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취미와 부조리, 병맛의 숙주를 찾아서

 

‘춤추는 바보에 구경하는 바보,
똑같이 바보가 될 거면 춤추지 않는 게 손해’
– 후루야 미노루의 ‘크레이지 군단’에서

병에 걸리면 의사를 찾아가야 한다. 주사를 맞거나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 그런데 의사조차 어쩌지 못하는 병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예술가를 찾아가야 한다. 고대로부터 문학, 음악, 미술, 연극은 인간과 그들의 공동체를 괴롭히는 질환들과 싸움을 벌여왔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절규’, 알버트 콜린스의 블루스 곡 ‘다잉 플루(Dyin’ Flu)’는 의사조차 손을 뗀 극악한 병들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병은 의사에게, 못 말리는 병은 만화가에게
또한 병은 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원천이 되었다. 질병과 그로부터 예기되는 죽음만큼 인간의 감수성을 예민하게 만들어주는 것을 찾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평생 폐결핵에 시달린 소설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에서 고백한다. 자신에게 삶과 실존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건 미치광이와 폐병 환자들이었다고. 또한 어떤 예술가들은 병이 만들어내는 육체적 쇠락이나 죽음의 공포를 넘어, 병리 자체에 집착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병, 혹은 환자는 인간 내면을 탐구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신경과학자 에릭 캔델은 최근의 저서 ‘통찰의 시대(The Age of Insight)’에서 주장한다.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 빈에서 과학자와 화가를 중심으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고 다루는 새로운 방식이 태어났다고. 특히 질환은 그들의 학술적, 예술적 성취에 큰 영감을 주었다.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마음의 병에 집중하며, 꿈의 해석을 통해 무의식의 밑바닥에 다가가려 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과학보다는 문학, 미술, 영화 등의 예술 분야에 더 큰 영향을 미쳐왔다. 비슷한 시기, 화가 에곤 쉴레는 병에 걸린 듯한 자화상들을 통해 현대인의 내면을 표현했다. 그것은 단지 상상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는 손과 발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린 히스테리 환자들의 사진에 빠져들었고, 유아거인증과 근육병 등 신체를 변형시키는 신경학적 질환에 큰 관심을 보였다. 미(美)를 추구하는 예술과 추(醜)를 만들어내는 병이 놀랍도록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커버

 

그로부터 100년 뒤, 병은 또 다른 방식으로 예술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21세기 한국의 만화 독자들이 스스로 ‘병맛’이라는 웃음의 병에 감염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용어로서의 ‘병맛’은 최근의 창조물이다. 그러나 나는 그 단어가 지칭하는 표현 스타일, 내러티브 구조, 유머의 코드가 완전히 새로운 무엇은 아니라고 여긴다. 우리는 미치광이와 병자를 등장시킨 여러 문학, 영화, 연극 등에서 이와 유사한 코드를 발견할 수 있다. 병맛을 영어로 번역하자면, ‘ill taste’ 혹은 ‘bad taste’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피터 잭슨이 1987년 발표한 컬트 영화 ‘고무 인간의 최후‘의 원제가 ’Bad Taste’다. 이 영화에서 지구를 침략해온 외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병맛’ 만큼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물론 병맛의 최대 숙주는 만화다. 오랫동안 밑바닥의 대중들과 호흡하며 가장 유치하고 더럽고 극단적인 이야기까지 담아온 결과, 만화는 스스로 온갖 사회적 병들과 친분 관계를 맺어왔다. 다분히 만화의 몸 속 어딘가에는 병맛의 유전자가 도사리고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AIDS, 에볼라 등 치명적인 전염병의 실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 병이 태어난 고향을 찾아가야 한다. 만약 한국 만화의 병맛이 무엇으로부터 유래했고, 그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내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당연히 일본 만화의 정글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병맛으로 분류되는 한국 만화가 표면적으로만 보아도 일본 개그 만화의 문법을 상당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일본인들이 병리적 현상에 대해 특유의 집착을 보여 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다. 또한 그들이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성적, 도덕적, 생리적 표현의 자유 덕분에 병리적 테마를 여러 예술 장르에 주입해왔다는 사실도. 때문에 나는 병맛에 감염된 원천적 숙주들이 일본 만화사 속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바보니까 봐줘라 – 퇴행적 부조리의 등장
2차 세계 대전 직후 데즈카 오사무가 개척한 현대 일본 만화는 밝고 쾌활하고 건전한 어린이들의 세계였다. <정글 대제>, <리본의 기사>, <철완 아톰>의 주인공들은 모두 고아라는 불행을 안고 태어났지만, 누구보다 건강하고 밝게 자라나 정의를 위해 싸운다. 데즈카는 만화가가 되기 전에는 직업 의사로서의 과정을 밟던 사람이었다. 그는 만화를 통해 탐욕과 전쟁이라는 치명적인 인류의 병을 치료하기를 원했다. 그러니 불건전한 병적 취향은 맛을 보기 이전에 철저히 소독되었다.

1960년대가 되자 일본은 패전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호황의 단맛을 보게 된다. 데즈카의 만화를 보고 자란 세대들이 직접 만화를 그리게 될 만큼 자라났고, 일본 만화도 다양한 장르로 분화하게 된다. 이시노모리 쇼타로는 <사이보그 009>로 SF 만화를, 미즈노 히데코는 <파이어>로 소녀 만화를, 그리고 아카츠카 후지오는 <오소마츠 군(おそ松くん)>으로 개그 만화를 개척한다. 만화 독자의 연령층도 성장하게 된 터라 만화는 점점 다양한 취향을 담아내야만 했다. 만화 세계는 도덕적으로 순결한 인큐베이터 안에 머무를 수만은 없게 되었다.

만화는 태생적으로 유머를 장착하고 있다. 데즈카도 <불새>처럼 지극히 진지하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펼칠 때에도 난데없이 희화화된 캐릭터를 등장시켜 웃음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부조리한 개그 장치는 일본 만화 전반에 통용되는 도구처럼 여겨진다. 거기에서 이미 우리는 미묘한 병맛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오직 웃기기 위한 만화인 개그 만화가 자신의 장르를 개척하면서, 그 병과 맛의 농도는 더욱 짙어진다.

 

01<오소마츠 군>은 아카츠카가 1962년 ‘주간 소년 선데이’에 연재를 시작한 만화다. 만화가는 틀에 박힌 생각을 가진 옹졸한 어른들과 순진하지만 악동 기질이 있는 아이들의 세계를 대립시킨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묘한 불화들을 흥미로운 웃음거리로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흔히 ‘명랑 만화’라고 하면 떠올리는 어떤 스타일과 아주 흡사하다. 이 작품은 일본 개그 만화의 원점이라 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특별히 자극적이지 않은 선량한 웃음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5년 뒤에 등장한 <천재 바카본(天才 バカボン)>에 와서는 본격적인 관습 깨기가 시도된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바카다(바보+와세다) 대학을 나온 아버지와 총명한 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천재 소년이다. 지나치게 똑똑한 꼬마는 아버지의 대학 친구들인 괴짜 바보들과 부딪히게 되고, 그 결과 매회 황당무계한 사건들을 겪게 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 개그의 주인공이 아이나 바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어른이 아니므로 여러 핸디캡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반대로 그 덕분에 여러 사회적 책무로부터 자유롭다. 정신적으로 미숙하다고 인정받기에 실수나 악행을 해도 상대적으로 쉽게 용서를 받는다. 이것은 인류사의 오랜 규칙이다. 아무도 못 건드리는 할아버지의 수염을 손주가 뽑는다. “어리니까 봐줘라.” 밭에 있는 수박을 누가 다 깨먹었다. “바보니까 봐줘라.” 바보와 미치광이 캐릭터는 유럽의 카니발이나 안동의 하회탈 별신굿에서 미친 듯 까불며 권력자를 조롱한다. “미쳤으니 봐줘라.” 만화 ‘짱구는 못 말려’에서 짱구가 벌이는 장난기와 성희롱이 관대하게 처분받는 것도 같은 논리다.

여기에 유머의 기초가 있고, 병맛의 기본 세포가 있다. 하회 별신굿의 초랭이는 상전인 양반을 불손하게 대한다. 그는 양반과 선비가 인사를 나눌 때 엎드린 양반의 머리 위에 올라타 선비와 대신 인사를 나눈다. 이 장면을 보고 우리는 부지불식 간에 웃음을 터뜨린다. 거기엔 양반 계급의 권위를 허무는 풍자의 즐거움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평소에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부조리한 상황이 주는 해방적 희열이다. 공옥진은 병신춤에서 똥을 싼 뒤 손가락 두 마디 만한 종이로 뒷처리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더럽고 견딜 수 없다. 정상적인 어른이 그랬다면 두들겨 패서라도 교정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낄낄대며 말한다. “병신이니까 봐줘라.” 그런데 그 일탈을 허용 받는 대상은 광대나 연기자만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대상은 바로 관객 자신이다. 관객들이 그 병신 짓을 마음속으로 함께 즐기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어떤 예능물로 존재할 수 없다.

1960년대 이후 일본 개그 만화는 이런 위반의 즐거움을 분명히 깨달았다. 위선에 가득 찬 인간들은 자신의 도덕과 위생 관념을 위배하는 어떤 행위를 보면서 불쾌감을 느끼지만, 그것을 교묘한 유머로 포장했을 때는 위선의 탈을 냅다 벗어던지고 그 희열에 동참한다.

그래, 이거다. 이제 밀폐된 방을 깨뜨리고 나가서 온갖 병균들을 만나자. 병의 맛을 느껴보자.

 

성과 폭력, 온갖 병리의 전천후 실험병동
“우리는 세계 평화의 대사입니다. 전범들의 썩은 뇌는 깨끗이 소독했고, 온갖 악덕의 균은 박멸했어요.” <철완 아톰>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 정도가 될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일본인들은 병을 사랑한다. 병적인 것에 탐닉하는 마음을 그토록 예술적으로 형상화해낸 민족은 없다. 에도가와 란포의 기괴한 소설들을 보라. <고구마 벌레>에서는 전쟁터에서 사지가 잘린 채 돌아온 남자의 애욕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리고 있다. <외딴 섬 악마>에서는 인위적으로 남녀의 몸을 붙인 샴쌍둥이, 머리만 자라난 난쟁이, 다리 관절이 개구리처럼 구부러지는 아이 등 생체실험의 극한을 보여준다.

태평양 전쟁, 731 부대의 생체 실험, 핵 피폭의 체험이 더해졌다. 나는 병리적 상황에 대한 일본인들의 체험과 상상력이 인류의 최고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 의식 아래에는 어떤 체념이 있는 것 같다. 갈 데까지 가보자, 더 이상 추해질 수 없을 정도로 추해지자는 자포자기의 의식. 그들은 그 상황에서 생겨나는 어떤 쾌감을 발견했던 것이다. 지극히 끔찍한 그 상황에서 온몸이 소스라치는 공포와 함께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공포와 웃음은 형제다. 엄마가 아이를 향해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떼면서 까꿍이라고 할 때, 아이가 그 감정을 극복할 수 없을 때는 무서움에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그걸 이겨내고 안전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웃음을 터뜨린다. 만화가가 독자의 상식을 뛰어넘는 표현을 할 때도 이와 같은 패턴의 반응이 일어난다. 그래서 작은 차이로 공포와 폭소 사이를 오가게 할 수 있다. 이때의 상식이란 독자들의 일상적인 도덕관일 수도 있고, 독자들이 익히 예상하고 있는 사건의 전개 방향일 수도 있다. 개그 만화는 오직 웃기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윤리관이나 만화의 관습적인 문법을 깨뜨려 나가야만 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 일본의 전전(戰前) 세대와 전후(前後) 세대 사이의 갈등은 전공투 학생운동으로 폭발하게 된다. ‘혁명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는 만화 세계까지 깊게 침투한다. 나가이 고는 학원 만화 <파렴치 학원(ハレンチ学園)>에서 노골적인 성과 폭력을 묘사하며 학교라는 도덕적 바리케이트를 부숴버린다. 이 만화를 통해 여학생의 치마를 들춰 팬티를 보이게 하는 ‘판치라(パンチラ)’라는 장난이 전국적으로 유행하자 학부모 단체들이 대규모 반대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학원 만화가 그 정도로 나선다면, 개그 만화의 행동은 더욱 과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1974년 야마가미 타츠히코의 <개구쟁이 데카(がきデカ)>가 혁명적 개그의 깃발을 들고 나타났다.

 

02<개구쟁이 데카>의 주인공 꼬마는 거대한 머리에 귄위의 상징인 경찰관 모자를 쓰고 있는데, 그 머릿속에는 온갖 변태적인 상상력이 가득하다. 꼬마는 자신의 몸 왼쪽을 공사장 인부로, 오른쪽을 여고생으로 만들어 왼쪽이 오른쪽을 성희롱하게 만든다. 자신의 성기를 거대한 코끼리 같은 모양으로 바꿔 여자들을 놀라게 만든다. 자신의 마음 속 욕망을 그대로 몸의 변화로 표현해내는 이 기법은 오늘날의 개그 만화, 그리고 병맛 만화에도 널리 쓰이는 수법이다. 세계를 완전히 자기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자아도취의 행동 역시 병맛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호러와 개그는 근친이다. 특히 파괴적 상상력의 한계를 돌파해버리면 둘 사이의 경계는 더욱 미묘해진다. 이건 웃긴 걸까, 무서운 걸까? <오로치>, <표류교실> 등으로 일본 호러 만화의 원형을 만들었던 우메즈 가즈오가 <마코토짱(まことちゃん)>을 통해 개그 장르에서도 독한 일획을 그었다는 사실 역시 별로 놀랍지 않다. 그런데 그가 공포를 유발하기 위해 창조해낸 독특하고 과장된 표현법은 오늘날의 여러 만화에서 수시로 패러디되며 웃음의 장치로 사용된다. 이러한 상황 자체가 병맛이다.

 

 

성상의 파괴 – 패러디와 만화 자체의 붕괴
성과 폭력을 중심으로 표현의 벽을 파괴해가던 개그의 망치는 문득 자신의 집안에 거대한 무언가가 우뚝 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970년대 들어 황금기를 누리게 되는 일본 만화의 여러 장르들은 모든 영역에서 극단을 추구하고 있었다. <거인의 별>, <허리케인 죠>와 같은 스포츠 극화의 주인공들은 이기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게 당연했다. 필살기와 마구는 인간의 신체 한계를 진작에 넘어섰고, 안드로메다의 외계인을 초대해서 경기를 벌여야 할 정도였다. 소녀들도 이러한 놀이에 동참했다. <유리가면>과 <스완>은 연극과 발레를 소재로 해서 스포츠에 버금가는 극단성을 추구했다. 그런데 그 과장된 진지함은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서면 곧바로 실소를 터뜨리게 만든다. 그래서 개그의 망치가 앞장서서 이러한 극단의 성상들을 부쉈다. 신랄한 패러디가 ‘목숨을 건 청춘의 싸움’이라는 클리셰를 우스개로 만들었다.

 

03그런데 거기에는 도덕 너머의 도덕, 아름다움 너머의 아름다움이라는 세계가 있었다. 소녀 만화 중에서도 극단 중의 극단은 미소년 동성애 만화. 하기오 모토의 <토마의 심장>, 타케미야 게이코의 <바람과 나무의 시> 등은 오직 탐미를 위해 동성애, 근친애, 소년애, 사도-마조히즘이라는 금기를 탐닉했다. 인간의 도덕 따위로 그들의 사랑을 재단할 수는 없다. 왜냐면 그들은 신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여기에서도 내부의 반란자가 등장한다. 미소년 동성애 만화의 세계 내에서 그것을 붕괴시켜 웃음을 터뜨려낼 존재는 마야 미네오의 <파타리로>였다.

파타리로는 삼등신의 몸에 통통한 배와 얼굴을 가졌지만 스스로를 미소년이라 생각하는 꼬마다. 그는 유럽 왕국의 지배자라는 권력을 이용해 전 세계의 미소년과 미남자들을 희롱하고 다닌다. 이 과정에서 미소년 동성애 만화의 여러 장치들을 노골적으로 뒤엎어버리는데, 특히 개그 만화체의 캐릭터가 꽃잎이 흩날리는 장면에서 탐미적인 대사를 읊는 장면은 거의 부조리 만화를 보는 듯하다. 일본 만화는 1970년대의 황금기에 너무나 강력히 성장해버렸다. 웃음을 위해 가장 먼저 깨뜨려야 할 상식은 이제 기성의 도덕보다는 만화 그 자체가 된 것이다.

 

헤타우마와 팩스만화 – 신체와 그림체의 동시 퇴행
1970년대에 폭발한 일본의 개그 만화는 오늘날의 병맛 만화와 거의 유사한 문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도덕관과 장르의 규칙 같은 ‘내용’을 붕괴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진정한 병맛의 아나키 혁명은 ‘형식’의 철저한 파괴가 동반되어야 했다. 그 징조는 일찍부터 보였다. 1970년 미나모토 타로는 ‘주간 소년 매거진’에 스파이와 개그 장르가 혼용된 <호모호모 세븐(ホモホモ セブン)>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당시의 유명 만화를 패러디하면서 그 대상들은 원작과 비슷한 스타일로 미끈하고 견고하게 그렸다. 그러나 그에 맞서는 주인공은 거의 낙서에 가까운 그림체로 휘갈겼다. 이러한 형식의 대조 자체가 웃음을 유발함과 동시에 해방의 쾌감을 선사했다.

주류 만화계에서 재미를 위한 형식의 파괴가 작은 틈을 만들고 있을 때, 비주류의 세계에서는 보다 본격적인 형식 해체의 실험이 진행되었다. 전설적인 실험만화 잡지 월간 <가로(ガロ)>가 가장 중요한 생체실험장이었다. <가로>는 1960년대에는 시라토 산페이의 <가무이전>을 통해 성인용의 극화 운동을 주도했지만, 극화 자체가 주류가 된 1970년대에는 보다 아방가르드한 실험의 장이 된다. 프랑스의 부조리 만화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일본 전통의 화법으로 원근법과 데생을 파괴하기도 하고, 그냥 자유분방하게 초현실주의적인 낙서풍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주제와 내러티브 자체도 종잡을 수 없는 형태로 해체되었다.

낙서인가, 예술인가? 이렇게 해체된 그림체는 1980년대에 만화는 물론 일러스트레이션 전반에도 퍼져나가게 된다. 이러한 화풍은 헤타우마(ヘタウマ) 라는 이름으로 통칭된다. 헤타는 하수, 우마는 고수라는 뜻으로, 헤타우마는 ‘일부러 하수처럼 그린 고수의 그림’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잘 그리고 훌륭한 우마우마, 기술적으로 잘 그렸지만 매력 없는 우마헤타, 못 그렸으면서도 매력도 없는 헤타헤타도 있다.

헤타우마의 대표적 작가는 만화가 겸 일러스트레이터로 활약한 테리 존슨이다. 필명에서도 느껴지지만 작품에서도 서구적인 캐릭터를 많이 그렸는데, 비틀어지고 과장된 얼굴에 짧고 어색한 팔다리를 붙여놓는 경우가 많았다. 늘어진 젖을 드러내고 목욕하는 노파 등 불쾌감을 만들어낼 소재를 적극적으로 쓰기도 했다. 못 그린 듯 묘한 매력을 가진 이러한 그림체는 자유분방하고 이국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적어도 다른 만화가들과 확실한 개성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었다.

원래부터 네 칸 만화(4コマ漫画)는 단순한 그림체로 유머를 표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1970년대 말과 80년대 초반에 파괴된 내용과 형식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개그 만화들이 쏟아져 나온다. <바이토 군(バイトくん)>의 이시이 히사이치와 <네안토피아(ネ暗トピア)>의 이가라시 미키오가 대표자다. 그들은 유혈이 낭자한 폭력과 노골적인 성생활을 즐겨 소재로 삼았고, 개인의 분노를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대사로 표현했다. (이가라시 미키오는 1986년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네 칸 개그 만화 <보노보노>를 발표하는데, 과격 일변도로 나아가던 개그 만화를 순수하고 담백한 동물 세계로 역전시켰던 것이다. 만화사 내적인 맥락으로 보자면 이 시도 역시 파괴적인 발상이었다고 본다.)

네 칸이라는 단순한 형식은 헤타우마 같은 자유분방한 스타일과 결합되기에 아주 좋았다. 요시다 센샤, 와다 라치요, 코지 완 같은 작가들은 거친 낙서 같은 그림으로 기성의 상식을 조롱하는 통렬한 만화를 그려냈다. 그림체의 자유도가 높아지다 못해 최소한의 형식미조차 무시하는 만화들이 인기를 얻게 되었고, 만화 잡지 편집부에서는 이를 비공식적으로 ‘팩스만화’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림체도 단순 간결하고 ‘미세한 톤의 느낌’ 같은 테크닉도 없었기에, 편집부에 팩스로 원고를 보내면 그걸 그대로 인쇄해도 될 정도라는 뜻이다. 21세기의 한국 병맛 만화의 파괴적인 그림체에서도 이와 유사한 퇴행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만화의 형식미를 파괴하는 모든 시도를 헤타우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헤타헤타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

 

이나중과 마사루, 병신미의 폭발과 한국의 수용
일본 개그 만화의 역사가 병맛스러운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왔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만화들이 한국 만화 창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상당수가 국내 독자에게는 생소한 작품들이고, <파타리로>처럼 일부 번역된 작품들도 상당한 시차를 두고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일본 만화의 번역 소개가 거의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면서, 동시대의 독자와 창작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게 된다. 병맛 계열의 국내 웹툰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아온 조석의 <마음의 소리> 연재 면에는 이런 소개가 적혀 있다. ‘마사루의 센스를, 이나중의 황당함을 뛰어 넘는다’ 바로 1990년대 양대 개그 만화 <멋지다 마사루>와 <이나중 탁구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물장구치는 금붕어’가 학원 청춘물과 개그를 결합시켜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어낸다. 주인공 남학생은 짝사랑 여학생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벌인다. 그런데 그 방법들이 벌거벗고 고백을 한다든지 하는 파렴치한 행동의 연속이다. 붙잡을 수 없는 행복 앞에서 미친 짓이라도 해야 하는, 절망과 자포자기의 정서는 1990년대 청춘 개그만화들에 큰 영향을 미친다.

모치즈키 미네타로를 ‘마음의 스승’이라고 하는 후루야 미노루는 <이나중 탁구부>를 통해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주인공들은 이자와, 마에노 커플을 중심으로 못 생기고 공부도 운동도 못하는 중학생 패거리다. 인기 없는 이들은 어떻게든 여자 친구를 만들어 보려 하지만 번번이 좌절한다. 친구들끼리의 방해도 방해지만, 각자의 마음 깊은 곳의 패배의식이 다리를 잡는다. 그러자 이들은 모든 면에서 자포자기하고 상황을 오히려 즐기기 시작한다. 어차피 노력해봐야 되는 일이 없으니 내 맘대로 즐겁게 살자, 그래서 온갖 파렴치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이나중 탁구부>는 형식적인 면에서도 한국의 병맛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 표현된 추남 추녀의 디테일은 1980년대 헤타우마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파격적인 형식미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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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중 탁구부>에는 콤플렉스로 찌든 루저의 마인드가 깊게 남아 있다. 묘하게 감정을 건드리고 진지함에 빠져들게도 만든다. 그러나 우스타 쿄스케의 <멋지다 마사루>에서는 그런 패배감을 완전히 떨쳐버린 자아도취의 세계가 펼쳐진다. 마사루가 전파하는 ‘섹시 코만도’는 그저 말도 안 되는 무술에 불과한 게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마주치는 모든 상황을 자기 식대로 해석해서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독창적인 철학이다. 처음에는 ‘저게 무슨 유치한 짓이지?’라고 혀를 차던 인물들도 어느새 마사루의 세계관에 감염된다. 병맛 만화의 중요한 코드인 ‘병신 같지만 멋있어’의 진수가 거기에 있다.

1990년대 개그 만화의 아나키즘 역시 만화의 기본적 규칙이나 한계까지 돌파하게 만들었다. 특히 내러티브의 해체가 두드러졌다. 망가타로(漫☆画太郎)는 <진유기(珍遊記)>를 서유기의 패러디로 시작했다가 점점 방향을 알 수 없는 막가파적 전개로 나아갔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지옥 갑자원>은 야구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도대체 왜 야구인지 알 수 없는 폭력과 살육의 잔치를 벌인다. 키타 야스아키의 <막장(幕張)>, <울어라 휘파람새> 역시 겉으로는 야구 만화인 척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작품의 내적인 구조가 존재하는지조차 의심해야 할 정도로 산만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원래는 아마추어적인 만화, 작가의 불성실과 무능력을 드러낼 뿐인 만화로 여겨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들 만화가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웃음은 독자들을 감염시켜버렸다.

이들 악취미, 부조리 개그 만화에는 가학적인 공격성과 무책임한 자유방임주의가 뒤섞여 있다. 그것은 어쩌면 현실 세계에서 철저히 패배자로 낙인 찍혀진 아이들에 대한 강한 애정의 산물일지 모른다. 자포자기에서 나온 온갖 괴팍한 행동들이 만화라는 링 속에서는 용납 받고 찬양 받는다. 더불어 관습과 규율에 옥죄어 있는 많은 소시민들에게 마음의 탈출구를 제공한다.

 

일본 개그 만화의 병맛 레시피와 한국 만화
21세기가 되면서 일본 사회는 정치, 경제는 물론 대중문화 전반에서 활력을 잃어버린다. 세계 최첨단의 전자 제품을 중심으로 음악, 게임, 애니메이션 등 여러 분야에서 서구를 위협하던 돌연변이 괴물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초식남, 건어물녀, 중년 동정 등 새로운 일본인 상을 그리는 용어들은 그 자체로 자괴와 자폐를 느끼게 한다. 어떻게 보면 현실 자체가 병맛스럽지만, 유머는 소실된 상태랄까? 만화 속에서도 과거와 같은 강력한 에너지는 보이지 않는다. 과격한 병맛 개그로 현실의 패배감을 돌파하겠다는 해방 의지도 사그라든 느낌이다. 물론 키타 야스아키의 <주먹에 산다>, 망가타로의 <진유기 2>, 사노 나미의 <사카모토입니다만> 등 자아도취나 막장 스타일의 병맛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만화 시장이 워낙 넓고 중층화되어 있기 때문에, 마이너한 취향을 반영하는 막장 만화들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러나 대중적인 파괴력을 보여주는 작품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현대 일본의 병맛의 진수를 보여주는 예는 마스다 코우스케의 <개그 만화 보기 좋은 날> 정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일본 개그 만화들을 통해 병맛의 핵심 요소들을 정리해보자.

첫째, 퇴행과 제멋대로. 병맛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정신연령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바보나 미치광이다. <멋지다 마사루>의 수염 낙서, <이나중 탁구부>의 이나중 환타스 놀이 같은 유치한 놀이가 무엇이든 마음껏 해도 된다는 해방감을 전해준다.

둘째, 악취미와 집요한 가학. <우당탕탕 괴짜 가족>, <지옥갑자원>의 주인공들은 도덕적 생리적 한계를 넘어 가학적인 공격을 펼친다. 독자들이 아찔한 공포를 넘어서며 그것의 터무니없음을 깨닫는 순간, 실소에 이어 폭소가 터져 나온다.

셋째, 패러디와 성상 파괴. <개구쟁이 데카>, <파타리로>, 이나중 탁구부>의 주인공들은 변태적인 상상력으로 온갖 변신을 거듭한다. 사회의 유명인사, 지배적인 예술 작품은 물론 인기 만화 자체를 파괴한다.

넷째, 낙서풍의 해체된 그림체. <호모호모 세븐>처럼 견고하고 정성스러운 그림체와 낙서풍의 그림체를 병치시키면서 아이러니를 유발시키거나, 아예 헤타우마 스타일로 완전히 제멋대로의 그림을 그린다.

다섯째, 관습적 서사구조 파괴. 가장 강력한 부조리 기법으로 기승전[병]이라는 내러티브의 파괴에까지 이른다. 격렬한 병맛은 초현실주의와 통한다.

여섯째, 자아도취와 병신미. 터무니없는 행동을 하는데, 그게 사람들에게 어떤 ‘멋짐’으로 받아들여진다. <멋지다 마사루>, <삐리리 불어라 재규어>, <사카모토입니다만>으로 계통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 만화계는 이러한 요소 중에 성과 폭력이라는 파격적 소재, 의도적인 키치 풍의 그림을 먼저 받아들였다. 이는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의 언더그라운드 만화, 독립 만화의 스타일과도 통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웃음을 위한 파격이라기보다는 파격 자체를 위한 파격에 가까웠다. 주류 예술과 만화에 반대하고, 사회의 도덕적 터부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다 2000년대의 여러 아마추어적인 만화들에서 유머로서의 파격이 터져 나온다. 이들은 과격한 패러디와 무책임한 내러티브로 엉뚱한 상황을 만들어내 인기를 모았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실력 자체의 일천함에서 나오는 거친 그림체는 그런 내용과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만화 창작의 주 무대가 잡지에서 인터넷으로 옮겨가면서, 전 시대의 관점에서는 작화나 스토리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 만화가들의 데뷔가 손쉬워졌다는 점이 병맛의 유행에 일조했다. 그러나 <열혈 초등학교>나 이말년의 여러 만화와 관련된 논란에서도 드러났듯이, 한국 사회의 표현의 한계는 일본보다 훨씬 좁다. 이는 병맛의 무조건적인 파괴를 제어하고 있다. 대신 병맛의 방향은 최의민의 <불암콩콩 코믹스> 같은 패러디나, <패션왕>의 자아도취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치료할 수 있는 병은 의사에게 가야 한다. 치료할 수 없는 병은 예술가에게 가야 한다. 그래도 안 되는 병은 만화가에게 넘겨라. 한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해체하는 것이 만화의 오랜 역할이었다.

 

 

이명석

만화를 비롯해 대중문화 여러 영역을 비평하고 있다. 저서로 [유쾌한 일본만화 편력기] [만화 쾌락의 급소찾기] [논다는 것] [어느날 갑자기 살아남아 버렸다] [여행자의 로망백서] [지도는 지구보다 크다] [도시수집가] [모든 요일의 카페] 등이 있다. 에 ‘요상한 전파사’ 칼럼을 연재 중이고, KBS 라디오 ‘신성원의 문화공감’ 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에 고정 출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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