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봄>이라는 재난 만화의 안과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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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의 시장성(?) 혹은 시간성
2013년 봄에 <체르노빌의 봄>이 번역되어 출간된 사정을 돌이켜보면 입맛이 쓰다.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체르노빌의 봄>의 감각이 ‘이율배반’인 것처럼, 출간 사정 역시도 이율배반에서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2011년 3월에 터진 후쿠시마 원전 폭발 참사가 이 작품이 번역되어 출간된 맥락의 앞자락에 있다. ‘시장성’이란 때로는 이렇게 비극을 먹고 자라난다.

물론 이는 번역판만의 사정은 아니며, 이 작품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체르노빌의 봄> 프랑스어판도 2012년 겨울에 출간되었는데, 잘 모르긴 해도 이 기막힌 타이밍 역시 후쿠시마의 비극을 맥락으로 할 공산이 높다. 발표 시점이 작가 엠마뉘엘 르파주가 2008년에 체르노빌에 다녀온 후로 4년이 지난 시점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일본어판의 역자 오오니시 아이코(大西愛子)가 통역 후기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작가의 작품 구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밝힌 바도 있다. 출판 계약과 기획의 문제는 또다른 사안이겠지만 말이다. 또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전에 한국에서 발간된 체르노빌 관련 서적이 학술적인 보고서류를 제외하면 단 한 종에 지나지 않는데 반해 이후로 출간된 체르노빌 관련 서적은 9종에 이른다는 것도 맥락이 잇닿는다.

이를 굳이 밝히는 데는 출판 주체들에 대한 어떠한 비난의 의도도 없다. 오히려 위 9종 가운데 절대다수의 출판사들은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작품을 펴냈으며 따라서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다. 비난받아야 할 것은 소를 잃고서야 외양간을 고칠 재료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안타까운 인간성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한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은 외양간을 고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비인간성일 것이다. 이와 더불어 비난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시장성에 기대어 재난을 오로지 ‘상품’으로만 팔아버리려는 속물성일 것이고. 물론 이는 ‘오로지 상품’인 것과 ‘상품의 형태로 유통되는 의미 있는 작품’의 조심스런 구분을 요하는 일이지만, ‘재난’을 그린 문화상품과 관련해서만큼은 독자들이 이를 잘 분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재난’을 그린 문화상품은 그렇게 폭발적인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무료로 보는 기사와 달리 도서라는 문화상품은 돈과 교환되기 때문에 ‘구매’에 이르는 과정이 훨씬 더 까다롭다.

어쨌거나 시간을 축으로 하여 살펴볼 때, ‘후쿠시마’ 이후로 ‘체르노빌’은 후쿠시마의 과거로 다시금 잠시나마 주목받았으며, <체르노빌의 봄>도 그런 맥락 가운데 수입되고 읽힐 기회를 얻었다. 까다로운 독자의 선택을 받은 맥락은 좀 더 설명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체르노빌의 봄>에 대한 한국 및 동북아 반응 개략, 혹은 재난의 공간성
어쨌든 <체르노빌의 봄>은 한국에서 시류에 알맞게 시기에 출간되었고, 같은 시기에 출간된 ‘체르노빌’ 도서 9종 가운데 수위권의 시장 반응을 기록했다. 이는 4대 인터넷서점(YES24, 교보문고, 인터파크, 알라딘) 판매량 정렬 및 판매지수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로, 알라딘에서는 1위, YES24에서는 2위, 교보문고에서는 3위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이후 분석할 작품 자체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출판사의 홍보 방식 또한 적잖이 작용했다. 당시 길찾기 출판사는 당사에서 출간하던 작품 가운데 ‘사회적 발언’으로서의 경향성을 지닌 작품군에 대한 기획, 언론 대응 및 온오프라인 홍보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을 따로 두고 있었다.
프랑스나 북미의 만화 시장에서는 자주 발견되는 예이지만, 국내 만화시장에서 이런 홍보 전략을 실행한 예는 많지 않다. 홍보 담당자를 따로 두었던 결과, <체르노빌의 봄>은 작품의 예상 독자군에 잘 알려진 각계 인사들의 추천사를 실었다. 주로 환경과 관련하여 꾸준히 발언을 해온 이들과 만화 및 그림과 관련해 권위를 지닌 작가가 그들이다. 또한 환경유관 단체들과 접촉하여 평소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던 잠재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환경단체 행사에서 판매되는 경우도 적지만 있었고 해당 상품의 판매액 대비 환경단체 후원 프로모션도 진행했다. 이와 함께 기존의 그래픽노블 독자들에게는 문학성과 예술성으로 어필했다.

<체르노빌의 봄>에 대한 언론 및 평단의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독자들도 많은 리뷰로 호응했다.
<체르노빌의 봄>은 2013년 부천국제만화대상 해외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이에 따라 이듬해 부천국제만화축제 전시작으로 결정되어 특별전시(<체르노빌의 봄> 특별전-아름다움과 죽음의 폴리포닉polyphonic 이미지)가 진행되었다. 또한 작가가 초대받아 내한하여 사인회와 대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수정됨_기타_스페셜대담l 1제목 없음-1수정됨_르파주 사인

이와 같은 긍정적인 반응에는 상술한 바와 같이 후쿠시마 원전 폭발이라는 상황, 출판사의 홍보 전략, 후술할 작품의 가치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한국’의 지리적 배치를 중심에 놓고 본다면 ‘후쿠시마 원전 폭발’은 또다른 의미와 이어진다. 어쩌면 한국의 독자들은 ‘직접 체르노빌에 찾아갔던’ 작가의 르포 작품을 통해 실존하는 위험에 대한 진단과 전망을 시도해보고 싶었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실존하는 위험이란, 후쿠시마와의 지리적 근접성에 원인을 두고 있다. 흥미롭게도 <체르노빌의 봄>은 후쿠시마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한국과 중국에 모두 출간되었으며, 재난의 당사자인 일본에서도 출간되었다. ‘아마존 차이나’나 리뷰 사이트인 ‘또우반(豆瓣, douban.com)’ 등을 참조할 때, 중국어판 <切尔诺贝利之花>는 한국과 비슷하게 상당히 좋은 평가를 얻었고 판매량도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외국 만화가 주목받기 어려운 일본에서는 눈에 띄는 평가나 판매고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일본어판 <チェルノブイリの春>에는 <후쿠시마의 상처(フクシマの傷)>라는 제목의 단편이 포함되어 있다. 작가 르파주가 2012년 11월에 일본에 만화축제 참석 차 방문했을 당시 후쿠시마를 찾았고, 이때의 경험과 인상을 바탕으로 2013년 12월에 시사 전문 만화잡지인 에 게재되었던 를 일본어판 출간에 맞춰 번역해 실은 것이다.

10_기타 넣으면 좋을 이미지. 후쿠시마의 상처.

이처럼 ‘후쿠시마’라는 재난의 시공간적 함의는 관련 담론 및 문화예술 작품의 시장성 및 독자 반응 등과 더불어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외부에 대한 검토는 이 글이 개략적으로 설명한 것보다 훨씬 더 상세하게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재난 만화라는 주제에 대해서, 그리고 <체르노빌의 봄>의 ‘시장적인 측면’에 대해 논해달라는 크리틱M의 요청에 이렇게밖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이제는 예고했던 대로 또다른 과제인 ‘학술적인 측면’을 검토해야 할 때다. 이는 작품 외부의 사안들만큼이나 중요한데, 관련하여 내가 늘 관심을 가지는 작품 내부의 동학(dynamics)은 그것의 가치와 설득력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체르노빌의 봄>과 관련하여서 적지 않은 글을 쓰며 이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마침 가장 상세하게 다룬 글이 담긴 책이 무가지로 적은 부수만이 출간되어 일반 독자가 만나보기 어려운데다, 인터넷으로도 공개되지 않았기에 여기 그 글의 일부를 옮겨두려 한다. 독자의 양해를 부탁드린다.

 

<체르노빌의 봄>의 가치와 설득력

르파주의 첫 국내 번역 출간작 <게릴라들>이 로망 그라피크라면 2012년작 <체르노빌의 봄 Un printemps à Tchernobyl>은 르포르타주 그라피크(reportage graphique)이다. ‘르포르타주’라는 현실참여적인 작업 방식 혹은 장르는 역사적으로 변천하며 구성되어왔다. 특히 초기 르포르타주는 저널리스트의 문자와 사진에 속박되어 있었지만, 지금 들어서는 동영상과 만화 등 다른 방식이 널리 함께 쓰이고 있다. 양식 면의 변천과 확장뿐만 아니라 르포르타주 예술론, 미학론 또한 큰 변화를 거쳐 왔다. 특히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 필요하다는 르포르타주의 조건으로 인해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초반의 르포르타주가 스스로 현실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전달한다는 인식을 가졌다면, 최근의 르포르타주론에서는 객관적이고 있는 그대로의 재현이란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이 더 넓게 공유되고 있다. 언어 소통 그 자체의 불완전성과 인간 지각의 주관성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목표를 르포르타주가 모두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를 수 없는 ‘진실’이지만, 그런 만큼 더욱 그것에 근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작가의 주관적 태도가 더 중요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체르노빌의 봄>은 뚜렷이 이러한 최근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며, 그것을 더 멀리까지 더 놀라운 소통으로 밀고 나간 작품이다. 다음 르파주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체르노빌의 봄>에 대한 비평적 조명을 시작해 보자.

정직하고 정확하기 위해,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분명히 한다. 내가 가족과 함께 있는 장면이나, 나의 의심과 두려움 그리고 약점을 그린다면, 이는 내가 주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커다란 진실(LA Vérité)을 밝히는 것이 내 의도가 아님을 보이는 것이다. 내 작품을 읽는 독자가 시범을 따르듯 외부에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독자가 나와 함께 있고, 내 어깨 너머로 보기를 원한다.

(중략)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원에 만화가 있다. 이것은 단지 이야기에 대한 보조적 수단이 아니다. 나는 위협을 표현하기 위해 모순을 선택했다. 예를 들어, 전원적 이미지와 방사능 측정기에 표시된 불안한 수 사이의 대조. 진실(La vérité)은 둘 사이의 간극에 있다.

수정됨_04_(각주 21)_택일

<체르노빌의 봄> 한국판 추천사에서 우석훈은 ‘실존’을 말했다. 적확한 단어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실증되지 않고 객관화할 수 없는 개인의 경험이 세계를 표현한다는 면에서, 그것은 ‘커다란 진실’이 아니라 작은 하나의 ‘진실’을 표현하고자 했던 르파주의 의도와도 통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실존’을 초과하는 정서가 존재한다. 우석훈이 <체르노빌의 봄>을 비견하기 위해 함께 언급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보다 어쩌면 더 특출한 정서다. <페스트>는 픽션으로서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실제 인물이나 시공간이 그 안에 담겨 있지는 않다. 작품 속에 형상화된 인물들은 가상이며, 가상이기 때문에 줄 수 있는 어떤 진실이 있다. 하지만 <체르노빌의 봄>은 르포르타주이며, 그 안에 그려진 사람들과 시공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물론 이들을 작품 속에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변용이 있었겠지만, 지시 대상으로서의 현실이 있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페스트>에 알레고리적인 측면이 있다면, <체르노빌의 봄>은 전혀 그렇지 않다. <체르노빌의 봄>은 빗대어 다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빗대지 않고 다시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타자(他者)를 발견하고, 그것을 작품 속으로 옮겼다. 바로 이 타자라는 벡터와 함께 ‘실존’은 ‘실재(the real)’를 향해 나아간다. 인식된 작은 진실을 통해 ‘실재’라는 커다란 진실의 한 모습을 드러내려는 시도로서, <체르노빌의 봄>이 품고 있는 방법론과 기술은 다양하고 놀랍다. 다음에서는 ‘연출과 구성’이라는 큰 틀에서부터 시작해서 ‘대조’, ‘비유’라는 수사법과 함께 독자를 향한 시선까지 간략하게 다루는 것으로 그 놀라움을 담아내려 한다.

1) <체르노빌의 봄>의 형식미: 연출과 구성 면에서

먼저 페이지 연출과 함께 전체적인 구성을 살펴보자. <체르노빌의 봄>의 기본적인 그림의 양과 질은 전작 <게릴라들>에 뒤지지 않지만, 흑백 채색이 반 정도를 차지하고 체르노빌 현지에서 그렸던 그림이 여러 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림 자체의 향상을 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페이지 연출과 구성에서 전작들에서 발견할 수 없는 파격이 시도되었다는 데 있다. 가장 극명한 예가 다음 펼침면이다.

수정됨_05_(크게)

만화에서 두 면을 전체적으로 활용해서 연출하는 것은 일반적인 방식이다. 독자 입장에서 이 방식을 조망하자면, 각 면에 한정된 연출을 보다가 펼침면 전체로 이루어진 연출을 만나면 시원한 느낌을 받는 것과 함께 그 장면의 이미지와 메시지가 깊이 각인될 수 있다. <게릴라들>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연출이지만, <체르노빌의 봄>에서는 전체면을 모두 활용한 페이지가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두 면을 하나의 칸으로 가득 채운 전통적인 방식과 함께, 두 면 안에서 시선의 이동을 재조직하며 칸을 배치하는 방식의 연출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위 그림이 바로 그 예이다. 파란색 원화 칸(⓻번)이 페이지 중앙을 침범한 것으로 인해, 독자들은 ⓵에서 그 면 바로 아래 칸 왼쪽에 있는 ⓸로 시선을 이동하지 않고 117쪽에 있는 ⓶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그러면서 한 면 안에서 시선을 옮기듯 두 면 안에서 읽어 내려가 마침내 ⓽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그 과정의 구체적인 면면이 또한 흥미롭다. 두 면의 우측에 있는 ⓼에서 대사에 이어 그림이 담긴 스케치북을 읽고 관습적으로 ⓽의 왼쪽으로 시선을 이동하려다 보면 긴 칸 배치로 인해 나무줄기로 이루어진 숲의 이미지를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훑게 된다. 그리고 발견하는 것은 악어 입을 빠져나가는 차량이다. 다시 관습대로 ⓽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나가면 그것이 악어이자 숲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비유와 칸 연출의 절묘한 결합이다.

이에 더해, 많은 평자들이 지목했던 부분이지만, 컬러 칸과 흑백 칸의 대조 또한 두 면 연출에서 효과를 이루어낸다. ⓻을 중심으로 ⓵은 같은 네거티브(음화) 이미지라는 속성이 공통적이다. 한편 ⓽는 나무줄기로 이루어진 숲이라는 형태가 공통적이다. ⓹번에서부터 시선을 조금씩 멀리하며 이어진 나무줄기 그림과 “끔찍한 외형. 그런 건 없다.”는 대사는 ⓽가 바로 보이는 외형이 아니라, ⓵과 ⓻처럼 음화로서만 현상되는 방사능의 공포를 비유적으로 가시화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 앞서 112쪽에서 115쪽까지 이어진 흑백과 컬러의 대조가 보여준 것은, 바로 보이는 현실은 흑백이고 그림 속에 담긴 현실은 컬러라는 일종의 규칙이었다. 그런데 116쪽에서 117쪽에서 ⓽는 그 두 가지를 통합하며 흑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르파주의, 또한 독자의 눈에 실재든 미메시스이든 모든 이미지는 이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중첩된 것으로 현상한다. 앞서 피터팬의 시계 악어에서 차용한 ‘틱틱’ 소리로 공포를 자아낸 청각적 감각에 더하여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감각하게 만드는 이미지의 기예(art)를 이룩해 낸 것이다. 비유와 대조와 양면 연출 등은 사실상 하나의 효과를 향해 직조되었다. 바로 작가 자신이 ‘직접 느끼고 바라보고 고민했던 실재를 어떻게 독자에게 전달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2) <체르노빌의 봄>의 호소력: 독자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

따라서 이제 독자를 대하는 르파주의 태도를 살펴볼 차례다. “내 작품을 읽는 독자가 시범을 따르듯 외부에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독자가 나와 함께 있고, 내 어깨 너머로 보기를 원한다.”라는 그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이러한 바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독자가 함께할 ‘나’의 존재가 작품 속에서 드러날 필요가 있다. 르파주는 말했다. “정직하고 정확하기 위해,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분명히 한다.”
‘정직’과 ‘정확’이라는 두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르파주는 객관성이 아니라 주관성을 포개어 놓는다. “내가 가족과 함께 있는 장면이나, 나의 의심과 두려움 그리고 약점을 그린다면, 이는 내가 주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커다란 진실을 밝히는 것이 내 의도가 아님을 보이는 것”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그의 정직과 정확은 ‘완전히 정확할 수는 없다는 데 대해서 정직한 것’이며, ‘정직하다는 면에 대해서만큼은 정확하게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의 어깨 뒤로 독자를 둘 수 있다. 그 독자는 작중 화자인 르파주의 활동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움직인다. 르파주의 시선을 따라 사물을 바라보고 르파주의 의심과 고민과 두려움을 공유한다. 만화가 최호철이 “이미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는 말로 독서 경험을 술회하며 제안한 <체르노빌의 봄> 감상법은, 따라서 매우 적절한 것이다.

그저 작가와 함께 체르노빌로 함께 떠난다는 기분으로 한 장 한 장 책을 넘겨보자. 그러면 작가가 처음 체르노빌에 가던 때의 선입관, 정보 등 마음속에 있는 감정에서부터 마을에 들어가 주민을 만났을 때의 낯섦, 두려움, 자연과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 등 작가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감상하기에 적절한 방법을 택했던 탓에, 여전히 체르노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정됨_06_(각주 28)

그렇게 독자는 르파주와 함께 체르노빌에 간다. 이를 반영하듯 <체르노빌의 봄>에 대해서는 유독 많은 독자 반응이 웹상에 게시되었다. 독자가 반응을 한다는 것, 특히 글의 형식으로 그 감상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 작품이 단순히 ‘읽는 작품’이 아니라 ‘쓰는 텍스트’
로서 의미가 있음을 방증하는 현상이다. <체르노빌의 봄>을 통해 체르노빌에 함께 갈 뿐만 아니라 독자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다. <체르노빌의 봄>의 어떤 면모가 그것을 가능하게 할까? 어떻게 또 왜, 이 텍스트는 쓰고 싶게 만드는가? 답은 이미 르파주의 말에 나와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르파주는 자신의 작품을 읽는 독자가 “시범을 따르듯 외부에서 바라보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많은 장치를 통해 독자를 작품속 세계로 데려다 놓는다. 이제 구체적으로 그 장치를 살펴볼 차례다.

3) <체르노빌의 봄>의 흡입력: 세계 재현과 자기 재현

앞서 살핀 작가의 태도는 작품 속의 장치를 통해 구현된다. 간략히 말하면, 이 과정은 두 가지가 동시에 작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독자를 작품 속 세계로 들여오는 것과 그 세계를 작가와 함께 바라보는 것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작용하며 서로의 효과를 강화한다. 둘 모두는 우리가 동일시라고 부르는 작용을 기초로 하되 동일시의 작용에서 한 발 더 나아가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동일시는 작중 화자에 대한 감정적 동의를 바탕으로 하며, 이를 통해 독자가 작중 화자가 내리는 판단에 대해서도 동의하게 한다. 그래서 그것이 불러오는 효과는 때로 독자를 소외시킨다. 무비판적으로 작중 화자의 결론을 맹신하게 되는 효과가 그것이다. 하지만 르파주는 여러 장치를 통해 지속적으로 그 동일시 안에서 독자의 생각을 요청한다. 독자가 생각하고 판단 내릴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르파주가 <체르노빌의 봄>을 통해 펼치는 감응의 요체다. 이를 우리는 나뉘지 않는 두 재현을 통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작가의 ‘세계 재현’과 ‘작중 화자(작가)의 자기 재현’이다. 이는 독자를 작품 속 세계로 들여오는 것과 그 세계를 작가와 함께 바라보게 하는 것과 조응하면서 독자의 감응과 생각을 이끌어낸다.

세계 재현과 자기 재현은 지속적으로 동시에 이루어진다. 서사 차원에서 이는 작가가 체르노빌로 향하고 도착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과정 가운데 반복되어 드러난다. 작품 속의 시간은 이를 위해 구조화되어 있다. <체르노빌의 봄>의 시간은 과거에서 출발해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체르노빌에 가기로 결정하는 과정을 그려내기에 앞서서, 가장 첫 페이지에서부터 체르노빌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그리고 시간을 뒤로 돌려 체르노빌에 가게 된 경위를 다룬다. 이를 통해 기차를 탔다는 사실 자체, 그리고 기차를 타고 체르노빌로 향하는 현재 시점의 작중 화자가 가진 선지식과 감정 등이 출발점으로 강조된다. 단적으로 말해 기차 장면은 바로 세계 재현과 자기 재현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고하게 알리는 장치다. 이를 장면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수정됨_07_A

*A: 기차 장면(5~9쪽): 실제 시간으로는 2008년 4월

수정됨_07_B

*B: 어린 시절 장면(10~19쪽): 실제 시간으로는 1986년 4월

수정됨_07_C
*C: 체르노빌에 가기까지(28~34쪽): 실제 시간으로는 2007년 11월 이후

C에 이어지는 장면은 다시 기차 장면이다. 이후로는 기차에서 내려 체르노빌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중간중간 짧은 플래시백 혹은 회상 장면이 있지만, 서사의 큰 줄기는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간다. 다시 말해 A~C에 이르는 부분만이 시간의 흐름을 재조직한 장면인 것인데, 바로 이것이 세계 재현과 자기 재현을 독자가 동시에 목도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다.

독자에게 작품 속의 세계는 낯설다. 작품을 따라가면서 그 안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기까지는 약간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명확히 해 두자면, ‘작품 속의 세계’와 ‘작품이 재현하려는 세계’는 다르다. 현실을 바탕으로 한 르포르타주인 이상 작품의 지시 대상인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것이 재구현 되면서 작품 속의 세계가 된다. ‘작품이 재현하려는 세계’는 작품이 수행하는 세계에 대한 재현을 거쳐서 ‘작품 속의 세계’가 된다. 사실 <체르노빌의 봄>의 독자에게는 두 세계가 모두 낯설다. 독자가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은 ‘작품 속의 세계’이며, ‘작품 속의 세계’는 ‘작품이 재현하려는 세계’로 이르는 불완전한 징검다리가 되기에 독자는 체르노빌을 간접적으로나마 만나게 된다. 그런데 르파주는 A~C 장면을 통해 세계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함께 재현한다. 체르노빌이라는 세계를 만나게 될 작품 속 ‘나’ 역시도 독자가 만나야 할 낯선 대상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A에서는 기차를 타고 체르노빌로 향하는 ‘나’가 재현된다. 그는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통해 체르노빌을 읽고 있다. 그러면서 작품 속의 세계의 일부가 또한 액자 형식으로 재현된다. 이어서 B에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방송을 통해 처음 사고를 접한 ‘나’가 재현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체르노빌에 대한 몇 가지 정보들이 제시된다. 이 재현은 체르노빌에 대한 재현이기도 하지만 ‘나’와 ‘나’의 세계 즉, 프랑스 정부와 사회가 체르노빌 참사를 전달하는 방식에 대한 재현이기도 하다. C 역시 마찬가지다. 데생 악퇴르의 계획, 르파주의 방문 계획에 대한 가족의 반응, 작가의 불안 등, ‘나’와 ‘나’의 세계가 동시에 재현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세계와 화자 모두에 대한 낯섦을 조금씩 풀어나간다. 그리고 두 재현 대상을 모두 작품 속에서 만나며 이야기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다. 이를 통해 작중 화자에 대한 전적인 동일시가 아니라, 작품 속 세계와 화자를 모두 지켜보며 독자가 스스로의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가 또한 열린다.

4) <체르노빌의 봄>의 감응 방식: 독자와 함께 실재를 목도하기

앞서 설명한 방식으로 독자들은 작중 화자 곁에서 체르노빌을 함께 본다. 그러면서 작중 화자의 체르노빌에 대한 감각을 바로 옆에서 느낀다. 그 감각은 독자에게 전적인 동일시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망설임을, 이어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작중 화자의 망설임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마지막으로 그 망설임의 과정을 몇 가지 장면과 함께 조망하겠다.

처음 체르노빌에 도착해서 바라본 체르노빌은 기대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아직은 망설임보다는 두려움과 안타까움이 앞선다. 방사능에 대한 두려움, 끝나지 않은 참사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그것은 색채와 선을 통해 그림으로 표현된다. 잿빛 색채로, 직선으로 묘사된 체르노빌은 그곳의 죽음을 명확히 재현한다. 여기에 더해지는 것은 “틱, 틱”이라는 문자와 방사능 측정기 그림으로 표현되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다. 이 위험이 체르노빌의 죽음을 완성한다. 우리에게 죽음 이후의 세계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체르노빌의 죽음을 가장 극명하게 담고 있는 방사능도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가장 완전한 ‘죽음’이다. 그래서 두렵고, 그래서 안타깝다. 이런 탁월한 표현이 이어지면서, 독자도 그 자신의 체르노빌에 대한 선지식과 르파주가 앞서 제시한 지식을 결합하며 체르노빌의 죽음을 확인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 확인은, 작품 속 세계와 화자의 반응 모두를 보면서 지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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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 순간 화자가 세계를 다르게 보기 시작한다. 사람들을 그린 그림에서 조금씩 진해져가던 따뜻한 색채가 버스 정류장 장면(113쪽)에서 ‘타오르는 듯 강렬하게’ 빛난다. 이 인식의 전환은 잠시 설명될 필요가 있다. 그 이전까지도 다르게 볼 단초는 조금씩 제시되었지만, 이 장면에서 그것이 극적으로 표현된 것은 작중 화자가 그곳에서 체르노빌의 ‘현재’를 ‘과거’와 대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두 가지의 ‘인지된 현재’가 탄생한다. 한 현재는 어두운 현재로 다른 한 현재는 밝은 현재로 일단 명명하자. 이 장면까지 지배적으로 인지되었던 것은 어두운 현재였다. 인식 주체인 화자에게는 도시도 숲도 죽음만을 담고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버스 정류장을 발견하면서, 숲길이라고 생각했던 곳(어두운 현재)이 원래는 차가 다니는 곳이었음이 인식되었다. 어두운 현재에 대비되는 ‘과거’가 발견되는 순간이다. 그 과거는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던 때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낸 그 테크놀로지가 현재의 숲의 과거인 도로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거가 금지구역에 있는 현재의 숲으로 변화했다는 것이 명확히 지각된다. 이제 현재에는 밝은 현재가 더해진다. ‘과거’를 발견하기 전까지 숲길은 어두운 현재였지만, ‘과거’를 발견한 후로 그 숲길은 어두운 과거를 극복해 되살아난 자연의 힘을 보여주는 밝은 현재로 재인식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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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재가 전적으로 밝아진 것은 아니다. ‘망설임’이, 더 정확히는 ‘이율배반’에 대한 감각이 두 현재의 발견을 통해 비로소 작품의 중심 정서로 부상한다. 이와 함께 이제까지의 감각들 – 두려움과 안타까움 – 또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증폭된다. ‘체르노빌’의 ‘봄’이라는 상반된 두 이미지의 충돌이 드디어 본격화된 것이다. 두 이미지가 맞부딪치면서 각각의 이미지는 더 선명해진다. 양자가 더 선명해질수록 둘 모두를 보고 경험하는 이는 더 어지러워진다. 아름다움 앞에서 “하지만 여기는 체르노빌이 아닌가!”라는 탄식을,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이곳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지?”라는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 이 망설임은 이후 계속 이어진다. 작중 화자가 망설이는 만큼 독자도 망설이게 된다. 독자는 작중 화자의 어깨 너머로 세계를 본다. 바로 그의 어깨가 세계에 대해 동요할 때, 그를 보던 독자도 동요한다. 작중 화자가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생각하고 되물을 때, 독자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되는 이율배반은 쪽과 쪽의 충돌로, 칸과 칸의 충돌로 표현된다. 잿빛과 천연색의 충돌, 직선과 곡선의 충돌. 이렇게 두 개의 상반된 현재가 끊임없이 재현되고, 그렇게 독자들은 르파주의 눈과 손을 통해 그가 목도한 재앙과 희망을 동시에 보고 느끼고 경험한다.

결국 작중 화자와 독자는 망설임 끝에 둘 모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 세계를 나선다. 이런 답 아닌 답을 찾은 채로 나설 때, 둘 모두는 다른 의미로 화한다. 그 의미를 새길 때에,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약간씩은 결이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답이란 애초에 없을 수도 있다. 이율배반 사이에서 고민하는 그 태도, 답을 찾아 나서는 행위 그 자체가 답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우리는 다시금 현실로 돌아온다.

 

재난의 시공간에서, 시작하는 끝
분명 작품의 독해에 가장 좋은 답이란 없다. 여러 오답과 소수의 좋은 답들이 있을 뿐이다. 또한 ‘후쿠시마’ 이후의 한반도라는 시공간성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의미화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독자로서, 평론가로서,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그 의미 혹은 내가 찾은 답들을 이렇게 썼다. <체르노빌의 봄>의 두텁고 중층적인 재현이 아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의미이기에 맺음을 위해 다른 두 글의 끝부분들을 옮겨둔다. 이것이 독자가 현실로 발을 디디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이 글의 끝이며 발걸음의 시작이다.

분명 ‘체르노빌’과 ‘봄’은 머나멀다. 하지만 재앙과 희망을 떠올리는 두 단어가 이 만화에서는 닿아있다. 함께 있기에 진정으로 의미를 토로한다. 게다가 우리는 2년 전 이맘때, 역시 봄에, 작은 바다 건너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접했지 않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조금이나마 안다. 올 봄의 후쿠시마는 3년 전의 후쿠시마와 같지 않을 것임을. 또 안다. 후쿠시마에서 봄을 앗아간 것이 무엇인지를. 따라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체르노빌에 봄이 돌아온 것이 20여년만이라면, 그것은 또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르파주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려낸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아직은 먼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후쿠시마의 봄을 떠올리며, 또 월성과 고리, 밀양에 당연히 와야 할 봄을 잃지 않기를 바라며, ‘체르노빌의 봄’을 반가이, 두려움을 안고, 맞이한다.

이제 다시금 가까이 있는 지금을 본다. 후쿠시마를, 더 가까이는 최근 연장운행이 결정된 월성1호기를 본다. 지금 보여지는 대세는 분명 국가의 해석이다. 일본도 한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다른 것을 보는 이들이 있다. 또 달리 보게 만들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 “나도 인간이다”라고 외친 흑인/여성/피식민자와 “너도 인간이구나”라고 새롭게 본 백인/남성/식민자의 합작이 그나마 차별이 덜한 세계를 만든 것처럼, 원자력 발전 문제를 다시 보게 만드는 이들과 다르게 보는 이들이 원자력 참사가 없는 세계를 향해 걷고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르게 보는 것을 불편해 하지 않고, 다른 목소리에 귀를 열어둔 사람들이다. ‘월성의 봄’이 언젠가 이율배반의 표현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 사람들에게 기대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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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체르노빌의 봄> 프랑스판이 Futuropolis에서 나온 것과 거의 같은 시점에 르파주와 질다스와의 합작 데생집인 <체르노빌의 꽃: 오염지역에 대한 여행 보고>(Les fleurs de Tchernobyl: Carnet de voyage en terre irradié)도 라 보와트 아 뷜(La Boîte à Bulles) 출판사를 통해 재출간되었다. 르파주와 질다스의 체르노빌 방문을 조직했던 ‘데셍 악퇴르’(행동하는 데생)의 프로젝트로 원래 2008년 겨울에 출간되었던 작품집이다.

2)히로세 다카시의 소설 <체르노빌의 아이들>이 1989년에 국민도서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된 이후로 2006년에 프로메테우스 출판사를 통해 재출간되었다. 이 책이 후쿠시마 이전에 발간된 단 한 종의 체르노빌 관련서로, 후쿠시마 참사 직후인 2011년 4월에 판갈이를 하여 다시 출간되었다. ‘체르노빌 관련 서적’은 제목 혹은 부제에 ‘체르노빌’이 포함된 책으로 한정했는데, 9종 가운데 만화가 3종인 점이 관심을 끈다. 만화 목록만 추리면, 프란시스코 산체스 글, 나타차 부스토스 그림, 김희진 옮김, <체르노빌: 금지구역>, 현암사, 2012; 마르제나 소바 글, 실뱅 사부아 그림, 김지현 옮김, <마르지 1984-1987>, 세미콜론, 2011(2권의 부제가 “우리는 체르노빌 세대”이다.); 그리고 이 글의 대상인 엠마뉘엘 르파주, <체르노빌의 봄>, 2013, 길찾기. 만약 제목에서 방사능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세슘 137>(파스칼 크로시 글·그림, 이세진 옮김, 현실문화, 2013)와 같은 작품까지 추가한다면, 후쿠시마 이후의 원전 재난 만화는 더 늘어난다.(사실 <세슘 137>은 아우슈비츠 등 더 폭넓은 인간이 만든 ‘재난’을 다룬 작품이다.)

3)출판물만 간략히 살펴보자.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후쿠시마’로 제목 가운데 검색하면 2011년 3월 이후로 모두 30종의 책이 검색된다. 잘 살펴보면 제목에 ‘후쿠시마’를 넣어서 ‘물타기’하는 책이 종종 있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는 더하다. 2014년 4월 16일 이후로 출간된 책 가운데 제목 검색에서 ‘세월’을 입력하면 87종이, ‘세월호’는 47종이 검색된다. ‘세월호’는 고유명사니 예외 없이 참사를 지칭하는 경우인 것인데, ‘세월호 힐링 프로젝트’ 식의 자기계발서 류의 ‘물타기’가 적잖이 눈에 띈다. ‘세월’의 경우도 2000년 이후 참사 직전까지 13년 넘는 기간 동안 313종(연 평균 23권)이던 것이 참사 후 1년 6개월 사이에 87종(연 평균 약 50권)이 되었다. 세월호와 전혀 관련이 없는 제목에도 ‘세월’을 넣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 이 가운데도 양화를 구축하는 악화가 적지 않다.


4)무료 기사와 유료 문화상품이라는 구분은 물론 불완전하다. 기사도 일정 정도 문화산업의 일부이며 유료 상품의 형태로 판매되는 경우가 분명 있다. 또한 유료 문화상품 가운데서도 영화처럼 재난의 스펙터클이 상당히 선호되는 경우가 있으니 양식 별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도서 형태의 문화상품으로 한정해 논했다.


5)검색식이 달라서 여러 관련도서가 함께 검색되는 인터파크에서는 후쿠시마 관련서 및 탈핵 관련서 40여종 가운데서 10위에 해당하는 판매고다. 어느 서점이든 만화 중에서는 가장 많이 판매되었으며, 일반서를 포함하면 <체르노빌의 아이들>의 판매고가 가장 높았으며 그 다음 자리가 <체르노빌의 봄>이라 할 수 있다.


6)고백하자면 당시의 그 홍보 담당자가 나였다. 나는 2013년 1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1년 단기계약으로 길찾기 출판사에서 근무했고, 다소 진지한 성향의 그래픽노블 라인에 대한 언론 보도자료 작성 및 SNS 홍보를 담당했다. 지금 와서 얘기지만, 나의 만화평론가 정체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책이 아니면 대충대충 일했고 좋아하는 책은 과하게 열심히 알리고 다녔다. 그중 <체르노빌의 봄>과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안토니오 알타리바, 길찾기, 2013)이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다. 물론 좋아했지만 좋은 성과를 보지 못한 작품도 있다.


7)웹상에서 독서에 이은 독자 반응은 크게 다섯 공간에서 세 방식으로 일어난다. 공간으로는 블로그, SNS, 인터넷 서점, 포털사이트 내 도서 서비스, 그리고 카페(또는 커뮤니티) 등의 플랫폼이 있고, 방식으로는 별점, 단평, 리뷰의 형식이 있다. 플랫폼과 표현 형식은 서로 조응하는 면이 있는데, 이는 게시물의 길이와 연관된다. 긴 글(리뷰)은 주로 카페, 블로그, SNS(특히 페이스북), 인터넷 서점에 게시된다. 짧은 글(단평 및 별점)은 주로 인터넷 서점(별점 및 단평 코너), SNS(특히 트위터)에서 게시된다. 짧은 글은 검색으로 수량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지만, 긴 글은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서 블로그로 나오는 항목과 각 인터넷 서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결과를 취합해서 확인 가능하다. <체르노빌의 봄>은 약 400여 편 내외(다음 및 네이버: 약 330건, 알라딘, YES24 등 4개 대형 인터넷 서점 게시물 합산 70편)의 게시물이 확인된다.


8)김성희, 김수박 작가, 그리고 스페인에서 초청한 안토니오 알타리바 작가와 함께 가진 자리다. 2014.8.14. 부천국제만화축제 스페셜대담 1 <만화, 실재를 그리다: 르포 혹은 미시사>.


9)크게 세 편이며 이 글에서 인용할 것이다.


10)이하 3절의 내용은 무가지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펴낸 <2014 부천국제 만화축제를 만나다>에 실린 내 글 「엠마뉘엘 르파주 작가론: <체르노빌의 봄>과 <게릴라들>을 중심으로」에서 <체르노빌의 봄>을 다룬 4절 거의 전체를 약간의 변경과 함께 옮겨둔 것이다.


11)로망 그라피크(roman graphique)는 프랑스어로, 영미권에서는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로 불리는 장르다. ‘소설’과 ‘그림’에 해당하는 낱말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그래픽 노블의 주창자 윌 아이스너가 어린이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만화로부터 구분된 어른들을 위한 만화를 지칭하고자 했던 ‘그래픽 노블’의 전통과 ‘로망(소설) 그라피크’의 전통은 잇닿는다.


12)프랑스판 <체르노빌의 봄>을 소개하는 글에서 자주 발견되는 명칭이기도 하다.


13)제17회 <부천국제만화축제> 스페셜 컨퍼런스 참여가 확정된 후 기획진의 요청에 따라 르파주가 보내준 발표문 가운데 일부. 자료집 46쪽. 이하 「<부천국제만화축제> 컨퍼런스 자료집」으로 표기.


14)엠마뉘엘 르파주, <체르노빌의 봄>, 길찾기, 2012. 113쪽.


15)116-117쪽.


16)「<부천국제만화축제> 컨퍼런스 자료집」, 46쪽.


17)<체르노빌의 봄> 한국판에 포함된 최호철의 추천사. 170쪽.


18)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 개념을 통해 독자의 읽기 행위를 작가의 저술 행위에 종속되지 않은 자율적 행위로 끌어올렸다. 그에 따라 읽기 행위의 대상인 작품도 저자의 권위가 부여되어 있고 작자의 의도에 따라 읽을 것이 요구되는 ‘작품’이 아니라, 독자가 그 스스로의 시선으로 읽고 다시 쓸 수 있는 – 이를테면 반론하거나 달리 접근하거나 동의하는 부분을 자신의 구체적 맥락에서 재서술하는 등 – ‘텍스트’로 재규정한다. 이 맥락에서 그가 <S/Z>에서 주장한 “읽는 텍스트(readerly text)”와 “쓰는 텍스트(writerly text)”의 구분은 어떤 텍스트의 본래적 성격만을 기준으로 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텍스트 그 자체의 성격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를 대하는 한 독자와 텍스트의 사이에서’ 읽는 텍스트와 쓰는 텍스트로 나뉘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독자가 쓰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 있다면, 그 안에 어떤 열린, 쓰여질 만한 성격이 (물론 그것이 최종심급은 아니지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체르노빌의 봄>은 분명 그런 텍스트다. 그 성격을 특정하는 것이 이 절의 내용을 이룬다. ‘읽는 텍스트’와 ‘쓰는 텍스트’에 대해서는 롤랑 바르트, <S/Z>, 동문선, 2006. 1장 참조.)


19)<체르노빌의 봄> 94~95쪽.


20)A와 B의 첫 장면과 C의 한 장면(31쪽).


21)112~113쪽.


22)조익상, 「후쿠시마 2주기, <체르노빌의 봄>이 온다.」, <빅이슈> 55호. 2013.


23)조익상, 「[만화로 본 세상 칼럼] <체르노빌의 봄>- 피폭의 현장, 대세와 ‘다르게 보다’」, <주간경향> 1117호, 2015.3.17.

조익상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만화 평론을 쓰고 있다. 만화를 통해 삶을 되짚어 보고 이야기 나누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작가보다는 독자가, 작품보다는 현실이 더 어렵다는 것을 매번 절감한다. 현재는 "주간경향", ‘만화로 보는 세상’ 코너에 만화 칼럼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으며, 협동조합 가장자리에서 만화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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