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카니발리즘, 혹은 병맛의 혀르가즘_ <이말년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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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맛’의 출현, ‘이말년’이라는 병맛
‘병맛 만화’ 혹은 ‘병맛 웹툰’은 더 이상 마니악한 저급문화로 분류되지 않는다. ‘병맛’, 곧 ‘병신 같은 맛’을 소수의 자폐적 코드로 폄하하는 이들은, ‘병맛’이 하나의 스타일이자 가능성으로 소비되고 있는 현실을 잘 모르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만화에 한정해 이야기하면, 대충 그린 듯한 작화체, 합리적 개연성이 무시된 이야기 진행 등이 병맛의 날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병맛의 기원에 관해선 딱 잘라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인터넷 상에 떠도는 맥락 없고 어이없는 구성의 창작물이 독특한 유희적 코드로 인정받게 되면서 그러한 용어가 출현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병맛으로 불리는 작품들은 대게 질적 수준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고, 주류 양식에 대한 고민도 무시되어 있다. 때론 고의로 질을 떨어뜨리면서 저열함 자체를 즐기는 흔적이 뚜렷하다. 어설픈 화장실 유머나 조야한 이미지가 주는 카타르시스를 전면화·극대화한 것도 특징이다. 혹자는 병맛을 격식에 대한 의도적 거부나 기존 문법에 대한 정치적 전복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같은 분석에 어울리는 의식화 된 실천이 의도된다면, 그것은 놀이성과 오락성 이외의 목적을 유념하지 않는 병맛의 본질과 유리된다.

한편, 병맛을 특징적인 집단의식의 표출로 본다면, 외관상 ‘잉여’들의 자폐적 동질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의 ‘잉여’라는 용어는 굳이 ‘20대’, ‘88만원 세대’와 같은 젊은 층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단정해선 안 된다. 사회 입문을 앞두고, 이상과 현실적 조건 사이에서 불안을 겪는 젊은 층이 잉여의 주축이겠지만, 상상적으로라도 주류 사회와 거리를 두면서 스스로를 잉여라 여기는 사람들은 나이나 계층을 불문하고 일정한 동류 의식을 가질 수 있다. 주목할 것은, 그들이 왜 ‘병맛’에 더 빠지는가의 문제다. 사실상, 주류 서사물의 세계는 ‘갈등’을 합리적으로 고조시키면서 일정한 절차적 과정에 따라 우리를 질서 있는 결말로 안내한다. 그러나 자칭 잉여일수록, 현실 세계는 그러한 서사와 낙차를 보인다고 느낄 여지가 크다. ‘기-승-전-결’에 대한 전망이 부재한 사회 속에서 고립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그들도 외부를 향한 냉소와 자기부정의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감정구조(structure of feeling)를 드러낼 권리가 있다는 점이다. 결국 병맛 코드의 확산 배경엔 그런 불가해한 욕구들의 연대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수년 전, <이말년시리즈>로 병맛 만화의 한 경지를 보여주었던 이말년의 작품들은 대개 그와 같은 특징을 부분적으로 공유한다. 그는 야후와 네이버에 <이말년시리즈>를 연재했고 관련 시리즈물 등도 다양하게 창작한 바 있다. 포털 웹툰 순위를 기준으로 보든, 개별 에피소드의 조회수를 기준으로 보든 그의 작품들은 당대 웹툰계에 특기할 만한 ‘사건’이 되었다. 이말년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군대를 전역한 후 휴학기간에 DC 인사이드, 루리웹 같은 초대형 커뮤니티 공간에서 하루 7시간 이상 ‘잉여짓’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생산적인 ‘잉여짓’의 결과물들이 <이말년 씨리즈>의 출발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포털 사이트 담당자에 의해 스카우트 되어 2009년 정식 작가로 데뷔하게 된다. 그림체의 공력이나 이야기 구성의 수준, 관습적 규준에의 부합 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작품들이 동시대의 어떤 ‘코드’를 헤집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그가 잉여에서 작가로 비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잉여들의 미시적인 담론이 결속하고, 접합되는 게시판 속 댓글들의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취향을 공유하던 잉여들이 등단 배지를 달아준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말년시리즈>는 디지털 가상공간에 점증하는 놀이성과 오락성, 구술성의 힘과 속성을 적확하게 보여주는 웹툰으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말년시리즈>는 저열함, 조야함이 더 이상 무조건적 폄하의 이유가 아니라 하나의 스타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변한다. 그렇다면, 이말년이라는 병맛을 더 깊이 파헤치기 위해 네이버 수요웹툰으로 종결된 <이말년시리즈>를 중심으로 몇몇 특징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앤티 스노비즘, 허세에 대한 허세
일반적으로, 스노비즘(snobbism)이라 하면 지적·경제적으로 허세를 부리는 태도, 상층부를 모방하려는 속물지향성을 일컫는다. 더 짧게 요약하면, ‘신사인 체하는 속물’을 스노브라 하고, 스노비즘은 그러한 사고방식과 실천을 지칭한다. 이를 근거로 <이말년시리즈>를 보면 젠체하는 그림체, 상식으로 통하는 이야기 구성 등을 깡그리 무시하면서 양식적으로는 만화계 안에 작동하는 스노비즘을 배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찍이 패션계에서는 스노비즘에 물든 성인복장에 대한 상식과 규율을 깨뜨리려는 시도를 두고 ‘앤티 스노비즘’이란 언명을 내린 바 있다. 고상하고 기품 있다고 믿어지는 전형적인 ‘무엇’을 추구하는 패션과 결별하고, 편견에 얽매이지 않는 발상을 실험해 보는 모험적인 작품들이 ‘앤티 스노비즘’의 자식들이었다. 이 개념을 좀 더 유연하게 확장해 보면, 오늘날의 CMC(computer mediated communication) 환경, 혹은 모바일 네트워크 환경 (mobile-network environment) 속에서 에고를 내려놓은 익명의 개인들이 만든 일부 창작물을 정의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병맛 웹툰/병맛 만화가 있다. 만화평론가 박인하는 병맛 만화를 ‘기-승-전-병’이라 말했지만, 사실상 병맛을 말하는 ‘병’은 ‘기’의 단계에서부터 출현할 수 있다. 그러니까 병맛으로 귀결되는 과정은 항상 절차적으로 보편타당한 서사 단계를 밟아가지 않는다. 대부분의 병맛 만화는 단속적이고 비약적인 상상력들의 난장(亂場)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대다수 병맛 만화의 고향이 인터넷 공간의 웹툰이라는 점을 고려해 병맛 만화/병맛 웹툰을 앤티 스노비즘 개념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창작자의 입장에서만 보면, 고상하고 기품 있다고 믿어지는 전형적인 ‘무엇’을 추구하는 만화/웹툰과 결별하고 편견에 얽매이지 않는 발상을 실험해 보이는 모험적인 작품이 바로 병맛 만화/병맛 웹툰인 것이다.

물론 병맛 만화에도 더 세부적인 성립 조건이 없는 건 아니다. 때론 더 저열한 이야기를 더 후지게 표현하는 순간에도 그들만의 잉여의식을 유희적으로 공명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의 ‘유희적 공명’은 좀 더 복잡한 사회학적 함의를 떠올리게 한다. 최근 포털사이트에서 인기를 끈 병맛 웹툰들을 보면, 역설적이게도 탈개인화와 탈집단화를 동시에 가속화시킨다. 앞에서 언급한 잉여의식 안엔 사회적 족쇄로부터의 일탈욕구, 유희적 공동체로의 도피욕구 등 동질적인 코드가 잠재되어 있다. 이는 해방구를 찾는 잉여의식의 속성인데, 병맛 웹툰은 그러한 욕구를 가진 이들의 연대를 간접적으로 도모하는 면이 있다.(탈개인화) 그렇다고 보편타당한 계몽의 의지를 피력한다든지, 사회적 기율에 맞닿은 주제의식을 강요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다.(탈집단화)

이와 관련해 사회학자 김홍중은 <마음의 사회학>에서 포스트 진정성 시대의 ‘마음의 레짐’을 연구하면서 공적 논리에 침윤될 수 없는 사적 정서‘들’의 형태에 집중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사적 논리나 표상으로 한정할 수 없는 어떤 집합적 의식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다. 이 역시 ‘탈개인화’와 ‘탈집단화’가 양가적으로 작동하는 인터넷 세계, 항상 젊을 수밖에 없는 디지털 가상공간 문화를 설명하는 데 요긴하다. 웹툰으로 출발한 <이말년시리즈>의 병맛은 바로 그 지점에 뿌리를 내리고 자양분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말년시리즈>는 놀이와 오락을 찾는 잉여들의 욕구를 수렴하며 새로운 앤티 스노비즘을 열어왔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등단 이전의 이말년이 창작물을 올리던 ‘DC 인사이드’ 등은 현실공간에서 자신을 규정하는 객관적 정보들과 격리되어 타인의 시선에 의해 억제되어 있던 무의식을 소환하기 좋은 웹사이트다. 사회적 존재감(social presence)을 결락시킨 후, 순수한 오락적 배설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창구로 인식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인터넷 공간에서 임의적으로 만드는 프로필이나 아바타, 혹은 ID 중 일부는 프로이트에 의해 명명된 ‘id’의 관문이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그곳에서 <이말년시리즈>는 상식, 문법, 표준, 전형, 격식이란 말 속에 포함된 ‘고상함에 대한 강요’를 허세로 치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론 유희적 본능에 의지해 그 같은 허세문화에 대한 허세스러운 응대를 실현해 온 것으로 보인다.

 

모든 상상 가능한 것들의 총화, 혹은 익스플로테이션 웹툰
한편, <이말년시리즈> 에피소드의 소통 방식을 보면, 인터넷 공간에 오래 머무는 개인들의 변화된 감정 구조가 읽힌다. 2000년대 초 인터넷 공간을 달궜던 ‘엽기’ 문화가 이제는 더 높아진 오락성, 놀이성, 구술성을 배경으로 ‘병맛’이라는 첨단을 향해 나가고 있다는 진단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말년시리즈>는 엘리트주의, 혹은 문화수준론에 의해 저급하게 평가 받을 수 있는 대중의 온갖 취향들을 적극적으로 소재화한다. 그러면서 독자의 일상의 고단함은 덜어주되, 나아갈 길은 제시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있다. 시의성 있는 이슈를 말할 때에도, 그 안에 선재하는 위험을 희석해낸 방식으로 대중의 욕구를 여과없이 개진하는 순기능이 발견되기도 한다. 소재나 기법 면에서는 주류 사회의 일반적 행동양식이나 가치관의 틈새를 벌이며 존재하는 서브 컬처의 특징도 분명하다.

그래서 <이말년시리즈>를 ‘B급 만화’의 한 양식으로 보면, ‘익스플로테이션 만화(exploitation cartoon)’라는 명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지하다시피 할리우드의 B급 영화(원래는 ‘B movie’다)는 경제공황 시기 이후 1930년대에 자기 정체성을 획득한다. 그 시기 B급 영화는 데뷔를 앞둔 감독, 배우들이 협업해서 만든 숙련기 제작 영화였고, 동시상영용 보너스 영화였으며, 이른 바 3無 영화(스타 배우, 유명 감독, 충분한 제작비가 없는)였다. 단기 완성형 오락 영화를 지칭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40년대를 거치면서 조악한 특수효과를 의도적으로 삽입하는 영화를 포함하기 시작했고, ‘키치적’ 장르 영화 개념을 포용하게 되었다. 이후 틴픽문화 혹은 취향문화의 대표적인 양상으로 평가 받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1960년대엔 컬트적 성격의 익스플로테이션 영화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익스플로테이션 영화는 기존 B급 영화의 성격을 더욱 첨예하게 수렴한 결과물이다. 예컨대, 자극적인 소재, 극단적인 주제, 선정적인 내용, 웃음이나 비웃음 그 자체가 목적인 사건들, 고의적인 엉성한 영상과 편집 등이 그 특징이었다. 그런데 팬덤 형성을 위해서는 그런 속성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질적인 속성들을 적절히 착종시키는 기술과 전략이 중요했다. 완성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예산 영화를 다작했던 로저 코먼 감독이 신작을 내놓을 때마다 컬트적 호응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도 거기에 있었다.

<이말년시리즈>의 ‘병맛’이 큰 인기를 얻어낸 비결은 로저 코먼의 전략과 일정 부분 유사해 보인다. 바꿔 말해, 이말년은 자신만의 B급 취향으로 다양한 하위코드들을 불러 모으면서 코드들의 묶음으로써 ‘병맛’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개별적인 하위코드들에 대한 이해 수준에 따라 ‘병맛’의 진면목을 어디까지 즐길 수 있느냐가 가려진다는 한계는 있지만, 작가에게 그것은 별로 중요치 않아 보인다. 그는 패러디와 오마주를 통해 동시적일 수 없는 것들의 ‘동시성’을 실천해 보이며 착종시킬 수 없다고 여겨지는 상상력을 접붙이며 자기 세계를 조형한다. 작품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흔하게 쓰이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란 용어로는 싸잡을 수 없는, 혼종적 사건들이 읽힌다. 이를테면 패러디의 형태만 보더라도 매우 이채로운 특징을 가진다. 거의 모든 에피소드마다 시각적 패러디, 언어적 패러디가 다각도로 시도되는데, 적게는 한두 개의 원전을 건드리지만, 많을 때는 예닐곱 개의 원전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부터 최근 인기 연예인의 사생활,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광고나 드라마의 특정 장면, 희화화되기 좋은 정치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소재의 출처도 종잡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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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적인 예로, 4화 ‘조선쌍놈’ 편의 마지막 컷을 보면, 천박하게 생긴 외모 때문에 쌍놈의 자식으로 오해 받는 양반이 “찍지 마! 이 쉬..ㅂ 찍지 마!! 성질 뻗쳐서 증말…”이란 대사를 날린다. 이는 당시 정치인의 말실수를 가져다가 전혀 엉뚱한 상황에 대입시킨 사례에 해당한다. 57화 ‘과일의 꿈’은 드라마 <야인시대>에 등장한 심영(김영인 분)이 한 “내가 고자라니!” 대사와 당시 영상을 차용해 과육쪽에 감각을 잃은 수박의 애처로운 현실을 패러디한다. ‘아낌없이 아끼는 사나이’(50-54화), ‘산소의 중심에서 벌초를 외치다’(59-61화) 등은 아예 제목부터가 기존 서사물의 제목을 가져와 비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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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폐쇄적 유희성으로 느껴지는 이런 ‘병맛’ 콘텐츠가 이제 주류문화 안에서 충분히 포용 가능한 양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잉여의 감수성은 그렇게 확산되고, 착종되는 중이다.

 

그리고 ‘병맛’ 카니발리즘은 계속된다
일찍이 바흐친은 라블레의 소설 안에서 ‘희극적 언어 형식’으로 문학화된 카니발적 요소에 주목한다. 라블레의 소설을 경유해 바흐친은 중세 민중 카니발의 전통이 체현된 세계를 예찬한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배설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명의 작용, 그리고 웃음과 욕설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며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는 장(場)에 대해 그는 지지를 표한다. ‘창조/파괴’, ‘죽음/부활’이 동격으로 등치되는 양가적 세계에선 어떤 공리주의적 동기도 작동하지 않는다. 저열함과 비천함조차도 그 나름의 존재 이유를 얻는다. 바흐친에 따르면, 양가성을 파괴하는 학문적 진지함과 위계화의 욕망이 때론 불온한 것이다.

오늘도 병맛 문화는 가식, 위선, 허위의식과 결속된 상식이 도그마처럼 작동하는 세계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 진화 중이다. <이말년시리즈>를 ‘키치’로 읽더라도 이 작품의 병맛은 경박한 자극적 오락에 그치지 않는다. 무수한 잉여들의 감수성을 감싸 안으며 디지털 카니발리즘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측면도 존재한다. 안일한 작품과 편안한 작품의 경계는 누구에게나 모호하고, 잉여들에겐 때론 폭력적이다. 포털에서 <이말년시리즈>는 연재 중단되었지만, 병맛의 카니발리즘은 시시각각 다른 얼굴로 되돌아 올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