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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신>

보이즈 러브(Boys’ Love), BL, 혹은 야오이(やおい). 여성 향유자를 위해 제작된 남성 간의 동성애 장르를 의미한다. 만화, 소설, 게임, 드라마 CD, 애니메이션, 실사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 걸쳐 발표되나, 한국에서 주로 유통, 소비되는 BL은 만화와 소설 출판물이다. 한국에는 90년대 초중반에 일본 만화 해적판 및 PC 통신의 소설 번역 공유로 유입되었으며, 90년대 말부터 현대지능개발사를 필두로 다량의 BL 만화와 소설이 정식 출판되고 있다. 2005년 만화산업통계연감에는 만화 장르 통계표에 ‘야오이’가 포함되었고, 대형 인터넷 서점의 카테고리 구분에 보이즈 러브(BL)가 추가된 것도 최근의 일이 아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순정만화잡지인 서울문화사의 <윙크>와 대원씨아이의 <이슈>도 200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BL 작품을 게재하고 있다. 특히 2007년은 <이슈>의 앤솔로지 <순애보 시즌 2: boy’s love>를 통해 나예리, 이시영, 심혜진 등 저명한 한국 순정만화 작가들의 BL 작품이 발표되었고, 절대교감의 BL 계간지 <뷰티풀 라이프>가 창간된 의미심장한 해였다. 한편 2006년에는 영화 <왕의 남자>, 그리고 2007년에는 뮤지컬 <쓰릴 미>의 흥행으로 문화 전반에 동성애 코드, 특히 여성이 소비하는 남성 호모 에로틱 동성애 코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2009년 즈음에는 남성들 간의 애정에 가까운 우정을 의미하는 미국의 신조어 ‘브로맨스’가 한국에도 소개되어 연예 기사를 중심으로 빈번히 사용되기 시작되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은 여주인공 성시원이 H.O.T 멤버들을 동성애 관계로 그린 팬픽을 써서 PC통신에서 공유하고, 그것을 프린트해 반에서 돌리다가 선생님에게 들켜서 망신을 당하는 장면을 통해 90년대 야오이 동인 문화를 묘사했다. 2015년 1월에는 BL 향유자 여성들이 BL 팬덤에 대해 논하는 비정기 간행물 <잡지 후조>를 출간하기도 했다. 이처럼 BL은 한국 서브컬처의 중대한 한 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팬덤도 주류문화에 점차 노출되며, 스스로 ‘커밍아웃’하기를 선택하는 등 산업적,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영향력이 가시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BL에는 대체 어떤 매력이 있기에 꾸준히 다양한 매체에 걸쳐 호응을 얻는 것일까? 그리고 BL이 현대 한국 사회와 문화산업에 가지는 함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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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나무의 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BL의 기원을 살펴보아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에 유입된 BL 문화는 일본을 통해 들어왔으니 일본의 BL 역사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일본의 BL은 대략 70년대의 소녀만화와 동인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소위 꽃의 24년조라고도 불리는 1949년생(쇼와 24년생) 소녀 만화가들의 작품 중 타케미야 케이코의 <바람과 나무의 시> (1976), 하기오 모토의 <토마의 심장> (1974), 야마기시 료코의 <해 뜨는 나라의 천자> (1980)가 남성 동성애를 중심적으로 다룬 것으로 보이즈 러브의 시초로도 꼽힌다. 그 바탕은 초기부터 젠더에 대한 유동적이고 실험적인 요소가 있었던 일본 소녀 만화의 역사와, 70년대 일본에 유행한 서구의 탐미적인 동성애 코드 영화에 기한다. 가령 데즈카 오사무의 <리본의 기사> (1953)는 남자아이의 마음과 여자아이의 마음을 동시에 가진 남장한 공주의 이야기인데, 여성 배우들만이 출연해 남성의 역까지 소화하는 타카라즈카 가극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그리고 타케미야, 하기오 등의 24년조 만화가들은 70년대 일본에서 동성애 묘사로 화제가 된 유럽 영화 <특별한 우정> (1964)과 <베니스에서의 죽음> (1971)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실제로 그 영향은 소년들 간의 동성애 혹은 호모에로틱한 관계 외에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낭만적인 유럽 풍경, 남자 기숙사 학교의 묘사, 탐미적인 정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여성향 상업만화의 남성 동성애 코드의 인기는 1978년에 동성애를 주제로 한 만화, 소설잡지 <쥬네(JUNE)>의 창간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한때는 여성향 남성 동성애물 전반을 ‘쥬네’라고 부를 정도였다. 현재도 <쥬네> 연재작들의 전반적인 특징으로 꼽히는 비극적이고 진지하며, 바탕에 파멸적인 탐미성을 깔고 있는 여성향 남성 동성애물을 ‘쥬네’라고 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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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BL의 또 다른 뿌리인 동인문화, 즉 아마추어 창작자의 세계 안에서는 70년대부터 이미 원작이 있는 작품을 가지고 동성애 코드의 농담을 넣는 패러디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처럼 원작이 있는 작품을 차용하거나 각색한 창작물을 (동성애 코드의 여부와 무관하게) ‘2차 창작’이라고 한다. 1975년 코믹마켓 개최를 시작으로 동인 시장이 크게 성장하자 기존 캐릭터들을 성적으로 묘사한 동인지도 늘어났고, 이 중에는 <기동전사 건담> (1979) 등 당초 소년향으로 제작된 작품의 2차 창작물이 많아서, 기존 소녀만화 독자가 아닌 외부인의 시선에 여성향 남성 동성애 만화가 들어오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그러한 팬덤 외부인의 시선에서 성적인 동성애 묘사가 많은 동인지를 가리키던 “야마(극적인 부분)도 없고, 오치(반전)도 없고, 이미(의미)도 없는 저급한 만화”라는 멸칭이 ‘야오이’의 어원이다. 80년대에는 인기 소년만화 <캡틴 츠바사> (1981)의 동인지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그 동인지를 정리하고 카테고리화하는 과정에서 캐릭터 사이의 연애관계를 가리키는 ‘커플링’ 및 그 관계 내에서의 역할 분담인 ‘공(攻), 수(受)’ 개념이 성립된다. 주로 성행위에서 성기를 삽입하는 쪽을 공, 성기를 흡입하는 쪽을 수라고 하는데, 반드시 작중에 성관계가 묘사되지 않는 경우라도 정신적인 관계 등 복합적인 의미에서 이런 구분을 사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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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는 이 두 개의 뿌리가 본격적으로 서로 얽히게 되는데, <쥬네>의 성공과 야오이 시장의 성장, 80년대 동인 작가들이 상업 작가(동인 작가와 대비되는 의미로, 프로 작가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상업지’는 동인지와 대비되는 의미로 이윤 창출이 목적인 출판사의 잡지를 의미한다.) 로 데뷔한 점 등 여러 가지 요소가 겹쳐져 90년대에는 비블로스의 <매거진 BE×BOY>, 잣소샤의 <파후(ぱふ)>, 타케쇼보의 <레이진(麗人)>, 호분샤의 <하나오토(花音)> 등 다양한 BL 잡지가 창간된다. 이 중 가장 창간년도가 앞섰던(1993년) 비블로스는 자사의 작품 장르를 개척자이자 경쟁자인 <쥬네>라고 부를 순 없었고, 그렇다고 어원적으로 멸칭이자 아마추어 동인 세계에 뿌리를 둔 ‘야오이’를 사용하는 것도 꺼려져서, 대신 소년들의 사랑이라는 의미로 ‘보이즈 러브(ボーイズラブ),’ 줄여서 ‘B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초 상업 잡지들이 채용한 용어인 BL은 상업지 창작물을 의미하다가, 현재는 단어 자체가 일본 밖으로도 널리 퍼져 상업지, 동인지, 매체에 무관하게 ‘여성 향유자를 위해 제작된 남성 동성애물 전반’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에 따라 상업지의 BL은 ‘상업 BL’로 구분되어 칭한다. 일본에서 BL은 만화, 소설을 넘어 게임, 드라마 CD, 애니메이션, 실사 영상매체로 제작되고 있다. 인기 원작을 기반으로 <타쿠미군 시리즈>, <후지미 교향악단>, <부디 내게 닿지 않기를> 등이 실사 드라마 및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7월에는 인기 BL 만화 <세븐데이즈>의 실사 영화판이 개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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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븐데이즈> 영화 실사판
2013년 당시 일본 BL 시장의 규모는 214억 엔으로, 전자서적 시장이 증가하는 추세이고 동인지 매상 역시 상승 중이다. (링크: 클릭)

 

90년대에 유입된 일본의 BL 문화는 한국 동인계와 만화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80년대에 들어와 창작보다는 패러디, 2차 창작이 주류가 된 일본의 동인 시장과는 달리 80년대~90년대 초반 한국의 동인계는 프로 작가를 지향하는 80년대 아마추어 만화 창작자들의 모임에서 기인하여 전적으로 창작 작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와중에 야오이 만화 <절애>의 파격적인 성애 묘사와 주인공들의 파멸적이고 극단적인 애증관계는 90년대 한국 여성 독자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물론 순정만화도 연애를 다루어 왔지만 압도적으로 이성애 관계에 국한되어 있었고, 노골적인 성애 묘사도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동성애’와 ‘여성 만화독자를 위한 성애 묘사’라는, 90년대로서는 터부에 가까운 요소들이 성적으로 억압되었던 여성 독자들에게 새로운 향유, 표현 수단으로 다가온 것이다.

또한 90년대에는 <슬램덩크> 등의 인기 만화와 SNK와 캡콤의 격투게임 등 인기 게임의 동인지나 2차 창작 앤솔로지가 대다수 무단으로 번역·출간되었는데, 이는 일본의 활발한 동인계를 한국 독자들이 직접적으로 접하는 창구이자 2차 창작 문화의 확장에 기여하였으며, 한편 개중에는 BL물도 적잖이 있어 2차 창작으로서의 BL이 소개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창작 동인단체의 쇠퇴와 일본 동인 행사 코믹월드의 한국 개최 등 복합적인 요소로 한국 동인만화의 주류가 창작에서 2차 창작으로 전복되는 과정에 한국에 자리 잡은 BL은 창작 소설 동인, 상업지 만화, 2차 창작 동인에 각자 수용되어 한국에 정착하게 된다. 90년대 순정만화잡지에 연재된 (1995), <쿨 핫> (1996), <M&M> (1997), <마틴 & 존> (1998) 등의 작품은 정도의 차이는 있고 대다수가 남성 동성애 관계를 중심적으로 다룬 본격적인 BL 장르로 구분하기에는 모호한 점이 있으나 BL 코드를 채용해 여성 독자 취향의 남성 동성애, 혹은 그런 암시가 있는 관계 및 묘사를 그려내, 한국의 주류 만화계에도 미친 BL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로, 아마추어를 넘나들며 걸쳐진 이러한 기틀에 90년대 후반 일본 BL 상업 만화의 대량 정식 발매가 21세기의 BL 시장의 확장으로 이어진 것은 자명하고, 주류문화 속의 여성 취향 동성애 코드의 유행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다.

흔히 BL의 어필 요소는 여성들을 위한 포르노, 주 향유층이 여성이므로 성기를 흡입한다는 측면에서 ‘여성’ 역할에 해당하는 수에 이입한다는 점, 이성애자 입장에서 본 동성애의 ‘금단성,’ 그리고 때로는 가부장제에 대한 반발이 꼽힌다. 분명 BL에 이런 요소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인기 장르가 그렇듯이 그것만이 BL의 전부도 아니고, BL 향유자들이 느끼는 매력을 설명하기에는 전적으로 부족한 구분이다.

우선 첫번째 요소를 살펴보자면, 한국에 비해 성애 묘사에 훨씬 개방적인 일본 시장에서도 판매율이 높은 BL 상업 만화 중에 47%는 성행위가 묘사되지 않는다. 반면 성행위가 묘사되는 것은 46%로, 거의 반반으로 나눠지는 셈이다. 성행위 묘사도 남성향 상업지 에로 만화의 묘사만큼 적나라하고 구체적인 수위는 많지 않다. 그 성행위도 연애를 전제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비율이 70%이며 강제적, 폭력적인 행위는 3%에 불과해, 각각 38.1%, 18.8%인 남성향 상업지 에로 만화와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링크: 클릭) 즉 BL은 ‘포르노’뿐만 아니라 ‘로맨스’ 장르로서 소비되는 복합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그리고 BL의 공/수 개념은 분명히 대다수가 이성애자 여성인 BL 향유층이 자신에게 익숙한 이성애적 젠더 관계를 동성애에 적용한 측면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전적으로 수 캐릭터에만 이입한다는 전제는 오해다. 오히려 독자가 공, 수, 관음자의 관점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점, 즉 주체성의 유연함이야말로 BL의 진정한 강점이자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덮치는 수’ 같은 취향이나 공/수가 전복되는 것을 즐기는 ‘리버시블’ 취향도 존재하니 일종의 젠더 유희적 측면도 존재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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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BL 향유층이 동성애의 ‘금단성’에 끌린다는 지적은 특히 BL 발생 초기에 유효하다. 한일 양국 다 현재보다 훨씬 동성애를 터부시했고, 보수적이고 다양성에 대한 수용도가 극히 낮은 사회적 특성상 커밍아웃한 공인은 전무하거나 커밍아웃을 하더라도 부당한 비난을 받으며 매장당하기 십상이었다. 공교롭긴 하지만 이런 점이 향유자들에게 동성애가 강렬한 로맨스 요소로 소비된 원인이었으며, 특히 <쥬네> 작품들이 극단적인 탐미성과 비극성에 치우친 경우가 많은 것은 동성애 그 자체를 금단적인 터부로 여기는 당시의 이성애적 편견이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90년대를 기점으로 일본 BL 업계에는 동성애의 금단성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짚고 넘어가거나 심지어 아예 언급하지도 않는 밝은 해피엔딩 위주의 작품이 증가하게 되었고, 정작 <쥬네>의 흔적은 한국의 일부 창작 동인 BL 소설에 남아 있다. 이런 변화는 현실의 성 소수자 인권이 개선된 영향이라기보다는 트렌드의 변화 및 유희적인 BL 패러디를 즐기던 동인 출신 작가들이 다수 상업지에 진입한 점과 더 유의미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편 이전에는 ‘동성애’는 묘사하되 캐릭터를 ‘동성애자’로 규정하는 것을 기피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필 좋아하는 A가 남자인 경우’를 강조하는 작품이 많았으나, 21세기부터는 “원래 남자를 좋아해서 A를 좋아하게 된 경우,” 즉 스스로가 동성애자임을 인식, 수용하는 캐릭터가 증가하는 추세가 보여 그나마 유의미한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인권 인식 향상으로 잇기에는 무리고, 실제 21세기에 비약적으로 늘어난 동성혼 등 동성애 관련 이슈의 미디어 가시성 증가가 그 원인일 수도 있고, 단순히 더 세련되어 보이거나 전개상 편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동성애 이전에 BL 자체가 가지는 ‘금단성’ 혹은 ‘전복성’은 여전히 간과할 수 없는 매력 요소인데, 2차 창작으로서 BL이 가지는 특성 때문에 그렇다. 즉 원작에는 건전한 친구 사이거나, 아니면 심지어 적대하는 사이고 전혀 성적인 관계로 그려지지 않는 남성 캐릭터들을 2차 창작에서는 커플링으로 만든다는 쾌감이다. 한편으로는 제작사 측에서 이를 인식해 의도적으로 ‘브로맨스’를 강화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가부장제에 대한 반발에 관해서는, 아마도 의식적으로 정치적, 계몽적 목적을 가지고 가부장제를 타파하기 위해 BL을 즐기는 BL 팬은 거의 없겠지만 (정치 운동으로써는 별로 효율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식의 계몽운동이었다면 BL이 이렇게 오래 존속하지도 못 했을 것이다), 반면 BL 문화 자체가 가부장제와 전혀 무관하다고 한다면 그것 역시 틀린 말이다. 일본에서 소년 동성애가 묘사된 소녀만화가 그려지던 70년대에, 미국에는 <스타트렉> 여성 팬덤을 중심으로 원작의 남자 캐릭터들을 연인 사이로 엮는, BL과 유사한 슬래시(slash)라는 장르가 탄생했다. 비록 한국에는 일본의 BL 문화가 직접 유입되긴 했으나 한국 독자들이 그에 공명하게 만드는 배경이 존재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창작, 소비, 향유된 것이다. 즉 딱히 의도적으로 가부장제에 반발하기 위해 BL을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BL 문화의 기저에는 가부장제 속 젠더 관계에 대한 불만이 전제되어 있다. 정확히는 여성에게도 법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교육이 보장되고 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문화매체나 실제 사회적 관계에 있어 평등이 보장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이상적인 이성애 로맨스를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에게 일종의 충족감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장르 중 하나가 BL인 것이다.

이런 복합적 전제를 내세우는 이유는 보편적 교육이 보장되어 있어야 다수의 여성이 콘텐츠를 구독하고 생산할 수 있고, 여성의 경제활동이 가능해야 취미를 위한 소비를 할 수 있으며, 자본적 인프라가 존재하고 통신 기술이 발달해야 동인들 사이의 교류가 가능하고 상업적 업체들의 시장 확장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현실적으로 여성은 뿌리 깊은 가부장제와 그에 기반을 둔 보수적 성 역할, 각종 성차별, 남성과 여성의 성에 대한 이중잣대에 규제당한다. 70년대 일본 소녀 만화가들이 소년의 육체로 성애를 그린 것은 그런 각종 규제를 우회하면서 깨부수고 성을 탐구하려는 날갯짓이었고, 90년대 한국 여성들에게 있어 BL은 여성의 육체에 비해 훨씬 자유로우면서 거리감이 존재하는 안전하면서도 위험한 남성의 육체를 통해서, 그리고 그 육체의 소비를 통해서 열린 새로운 미학적, 젠더적 개척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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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인 2차 창작에 남성 캐릭터들을 엮는 커플링이 탄생한 이유는 물론 전복의 쾌감도 있지만 무엇보다 여성 캐릭터가 취약했기 때문이다. BL 2차 창작이나 슬래시의 주된 대상이 되었던 작품은 소년만화나 SF 시리즈 등 주로 남성 독자나 시청자를 타깃으로 만들어졌고, 여성의 등장이 없거나, 비중이 적거나, 혹은 여성의 입장에서 봤을 때 성차별적이고 불쾌하게 묘사되었고, 진정 유의미하고 진실된 관계는 주인공과 그 남자 동료, 라이벌, 혹은 적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남성 중심적 이야기들이 다수였다.

남성들 사이의 동성 사회적(homosocial) 관계는 남성 집단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고, 이 안에서 여자는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남성들 간의 경쟁에 필요한 트로피나 동맹에 필요한 정략결혼의 대상 등 남성들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도관(導管) 역할만 부여된다는 것이 남성 동성 사회성 이론인데, 굳이 소년만화가 아니더라도 이런 구조를 내면화한 이야기와 매체는 많았고, BL 향유 여성들은 그 안에서 진실 되고 중요한 관계는 결국 남자들 사이의 관계라는 것을 제대로 간파한 셈이다. 물론 BL은 언제까지나 유희적 문화이므로 향유자들은 당연히 기존 체제를 전복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신 2차 창작을 통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남자 캐릭터들을 조종해 이어주는 ‘주체적 도관’으로서의 놀이를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으로 BL의 기원과 향유 배경에 관해 살펴보았다. 분명히 BL 코드는 주류문화에도 증가하고 있고 BL 팬덤 역시 점차 노출되는 경향이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의 서브컬처에 대한 편견과 그에 대한 피해 의식으로 이런 노출을 두려워하는 팬들도 있다. 앞서 BL의 기원은 분명 가부장제에 대한 불만에서 출발했다고 기술했지만, 현재에는 그런 인식 없이 순수하게 미학적이고 성적으로 매력적이라서 향유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현실 속 성 소수자 이슈가 BL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점은 알 수 있지만, 반면 BL이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생성하면 모를까, 역으로 성 소수자의 인권 개선에 발전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렇다고 BL이 동성애의 존재를 부정하고 동성애자를 단죄하자고 외치는 종류의, 없어져야 마땅할 혐오 매체라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확실한 점은 BL은 다소 기묘한 방식으로 자본주의 현대사회 속의 여성들이 남성 중심적 구조를 살짝 비틀고 놀리며 유연한 정체성과 주체성을 즐기고, 안전하면서도 스릴 있게 남성의 육체를 욕망하며 성과 젠더에 대해 탐구하는 유희와 표현과 실험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유희가 어쩌면 개개인의 생각과 사교의 폭을 넓힐 수는 있고, 적어도 향유자들에게 안도와 즐거움을 주는 한 계속 존속할 것은 분명하다.

김혜신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교 미디어/정보/테크노컬처 학부 졸업,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석사 졸업.
관심 분야는 만화 역사, 팬덤 문화, 보이즈러브, 게임, 영화 등.
만화 연구자로써 만화인, 만화규장각, 우리만화, 시사IN, 생각쟁이, 에이코믹스 등에 기사가 게재되었으며, 부천만화센터 연구사업에 참가한 전력이 있고, 한영/영한/일한 번역가로써도 활동중.
전직 AK 코믹스 편집자로 철도여행의 즐거움과 베어 취향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에키벤 ~철도도시락여행~]을 국내에 소개했고, BL 레이블 인디고 신설. (男色=남색=藍色 get it?)
3년간 모처에서 법률 문서 번역을 하다가 최근에 프리랜서로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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