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만화라는 끝나지 않는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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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무엇을 ‘재난’이라 부를 것인가?

“여긴 어디지? 아무 것도 안 보여!”
<생존게임>, <드래곤 헤드>, 최근의 <심연의 하늘>까지, 재난만화의 도입부는 주인공이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치 연극에서 배경이 바뀌면서 암전되었다 밝아지듯 어둠을 잘라내는 순간, 세상은 이미 다른 세계로 변해있고, 철저히 파괴된 일상 위에서 스토리가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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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의 목표를 재난 만화의 고유한 특성을 밝히는 것으로 삼았고, 유사 장르인 좀비, 괴수, 포스트 아포칼립스등과 구별되는 재난 만화의 특징을 다루려고 한다. 각각의 장르는 양적-질적 성장을 통해 독자적이고 고유한 형태 진화했기에, 재난물의 하위장르로 국한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난 장르는 ‘낯설게 보기’의 수법으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을 도입한다. 오에 겐자부로에 의하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란 비일상적인 캐릭터, 사건, 플롯을 리얼리즘의 수법으로 그려내 물리우주를 재음미 하도록 유도하는 방법론1) 이다.2) 재난 장르에서는 재난으로 인해 신체나 일상의 공간이 파괴되고,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에 입각해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그 결과 일상은 ‘낯설게 보기’로 철저히 타자화 된다.

나는 재난 장르의 고유한 특성은 크게 두 가지, ‘우파 공포’, ‘적대자=세계’로 보고 있다. ‘우파 공포’란 존 카펜터가 말한 공포영화의 분류로, ‘적’이 어디에 위치하는 가로 구분하며 적이 ‘우리 밖’에 있으면 우파, ‘우리 안’에 있으면 좌파로 본다. 우파 공포에서 적은 울타리 밖에서 안으로 침입해오는 존재인 타자로 이해나 의사소통, 혹은 타협이 불가능한 존재로 그려진다. 적을 물리치면 울타리 안은 다시 ‘안전한 공간’, 일상으로 회복되고 혼란은 사라진다. 재난 장르의 적인 재난은 주로 천재지변, 큰 규모의 이재, 전염병 등 거시적인 현상이자 의인화되지 않아 소통이 불가능한 타자로, 끊임없이 캐릭터를 위협한다.

‘적대자=세계’에서 ‘적대자’란 스토리에서 갈등의 대립축이고, ‘세계’는 내 독자적인 스토리텔링 작법론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스토리의 구조와 관계가 있다. 나는 스토리를 ‘뇌가 물리 우주(현실)을 인지하는 방식으로 구성한 정보공간’, ‘전이 우주’라고 정의하는데, 전이 우주도 ‘1 시간차원 + 3 공간 차원’으로 구성된다. 공간 차원은 1차원(=캐릭터), 2차원(=사건), 3차원(=플롯/세계)으로 구성되며, 낮은 차원이 모여 상위 차원을 형성한다. 3차원은 플롯과 세계로 나뉘는데, 세계는 1, 2, 3차원을 위한 무대이자 배경으로 각각에 간섭한다. 여기에 스토리텔링을 하는 물리적 시간이 더해지면 전이 우주는 현실과 접속하게 된다. 이야기를 돌려, ‘세계’가 배경으로만 잠재되어 있는 다른 장르와 달리, 재난 장르에서는 적대자로서 각 차원에 개입해 갈등을 유발하는 소통 및 타협이 불가능한 절대적 존재로 설정된다. 칸트의 장엄미나 SF의 센스 오브 원더(sense of wonder)와도 관계가 있으나, 이 글에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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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돕기 위한 예로, 재난 장르와 괴수 장르가 미분화된 영화 <고지라>(1954)를 들겠다. 고지라는 단순한 파충류 괴수가 아니라, 일본이 경험한 ‘악몽’이자 ‘세계’다. 원폭 피해의 은유이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원혼이 ‘들린’ 외경의 존재다. 고지라는 일반적으로는 감정이입이나 소통이 불가능한 천재지변과도 같은 존재로 전쟁 특수로 번영하기 시작한 일본의 일상을 파괴한다. 최근 리메이크한 <고지라>(2014)에서도 이 점을 잘 살렸다. 반면 시리즈 2탄부터, 고지라는 캐릭터로서 감정이입의 대상이 되고, 재난 장르의 성격에서 벗어난다.

 

 

재난만화: 일본의 미국의 경우, 그리고 만화와 영화의 차이
재난 만화는 압도적으로 일본에서 두드러진다. 반면 미국에는 드물다. 내가 발견한 것은 그래픽 노블 (이하 로, 태풍 카트리나로 피해를 입은 뉴올리언스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미국에는 대신 재난 영화가 두드러진다. <에어플레인> 시리즈, <타워링>, <포세이돈 어드벤처> 등등 인재를 다룬 영화에서부터 최근에는 자연재해를 다루는 <투모로우>, , <샌 안드레아스> 등도 보인다. 두 나라 간의 차이는 물론 자연환경 등의 차이도 있으나, 스토리텔링의 형식으로 한정하자면 만화와 영화, 두 매체의 고유한 특성 차이가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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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영화와 다른 가장 큰 차이는 움직임과 소리의 부재다. 이 둘은 영화의 임장감(reality)를 구성하는 주요 감각으로, 만화는 대신 캐릭터의 매력이나 심리적 감정이입을 이용해 임장감을 만든다.3) 이 차이가 똑같이 재난이라는 거시적인 현상을 다루면서도 스토리텔링의 차이를 만든다.

영화는 탑-다운 방식이다. ‘플롯’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며, 움직임과 소리를 보여주는 외현적인 ‘사건’을 쌓아서 구축한다. 특히 재난 영화는 스펙터클한 영상을 보여주고, 캐릭터는 여기에 반응하는 정도로 축소된다. 시간적 제약 문제로, 플롯은 해결 가능하거나 적어도 탈출이 가능한 것만으로 한정되고, 사건은 플롯에 봉사하는 것만으로 압축-선별한다.

반면 (연재)만화는 바텀-업 방식이다. 외현, 내현을 포함한 ‘캐릭터’의 행동과 심리에 감정이입시키는 것이 목적이며, 미시적인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준다. 준다. 극단적인 상황(=사건)에 처한 캐릭터의 행동과 심리를 묘사하기에 긴 분량이 요구된다. 이 긴 분량의 사건을 모두 통합하여 플롯을 이루기 위해 종종 해설이나 방백을 넣기도 한다. 재난은 사건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배경이자 원인으로 작용한다. 재난 만화는 종종 결말을 맺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사건이 너무 많아서,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플롯이라는 한 단계 위 추상도로 포섭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용두사미가 되거나, 설명하더라도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재난’의 아우라를 지워 작품의 매력이 왜소해진다고 비판을 받는다. 명작으로 꼽히는 <드래곤 헤드>조차 이 결말에 동일한 비판을 받았다.

‘길이’와 ‘형식’의 차이도 원인 중 하나다. 미국과 달리, 일본은 주간지 연재가 주류를 이루며 긴 분량으로 이어지는 대하장편연재 방식인 반면, 미국은 대부분 짧은 분량의 1화 완결 스토리 형식이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긴 호흡의 형식도 존재하나, 형식을 막론하고 갈등이 캐릭터 대 캐릭터로 양식화되어 있어 거시적인 현상도 인물 간 갈등으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 후에 그래픽 노블로 발간된 도 본래는 웹 연재만화다. 웹이기에 분량의 제약이 없어 재난을 다루는 것이 가능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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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 체험’도 이유로 들 수 있다. 미국 독자는 일본 독자에 비해 재난상황을 경험한 일이 드물다. 일본은 전쟁, 피폭, 화산 폭발, 지진 등 거시적인 자연재해나 인재를 경험해왔다. 일본의 경우 강도 높은 지진이 잦았던 1972~1974년, 그리고 1993~1997년 부근에 지진을 소재로 한 재난 만화가 다수 발간되었다. 미국의 경우, 최근 자연재해나 9.11 테러 등을 경험하면서 재난을 테마로 다루는 작품은 분명 늘었으나, 만화에서는 길이와 형식의 문제로 여전히 드물다.

또 다른 이유는 ‘시쇼세츠(私小說) 전통’이다. 시쇼세츠는 카메라로 비유되는 자연과학주의적 시선을 내면으로 돌린 것으로,4) 캐릭터의 내면묘사로 임장감을 주는 일본의 재난 만화는 사실상 시쇼세츠과 동일한 문법을 갖는다. 1980~1990년대의 버블경제 직후의 끝나지 않는 일상(終り無き日常)’ 5)의 거울상처럼 재난 만화나 극단적인 폭력이나 파괴를 테마로 삼은 만화가 등장한 것과 맞물린다.

종합해보면, 재난 만화란 “거시적 재해에 처한 개인(들)의 내적 갈등과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벌이는 행동의 변화를 쫓으며 사건과 상황을 쫓는 스토리로, 독자에게 일상을 낯설게 보게 만든다.”로 요약할 수 있다.

 

양식: 재난 만화에서 흔하게 보이는 장치와 하위 장르들

재난 만화는 크게 네 가지 하위 장르로 분류가 가능하다. 기준은 재난에 대처하는 개인에게 집중하느냐 군상의 상호작용에 집중하느냐, 그리고 행동을 중심으로 하느냐 내면을 중심으로 하느냐다. 낭만주의 모험담과 사이코 스릴러, 폴리티컬 픽션과 다큐멘터리는 각각 거울상으로 대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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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재난 만화의 하위 장르

낭만주의적 모험담은 ‘완전한 자연에 대항하는 개인의 강한 의지’가 테마로 주로 주인공이 사건을 극복하는 행동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며, 신경질적이고 현대적인 요소는 ‘나약함’으로 치부된다. <생존게임>에서는 실제로 생존에 필요한 기술을 해설하고 보여주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필요한 정보는 신의 시점에서 해설로 제공된다. 자연을 극복하면서도 자연 그 자체인 주인공 사토루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며, 입체적인 내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현실에 적용 가능한 지식으로 빈 공간을 채운다.

반면 사이코 스릴러는 일상을 낯설게 보게 하는 목적에 충실한 하위 장르다. 일본의 재난 만화에서는 이 사이코 스릴러가 두드러진다. 주로 성적 충동 등 ‘일상의 무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재난을 사용하며, <표류교실>이나 <드래곤 헤드>에서는 재난이 일종의 알레고리로 작용한다. 극한 상황에서 캐릭터들은 강한 내적 모순에 직면하고, 이들의 행동은 신경질적인 노이로제로 표출된다. 성에 대한 집착이나 죽음이나 어둠에 대한 공포가 주요 테마로 등장하며, 객관적인 해설보다 독백이 중시된다. <배틀로얄> 등 재난물과 특성을 공유하는 생존물에서도 사이코 스릴러의 속성을 찾아볼 수 있다.

폴리티컬 픽션은 재난에 대처하는 사회 시스템에 중점을 두고 있다. 주로 인간 군상의 집단역학을 시뮬레이션하며, 낭만주의적 모험담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많이 반영한다. 대표적인 예인 <일본 침몰>(만화의 경우는 사이코 스릴러의 면모도 보이고 있다.)의 원작자 코마츠 사쿄는 일본 SF계의 거두로 <일본 아파치족>, <물체 O>, <부활의 날>, <수도 소실(首都消失)>, <여기는 일본> 등 다수의 폴리티컬 SF를 남겼다. 전염병, 천재지변, 재난물로서의 괴수물 등도 동일한 성격을 보인다.

다큐멘터리는 드문 장르로, 실화를 바탕으로 하며 실제 인물의 내면이 반영된다. 만화의 경우는 보기 드무나, 미국의 에서 주요 사건은 대부분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들이고, 실제 인물의 인터뷰 내용이 극 중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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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만화의 양식적 연출은 크게 ‘세계=재난으로 낯설게 하기’와 ‘시쇼세츠적 내면묘사’로 목적을 나눌 수 있다. ‘세계=재난으로 낯설게 하기’는 도입부의 암전, 신(=전지적)의 시점으로 잡은 부감앵글와 내면 해설,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으로 그리는 파괴된 신체와 배경 세계, 그리고 잦은 플래시백이 있다. 신의 시점은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파괴된 신체와 배경 세계는 재난의 폭력으로 일상을 낯설게 하고 스스로를 물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플래시백은 낭만주의적 모험담에서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힌트를 얻는 복선으로 주로 사용된다. 사이코 스릴러에서는 시쇼세츠적인 내면묘사를 위해서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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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쇼세츠적 내면묘사’는 외경과 대비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춘다. 구체적으로는 잦은 독백, 신의 시점으로 묘사된 재난과 병치된 캐릭터의 얼굴 클로즈업, 그리고 공허한 눈이 있다. 이는 모두 내면을 묘사하기 위한 장치로, 특히 눈의 표현은 일본 만화의 심리묘사 기법 중에서도 특징적이다. 테즈카 오사무는 스토리 전달을 위해 캐릭터의 ‘내면’을 묘사할 필요를 느꼈고, 이를 위해 기법으로 확립했다. 구체적으로 눈썹과 눈의 크기를 키워 강조하고, 감정을 추상화한 표정으로 기호화하였다.6) 스콧 맥클라우드는 이를 ‘탈바가지 효과’라고 부르는데, 세밀한 배경과 추상화된 얼굴로 임장감을 일으킨다고 지적한다.7) 재난 만화의 경우, 극한 상황의 내면을 반영해 눈은 공허하고 표정이 사라진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결론
재난 만화는 일상을 다시 보게 만든다. 거시적 현상에 대면한 개인의 내면과 행동에 집중해 경외감을 일으키는 스토리텔링이 중심이 된다. 재난 만화는 ‘세계’를 소통 불가능한 절대적인 타자이자 갈등의 축으로 두어 사회나 개인 등 일상공간을 낯설게 보게 만드는 거울상이자 그림자로,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일상을 뒤흔든다. 그 결과 독자에게 경외감(Sence of Wonder)을 준다. SF의 경외감이 우주의 거대함에서 비롯되나, 재난 만화의 경우는 재난에 대항하는 낭만주의적 행동, 인간 군상의 집단역학, 혹은 시쇼세츠적으로 묘사된 내면이라는 소우주에서 비롯된다. 자연환경 및 매체의 특성과 전통으로 인해 주로 일본에서 발달했다. 그 중에서도 시쇼세츠적인 사이코 스릴러가 두드러지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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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오에 겐자부로, <소설의 방법>, 한림사.

2)오에 겐자부로는 <소설의 방법>에서 토마스 만의 작품을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예로 든다. 그 중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훌륭한 ‘재난 만화’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작중에서 토마스 만은 자신을 모델로 한 주인공이자 작가 구스타프 아센바흐의 내면을 전염병으로 황폐화된 베니스와 미소년을 대비시키며 그린다.

3)코이케 카즈오, <사람을 끌어들이는 기술(人を惹きつける技術)>, 코단샤

4)김용옥, <루어투어 시앙쯔> 서문, 통나무.

5)미야다이 신지가 제안한 개념으로,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처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을 말한다. 끝나지 않는 일상을 건전하게 이겨내지 못하고 ‘초인’이 되려고 하면 강력범죄, 파괴행동, 신흥종교 등에 빠지게 된다고, 그는 지적한다. 이러한 충동이 재난 만화나 괴수영화에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Q>과 동시 상영한 <거신병 도쿄에 나타나다(巨神兵東京に現わる)>에서 잘 나타난다. <최종병기그녀> 등 세카이계라는 2000년대 일본의 서브컬쳐 장르도 이와 연결되어 있다.

6)나츠메 후사노스케(夏目房之介), <테즈카 오사무의 모험-전후만화의 신들(手塚治虫の冒険-戦後マンガの神々)>, 쇼가쿠칸분코(小学館文庫)

7)스콧 맥클라우드, <만화의 창작>, 비즈앤비즈

손지상

소설가, 만화평론가, 칼럼니스트, 번역가.

주요 출간:
단편집 [당신의 苦를 삽니다], [데스매치로 속죄하라 - 국회의사당 학살사건], [스쿨 하프보일드], [일만킬로미터 너머 그대. 스토리 작법서 [스토리 트레이닝: 이론편], [스토리 트레이닝:실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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