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에 대한 우려와 기대_ 병맛 만화 <소년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에 대한 무거운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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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남학생과 여학생이 다정하게 길을 걷는다. 누가 봐도 연인이다. 그때 한 남학생이 나타나 여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와 과도하게 어깨를 껴안으며 귀에다 대고 보고 싶지 않았냐며 속삭인다. 여학생도 싫지 않은 모습으로 그 남학생과 깨알 같은 대화를 나눈다. 순간, 어색한 분위기를 느낀 여학생이 연인으로 짐작되는 남학생에게 미안한 듯 묻는다. 무슨 일 있냐고. 이쯤에서 일반적인 남자라면 버럭 화를 내며 질투의 심정을 불같이 쏟아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연인처럼 보이는 그 남학생이 담담하게 말을 한다. “옷에다 똥 쌌어.” 네이버에 연재된 <소년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라는 웹툰의 한 내용이다. 황당하고, 찜찜하고, 불쾌하다.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인지를 파악하려 했던 나의 순진함이 일거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내용에 달린 댓글도 참으로 희한하다. 머리를 비우고 보면 편하다고 조언을 한다. 어떤 독자는 이 만화를 보면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서두에 예시로 든 내용은 3화 연재 내용인데, 1화와 2화의 내용들도 황당하기 그지없다. 괴상한 건물 앞에 궁둥이처럼 생긴, 아니 궁둥이로 된 문이 있는데 그 문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라고 하자 한 남자가 궁둥이를 찰싹찰싹 때리다 손을 항문 속으로 쑥 집어넣는다. 그러자 문이 비밀번호가 틀렸다며 남자의 면상을 향해 방귀를 내뿜는다. 결국 그 남자는 기절해서 쓰러진다. 이게 1화 내용이다. 이해 불가능했지만 처음이니까, 라는 가벼운 심정으로 2화를 클릭했다. 자신의 여자 친구와 바람을 피운 상대남자에게 증거사진을 내밀며 이래도 할 말이 있냐고 다그치자 “할 말은 없지만 탈 말은 있단다.”라며 진짜로 말을 타고 도망을 가는 내용이다. 단 세 편을 보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불쾌한 황당함’을 만끽(?)했다. 그런데 이 만화에 열광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도대체, 지금, 이 세계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모든 시대는 그 시대를 주도하는 예측 가능한 범주 안에서 사건들의 연쇄가 일어난다. 개가 사람을 물면 별일이 아니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별일’이 된다. 왜 그럴까? 통념 때문이다. 통념은 한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사건들의 다발을 포괄하는 상식의 외연이다. 그래서 사람이 개를 문다는 것은 통념을 벗어나는 특별한 사건이 된다. 비윤리적이란 질타는 한 개인이나 집단이 통념을 벗어나는 비상식적인 일을 저질렀을 때 받게 되는 사회적인 압박이다. 통념은 비상식을 통제하는 사회적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당위성의 차원으로 수용된다. 그런데 통념은 갑갑하고 허술하고 억압적이다. 보편성의 줄로 개별성의 자유를 옥죄는 집요한 폭력이다. 사나운 개가 나를 공격하면 살기 위해 그 개를 물 수도 있다. 개를 물어야 하는 절박한 특수성을 통념은 온전히 포괄하지 못한다. 경찰복을 입은 강도가 범죄 대상을 찾아 거리를 배회한다고 생각해보자. 누가 그를 의심할까? 상식과 통념의 빈틈이 진실의 경계를 허무는 순간, 세계는 위험 그 자체가 된다. 특히 통념이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때 일상은 감옥이 된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며 살았는데 현실은 비참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자본의 지배자들은 그 불만을 이미 예측하고 그들의 절박함을 다독일 그럴싸한 통념을 생산한다.

예를 들면, “아프니까 청춘이다. 세상이 그러하니 현재의 너를 긍정하라.”와 같은 공소한 메시지를 모세의 계명처럼 세속에 유포한다. 아픔을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자나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고 불평을 하는 일군의 사람을 ‘루저’로 몰아세우는 현실. 분노할 시간에 스펙 하나라도 더 쌓으라는 적반하장의 사회. 이것이 통념의 교묘한 억압이다. 개인의 욕망과 감정이 통념에 의해 질식되는 임계점에서 <소년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이하 <소무하>)라는 웹툰이 ‘당혹’의 무기(바이러스)를 들고 불현듯 출몰을 했다. 긍정과 처세와 성공에 대한 공허한 계몽이 실존의 생동을 무력화시키는 극단의 순간에,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스토리로 일상에서 누적된 무기력과 권태를 일거에 날려버리는 <소무하>에 대해 사람들은 즐거워 한다. 이해가 된다. 그러나 뭔가 허전하다. 과연 <소무하>에 대한 열광은 ‘경쾌한 반항’인가 아니면 ‘산만한 자위’인가?

 

카타르시스의 그림자
‘병맛 만화’란 ‘병신 같은 맛’을 내는 만화라고 한다. <소무하>도 병맛 만화다.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백과’의 정의에 따르면 “기승전결의 이야기 전개를 따르지 않고 앞뒤가 맞지 않는 대사, 뜬금없는 삽화의 인용 등을 활용해 ‘병맛’을 구현해내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기승전결의 플롯을 파괴하는 것은 필연성에 대한 거부이며, 통념의 외피를 쓰고 진행되는 현실의 부당한 논리에 대한 조롱이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을 당연하게 무시하는 ‘낯설게 하기’의 전략은 일상에 대한 전복의 의도가 담겨 있다. 일상의 전복은 당혹과 불안을 안겨준다. <소무하>의 작가 ‘컷부’는 일상을 비틀어 독자의 기대를 배반하는 기법을 시종일관 연출하고 있다. 더불어 똥, 방귀, 게이, 폭력 등과 같은 소재를 사용해 자극의 강도를 한층 강화시키고 있다. 작가는 <소무하>를 완결하는 후기 컷에서 “스토리가 잘 진행되다가 갑자기 황당하게 끝나버리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소무하>의 탄생 배경이었다고 밝혔다. 작가는 ‘황당’하게 끝내는 기술을 ‘결’의 구조를 ‘기승전’의 전개로부터 단절시키는 방식으로 구사하거나, 대화의 유기성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구사고 있다. 머리를 염색했냐는 질문에 “아니, 똥물이야.”(12화), “시끄러워, 개새끼야.”라는 말에 “우린 개새끼가 아니라 게세끼야.”(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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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상대를 보며 “잘생긴 사람이 구해줬으면 했는데.”(117화)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곳곳에 산재한다. 땡땡이를 치고 연애를 하는 아들을 만난 아버지가 아들을 보며 “실망이구나. 내 아들 게이인 줄 알았는데.”(105화)라고 한다. 83화를 보면 사실 그 학생의 아버지는 게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성인 게이잡지를 보는 아버지를 보며 어떻게 나와 어머니를 속였냐며, 나보다 먼저 어머니께 사과하라고 아버지를 다그칠 때 어머니가 나타나 말 없이 가발을 벗는다. 어머니는 여장 남자였던 것이다. 유기성의 해체, 엇갈리는 대화, 자극적인 소재의 변주가 <소무하>의 전체 골격이다.

브레히트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통념들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들춰내기 위해 ‘소격효과(alienation effect)’를 연극의 도입했다. 익숙한 것들이 어느 순간 낯선 것으로 출몰할 때 우리는 ‘불안’을 경험한다. 브레히트는 괴상한 것을 통해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친숙한 일상의 질서를 비틀어 그 이면에 존재하는 불합리를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다. 친숙은 몰입을 유도하고, 몰입은 망각을 유도하고, 망각은 비판 능력을 상실하게 한다. 이는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되는 과정이다. 속된말로 눈에 콩깍지가 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하여간 대상으로부터 ‘적절한’ 거리두기를 통해 현실을 자각하게 하고 자각을 통해 현실에 맞서게 하는 것이 브레히트의 전략이라면, <소무하>의 작가 컷부는 그러한 전략을 배제한다. ‘과도한 삭제’와 ‘과도한 덧붙임’으로 현실을 더 산만하게 만든다.

그 산만성에 미덕이 있다면 ‘무분별한 통쾌함’일 것이다. 방귀를 뀌고, 똥을 싸고, 누군가를 두들겨 패는 무차별적 행동이 주는 일종의 쾌감, 그것은 현실에 대한 억눌림으로 질식의 끝에 다다른 개인들의 파괴적 욕망을 대변해주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인 것이다. 독자들은 <소무하>를 보며 한바탕 웃고, 그 웃음으로 분노와 억압의 정념을 정화하고 다시 일상의 감옥으로 가볍게 복귀한다. 자위 뒤에 오는 허탈, 웃음 뒤에 남겨지는 씁쓸함은 만화 속에 포진된 과잉된 ‘황당’이 남긴 카타르시스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의 열광은 어느 면에서 위험하다. 실존을 망각시키는 카타르시스, 익숙하지 않은 것(과잉된 황당)을 익숙한 것(현실)으로 강요하는 전도된 ‘낯섦’은 현실을 굴절시키고 왜곡한다.

 

 

미궁에서 탈출하기
<소무하>의 작가는 수수께끼를 던지는 스핑크스처럼 독자들 앞에 기표화된 ‘텅 빈 괄호’를 던진다. 독자들은 댓글을 통해 그 괄호를 메꾼다. 방귀를 추진력으로 해서 날아가는 비행기에 대해 과학적인 논거를 제시하면서 ‘방귀비행기’의 가능성을 댓글을 통해 역설하거나, 베스트 댓글을 쓰기 위해 만화의 내용과 관련된 추가 정보를 수집하는 방식을 통해 <소무하>의 스토리를 보충하고 개작을 한다. 이렇게 작가와 독자, 독자와 독자의 친밀성은 ‘하이퍼텍스트’의 실현과 함께 그들만의 거대한 라비린토스(Labyrinthos, 미궁)를 형성한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에 들어선 사람들처럼 독자들은 <소무하>의 ‘텅 빈 괄호’를 배회하며 탈출구가 없는 현실을 자조의 웃음으로 소진한다. 병맛 만화의 대표주자인 이말년 작가는 병맛은 병맛으로 즐겨야지, 논리적으로 분석하려 하면 더욱 재미없어진다고 했다. 웃자고 한 것에 대해 죽자고 덤비지 말자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죽자고 덤벼들 필요는 있는 것 같다. 비평가에게 해석은 고유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해석은 세계를 자기화하는 주체화의 과정이다. 병맛을 병맛으로 즐기는 것도 권리이지만 병맛을 다른 맛으로 느껴보고자 하는 것도 엄연한 권리다.

그렇다면 병맛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허기와 갈증이다. 신들의 음료인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훔쳐 인간에게 준 죄로 탄탈로스는 신들로부터 아주 고약한 형벌을 받는다. 허기에 지쳐서 머리 위에 열린 열매를 따먹으려 손을 내뻗으면 열매는 닿을 듯 말 듯 물러난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숙이면 물 또한 아슬아슬하게 그의 입으로부터 멀어진다. 닿을 것 같은 그 미세한 거리가 증폭시키는, 포기되어지지 않는 눈앞의 욕망. 신들은 그에게 죽음보다 더 괴로운 고통을 준 것이다. 나는 병맛이 탄탈로스가 겪는 고통과 유사하다고 본다. 병맛은 실현되지 않는 현실의 욕망을 위로하는 또 하나의 가상 욕망이다. 병맛을 병맛으로 즐기는 것은 결핍된 욕망을 대체하려고 더 큰 결핍을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 ‘텅 빈 괄호’ 안에는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들을 무한히 집어넣을 수 있다. 그렇지만 채우면 채울수록 공허하다. <소무하>를 위시한 병맛 만화들은 바로 채울 수 없는 허기와 갈증의 블랙홀이다.

전략이 없는 ‘낯설게 하기’는 부조리한 현실의 자장(磁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 점이 <소무하>의 아킬레스건이다. 기승전결의 플롯을 파괴하려는 것보다 새로운 플롯을 만들어 대항하는 것이 필요하다. 형식의 발랄함이 현실의 독사(doxa, 통념)를 제거하지 못한다. 부조리를 양산하는 억견과 통념에 대항하는 파라독사(paradoxa, 역설)의 구축 없는 현실은 늘 감옥과도 같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억지의 낯섦이 아닌 친숙한 낯섦을 대항의 플롯을 통해 예리하게 보여준다면 <소무하>는 분명히 독사의 벽을 허무는 ‘경쾌한 반항’의 저력을 보여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독사만 있고 파라독사가 없는 현실은 파국의 시작이다. 보르헤스의 단편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 나오는 문구를 인용하면서 두서없는 글을 마친다.

 

“나는 다양한 미래들에게 (모든 미래들이 아닌)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남긴다.”

엄경희

약력 : 1963년 서울 출생. 1985년에 숭실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이화여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음. 200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매저키스트의 치욕과 환상―최승자론]으로 등단. 현재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저서로는 [빙벽의 언어], [未堂과 木月의 시적 상상력], [질주와 산책], [현대시의 발견과 성찰], [저녁과 아침 사이 詩가 있었다], [숨은 꿈], [시―대학생들이 던진 33가지 질문에 답하기], [전통시학의 근대적 변용과 미적 경향], [해석의 권리] 등이 있음. 2014년 제3회 인산시조평론상을 수상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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