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성적 욕망에 대한 만화적 판타지_ <나쁜 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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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가 됐어도 여성의 성적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유교적인 가부장제 전통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여성의 성적 욕망은 남성을 유혹하여 파멸로 이끄는 팜므파탈에게나 허용된 감정일 뿐이다. 만약 어떤 여성이 성적 주체성을 이야기하거나 성관계에서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한다면, 그 여성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 쉽다.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해지고 그만큼 사회적 위상이 높아져도 성적 욕망은 여전히 남성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성 의식이 개방적인 미국이라고 해서 별다를 바는 없다. ‘여성용 비아그라’로 불리는 여성용 성 기능 촉진제에 대한 미국 식품 의약국(FDA)의 최종 승인을 두고 미국 내에서 찬반 논쟁이 불거지고 있는 것이 2015년 6월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여성의 성적 욕망을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격정적이고 치명적인 방식으로 여성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고 은연중에 성관계에서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는 네온비의 웹툰 <나쁜 상사>를 주목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나쁜 상사>의 서사 전개 방식은 복수극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호스트 출신의 광고디자인 회사 팀장 권승규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대학 후배 김민을 상대로 복수를 결행하기 위해 김민이 사랑하는 대리 채영조를 자신의 노리개로 삼다가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는 내용이 선정적인 그림과 함께 대단히 자극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대학 시절 자취를 같이 할 정도로 친했던 후배 김민이 주식투자로 진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명의를 도용하여 빌린 사채 때문에 호스트로 전락하여 뭇 여성의 노리개라는 치욕스러운 시간을 보냈던 권승규의 복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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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승규가 김민에게 복수하는 과정에서 도구로 이용된 채영조의 여성성이 훼손되는 것은 기존의 남성 중심적 성 의식의 발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표면적인 서사 구조의 이면을 살펴보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김민을 향한 권승규의 복수와 권승규에게 대응하는 김민의 반격이 펼쳐지는 과정에서 실체가 드러난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나쁜 상사>의 지향점이 여성의 성적 욕망의 구현에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권승규는 30대의 젊은 나이로 팀장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능력은 물론 훤칠한 키와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면서 회사 내 여직원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지만,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인물이다. 대신 그는 호스트 시절 사용했던 ‘권승호’라는 가짜 이름으로 언제든지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섹스 파트너와 애정 없는 섹스를 하면서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메운다.

권승규의 여성 편력은 무릇 남성 중심적인 성 의식에서 비롯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호스트 시절 자신을 애완동물처럼 길들였던 여배우 백혜미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다. 섹스 파트너와의 격정적인 섹스가 끝내고 잠든 권승규가 백혜미의 성적 노리개로 시달리던 호스트 시절의 악몽을 꾸는 장면이 1화의 시작을 장식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백혜미로부터 탈출한 뒤에도 호스트 시절 그녀에게 사육 당하다시피 했던 악몽에 시달린다. 백혜미가 권승규의 내면에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꼴이다. 자신을 호스트로 전락시킨 김민에 대한 그의 복수심이 왜 그리 처절한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필사의 노력 끝에 백혜미의 그늘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던 권승규가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대학 후배 김민에게 잔인하게 복수하는 것은 김민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가졌다는 인식 때문이다.

김민은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광고디자인 회사의 팀장이 졸업 이후 소식을 알 수 없었던 대학 선배 권승규라는 것을 알아보고 울먹이며 인사할 정도로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순수한 청년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대학 시절 함께 자취하던 선배 권승규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주식에 투자했다가 날리고, 급기야 대부 업체에서 권승규 명의로 사채를 빌렸다가 도망친 전력이 있는 인물이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저간의 상황을 알리는 문자를 보내고 잠적한 뒤로 소식을 알 수 없었던 선배 권승규의 성공한 모습을 보고 안도하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사과할 정도로 그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다. 그동안 마음의 짐을 안고 살면서 걱정했다는 말을 건네면서도 대학시절의 투자가 자신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스스럼없이 강조할 만큼 이기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다. 물론, 영어 학원에서 알게 된 채영조를 짝사랑하면서도 마음을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순수한 면이 있지만, 사랑의 감정마저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할 정도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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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선후배 사이인 권승규와 김민은 성장 환경과 성격이 전혀 다른데다가 사채를 매개로 악연을 맺게 된 인물이지만, 여성의 시선에 최적화된 남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권승규는 직장 내의 여직원들은 물론 호스트 시절 여배우 백혜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탁월한 외모와 자상하고 예의 있는 품성의 소유자이다. 동시에 그는 잠자리에서 여성을 육체적으로 만족시킬 정도로 남성적인 매력을 자랑한다. 그만큼 부드럽고 자상한 남자와의 거칠고 공격적인 섹스에 대한 여성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한 인물이다. 반면에 김민은 비록 자기중심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채영조와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누나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한 소년의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권승규에 의해 파국으로 치닫기 전까지 채영조를 향한 김민의 사랑이 낭만적인 감정이었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여성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여성의 성적 욕망이 만들어낸 남성이라는 점에서 여성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된 존재이다. 권승규의 전직이 여성의 성적 노리개인 호스트라는 것이 바로 그 방증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권승규와 김민은 표면적으로 복수극의 서사 구조를 이끌어가는 주동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면을 살펴보면 이들은 그저 여성의 욕망에 의해 희생되는 남성에 지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권승규가 자신을 호스트로 전락시킨 김민에게 복수하는 과정에서 실체를 드러내는 여성들은 대부분 성적 욕망에 관한 자의식이 강한 인물들이다.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중견 여배우 백혜미와 떠오르는 신예 스타 루미나, 그리고 백혜미와 비슷한 이미지의 주세연은 성적 욕망에 있어서만큼은 남성을 능가한다. 그녀들은 모두 대단히 적극적인 자세로 권승규와의 섹스를 주도한다. 심지어 모태솔로로 불릴 정도로 남자와의 관계에서 숙맥인 채영조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 권승규와의 섹스를 욕망할 정도이다. 물론 채영조의 성적 욕망이 여자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권승규의 의해 유도된 것으로 비칠 수 있으나, 그녀의 욕망에 의해 권승규와의 섹스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채영조 또한 섹스의 최종 결정권자라는 점에서 <나쁜 상사>의 주요 여성 인물들은 성적 욕망에 관한 주체성을 확보한 인물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백혜미와 주세연이 권승규를 파멸시키는 여성인 반면, 루미나와 채영조는 권승규에게 도움을 주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차별화가 이루어진다. 백혜미는 불감증에 걸린 여성으로, 권승규가 다른 여성들과 집단 섹스를 하는 것을 보며 만족감을 느낀다. 그녀의 이러한 변태적인 섹스 성향 때문에 자존감이 짓밟힌 권승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탈출을 모색한다. 애완동물처럼 사육하던 권승규가 탈출한 뒤에도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은밀하게 행방을 수소문하던 끝에 운명처럼 다시 만난 백혜미는 그에게 이렇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공허했던 마음이 널 소유하고픈 욕망으로 완벽히 채워졌지. 네 연인이 아니라 주인으로, 제 3자로 그 아름다움을 계속 보고 싶었어. 모두에게 과시하면서!”라면서 권승규가 자신의 소유물이었음을 강조한다. 백혜미에게 권승규는 “내 것이 되기 위해 태어나고 살았던 사람”일 뿐이다. “정복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불쌍한 인간”이라는 권승규의 반박 따위가 그녀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백혜미는 권승규의 내면 의식을 장악한 지배자와 같은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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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혜미에 대한 권승규의 강박은 그의 섹스 파트너인 주세연과의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호스트 권승호가 아닌, 광고디자인 회사 팀장 권승규로 승승장구하면서도 권승호라는 이름으로 만나는 섹스 파트너 주세연이 백혜미와 비슷한 이미지의 여성이라는 사실은 그의 내면 의식에 백혜미라는 존재가 그를 얼마나 강력하게 억압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권승규는 주세연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지 관계를 맺고 끊을 수 있는 섹스 파트너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주세연의 감정이 집착으로 이어지면서 상황이 돌변한다. 그녀는 백혜미와 마찬가지로 권승규를 자기 소유로 생각하면서 그와의 섹스에 빠져든다. 주세연은 섹스를 통해 권승규와의 일체감을 느끼지만, 섹스가 끝난 뒤 서둘러 자리를 떠나는 그의 행위는 그녀의 집착을 자극한다. 결혼을 통해 권승규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은 주세연의 바람이 권승규에 의해 완벽하게 차단되고, 자신을 따돌리는 권승규의 행동에 그녀는 살인 충동을 느낄 정도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이처럼 겉으로는 권승규와 주세연의 관계의 주도권이 권승규에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따져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백혜미에게 덜미를 잡힌 권승규를 의식불명 상태에 빠뜨리는 것은 다름 아닌 주세연이기 때문이다.

백혜미와 그녀를 닮은 주세연에 의해 파국으로 치닫던 권승규를 구원하는 존재는 바로 채영조이다. 애초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운명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김민에게 복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던 채영조가 아이러니하게도 파국 직전의 그를 구원하는 것이다. 김민이 짝사랑한다는 이유로 권승규의 먹잇감이 된 채영조는 화려한 외면과 달리 결핍과 상처투성이인 권승규를 감싸 안는다. 그녀는 권승규가 자신을 복수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주세연의 칼부림 때문에 의식불명 상태로 병상에 누워 있는 그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면서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결핍을 채워준다. 권승규에게 이용당하고 그토록 순수했던 김민에게 강간을 당하면서 상처를 입지만, 채영조는 정신과 상담을 통해 상처를 거름 삼아 자신의 내면을 다지면서 주체성을 확고히 한다.

 

권승규와 김민의 복수혈전이 마무리 된 뒤에 NEONA광고디자인 회사를 퇴직한 그녀는 다시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생각에서 ‘리셋(reset)’과 ‘리스타트(restart)’란 의미를 담아 ‘RS 광고디자인 회사’를 설립한다. 그리고 2년간의 병원 생활 끝에 퇴원하여 커피전문점에서 일하는 권승규를 찾아와 AE(account executive) 자리를 제안한다. “당신과 나는 이미 끝났고, 당신에 대한 감정도 모두 정리했지만, 연인이기 이전에도 당신 재능을 존경했기에 월급을 많이 주지는 못해도 경력을 참작해서 대우하겠다.”고 말한다. 자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여성으로 완벽하게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녀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를 돌아보는, 밝고 화사한 채영조의 상반신이 전체 서사의 마지막 컷을 장식하는 것은 <나쁜 상사>가 채영조의 성장서사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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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마음 맞는 남자들과의 섹스를 주도하면서 자신의 성적 욕망에 충실했던 루미나는 배우로 재기하여 3년 뒤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승승장구한다. 루미나 때문에 대상을 놓친 남자 배우의 팬클럽의 항의를 받고 “자꾸 그러면 확! 니네 오빠랑 사귀어버린다!”라고 농담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자기 마음이 무시당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때마다 폭발적인 광기에 사로잡히던 김민은 끝내 살인 미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다. 그리고 출소를 일주일 남겨 둔 상황에서 연예계를 떠난 백혜미의 공허감을 달래줄 존재로 지명된다. 그는 과거에 권승규가 누렸던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백혜미 측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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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나쁜 상사>의 여성 인물들은 성적 욕망에 솔직한 태도로 자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반면에 전체 서사의 중심에 놓인 남성 인물 권승규와 김민은 서로를 향한 복수전으로 소멸되는 존재들로 그려진다. 극한 대립 끝에 파국으로 치닫던 두 사람을 채영조와 백혜미가 거두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바로 <나쁜 상사>의 서사 주체가 여성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 만큼 권승규와 김민은 여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성의 성적 욕망이 만들어낸 꼭두각시가 바로 <나쁜 상사>의 남성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죄를 잊은 그에게 선사하는 잔혹한 선물, ‘그녀를 뺏는다’.”라는 <나쁜 상사>의 헤드카피는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성의 성적 욕망의 서사시”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윤석진

2000년 8월 한양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2004년 가을부터 현재까지 충남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임. 2004년 9월 주간지 [시사저널]에 ['캔디렐라’ 따라 울고 웃는다]를 발표하면서 드라마평론을 시작하여 [미디어오늘], [월간 에세이], [광고1번지] 등의 매체를 거쳐 2013년 9월부터 현재까지 [문화일보]에 ‘윤석진 교수의 드라마 세상’이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음. ‘서울드라마어워즈’와 ‘대전드라마페스티벌’ 심사위원과 ‘MBC시청자평가원’을 역임하였음. [2000년대 한국 텔레비전 역사드라마의 장르 변화 양상 고찰1], [TV드라마 내조의 여왕의 희극성 고찰] 등의 논문과 [김삼순과 장준혁의 드라마 공방전], [TV드라마, 인생을 이야기하다] 등의 드라마평론집을 출판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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