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는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중학교 때까지는 비교적 어른들의 말을 잘 들었던 것 같다. 만화는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말에 쉽게 수긍했으니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바로 만화가게 출입을 끊었다. <소년중앙> <새소년> 같은 만화잡지도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여전히 만화를 좋아했지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대신 서점에 가서 ‘어른들을 위한’ 만화를 보기 시작했으니까.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서점에는 거의 매일 들렀다. 책을 살 돈이 없어도 일단 가서 무슨 책이 있는지 확인했다. 나중에 돈이 생기면 살 책을 미리 골라뒀다. 서점에 있는 책에 대해서는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만화책도 눈에 많이 띄었다. 고우영의 <일지매>와 <삼국지>, 박수동의 <고인돌>, 강철수의 <사랑의 낙서> 등 한국만화와 몽키 펀치의 <루팡 3세>와 <남녀공학>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던 쇼지 요코의 <생도 제군> 등 일본 만화 번역본.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만화가게의 대본용 만화책은 아이들 용이고, 서점에서 파는 만화책은 성인 최소한 청소년용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돈을 주고 만화책을 사서 집에서 봤다. 이건 어른을 위한 만화라는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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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만화라면 흔히 ‘성’(性)을 떠올리지만, 그 시절 보았던 만화들이 기억에 남은 이유는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인돌>은 성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야한 장면이 노골적으로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 삐뚤빼뚤한 그림을 보면서 성적인 자극을 느낀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어수룩해 보이는 원시인들의 말이 훨씬 더 야했다. 성을 둘러싼 해학과 농담 때문에 즐겁게 웃을 수 있는 만화였다. <루팡 3세>의 미네 후지코는 섹시했다. 나신의 미네 후지코에게 한국의 검열은 굳이 비키니와 레이스 같은 것을 걸치게 했지만, 언제나 남자를 홀릴 수 있는 후지코의 매력은 줄지 않았다. 미네 후지코도 좋았지만 <루팡 3세>의 매력은 역시 루팡 3세 일당의 초현실주의적인 모험담이었다. 성은 어른들을 위한 만화의 주요한 요소이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어른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 시절 어른들을 위한 만화를 보면서 어른의 세계는 단지 섹스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 때 당시는 아니었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비로소.

 

 

어른을 위한 만화
어른을 위한 만화란 대체 무엇일까. 흔히 생각하는 것은 성과 폭력이다. 아이들을 위한 만화라면 명랑만화와 모험 만화를 쉽게 떠올리고, 어른을 위한 만화라면 즉각 에로 만화가 떠오른다. 일본이라면 야쿠자 만화와 도박 만화도 있을 테고. 허영만의 <48+1>과 <타짜>도 분명 어른을 위한 만화다. 그러니까 쉽게 생각한다면 어른들에게만 허락된 오락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청소년에게는 섹스가 금지되어 있고, 술과 도박도 금지되어 있다. 실제로 하기는 하겠지만 하여튼 금지. 청소년에게는 금지되었지만 성인에게는 허락된 것들을 다루면 대체로 성인만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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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재만으로 성인만화를 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는 상고사를 다룬 역사물이다.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가르기가 쉽지 않은 상고사를 다룬 <천국의 신화>는 성인용과 청소년용을 따로 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에 필수적인 요소인 혼음과 근친상간, 강간 등이 청소년용에서는 많이 순화되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음란물로 고소당했고 법정에까지 가야 했다. 표현이 순화되었고, 일부 장면과 묘사가 삭제되었지만 그리스 신화는 청소년의 필독서다. 그렇다면 결국 소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강도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것은 음란물과 성인용의 구분에서도 마찬가지다. 성인용에 음란물도 포함될 수 있지만 한국은 일단 포르노가 금지된 국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분은 해야 한다. 성을 얼마나 자극적으로 다루는가는, 작품 안에서의 필요에 따를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른들의 세계를 얼마나 진지하고 심도 있게 다루는가가 아닐까.

히로카네 켄시의 <시마 과장>은 성인 만화다. 섹스가 많이 나오기는 한다. 시마가 출세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체로 ‘여자’다. 하지만 <시마 과장>을 보는 이유는 섹스 때문이 아니다.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남자. 때로는 좌천도 당하고 굴욕을 맛보기도 하지만 시마는 굳건하게 성공의 길을 달려간다. 샐러리맨의 판타지가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과 상황을 통해서 펼쳐진다. 그건 성인만이 아니 성인으로서의 사회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보았을 때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시마 과장>의 참맛이다. 청소년의 사회경험, 즉 가정과 학교를 오가며 사회의 일부분을 맛보는 정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세계’가 <시마 과장>에는 그려져 있다. 단지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어른의 사정’을 얼마나,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현실 그리고 하수구
최근 개봉한 <동경표류일기>는 일본 극화의 창시자인 타츠미 요시히로의 일대기를 보여준다. 타츠미 역시 테즈카 오사무를 존경했던 만화가 지망생이었고 아이들을 위한 만화를 그렸다. 하지만 대본소용 만화를 그리면서 타츠미 요시히로는 자신의 취향을 알게 되었다. 서양의 범죄영화에 영향을 받은 타츠미는 어둡고 냉혹한 하드보일드의 세계를 영화적인 표현을 빌려 담아내기 시작했다. 1957년 만화잡지 <가>(街)에 발표한 <유령택시>의 표지에서 처음으로 ‘극화’라는 말을 붙였다. 테즈카 오사무로 대표되는 기존의 만화와 자신의 ‘극화’가 다르다는 것을 선언한 셈이다. 타츠미는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만화를 싣는 <가로>에 작품을 발표하며, 사회 저변에 있는 사람들의 처절한 현실과 마음을 사실적인 터치로 그려냈다. 꿈과 희망이 아니라 현실의 가장 참혹한 풍경을 목도함으로써 미래를 내다보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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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표류일기>에 아동용 만화를 그리면서 슬럼프가 찾아온 타츠미에게 성인만화 편집자가 충고하는 장면이 있다. 당신은 슬럼프가 아니라 그리고 싶은 것을 제대로 찾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였다. 공중화장실에 그려진 낙서. 타츠미는 그 생생한 낙서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가장 솔직하게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욕망을 끌어내 전시하는 화장실 낙서들. 타츠미는 그것을 원했다. 하수구라는 것은 분명하다. 저열하기도 하고, 추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인간의 얼굴이다. 지금은 고상한 말을 하더라도 화장실에 가면 누구나 똥을 싸야 한다. 누구에게나 배설물은 있고, 감추고 싶은 비밀은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성인용이 반드시 어둡고 심오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예술적인 고양과 각성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오락과 유희도 필요하다. 성과 폭력을 안전한 문화예술 혹은 문화상품인 만화, 영화, 소설에서 즐기는 것을 비난하거나 폄하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성인용은 오히려 아동용을 제외한 모든 만화라고도 할 수 있다. 어린이용으로 만들어진 것도 얼마든지 어른이 즐기고, 심오한 각성을 할 수도 있으니까.

요즘 성인만화라는 것은 대체로 타깃을 정하면서 만들어지게 된다. 문화상품이라면 당연히 타깃을 정한다. 10대를 위한 것인지, 남성을 위한 것인지 또는 아이와 아이 같은 어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 등등. 타깃을 정확하게 정함으로써 내용과 수위가 정해진다. 똑같은 내용이라도 타깃에 따라서 주제와 표현의 정도가 달라진다. 아동용일 경우 인물과 주제를 단순하게 만들고, 중간 중간에 의도적인 개그를 집어넣게 된다. 성인용이라면 소재와 주제, 표현에 있어 제한이 없는 대신 어른들이 호기심을 느끼거나 공감할 요소들을 넣어야 한다. 표면만 건드리거나 식상한 이야기라면 어른들은 금방 지루해할 테니까.

 

 

웹툰과 성인만화
한국의 만화산업은 출판만화에서 웹툰으로 무게 중심이 넘어가며 성인만화가 특히 위축되었다. 웹툰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포털의 성격상 성인만화를 내세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10대 독자가 많은 네이버에서는 거의 성인만화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네이버보다는 자유로웠던 다음이 먼저 19금 만화를 선보였다. 그러나 레진코믹스가 뛰어들면서 상황이 많이 변했다. 레진코믹스의 차별화 전략은 유료화와 성인만화였다. 유료만화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것이 첫 번째였고, 어른들을 위한 야하지만 품격 있는 성인만화를 선보이겠다는 것이 두 번째였다.

레진은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네온비의 <나쁜 상사> 같은 히트작도 나왔고, 성인만화의 유료 수익도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그리고 성인만화를 내세운 웹툰 플랫폼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시적으로 성공이 보인 플랫폼은 탑툰이었다. 레진보다도 매출이 많다는 소문이 들리는 탑툰은 철저하게 상업적인 성인만화로 독자를 공략했다. 상업적, 그러니까 말초적이고 선정적인 효과를 극대화한 성인만화로 독자를 끌어들인 것이다. 성인만화의 상업적 파괴력은 충분히 인정되었고, 성공을 거둔 레진과 탑툰의 행보는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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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중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레진코믹스를 차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단순한 실수라고 마무리는 되었지만, 문제가 된 작품을 레진코믹스는 내렸다. 시끄러워질 수 있는 사안을 일찌감치, 암묵적으로 합의하여 폐기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소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문제가 되는 콘텐츠─ 웹툰이건, 야설이건 ─가 있는 사이트를 일방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행위인가. 이것은 법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각각의 만화가 외설, 음란물에 해당하는지를 누가 결정하는가, 이다. 청소년용과 성인용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 성인물에 청소년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 방법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규제와 구별이 성인물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일본에서도 60년대부터 유해 만화 논쟁이 있었다. 당시 야마나시현에서 나온 <만화 실태 백서>라는 책에서는 당시의 만화들이 ‘선과 악의 규범을 무시’하고 ‘마약 및 살인 묘사가 증가’하여 ‘소년 범죄를 부추길까 우려되는 수준’이라고 공격했다. 당시 유해 만화로 꼽힌 작품에는 이미 역사에서 잊힌 말초적인 만화만이 아니라 나가이 고의 <파렴치학원>, 시라토 산페이의 <닌자무예장>, 이시이 다카시의 <천사의 내장> 등 걸작들도 있었다.

작품이 문제가 되어 잡지가 정간을 당하면 다시 연재를 계속하고, 문학평론가와 문화계 인사들이 만화를 옹호하는 기고문을 언론에 실으면서 격렬하게 싸웠다. 법정으로 간 만화가와 출판사들도 싸웠다. 그렇게 일본에서 유해 만화 논쟁이 진행되었고, 투쟁과 타협을 통해 성인만화는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성인만화와 에로 망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확실한 비주류이며 하위문화인 에로 망가에서도 뛰어난 작가들이 등장하고 주류에 진입하여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모리야마 토로 활동하던 야마모토 나오키는 이미 거장이 되었고 지금도 <헬싱>의 히라노 코우타, <도쿄 빨간 두건>의 타마오키 벤쿄 등이 에로 만화에서 주류로 올라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성인만화라고 할 때는, 일본의 경우 <모닝>, <빅 코믹 스피리츠> 등 청년지에 실리는 만화를 칭한다. 에로 망가도 필요하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성인만화를 이야기할 때는 아무래도 일본의 청년지에 실리는 정도의 만화를 염두에 둬야 하지 않을까.

 

 

어른이 즐거운 만화를 원한다
일본에서 만화, 애니메이션이 어른들의 오락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본격적인 계기는 <우주전함 야마토>였다. 74년 방영된 <우주전함 야마토>가 소수의 팬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끌고 77년 극장용으로 재편집되어 개봉되는 일이 벌어진다. 놀랍게도 <우주전함 야마토>의 팬은 아이들보다 성인의 비율이 더 높았다. <우주전함 야마토> 이후 일본의 만화계는 ‘성인’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포르노라던가, 어른을 위한 진지하고 예술적인 작품 등 ‘성인용’ 상품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달라졌다. 어린 시절부터 테즈카 오사무의 만화를 보고 자란 아이들은 성장해서도 여전히 만화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자신들이 볼 만화를 기다려왔다. 성과 폭력의 직접적인 표현이 없어도, 성인이 아니면 좀처럼 이해할 수 없고 사회적 경험의 폭이 넓은 성인이 주로 감동할 수 있는 작품을 원했고, 부응하여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진정한, 어른을 위한 만화이고 영화이고 소설이었다.

지금 한국의 성인만화에게 필요한 것은 ‘성’(性)이 아니라 ‘어른의 사정’을 제대로 그린 만화다. 그런 점에서는 <미생> 역시 어른을 위한 만화다. <미생>처럼 어른이 살아가는 세계의 모습을 다각도로 바라보고,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그려낸 만화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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