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리셋할 수 있을까_ <환각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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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무언가 해야 한다고 느낄 때, 흔히 빠지는 것이 바로 ‘리셋’에 대한 욕망이다. 손봐야 할 곳이 너무 많은데 하나하나 바로잡느니 싹 갈아엎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려 한다. 스스로는 세상을 바로잡을 영웅이라고 생각하지만 악당이 되어버리는 순간이다. 이 악당을 무찌르는 사람이 영웅이 된다. <환각소년>은 ‘감정 세계’라는 낯선 공간에서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는 악당과 그들을 막으려는 영웅들의 이야기다.

 

약 빨고 그린 약 빠는 만화
작품 속에서 ‘약’(작품 안에서는 ‘의문의 설탕’으로 ‘감정초’의 가루다)은 중요한 요소다. 어느 날, 고등학생 강살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할아버지한테 설탕 한 봉지를 받는데, 그 의문의 설탕은 감정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다. 감정 세계에는 세상 모든 인간들이 가진 감정의 조각들이 살아간다. 현실 세계 사람들이 남긴 부정적인 감정들은 감정 세계 안에서 거대한 괴물이 되어 다시 현실 세계에 영향을 준다. 살별은 설탕을 맛본 뒤 감정 세계로 들어간다. 처음 들어간 세계였지만 상상력이 뛰어났던 살별은 바로 ‘기술’을 쓸 수 있었고 감정 괴물을 물리친다. 하지만 그 와중에 자기가 짝사랑하는 여학생의 감정 혼이 죽어 현실의 여학생도 죽게 될 위험에 처한다. 살별은 여학생을 살리려고 노력하는데, 검은 설탕을 몰래 유통하며 감정 세계에 혼란을 가져오는 세력의 음모가 서서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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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소년02-2여기서 감정초 가루는 감정세계로 들어가는 열쇠다. 검은 설탕에 숨은 비밀은 무엇일까?

 

만화 댓글란에 ‘작가가 약 빨고 그렸나 보다.’ 식의 말은 ‘포텐 터지다’ 등의 말과 같이 쓰이며 재미와 완성도가 높다는 찬사다. 여기서 빨았다는 약은 게임에서 캐릭터의 능력을 높이는 ‘물약’ 아이템 정도의 의미일 터이다. 작가 스스로 ‘약 빤 듯한 새로운 만화를 그리고 싶었다,’며 밝혔듯이 전작의 환상을 넘어서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새로운 판타지를 그려낸다.

하지만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점점 더 설탕을 찾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중독과 닮아있다.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가두려는, 벗어나려는 우리의 모습이다. 물론 감정 세계, 현실 세계를 구할 치료약으로 쓰이게 될 테지만.

 

감정이 죽어버린 세상, 그래서 죽어버린 세상
<환각소년>의 감정 세계에서는 감정 혼이 죽으면 현실 세계의 본체들도 7일 안에 죽게 된다.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면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르는 채 공허함에 빠져 자살 등 여러 방법으로 목숨을 잃는다.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 10대 청소년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인 나라. 2015년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작가는 ‘자살공화국’이라는 슬픈 현실의 원인을 이렇게 상상해 보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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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만 하는 밀실 책상에 갇혀야 하고, 초등학교도 친구의 자살을 겪는 현실이다

 

살별의 가장 친한 친구인 창기는 전교 1등이지만 엄마의 그릇된 집착은 커져만 간다. 그 때문에 마음에 상처는 점점 깊어지지만, 창기는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끝내 이 상처는 감정 세계를 크게 뒤흔들어 놓는다. <환각소년>은 따돌림과 폭력, 공부 스트레스 등에 짓눌린 10대들의 슬픔과 분노를 직시한다.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공부만을 강요받으며 사육되는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영화 <이퀼리브리엄>처럼 이성만 강조된 채 인간에게서 감정이 제거된 미래를 다룬 이야기들이 종종 나오는 것은 감정이 통제된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공포이기 때문이다.

 

리셋할 것인가, 고쳐갈 것인가
이런 면에서 보면 감정 세계를 지키는 기술자들이 감정(괴물)을 제거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감정 괴물도 현실에서는 괴롭힘을 당한 불쌍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검은 설탕’ 무리의 의도가 점점 드러나고 살별도 자기가 가진 기술자로서의 뛰어난 재능에 눈 떠가고 있다. 또 이제까지 없었던 모습과 능력으로 현실 세계 인물의 감정과 동화되어 감정 괴물로서의 엄청난 능력을 보인다. 그런 살별이 짝사랑을 위해 혹은 친구를 위해 어떤 결정을 할지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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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별은 타고난 기술자이기도 하고, 감정 괴물과 동화되기도 한다

 

주인공의 이름 ‘살별’은 혜성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이현세가 그렸던 ‘혜성’이 암울한 영웅이었다면, 손규호의 ‘살별’은 어렸을 때 큰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티 없이 밝고 명랑하다. 작가는 우리에게, 살면서 큰 슬픔과 고통과 분노와 만나게 되더라도 혜성(우울함)이 아니라 살별(밝음)이 되자는 제안하는 것은 아닐까.

이대연

출판사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만화책 사는 것이 거의 유일하게 취미. 웹툰에서 다음 이야기를 먼저 만나보시라는 꼬임에 빠져 핸드폰으로 결제 한도까지 가봤음. 최근엔 마블과 DC코믹스를 사 모으면서 월급을 탕진 중. 집에 가져가면 소박맞을까봐 사무실 책상 밑에 고이 모셔 둠. 졸라맨 수준의 실력으로 신티크를 탐내고 있으나 이혼 당할까봐 엄두를 못 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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