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어긋난 일상으로의 초대, <하쿠메이와 미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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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쿠메이와 미코치
저자: 카시키 타쿠토
출판: 길찾기

판타지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이며, 현실도피를 위해 빠져드는 가상공간(virtual reality)이라는 인식이 우리나라에 퍼져있는 것 같다. J. R. R. 톨킨이나 조지 R. R. 마틴 등이 구축한 중세 유럽의 이미지나 MMORPG 게임 화면이 한국에 정착된 판타지의 이미지다. 나는 이에 대해 조금 다른 정의를 내세운다. 판타지란 ‘살짝 어긋난 일상’이다. 일상을 비틀어 낯설게 보게 하는 장르가 판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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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슨 스콧 카드는 <캐릭터 공작소>라는 책에서 자신이 읽은 어느 판타지 소설의 예를 든다. ‘조지아 주의 산간 지역에 사는 어느 평범한 10대 청소년들이 요정나라 주민들과 엮인다는 내용’인데, 1부에서는 ‘미국을 마법의 땅 “티르 나 노그(Tir na nÓg. 켈트 신화에 등장하는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요정들의 낙원)”로 여기고’ 있는 요정들로 인해 벌어지는 사건이 주 내용이다. 오슨 스콧 카드는 흥미진진하게 1부를 보다가 2부에서 실망하고 만다. ‘조지아 주 배경이 평범하다고 생각하고 요정들에게 매료되었는지’ 작가가 배경을 요정나라로 바꾸어 버렸고, 이야기가 상투적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좋아한 부분은 “낯설면서도 동시에 생생한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었던 조지아 주 쪽의 이야기였다.”라고 밝힌다. 나 또한 오슨 스콧 카드의 의견에 동의한다.

과거 일본 만화업계에서 판타지는 신인들에게 금지된 장르였다고 한다. TRPG나 컴퓨터 RPG가 유행하기 시작한 당시 일본에서는 <로도스도 전기> 같은 판타지 소설이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많은 신인들이 하이 판타지 만화에 매료되고 도전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커다란 세계관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비키니 같은 갑옷 입은 미소녀 검사’나 ‘쿨한 미남 마법사’가 ‘거대한 용과 싸우는’ 상투적인 이야기에 머물렀다. 이들이 빠진 함정은 판타지란 도피문학이라는 식의 오해에서 비롯된다. 판타지는 도피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나, 동시에 ‘낯설면서도 동시에 생생한 사람들의 삶’ 다시 말해 일상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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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메이와 미코치>는 좋은 판타지다. 우리의 일상이 노동과 타인과의 교류로 이루어지듯 토착적인 일상을 사는 ‘숲 속의 9센티미터 귀여운 요정’들도 다른 요정들, 그리고 인간처럼 말하고 생활하는 곤충이나 작은 동물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그들과 노동과 인간관계를 나누며 평등하게 지낸다. 우리 사회는 노동과 사람과의 교류로 구성된다. <하쿠메이와 미코치>도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 서로가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면서도 부족한 면을 채워주고 의지하는 모습은 이 만화의 판타지를 실존하는 공간으로 느끼게 만든다. 치밀하게 묘사된 배경과 소품 덕에 더욱 현실감은 강해진다. 이 모든 배경은 귀엽고 개성 강한 요정들 — 동거 중인 씩씩하고 왈가닥인 수리공 하쿠메이와 요리와 재봉일을 하는 미코치, 생명의 신비를 연구하는 센, 덜렁대지만 여성스럽고 노래를 잘하는 가희(歌姫) 콘쥬(아마도 ‘공주’의 일본어 발음 ‘コンジュー’에서 따온 듯하다.), 엉뚱한 보헤미안 이발사 쟈다 — 로 승화된다. 이들이 타인과 만나, 친해지고, 신뢰하는 작은 드라마가 이야기를 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재봉, 염색, 요리, 돌담 쌓기 등 일상의 노동이 자세하고 디테일하게 묘사된다. 번역자의 정성도 대단해서, 홀치기 염색에 대한 주석은 패션 전문자료사전에서 인용해올 정도다. 양념으로 만화와 만화 사이에는 공동체 내의 소식과 소문을 인용의 형태로 짧게 보여주어 커다란 공동체를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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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나는 작가가 홋카이도 출신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데뷔 때부터 이미 완성되어, 독특하고 개성이 강한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북일본 출신이라는 농담이 있다. 아다치 미츠루, 시마모토 카즈히코, 아라카와 히로무 등등이 대표적이다. 노동, 서로에 대한 신뢰와 공동체, 그러면서도 어디까지나 서로의 주체적인 공간을 존중하는 태도 등의 ‘숲의 문화’는 아라카와 히로무의 <백성귀족>이나 <은수저>와도 닮아있다. 배경도 유럽풍의 도시, 아시아 풍의 항구, 일본 토호쿠 지역의 숲이 두드러진다. (어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닮아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프랑스에서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저자의 트위터를 통해 본 근황에서는 프랑스에서 열린 행사에 참가해 사인회를 열었다는 말이 있었다.

<무밍>, <고깔모자의 메모루>, <곰돌이 푸>, <피터 래빗> 같은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추천하는 만화다. 느긋하게 흐르는 시간을 접하고 나면 주변의 일상이 새로운 눈으로 보일 것이다.

손지상

소설가, 만화평론가, 칼럼니스트, 번역가.

주요 출간:
단편집 [당신의 苦를 삽니다], [데스매치로 속죄하라 - 국회의사당 학살사건], [스쿨 하프보일드], [일만킬로미터 너머 그대. 스토리 작법서 [스토리 트레이닝: 이론편], [스토리 트레이닝:실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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