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맛 만화, ‘한국형 재난’만화

by -
0 1043

병맛 만화, 실험만화?
언젠가 처음 ‘병맛 만화’란 단어를 들었을 때, 당연히 물었다. 그랬더니 ‘병신 맛 나는 만화’라는 것이었다. 에구머니나, 이런 말이. 여하간 이리 호칭되는 만화들을 찾아봤는데 그 어이없음이 정말,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작품들의 목적이 독자들에게 병맛을 전달하는 것이다 보니, 엄청 정돈되고 깔끔한 스타일을 보여줘서도 안될 터, 작화나 연출에 많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읽다보면 ‘어이없는 나름의 재미’를 야기한다. 이러한 만화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초기의 여러 작품들에 비하면, 특히 그림판 같은 것으로 그린 것 같은 작품들에 비해 최근의 병맛 만화들은 ‘상대적으로’ 형식적인 세련미를 가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 또한 병맛 만화는 기존의 만화작품들에선 발견할 수 없었던 성격들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실험만화의 새로운 태동을 그냥 지나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존의 이미 일반화되어버린 관습에 반기를 드는, 더 나아가서 자신의 토대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실천들을 우리는 실험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들은 다수의 사랑을 받는 작품들은 아니다. 보통은 잘 이해할 수도 없고, 재미도 없고, 어렵다. 그 문화예술 실천의 영역 안에서야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읽혀지겠지만, 개별적 독자나 관람객으로서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그다지 즐겁지 않을 만하다. 하지만 우리가 싫어한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노력 덕분에 고착화된 관습에 서서히 변화가 생기기도 하고, 평상시의 습관이 어떤 것이었는지 성찰하게도 된다. 그렇다면, 병맛 만화 – 다수의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실험만화의 일반적 경향에서는 벗어나 있긴 하지만, 만화작품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화창작의 일반적 관습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 볼 만한 여지가 있는 것 아닐까?

 

001컷부, <소년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통의 만화가들이라면 열심히 쓰고 그리고 연출하며,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보여준다. 만화라는 표현형식이 꼭 스토리를 전달해야 한다는 강제적 조항은 없지만, 대다수의 만화작품들이 주로 이야기 그 중에서도 픽션을 제공하다보니 만화는 원래 비현실적인 스토리텔링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정확하지 않은 상식적 지식이 압도적인 편이다. 대부분의 만화들이 재미와 감동의 제공을 목적으로 한다면, 병맛 만화는 병맛적 재미의 제공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병맛 만화는 보통 시각적 측면에서의 무성의성, 서사적 차원에서의 비논리성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무성의성이라 함은 역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맛이라는 특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못 그리는 것처럼 그리는 경우이다. 아주 간단하게 보이도록 그려내며, 섬세한 연출이나 아주 시간과 노력이 많이 투여된 것 같은 배경을 삽입하지 않는다. 병맛 만화의 서사적 특징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점이다. 사건이 진행될 때, 특정한 행위를 보면 독자들은 그 다음 행위를 가능한 범위 안에서 몇 가지로 추측한다. 그러나 병맛 만화에서의 다음이란, 종종 독자들의 상식적 전개 범위를 완전히 초월해야만 한다. 이러한 어이없는 감탄이 병맛 만화를 찾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맛 만화를 실험만화의 맥락으로만 읽는 것이 아주 적절해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장르는 만화라는 표현 형식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했거나, 만화의 일상화된 관습을 뛰어넘는 것을 의도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습화된 만화와의 차별적 요소들은, 병맛 만화가 의도하지 않았던 부수적인 효과로 보인다. 어쩌면, 심각한 준비과정이나 성찰 없이 주변의 자극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했을 뿐인데 그것이 독자들의 특정한 욕구들을 충족시킨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하게 보인다.

 

세상이 병신 같으니 병신 같이 놀아주마
우리의 주변은 온통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하며, 그 무엇보다도 불안하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라는 말을 초등학교 때부터 들었다. 그래봤자 대학에 들어가면, 또 주변을 돌아보지 말고 스펙 쌓기 무한경쟁에 돌입하라고 한다. 이렇게, 계속, 주변과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바대로 살아왔는데도, 졸업하면 대다수가 비정규직이거나 취업준비생으로 남는다. 취업난은 곧바로 사회적 안전장치가 불안한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학교에서 배운 도덕이나 윤리는 허구가 되고,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라는 말을 할 수 없다. 공동체 개념은 찾기 힘들고 개체들의 급격한 이기주의화만이 판을 친다. 한번 경쟁에 밀려나면 끝없이 추락할 것이라는 공포감은 우리를 질식시키고, 오래 살면 폐지를 주워야 한다는 불안감은 반복 강화 재생된다.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자살에 노출된 사람들은 크게 늘었다. OECD 자살률 1위. 이러한 사회에 대한 불안감은 사회 진출을 준비하고 해야 하는 10대, 20대 청년들에게서 가장 증폭되어 나타난다.

이를 청년들에게 닥친 ‘재난’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을 재난이라고 부를 것인가. 자연재해처럼 한꺼번에 닥친 것이 아니라 서서히 보이지 않게, 우리의 일상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재난 자체가 우리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키는 대로 했더니 우리의 사는 방식 자체가 이런 재난을 축적하게끔 만들어버린 것이다. 걸어가다가 갑자기 땅이 꺼질 때만 재난인 것이 아니다. 청년들이 어떻게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오로지 호구지책으로만 변질될 때, 미래가 너무나 불안하므로 너도 나도 공무원 시험에 원서만을 내밀 때, 계속적인 비정규직만 떠돌며 결혼도 육아도 모두 포기해야 한다고 느낄 때, 그러한 사회가 앞으로 조금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고 판단할 때, 재난은 이미 우리 안에 내재화되고, 육화(肉化)되고……. 그리고, 우리가 되어간다.

재난이 타자일 경우 오히려 쉬울 지도 모르겠지만, 재난이 우리들 속에 끈끈하게 여러 층으로, 다양한 형태와 무늬로 복잡하게 엮이고 얽혀 있다면, 이에 대해 각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들이 과연 무엇일까. 재난을 뿌리 째 뽑아내고 싶지만, 그럴 만한 수단도 방법도 모른다. 이 길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지만, 그렇다면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심지어 어떤 것이 길인지 아닌지도 뚜렷하지 않다. 그래도 재난이 외부에 있을 때 인류는 ‘비틀기’를 해 왔다. 방법이 없었거나, 방법을 모르거나, 또는 알아도 당장은 행할 수단이 없을 때 우리는 유머나 해학으로 외부의 재난을 비꼬곤 했다. 하지만 병맛은 해학이나 유머와는 그 결이 다르다. 후자들이 당장은 적절한 방법이 없어 웃고 넘어가지만 언젠가는 힘을 가지고 재난-비판의 대상-을 극복하리라는, 희미하나마 잠재적인 믿음 같은 것이 있다면, 병맛은 다르다. 비틀기나 비꼬기도, 그 대상이 뚜렷하고 힘이 쌓이고 경험이 축적될 미래가 온다고 믿을 때 가능하다.

002귀귀 <귀갤>, 칼잡이

 

문제는 대상이 뚜렷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구체적으로 보이는 대상조차도 너무나 비합리적일 경우이다. 말싸움을 하려고 해도 계속 말을 바꿔 버리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달리 말하면 병맛 나는 대상과 일반적인 방식의 싸움은 불가능하다. 싸워보기도 전에 힘을 다 빼버리는 방법은 전의를 잃게 만들 뿐 아니라, 우리도 병신으로 만든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병신이기에 저런 대상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귀귀는 그러한 우리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분명 A인데, B라고 우기는 사람을 만난다. 그러면 자신이 B가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 병신 같은 경우를 만나는 것이다. 심지어 증명을 하려고 하면 원래 말을 잘해서 속여 넘기는 거라고 듣지 않겠다고 한다. 정상적인 사람들을 팔짝 뛰게 만드는 이런 부조리한 상황. 그냥 별 미친놈 다 봤네 하며 지나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의 불행은 그럴 수 없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그 재난이 우리와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병맛 만화에는 자책, 자조의 내음이 옅건 짙건 깔려있다.

이렇게 본다면 병맛 만화는 우리 사회의 재난과 밀접하지만, 재난을 다루는 다른 작품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최근 연재가 완결되었거나 연재 중인 <1호선>, <노네임드>, <하이브>, <심연의 하늘> 등을 떠올려보자.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철저히 파괴되어있는 현재를 맞닥트린다. 주인공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현실의 불안감을 픽션, ‘완벽한 거짓말의 세계’에 펼쳐낸 것이다. ‘시각적 무성의성, 서사적 비논리성’은 이런 작품들에서는 발견하기 힘들다. 주인공들은 결국, 어떻게 해서건 결론과 결말에 도착할 것이다. 자연재해나 전쟁,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인재(人災), 폭압적이고 거대했던 군사독재 같은 사회적 재난도 극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가 만난 재난은 그렇게 명쾌하거나 깔끔하지 않다. 마치 모습을 계속 바꿔나가는 귀신처럼, 말로 바꾸고 몸도 바꾸며 우리 속에 숨어 우리를 희롱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병맛 만화를 한국형 재난만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런 재난과 만나고 있는 것이 우리뿐이라면 그렇게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가는 장르이기를
어쩌면, 해외에서도 이와 유사한 만화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많은 청년들이 사회진출을 포기했다는 소리를 들려줬던 만화왕국 일본의 경우라면 그 징조가 굳건해졌을 때,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 빨리 그런 작품들이 표출되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유사한 성격의 작품들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합리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분들은 분명 ‘지금, 여기’의 우리의 현실들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말년의 던전스트라이크 브랜드 웹툰 마지막 화를 보자. 이 게임을 마스터한 이말년에게 ‘여성가족오락부 건전게임 도우미’가 아줌마 형상으로 현현한다. 여성가족오락부가 여성가족부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이말년을 현실세계로 돌려보내려고 하자 이말년은 그에 항거하며 발언한다. 나는 현실세계에선 찌질이기 때문에 현실에 돌아가기 싫고, 게임세계가 더 좋다. 건전게임도우미가 말이 되는 소리냐, 여성가족오락부나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지 말고 현실을 눈 똑바로 뜨고 좀 파악해봐라. 이말년은 최소한 현실에서 찌질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여성가족오락부는 현실에서 자신이 어떤지조차 모른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003이말년, <맨 VS 던전>

 

아주 특수하고 지엽적인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태동한 이 병맛 만화의 향유자층을 해외로 확대할 수 있을까. 답변은 뻔해 보인다. 거의 불가능하다. 정확히 우리사회의 특수성에 기반한 작품들로써, 이 병맛은 이곳에서 살아보지 않은 이들이 공유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이를 제대로 번역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또한 매체 이전용으로도 참으로 쉽지 않은 작품군들이다. 병맛 만화를 창작하는 작가들은 이 스타일로 광고나 다른 작업들을 함께 참여할 수 있겠지만, 작품 자체를 드라마나 영화 등으로 제작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일반적인 스토리만화와는 달리 제한적인 내수용 작품군이다. 이렇게 보자면 너무 많은 병맛 만화들이 등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004윤인완, 김선희 <심연의 하늘>

 

게다가 우리는 작년에 생애 최고의 어이없음을 목격했다. 그 어떤 재해도 이렇게 끔찍하진 않았을 것이다.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월호는 침몰했고,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했다. 집단수장. 그러고도 1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그 원인을 모른다. 김선희의 이미지들은 어떻게 봐도 세월호를 잊으려는 이들에 대한 진지한 경고로 보인다. 재난의 일상화가 완전히 고착되어버리면, 이제 이곳은 지옥이 될지도 모른다. 병맛 만화는 재난이 일상이 되어가기 때문에, 세상이 점점 병맛 같아지므로, 이런 우리 현실에 대한 투명한 반영물인 셈이다. 한낱 한 개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니들도 병신이지만 이런 우리도 병신 같다는 자조. 상대방을 비판하려고 했더니 내게도 똑같은 비판꺼리가 있더라는. 그래서 상대방만을 욕할 수 없는. 타자를 비웃으며 동시에 스스로를 자조할 수 있을 때, 이때까지는 아마도 괜찮을지 모른다. 병맛같은 웃음이라도, 웃음은 웃음이니까. 하지만 세상이 완전히 병맛이 되어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병맛이 정말 일상이 되어버리면 병맛 만화는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거꾸로, 우리 사회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느끼고 청년들이 희망을 꿈꾸기 시작한다면, 마찬가지로 병맛 만화를 즐기는 독자들이 줄어들 것이다. 이 재난같은 세월이 지나가며 병맛 만화도 함께 지나가기를, 세월이 지나고 보면 이게 왜 웃겼던가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한상정

현재 상지대학교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크리틱 M의 편집위원들 중 유일하게 여성형태를 띄고 있다는 이유로 편집위원장이라는 무한 권력을 쟁취해냈다(그래서 매번 회의록 작성해야 한다나?). 일요일 일찍부터 일어나서 마당을 쓸고 닦고 나면 그제야 어머니의 허락 하에 아버지, 두 남동생과 함께 탐독하던 만화책들의 기억으로 만화사랑을 실천중이다. 이런저런 만화들을 골고루 보는 편이지만, 성별과 상관적으로 (이 대목에서 어떤 이들은 말도 안 된다며 구박한다) 꽤 오래 순정만화를 탐독하고 연구했다. 요즘은 장르 불문. 그러나 너무나 섬세해서 (거기, 얼굴 돌리지 마시고!!), 과다한 유사코드 반복 작품들은 3분도 견디지 못한다. 뭐라도 ‘새로운’것이면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니, 모더니즘으로 회귀 중 일지도...

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