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구울>, ‘우리’는 공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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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 우리에게 묻는 것들

1<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의 포스터

좀비 영화의 클래식으로 여겨지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에서 ‘좀비’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꽤 알려진 사실이다. 영문 모를 이유로 무덤에서 깨어나 인간들을 물어뜯어 먹어 치우는 이 좀비들은, 영화 안에서 ‘저것들 (those things)’ 또는 ‘구울 (ghoul)’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좀비의 원형이 구울이었단 말일까? 그러나 엄밀히 말해 좀비와 구울은 같지 않다. 1960년대 조지 로메로 감독의 영화와 함께 유통된 ‘좀비’라는 단어는 본래 부두교 의식에서 ‘살아있는 시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마술적 힘에 의해 죽었다가 깨어난 이 좀비들에게 자의식은 결여되어 있다. 영혼이 없는 퍼펫과도 같은 이 좀비들이 공포스러운 이유는, 그들이 인간을 먹기 때문이 아니다. 마땅히 죽어 있어야 할 것이 살아 움직이는 섬뜩함, 인간이었던 것이 그저 썩고 부패하는 역겨운 고깃덩어리임을 드러냄으로써 좀비는 비로소 공포의 대상이 된다.

2<시디 누만의 이야기>에서 구울들이 시체를 먹는 장면이 묘사된 삽화

이렇듯 대중문화에서 널리 퍼진 고딕 문화의 일부로서 좀비가 자리를 잡아왔다면, 아랍 신화에서 유래된 악마의 한 종류인 구울은 아마도 <도쿄 구울>에서 처음 들어봤음직한 생소하고 낯선 이름에 가깝다. 아랍 신화에서 유래한 구울이 기록되어 있는 최초의 문헌은 <천일야화>에 수록된 <시디 누만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시디 누만의 아내는 밥알을 세며 식사를 하는 등 기이한 행동을 보이다가, 늦은 밤 몰래 집을 빠져나와 다른 구울들과 시체를 파먹는 모습을 들키고 만다. 여기서 구울은 ‘인육을 먹는 악마’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좀비가 외양에서부터 뚜렷하게 인간과 구분되는 반면, 구울은 ‘모르고 결혼할 정도’로 인간과 구별하기 힘들다.

좀비와 구울이 이러한 기원적인 차이가 있다 해도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좀비들을 ‘구울’로 불렀던 것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현대의 좀비와 구울이 ‘타자’라는 점에서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조건을 심문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 타자들은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인류에게는 거대한 재앙이며 위협이라는 점에서 절멸시켜야 할 적으로 규정된다. 인간 대 좀비, 인간 대 구울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세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직적이고 물리적인 힘으로 적을 제거하고 세계를 안정화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인간과 닮은 형상을 한 괴물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간성의 토대는 계속해서 미세하게 진동한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주인공인 벤이 좀비로 오인당해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결말은 좀비 영화라는 장르 전체를 아우르는 세기말적인 정서를 상징한다. 이 같은 ‘영웅’의 죽음은 다소 패배주의적이고 회의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인간성은 회복되거나 구제되거나 보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질문되고 고민할 수 있는 투쟁의 장소가 될 따름이다. 이미 좀비들을 즐겁게 도륙하고 있는 마당에 영웅이 승리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것이 어떻게 인간성의 승리가 될 수 있을까.

3<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에서 주인공과 좀비가 된 주인공의 친구가 게임을 즐기고 있다

좀비 영화가 주는 시각적 쾌감의 크기만큼, 윤리와 보편성에 대해 던져지는 질문의 크기 역시 묵직하다.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괴물인가? 이 같은 질문에서 동시대의 좀비 영화들이 내놓는 대답들은 주목해볼 만하다. 요컨대 조지 로메로 감독의 <랜드 오브 데드>(2005)나,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새벽의 황당한 저주>(2004)에서 인간과 좀비는 분명 공존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힘을 합쳐 ‘배부른’ 자본가들을 박살낸 후 좀비 ‘주체’와 혁명가 인간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고 유유히 제 갈 길을 떠난다. 좀비가 되어버린 친구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 넣고 절망에 빠지는 대신 목줄을 걸어두고 애완용 좀비로서 그를 돌봐주는 결말도 가능해졌다. 이 괴물들을 완전히 없애는 것만이 우리를 인간으로서 보증해주지는 못한다는 결론에 가까울 것이다. 대신 그들을 모른 척해주거나, 길들이는 방식으로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해답인가? 영화가 끝난 후 좀비들이 인간을 다시 덮쳐왔을지 어쨌는지는 모를 일이다.

 

반은 인간, 반은 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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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다 스이 작가의 <도쿄 구울>의 7권 표지

최근 괴물을 다룬 많은 작품 중 <도쿄 구울>이 유독 좀비 영화를 상기시키는 이유는, 만화가 제시하는 상황들이 이 같은 질문 주변을 끊임없이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편성과 인간성에 대한 질문들과 타자와의 공존 가능성에 대한 의문은 다원주의의 가치를 믿는 우리 세대에게 이미 익숙해진, 체화된 태도로서 자리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이시다 스이 작가의 <도쿄 구울>은 총 14권으로 완결된 만화로, 본래 인간이었지만 장기이식을 통해 후천적으로 구울이 되고 만 ‘카네키 켄’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작중에서 구울은 인간을 주식으로 삼으며 ‘카구네’라는 특수능력을 사용해 인간에 비해 물리적으로 우세한 힘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 대해 인간 측에서는 ‘구울 대책국(CCG)’를 마련하여 전략을 연구하는 한편 구울의 카구네에 대항할 수 있는 ‘쿠인케’라는 무기를 개발한다. 이 쿠인케의 재료는 다름 아닌 구울의 ‘카구호’로, 카구네를 발현시킬 수 있는 원천적인 힘인 ‘RC세포’가 저장된 구울 특유의 생체 기관이다. <도쿄 구울>의 전개 과정은 이 카구네와 쿠인케를 이용한 전투를 중심으로, 전형적인 소년 만화의 구도를 답습하며 전개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뻔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이 만화에서 던져진 흥미로운 몇 가지 설정들로 충분히 희석되고 있다. 바로 주인공인 카네키 켄이 ‘후천적 구울’로서 인간과 구울의 명확한 이분법 사이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56<진격의 거인> 애니메이션에서 거인화를 시도하는 에렌 예거와 거인화된 에렌 예거의 모습

사실 이런 설정은 쉽게 하지메 이사야마 작가의 <진격의 거인>을 연상시킨다. <진격의 거인> 역시 주인공인 ‘에렌 예거’가 일생 복수의 대상으로 증오해왔던 ‘거인’이라는 대상이 바로 자신이기도 했음을 알게 되며 스토리상의 큰 전환을 맞게 된다. 뿐만 아니라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다른 거인들이었음을 알게 되며 에렌 예거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 같은 갈등은 결국 에렌 예거 역시 반은 거인이라는 점에서 투명하게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에 실패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에렌 예거의 모순은 이것이다. “인간을 먹다니, 이 괴물!” 이라고 외쳐봤자, “그렇게 말하는 너도 괴물이잖아!”라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다. 이는 <도쿄 구울>의 1권에서 카네키가 구울화된 후 토우카와 겪는 갈등과 유사하다. 그러나 <진격의 거인>이 이러한 인물들-거인과 인간 중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을 소재로 삼고 있다곤 해도, <도쿄 구울>만큼 주인공을 정체성으로 인해 방황하게 두진 않는다. 즉 에렌 예거가 ‘denial-거인(스스로가 거인임을 부정함)’ 하느라고 연재분 수십 화를 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7<도쿄 구울> 애니메이션에서 구울화 되기 전의 카네키 켄. 순진해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두 만화 모두 주인공의 정체성을 소재로 쓰고 있고, ‘인간과 구울 혹은 거인’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갖고 있으며, ‘세상은 잘못되었다’는 뼈저린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이유로 단순히 ‘중2’ 장르의 특징일 뿐이라고 얼버무릴 수 있을까? 물론 장르적인 특성도 부정하긴 힘들 것이다. 구울이든 거인이든 뭐든 어쨌든 재앙은 재앙 아닌가? 다만 <진격의 거인>이 벽 밖의 세계를 상상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를 비관적인 톤으로 역설하는 반면, <도쿄 구울>은 인간과 괴물 사이의 관계의 여러 가능한 형태들을 주인공을 통해 제시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는 지적은 가능해 보인다. 때문에 <도쿄 구울>이 보다 조밀하게 주인공의 정체성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전개상 자연스럽다.

좋아하는 소설가의 소설을 읽고 호감 있는 상대에게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소심한 대학생인 카네키가 어떻게 인간이 아닌 ‘구울’로서 자신을 정체화하는데 성공한 것일까. 아니, 일단 그 정체화가 성공하긴 했던가?

 

이 구울과 인간들이 공존하는 법
카네키 켄의 ‘실패’에 대해 섣부르게 말하기 전에, 우리는 <도쿄 구울>에서 제시된 몇 가지 흥미로운 공존 모델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치 <랜드 오브 데드>와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서 좀비와 인간이 그러했듯이, 다양성과 보편성이 반드시 반목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말이다.

탈식민주의 문화 이론가인 호미 바바는, ‘이원구조론’으로 피지배 경험을 역설한 파농의 논의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발전시키고 피지배 계층의 내부에서 주체적인 가능성을 타진한다. 파농이 지배 주체인 백인의 욕망을 고정하고 그로 인해 단순히 보여지거나 혹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흑인 정체성을 전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바바는 이러한 주체성이 결코 고정되거나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문화는 ‘혼종적’이며, 그렇기에 이미 피지배 계층의 문화 역시 일방적으로 물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피지배 계층의 문화와 지배 계층의 문화가 경계선이 흐릿하여 구분이 모호한 것이라면, 단순히 양가적으로 ‘선’ 혹은 ‘악’의 구도로 나누어질 수 없게 되어버릴 테고, 전복적 힘을 가진 주체는 지배나 피지배 계층이 아닌 바로 그 틈새에서 탄생하게 될 것이다. 바바는 이렇듯 피지배 계층 내부에서 ‘틈새’, ‘중간 지대’로 시선을 돌림으로써 새로운 주체가 가지는 힘을 이야기한다.

89스즈야 쥬조

<도쿄 구울>은 실제로 어느 한쪽을 완전한 타자로 종속시키는 대신, 인간 역시 구울에 의존하고 있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주는 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이를테면 ‘쿠인케’는 어떤가? 인간이 인간을 뛰어넘는 강함을 확보하고 구울을 처분하기 위해 쓰이는 도구가 구울의 ‘카쿠호’를 압축한 것임을 상기해본다면, 인간 역시 구울의 ‘불온한 응시’에서 분리된 채 흔들림 없이 서 있을 수는 없음이 자명해 보인다. 인간 역시 너무나 불안하며 흔들리는 존재임이, 그가 과시하는 수단에 의해 반복해서 증명된다. 뿐만 아니라 CCG의 예외적인 인물인 ‘스즈야 쥬죠’의 경우, 그가 구울인가 아닌가 판단하는 것은 (그의 과거가 밝혀지기 전까지) 독자들에게 여전히 시험으로 남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라기엔 너무나 도덕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것은, CCG가 말하는 제거 대상으로서의 구울과 보호 대상으로서의 인간이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보편성’의 토대는 다시 한 번 흔들린다.

1011니시오와 토우카.

‘토우카’나 ‘니시오’가 각자의 친구나 애인과 맺는 관계는 어떤가? 물론 토우카의 경우 일방적으로 ‘희생’함으로써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친구를 제외한 다른 인간들에게는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하지만 5권에서 벌어진 츠키야마전에서 제물이자 목격자였던 니시오의 애인을 결국 죽이지 못한 것으로 보아, 토우카 본인 역시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그 뚜렷한 경계가 점점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니시오의 경우는 어떤가? 심지어 ‘openly-구울(스스로를 개방적으로 구울임을 인정함)’로서, 자신을 받아들여 준 애인과 서로 의존하고 있는 관계 아닌가? 이들은 분명 인간과 구울의 두터운 경계 사이를 가로지르며 적과 아군, 나와 타자 사이를 매끄럽지 못하게 재기입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 때문에 인간이면서 구울인 존재, 카네키 켄이 스스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외부로 자신을 표출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이 중간지대의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자들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인 카네키는 후천적으로 자신을 구울로서 정체화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앞의 인물들이 모두 날 때부터 인간이거나 구울인 반면, 카네키는 이식 수술 이후 여태까지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해야만 하는 조건에 놓이는 것이다.

 

‘나의 안테이크를 지켜줘’
카네키가 오랜 ‘denial/closet-구울(구울임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킴)’ 끝에 최초로 ‘구울’임을 인정하고 (사실인지 환상인지 모호하지만) 다른 구울을 뜯어먹게 되는 것은 7권에 이르러서다. 그간 카네키는 무엇을 했던가? 1권의 카네키를 상기해보자면, 구울이 된 스스로를 너무나 혐오스럽게 여긴 나머지 자기 손으로 식칼을 들고 신장을 꺼내려고 한 전적이 있다. 심지어 구울 공동체(?)에서 하나의 구울로 인정받는 의식과 다름없는 ‘가면’을 제작 받고 나서도, 3권의 아몬과의 대결에서 “살인자가 되기 싫다.”라며 아몬에게 도망칠 것을 애걸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왜 카네키는 그토록 자신을 구울로 인정하지 않는가?”가 아니다. 물론 구울이 ‘되는’ 것은 어렵다! 인간을 먹지 않고서는 커피 외에 무엇도 섭식 불가능하단 점, ‘참을 수 없을 만큼’ 인간의 살 냄새에 끌린다는 것은 그가 속한 육체가 생존하기 위해 요구하는 조건들에 대한 문제다. 동물적인 본능 자체가 그를 구울로 ‘만들지’ 않는다. 구울이 스스로 ‘된다’(고 선언하)는 것은, 본디 인간이었던 카네키로 하여금 일곱 권에 달하는 분량만큼의 갈등과 고민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엇이 카네키를 ‘구울’로서 정체화하게 만들었는지를 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7권에서 카네키는 ‘아오기리 나무’의 소굴로 끌려가 긴 시간 동안 야모리에게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끔찍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그동안 그의 육체는 ‘인간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시켜주려는 듯 계속해서 재생하게 된다(“마치 나는 정말로 괴물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기분이 든다.”). 그는 고통스럽게 그가 ‘인간이 아님’을, ‘구울’임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육체적인 고통에 반응하지 않자, 야모리는 카네키의 동료를 눈앞에서 무참히 살해하게 되는데 이것이 카네키를 소위 ‘각성’시키게 한 외부적인 트리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1권 아몬과의 재회에서 대화를 원하는 아몬에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대답할 정도로, 각성 이후의 카네키의 행보는 ‘지금까지 만났던 구울 중 가장 정신 나간’ 것에 가까울 것이다.

12각성 이후의 카네키

그의 구울로서의 정체화는, 지극히 극단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구울’이라는 정체성 속에 고립하고 매몰시킴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가 구울 임을 인정한 후, 이전의 인간 정체성과 구울 정체성의 경합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이식수술 이후 카네키 켄의 고민이었던 “앞으로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는, 그의 ‘구울’ 정체성에 떠밀려 영영 사장된 것처럼 보인다. 이 시점에서 그가 자멸하게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면서 이 곳에 공존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너무 일찍 잊혔다. 인간이었던 구울의 고민, 즉 인간과 구울이 공존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다양한 모델들은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폭력에 취한 카네키에게는 고려 대상조차 되지 않는 것 같다.

이후 카네키의 행보가 ‘나의 소우주 지키기’에 머무는 것으로써, 이 혼종 구울의 한계는 너무나 명백해졌다. 아오기리 나무를 격파하기 위해 분투하던 카네키는, 마치 퇴근 후 지친 가장이 된 양 ‘안테이크’의 사람들이 다시 자신을 받아주기를 원한다. ‘정말 소중한 것’이 이제는 무엇인지 깨달았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고민은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가림막이 쳐진 채다. 어떤 의미로 그는 계속해서 ‘디나이얼’인 상태다. 다른 구울과 인간들이 서로의 관계 맺음을 통해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두 세계의 이음새를 밝히고 있는 동안, 카네키는 구울로 정체화한 후 다시는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카네키는 더 강한 힘과 더 많은 적을 원하게 될 뿐이다. 다른 대안이 불가능하기에, 카네키가 맞는 파국이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정말로, ‘우리’는 공존할 수 있을까?
물론 <도쿄 구울>에서의 구울은 인육을 먹어야만 생존할 수 있기에, 누군가는 구울의 존재 자체가 인간이라는 종에게 있어 큰 위협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초반의 “왜 죄 없는 인간을 먹느냐?”는 카네키의 질문에 일순간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만약 구울이라는 종이 인간을 해침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다면, 즉 보편적인 정의를 훼손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는 존재라면, 구울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할 까닭이 있을까? 인간은 인간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정언명령은 법 이전에 도덕적이고 도덕적이기 이전에 윤리적인 질서에 가까운 것 아닌가. 하나의 세계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몇 번이고 번복될 수 있다면, 혹은 ‘살인해도 좋다’는 뒤집힌 판본이 공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수호해야 할 가치들은 금방 무너지고 말 것이다.

13<프랑켄슈타인>(1931)

앞서 제시한 좀비와 마찬가지로, 괴물들의 이야기는 자주 타자-여성, 유색인, 성소수자, 장애인의 이야기로 번역된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의 비극성은 그가 ‘인공적’이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심지어 그 창조주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박해받고 증오받는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혼종으로서 ‘괴물’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끝내 (‘정상적인’) 세계의 규범과 질서 속에 통합되지 못한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그렇고, ‘뱀파이어’나 ‘좀비’, 각종 유령, 혹은 ‘안드로이드’와 같은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도쿄 구울>에서도 구울들은 인간에 의해-그 압도적인 능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쫓기고 제거당하는 운명이다. 이들의 대립항은 당연히 ‘인간’이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이들 소수자들을 판단할 수 있는 지위를 자연적으로 승인받는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선하고 옳은 위치에서 판단하게 되는가? 앞서 제시한 예들인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진격의 거인>을 떠올려보자. 좀비와 거인이 인류 전체에게 재앙임이 분명함에도, 좀비를 능가하는 인간의 잔학성에 표정이 굳고 거인들의 비극적인 상황에 감정이입하며 안타까워하게 되는 이유는, 어느 쪽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이 계속해서 시험당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인간적인’ 보편성 자체에 그 균열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카네키 켄이 자폐적인 세계로 고립되었다고 해도, <도쿄 구울>에서 던져지는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로 남아 있다. 구울이 인간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에게 의존하며 관계 맺고 있는 인간들과 구울들이 있다. 서로가 믿는 가치가 설령 다를지라도, 그 다르다는 사실로 인해 함께 있을 수 있는 관계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