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그 가터벨트를 벗기지 마오”_<살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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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화가 좀 났다. 이 글에서 소개할 김종훈의 <살생부>를 읽다가, “역사 속 실존인물들 이름만 따온 픽션사극 ㅡ.ㅡ;;;” 이라는 답답한 댓글을 봤기 때문이다. 성인 인증해서 봐야 하는 만화인데 초등학생이 읽은 건가?! ‘극(劇)’이 무슨 뜻인지 아시는지. 이 분 최소 <홍길동전>을 실록으로 읽으실 분!

<홍길동전>은 대표적인 전기(傳奇) 소설인데, 현실에 허구를 섞은 스토리를 전기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전기가 하나의 장르로 정착되어 있다. 대표적으로는 개인적으로도 팬인 소설가 야마다 후타로의 연작소설 <인법첩(忍法帖)> 시리즈가 있다. 국내에는 만화화 한 <바질리스크 ~코가인법첩> 등이 번역되었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이순신을 암살하러 파견되었다가 그의 인품에 반해 전향한 닌자가 아내인 무당과 함께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암살하러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단편소설 <인법파왜병장(忍法破倭兵状)>도 있다. 이렇게 픽션과 사실을 뒤섞는 전기물의 수법은 <살생부>에서도 두드러진다.

 

살생부_가터벨트예를 하나 들자면 가터벨트다. 가터벨트는 18세기 임마누엘 칸트가 만든 것이다. <살생부>의 배경인 계유정란 이후의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는 옷인 데다가, 이 작품에서는 옷이 아니라 문신이다. 피에 독을 품어 관계를 맺을 때 나는 피로 상대를 죽이는 ‘처녀 기생 암살단’ 화접몽 4인방이 결의의 뜻으로 새긴 것이다.

전기적 수법으로 역사를 다루는 대표적인 만화로 <창천항로>가 있다. 이학인 원작, 킹☆곤타 작화로, 삼국지를 연의가 아닌 정사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비록 연재 초반부에 사망했으나, 이학인이 담당한 스토리 덕분에 킹☆곤타는 자신의 장기인 게키가(劇畵)의 수법을 이용해 마음껏 ‘전기(傳奇)적으로 놀 수‘ 있었다.제목 없음-1

게키가는 본래 1960년대 일본 오사카의 젊은 ‘극화가’들이 ‘성과 폭력’을 무기로 정념을 토해낸 ‘운동’이었다. 킹☆곤타는 이 게키가의 흐름을 잇는 작가다. 게키가의 주요 특징은 ‘과잉’이다. 연출도, 선도, 캐릭터도 모두 과하다. ‘사실’을 그려내기 위한 과잉을 이용해 킹☆곤타는 픽션을 물화한다. 동탁은 마왕과도 같은 ‘남근의 이상형’이고, 여포는 드레드 머리다. 비중이 얼마 안 되는 손부인은 호랑이를 타고 등장한다. 심지어 원술은 점점 원숭이가 되어간다.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의 자화상과 미야야 카즈히코의 <청춘상속인>. 간결하고 둥근 데즈카의 선이 만드는 ‘만화적 픽션’에 대항해, ‘극화가’들은 빽빽하고 거친 선으로 자신들의 리얼리티와 정념을 물화한 ‘사실’을 그리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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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향로>에서 동탁이 여포의 마음을 얻는 장면 / 손부인의 등장 신. 여기에 강한 오사카 사투리까지 구사한다 / 원술은 아예 원숭이가 되어버린다

캡처

<살생부>에서도 ‘과잉의 재미’가 돋보인다. 성과 폭력이 단순히 말초적인 자극에서 그치지 않고 보는 사람의 감정을 ‘과잉’시키도록 플롯도 탄탄하고 연재 분량도 넉넉하다.

이러한 연출이 사극으로서의 리얼리티를 깎기는커녕, 오히려 실록의 밋밋한 한 줄 문장을 ‘사실’로 꿈틀거리게 만든다. 픽션이라는 이유로 가터벨트를 벗기지 마라. 당신이 실록이 더 재미있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평범하게 잘 만들어진 웹툰을 읽고 재미있었다고 만족하고 싶으면, 당의정 벗기지 말고 <살생부>를 목 깊숙이 삼켜라. 속이 뻥 뚫린다.

 

 

<살생부>에서 보이는 ‘과잉’의 소소한 예. 다른 ‘사극’이었다면 점잖은 호통 치고 말았을 것이다. 덕분에 독자는 쉽게 인물에게 감정이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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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맨>(좌)와 <살생부>(우)

하지만 내가 <살생부>를 처음 보았을 때 떠올린 만화는 <창천항로>가 아니다. 첫 인상은 “이거 <데빌맨>인데?” 였다. <살생부>가 나가이 고의 <데빌맨>과 닮은 점은 상당히 많다. 주인공 이화와 후도우 아키라는 모두 인간과 이형의 존재 사이에 걸친 자들이며, 폭력을 무기 삼아 싸우면서도 인간의 마음을 잃지 않고 갈등한다. 선은 굵고 강하다. 연출은 구체적인 동작의 분해보다 속도감 있고 시원시원한 ‘액션감’을 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캐릭터는 하나 같이 개성적이다. 이 모든 요소가 감정적을 움직이도록 잘 구성된 플롯을 밟고 서 있다. 덕분에 ‘정념’과 ‘사실’이 더욱 현란하게 무늬를 드러내며 살아난다. 그렇다. ‘변칙’ 노선을 걷는 것 같이 보여도, <살생부>는 ‘정통’ 노선의 한복판을 걷고 있다.

“오늘따라 든든하게 먹고 싶은데?” 하고 찾아간 순대 국밥집에서 특으로 배부르게 먹는 경험과 닮아 있다. 작가가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다. 아니나 다를까,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살생부>는 시즌 2가 끝나고 두 번째 휴재에 들어갔다. 등장인물들의 과거사가 모두 정리되었고, 2015년 6월 28일, 시즌 3가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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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지상

소설가, 만화평론가, 칼럼니스트, 번역가.

주요 출간:
단편집 [당신의 苦를 삽니다], [데스매치로 속죄하라 - 국회의사당 학살사건], [스쿨 하프보일드], [일만킬로미터 너머 그대. 스토리 작법서 [스토리 트레이닝: 이론편], [스토리 트레이닝:실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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