게 천용덕이 세운 ‘시골’은 무너지고 만다.

야후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본인과의 소통에 실패한 아버지가 죽게 되지만, 류해국은 아버지의 행적을 좇다가 자신을 발견하게 된 셈이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무엇을 꿈꾸었을까, 하고 류해국이 신경질적으로 파헤친 자리에는 다음을 생각하며 꼿꼿이 자리에 선 채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가 있었고, 사건은 아버지의 뒤를 이은 류해국의 손에 의해 해결된다.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늦게나마 아버지를 따라잡은 것이다. 류목형은 김현의 아버지처럼 대답 없이 사라지지 않았고, 신무학의 외침처럼 ‘그래도 아버지란 말이다!’라는 ‘사실’이 류해국 본인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아주 약간 틀어진 조준은 이렇게나 달라진 과녁에 꽂힌다.

스릴러물로써는 더할 나위 없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남은 의문은 이끼의 아버지들은 야후의 아버지들과 달리 (선이든 악이든) 완전한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류목형은 비록 실패하고 수많은 사람까지 죽인 적그리스도와도 같은 인물이지만, 후세대가 애초부터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기존 세대의 특성은 천 이장을 비롯한 악인들에게 모두 전가 되어있다. 단순화하자면 세대(가치) 간의 대립은 묘하게 선악의 대결로 이어지고, 우연히도 선한 소수자의 아들이, 아버지를 따르지 않은 이들에게 복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왜 발생했을까? 위악의 탈을 쓰고 관심을 끌어도 여전히 상호이해가 불가능했기에 결국은 답 없이 스러져 갔던 야후의 두 인물과 달리 류해국이 ‘혈육’이라는 이유로 너무도 쉽게 (살해 위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야후의 사건들에 비하면 가뿐히 뛰어넘을 수 있는 장애물로 보인다) 아버지의 자리에 들어 맞는 까닭을 명확히 밝혀내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야후의 두 청년이 그랬듯 류해국은 평행세계를 살아가는 윤태호일 게다. 그렇다면 의외로 대답은 초반부에 주어졌을지도 모른다. 박민욱 검사와의 통화에서 류해국은 부탁한다. “한마디만 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 ‘이끼’는 김현과 신무학을 뒤로하고 살아남고 말았다는 죄책감을 짊어진 작가 자신에게, 그리고 그 ‘아들 세대’ 모두에게 보내는 위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버지가 되어 미생을 쓰다
다음은 ‘미생’이다. 윤태호는 그 이전부터 뛰어난 작가였지만, 미생으로 이뤄낸 공전의 히트로 인해 일약 ‘국민작가’의 자리를 거머쥐게 된다. 이는 한국만화 및 웹툰의 지위를 한층 격상시킨 일이자 만화를 그리느라 지게 된 본인의 빚을 갚게 해준 일이며, 허영만으로 굳어진 ‘한국 대표 만화가’의 이미지를 본인으로 갈아치우는 역대 사건이기도 했다. 인터뷰[1]에서 밝혔던, “지인들과 함께 차 마시는 편한 자리였다. 그런데 문득 사람들이 내 말에 경청을 하는 거다. 예전에는 서로 말 주도권을 안 뺏기려고 경쟁하곤 했는데, 이제는 내가 말하면 다들 말을 멈추고 경청했다. 너무 불편해서 자리를 피했다.”는 일화가 그의 위상을 말해준다.

세속적인 평가 외에도 ‘허영만’의 문하생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그가 ‘허영만’의 이름을 대체할 날이 온 것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미생은 그가 아버지 연작에서 아들이 아닌 아버지의 위치에서 발화하는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 팟캐스트를 통한 인터뷰[2]에서 오 과장도 모델이 있느냐는 물음에 “저 같아요, 그거는. 항상 일 중독에다가. 피곤하고 눈 충혈 되어있고 이런 부분들이.” 라고 밝혔듯 김현(1985~2003)은 류해국이 되어 아버지와 화해하고, 세 아이의 아버지인 오상식이 되었다. 즉 작품 안에서 본인이 ‘그토록 소통을 갈망하던 구세대’가 되었듯이, 현실에서는 ‘미생’의 성공으로 한국 만화가를 대표하며 허영만의 이름을 대신 짊어졌다.

그렇다면 내용의 결은 어떻게 다른가, 작가는 어떤 계기로 삶과 밀접한 사람들을 그리기로 하였고, 그래서 가족적인 가치 역시 담게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겠는데, 이는 앞에서 말했듯 작가 이전의 자연인 윤태호의 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의 역량이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폭넓은 사랑을 받은 데에는 좋은 소재를 선정한 까닭도 있겠지만, 시선의 온도 자체가 달라진 것이 주된 이유로 느껴진다.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주인공인 장그래는 어려서부터 바둑을 배우다 결국 입단하지 못한 채 기원을 나오게 된다. 그 동안 집안은 기울어 있었고 어머니는 앓고 있으며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바둑에 모든 것을 바쳤으므로, 2년간 회사에서 요구하는 덕목을 모조리 소화해 내는 것만이 장그래가 살아남기 위한 길이다. 그러나 장그래는 결국 실패한다.

사회를 죄다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장그래에게 회사가 추구하는 것은 모조리 받아들여야 할 가치이며, 그 중에 발견되는 오류들은 수정해야 할 사항들이지 근본적인 결함 따위가 아니었다. 물론 작중에서 여러 인물이 ‘회사의 일이 과연 나의 일인가’하는 질문을 마주하고 끝끝내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긴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미생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전제에 의문을 품는 것은 배부른 소리일 뿐이다. 그러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2년간의 활약을 하고도 살아남지 못한 장그래가 할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냉정하지만 합리적인 ‘결과’만을 원하는 회사/사회가, 노력으로 결과를 보여준 사람을 내쳤다. 삶을 유지하는 게 너무 어렵고, 시스템은 여전히 오류투성이로 보인다.

‘미생’의 주제는 무겁지만, 전작들의 인물들이 쫓는 거대한 질문의 크기에는 한참 못 미친다. 결국 윤태호가 아버지로서 ‘2세대 김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함부로 폄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먹고 사는 일에 대한 조언이다. 격동하는 현대사를 관통한 김현과 신무학을 지나 류해국이 아버지를 용서하고 나서 한다는 말이, 먹고 살기 힘들다는 얘기라니 너무하지 않은가.

‘독재타도, 민주주의 만세를 부르짖어 자유를 찾는’ 서사가 ‘자유’ 그 자체보다 더 매력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때문에 우리는 자유 위에서 태만하게 먹고 살 궁리나 하며 지루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21세기의 현실은 그러하다고, 인정하고 싶다. 하지만 실상은 그만큼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하다. ‘자유’ 이후에 부르짖던 모든 구호가 ‘경제’로 통일되었음에도, 현재 경제 및 노동 관련 지표들은 ‘OECD’ 기준과 비교하기 부끄러운 수준이다. 비정규직 비율과 청년 실업률은 높아만 가고 노조 조직률과 임금 상승률은 처참하다. ‘미생’은 (‘아버지 연작’ 중에서도 유독 많은 인물을 다루고 있지만) 아버지가 된 윤태호가 다시 세대적 질문으로 돌아와서, 현대사를 지나 커다랗게 일궈낸 가치들 앞에 개인들이 한없이 작아지며, 그간 치른 희생의 결과로써 게으르게 사는 것조차 허용이 되지 않는 ‘너무한’ 지점을 지적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은 윤태호의 주제의식이 흐려진 결과가 아니며, 온정주의를 수용한 부작용도 아니고, 개인이 더욱 작아진 시대가 도래한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의 주제의식을 인정하면서도, 방법론에 대해서는 유효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오 과장은 결국 장그래를 데리고 떠나 회사를 차린다. 등장인물에 대한 작가의 어떤 예의가 느껴지긴 하지만, 너무한 현실에 대한 비현실적인 결론임은 변하지 않는다. 결론의 미진함이 작품의 결을 훼손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살고 있는 모두의 현실적 고민을 받아 적은 작품이기에, 결말에서 다소 작위적인 희망을 안겨주더라도 작품의 궤를 크게 흔들지는 않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결론에서야 살짝 정체를 드러내는 ‘무엇’에 대한 얘기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내 들었기에, ‘야후’와 ‘이끼’에서 등장한 ‘구세대 및 구세대가 추구하던 가치’, ‘이해 불가능하거나 타파해야 할 무엇’들이 화면 밖으로 밀려나 있다는 것이야말로 미생의 비현실적인 결론에 대해 추궁해야 할 지점이다.

일종의 가족적 온정주의를 수용한 탓에, 혹은 가상의 서사가 그리는 역동적인 삶 대신 실제 몸무게만큼의 책임감을 지닌 존재들을 다룬 탓에, 그간 아버지 연작에서 보여주었던 ‘구세대와 타파되어야 할 가치’는 ‘이끼’의 선악 구도에 의해 타자화된 시기를 지나 ‘미생’에 이르러 개인으로는 회자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화면 내부의 악인들은 그저 수많은 범상한 개인 중 하나이기에 무능을 깨닫지 못하거나 양심을 저버린, 어딘가에 있었을 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적 풍경 중 하나에 불과하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숟가락’을 짊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더 이상 악인은 없고, 화면 가장자리에서 피상적으로 언급되는 자본주의 또는 회사라는 시스템이야말로 ‘구세대’의 성취이자 유물이며 끊임없이 개선되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악한 사람으로 등장하는 ‘회사의 이윤을 빼돌린’ 범인 박종식 과장이 적극적으로 시스템에 저항하는 ‘민주 투사’처럼 보이게까지 하는 배경에는 아버지들마저 버려진, 아버지들이 만든 ‘무엇’이 자리한다.

가장 근본적인 갈등이 전작들과 달리 다소 미뤄져 있다는 점으로 인해 ‘미생’은 그간의 아버지 연작과 결이 다르게 느껴지는 지점이 작품이 되어 버렸다. 미생이 대중에게 널리 사랑 받는 이유가 곧 미생이라는 작품이 가진 한계인 것이다. 윤태호라는 텍스트는 정말 본인이 가족을 구성한 뒤로 확연히 돌아선 것일까? 앞에서 작가가 더는 구세대와 투쟁할 필요가 사라지고 ‘너무한 지점’을 지적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 변호를 했다면, 그 방법적 실패에 대한 변론은 어떻게 가능할까?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오토바이를 목숨을 내놓은 채 달리던 ‘김현’에게 세상은 불가해한 것이었고, ‘류해국’은 어쨌든 아무 잘못 없이 순진한 악에 맞섰으나, 철봉에 매달리는 순간 내가 지닌 무게를 실감하고 자신을 도저히 들어 올릴 수 없을 것을 예감하는 ‘오 과장’은 터무니없이 무기력하다. 어쩌면 부친살해의 고전적인 문법을 따라 그의 이름이 서서히 허영만을 대체해가는 모습과 작품 내의 아버지상에 맺힌 컴플렉스가 스러져 가는 모습을 겹쳐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맞서야 할 대상이 나와 관계가 없고 타자화된 상태에서는 그 모든 것을 부수기 수월했으나, 아버지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갈수록 저항의 힘은 약해져 간다. 이는 ‘파인’의 연재 분량이 어느 정도 쌓이기 전까지는, 나 자신에게 꽤 설득력 있는 해석이었다.

 

촌뜨기(파인)들은 무엇을 하러 모였나
‘범죄자들을 모아 신안 앞바다 보물을 도굴하려는 근면 성실 악당 이야기’인 파인은 1970년대가 배경이다. 윤태호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벌써 재미가 느껴지지만, 놀라운 것은 위 문장에서 파인이 미생의 안티 테제로 보인다는 점이다. 왜 범죄자이고, 왜 근면 성실이며, 왜 70년대인가?

파인에서 말하는 범죄자는, 실형을 선고 받아 사법처리를 받은 대상이 아니라 위법 행위로 목숨을 연명하는 사람들이다. 미생에서 소시민의 삶이 회사원으로 대변되었다면, 이번엔 아예 사회의 통념이나 규율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단지 법을 준수하지 않을 뿐 여전히 근면 성실하다. 특별히 선해서 회사 일을 하는 게 아니듯 극도로 악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어느 쪽이든 그저 먹고 사는 방편으로 제시된다.

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미생이 너무나 현실과 가까워졌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 없었으므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작가는 가상의 무대에서 다시 한 번 본인이 하려던 이야기를 마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야후의 80년대 중반~2000년 초반, 이끼의 2000년 중반, 미생의 2010년을 다시 돌아, (김현이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85년보다 10년 정도 앞선) 70년대 중반의 사건을 다룬다.

작법 또한 미생을 닮아있는데, 윤태호는 ‘미생’ 이후에 한 두 인물 위주로 사건을 전개하지 않는다. 물론 중심인물은 존재하지만, 그 사건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깊이가 더해졌다. ‘미생’에서 치열함으로 드러난 각자의 사연이 ‘파인’에서 장황하고 우스꽝스럽게 무너지는 광경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아직 연재 중이기에 결론을 말하기엔 한 참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들이, 그리고 그들이 욕망이 만들어낸 거대한 시스템을 이야기하려는 조짐은, 범죄자들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이미 느껴진다. 과연 그들이 넘어지는 광경 속에 ‘김현’이 추적하던 어떤 권위들의 실체가 – 단순한 공권력이 아닌 무자비하고 정교해 너무한 현실을 만들어내는 – 포함될 것인지를 함께 지켜보자.

 

존재하지 않은 어머니와 버려진 딸
파인을 끝으로, 윤태호 작가의 아버지 연작들을 살펴보았다. 물론, 단점과 한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다른 것은 제쳐놓더라도 작가가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은 현시점에서 문제가 있어 보인다. 나름대로 작품 마다 한층 나아진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역사의 장이 실제로 아버지들의 것들이었다는 사실과 별개로 이름이 남지 않은 여성들을 주체적인 인물로 그릴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버지 연작에서 누군가의 어머니인 캐릭터는 제대로 호명조차 되지 않으며, 여성 캐릭터의 부모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부자 관계에 서사를 집중하기 위해 어머니와 딸의 존재를 소거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한 서사적 필연성이 성차별적 시선과 만난다면, 무신경한 편견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열거해보자. ‘야후’의 ‘이혜원’은, 시대가 시대인 만큼 90년대 유행하던 ‘성녀 – 창녀’ 이분법의 연장이자 그 판타지의 끝을 재현하는 캐릭터이다. ‘싸 보이는’ 모습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으며, 주인공에게만은 헌신적이고 순정파인 이 ‘여인’은 비련의 죽음을 맞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차라리 신무학의 연인이었던 ‘고예리’야 말로 속물적인 캐릭터성을 가짐으로써 (여전히 조연에 불과하며 묘한 4각 관계를 구성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지만) 주체적인 자리를 획득한다. 이런 캐릭터에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미의 기준과 동떨어진 외모를 부여한 것도, 2015년인 이제 와서 논리와 유행이 한 바퀴 돌아 겨우 돋보일 뿐이다. (사족으로 특이하고 쿨한 캐릭터인 모델 ‘장윤주’와 닮았다.)

‘이끼’의 ‘이영지’는 ‘야후’에서 ‘이끼’가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에서 한 발 나아간 딱 그만큼의 변화를 보인다. 수동적인 피해자의 위치는 언뜻 후퇴한 듯 보이지만, ‘나에게만큼은 성녀인 창녀’보다는 덜 환상적이며, 마지막에 류목형의 유지를 받드는 또 다른 자식이기도 하다. 대상에서 주체로 어느 정도 다가간 셈이다.

‘미생’에서 ‘안영이’는 좀 더 나은 모습을 보인다. 남아 선호사상을 체화한 군인 아버지의 기대를 실력으로 뛰어넘는 다소 체제 순응적인 방법론을 따르고 있지만, 확실히 주체적인 면모를 보인다. ‘안영이’ 외에도 인물들을 다루는 방식이 확장된 작품인 만큼 안에서 다뤄지는 다른 여성들 또한 사회 속에 자리한 개인들로 존재하는데, 특히 ‘선영 차장’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워킹맘’의 비애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윤태호가 가진 여성에 대한 시선이 현대에 걸맞게 수정되는 중이라 할 수 있겠다.

‘파인’의 ‘천 회장 부인’은 그의 수정된 여성관을 가장 제대로 반영하는 인물일 수 있다. 시대상은 지금까지의 작품들보다 앞선 70년대지만 ‘천 회장’ 대신 돈 냄새를 맡고 몰려든 능구렁이 같은 사내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본인의 욕심을 관철해 나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희동’이 진실로 무서워하는 성욕의 주체라는 점에서도 어떤 당당함이 느껴진다. 비록 권력과 재물 옆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이름 없이 역사의 그늘에 존재한 여성을 주체적으로 그려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권력을 가진 누군가의 옆에서 아부를 떠는 모습보다 주인공 일행과 대등하게, 혹은 그 위에서 군림하는 모습은 ‘오희동’이 요란을 떨어놓고 나가떨어지는 모습과 함께 묘한 쾌감까지 선사한다.

아버지관과 마찬가지로 윤태호가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보면 ‘미생’이 유행하고 나서 지인들과 겪었던 일을 언급하듯 그저 ‘꼰대’로 남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성실함이 느껴진다. 이러한 그의 일관된 치밀함이 아버지 연작을 가능케 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의 작품을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이기도 하다.

 

파도가 남긴 것
아버지를 이해 못 한 어느 짐승이, 자신에게 아무 잘못이 없음을 확인하고, 본인이 쓴 탈이 아버지임을 깨달았다. 그 뒤에야 그는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겨우 먹고 살자고 말하며 회사를, 사회를 곁눈질한다. 촌뜨기들은 과연 곁눈질에 어떻게 대답하게 될까.

시대에 대한 해답을 한 사람에게서 찾는 일에 대한 어리석음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대라고 하기엔 좀 얇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아버지 또는 아들, 어머니이거나 딸인 채로 버티는 일이다. 그 동안 잇속을 챙기려던 촌뜨기들이 어떻게 서로를 배신하고 어그러질지를 구경하는 것은, 우리에게 답이 아닌 질문이 되어준다. 그 질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간의 행적을 좇아 온 것이기도 하다.

웹툰의 등장으로 인해 한국만화의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은 듯 보이는 지금, 윤태호는 여전히 아버지라는 이름을 향해 닮은 모양으로 파도 친다. 해변에 앉아 매번 약간 다른 모양으로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이라도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엉덩이의 모래를 털고 일어나 파도로 인해 조금씩 달라져 온 지형의 흔적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발목을 시큰히 담근 채 파도들이 어떻게 땅의 모양을 바꿔왔는지 따라가다 보면 이내 먼 섬들이 보일 것이고, 그 앞바다 어느 깊은 곳에는 길어 올려야 할 보물들이 잠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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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겨레 인터뷰, 문화면, <‘미생’ 원작자 윤태호 “내가 장그래다”>

[2]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 14화 – 미생, 조명가게 편, 1시간 10분 경.

선우 훈

웹툰을 읽어왔고 웹툰을 그리게 되었다. 조회 수가 곧 작품의 가치인 환경에서 거의 의미가 없는 작품 [데미지 오버 타임]을 연재했다. 실은 나도 내 조회 수를 모른다. 이쪽이 그렇다. 연재하게 해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딴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괘씸하다고 느끼실지도 모르니까. 언젠가 노블레스처럼 가치 있는 만화를 생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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