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마신다 미깡의 <술꾼도시처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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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술이 맛있어졌다. 사람도, 수다도, 안주도 좋아해 이 모두가 총합된 술자리는 언제나 반겼지만 요즘처럼 술 자체의 맛을 즐기는 것은 기억에 없던 일이다. 적어도 나한테는 술이란 그저 모임의 윤활제랄까, 마중물이랄까 그 자체의 맛보다는 흥을 돋우는 기능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동안 쓰기만 했던 소주의 담백함이 좋아지고, 몇 년 동안 처박혀있던 보드카를 꺼내 새삼 그 깔끔함에 감탄하는 나 자신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밥 먹자는 사람보다 술 먹자는 사람이 더 반갑고, 호감 가던 이가 술을 입에도 못 댄다고 하면 긴 인연은 못 되겠구나 의례 짐작(혹은 포기) 하고, 하다못해 배낭여행 때도 맥주를 거절하지 않는 독일 애들이 제일 반갑고 만만하다.

막상 이런 상태가 되고 보니 스스로도 이런 변화가 낯설 때가 있다. 체질적 주당도 아닌데다 간이 쌩쌩하던 젊은 날을 다 보내고 오히려 금주를 해야 할 판인 요즘에서야 술맛을 알게 되다니. 처음 보드카 한 잔을 비우고 멀쩡한 듯 내 방에 돌아온 다음날 아침, 밤새 SNS에 올려놓은 별별 희한하고 유치한 메시지들을 삭제하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왜, 이제 와서, 이렇게 술을 마시는 걸까? 외로운가, 힘든가, 억울한가 아니면 정말, 정말, 정말 술이 맛있어진 건가?

미깡의 <술꾼도시처녀들>은 그야말로 술을 참 맛있게 마시는 36세 동갑내기 세 여자 친구들의 주당일지같은 만화다. 내용이라고 해 봐야 늘 어떤 핑계로 얼마나 더 자주 더 많이 마실 수 있나를 셋이 함께 마시면서 고민하는 게 다다. 물론 썸남도, 짜증나는 상사도 이상한 술집주인도 간간이 등장하지만 얘기의 대부분은 돈도 체력도 축나는 술에 대한 애증과 그로 인한 세 친구의 합심된, 하지만 실로 무력하기 그지없는 분투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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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동전 한 푼에도 벌벌 떠는 소시민 직장인 내지 프리랜서로, 언제나 메뉴판에서 가장 싸구려 안주로 딱 한 잔만 하자고 시작한 술자리는 술병이 쌓여가면서 가장 비싼 안주를 향해 지갑이 열리다못해 하얗게 뒤집어질 때까지 계속된다. 귀중한 물건들은 수없이 잃어버리면서 술집의 쓸데없는 물건들은 가방 가득 쓸어 담아온다. 술자리에서의 온갖 진상 짓으로 애써 쌓은 이미지도 관계도 물거품으로 끝난다. 비싼 술을 얻어먹고자 가장 재수 없는 상사 옆자리의 흑기사를 자청한다. 술병 나고 지갑 털리고 이미지 추락하고 기 빨리고. 도대체 소위 남는 것 하나 없는 이 짓을 왜 계속하며 술을 마시는 걸까. 아니 우리는 왜 이런 짓거리의 반복일 뿐인 이 만화를 계속 들여다보는 걸까.

<소설가의 일>에서 김연수는 마흔 들어 술이 맛있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의 나이에서 찾는다. ‘뭔가에 홀리는 일 없이 제정신을 차리는’ 것이 불혹이라면 그렇게 항상 제정신으로 있는 게 힘들어 술의 취기에라도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마흔이 넘어야 술맛을 알게 되는 건 아니다.

 

<음주가무연구소>에서 20대인 니노야마 토모코는 <술도녀>들보다 한 술 더 떠 폭음을 하지 않고서는 감히 꿈꾸지 못할 일들을 태연히 저지른다. 모르는 사람들과 옷 벗기기 게임으로 알몸이 되거나 야쿠자에게 쫓기거나 경찰차까지 충돌시키는 등, 그야말로 웬만한 주당들은 다 입 닫으란 느낌이랄까. 정말 이렇게 아슬아슬할 정도로 놀아대면서 쓰러지지 않고 그 많은 만화를 그렸다는 게 어이없을 정도다. 물론 그녀만큼 운이 좋지 않았던 사람도 있다. <실종일기>의 아즈마 히데오는 창작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알콜중독에 빠진다. 결국 가출, 노숙, 우울증, 자살시도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중독증세는 <실종일기 2>의 알콜병동 생활로 (일단) 마감한다. 이렇게 정도의 차이는 분명 있지만, 그들이, 우리가 이렇듯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잃고 싶은 ‘제정신’이란 게 뭘까.

술 취해 있지 않은 맨정신일 때 우리는 참 열심히 ‘산다’. 그건 내가 가진 (혹은 가졌다고 믿는) 얼굴과 위치를 지키거나 더 나은 (혹은 그렇다고 믿는) 것을 추구하는 일이다. 표정관리를 하고 말조심하고,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실패하지 않으려 동분서주한다. <술도녀>에서의 친구들에게도 현실은 마찬가지다. 며칠 동안의 밤샘작업이 상사의 한 마디로 물거품이 된다. 그 나이 되도록 결혼 안 했다고 무시당하고 결혼하면 더더욱 피곤해진다 (게다가 술도 못 마신다!). 돈을 벌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다. 참고, 견디고, 애쓰는 나날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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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이들에게는 일단 시작하면 마음이 돈짝만 해지는, 술자리라는 구원처가 있다! 끊임없이 계획하고 성취하고 이런저런척 하느라 바빴던 마음과 관리했던 얼굴근육이 노곤노곤해지면서 한량없이 풀어진다. 욕도 하고 고함도 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바보처럼 웃어제낀다. 사실 이렇게 제정신에서 살짝 비껴나야만 가능해지는 일도 많다. 내일이 되면 후회하더라도 지갑 두께를 따지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술을 사고 싶은 사람도 생기고, 취기가 오르면 괜히 예뻐 보이는 얼굴도 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연장하고 싶어 새벽까지 자꾸 이곳저곳 옮겨 다닐 기운도 난다.

결국 우리가 술기운을 빌어 확인하고 싶은 것은 은행 잔고나 속 쓰림, 내일의 쪽팔림에 대한 걱정 이전에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솔직하게 드러낼 욕망과 그걸 참아주거나 연대할 누군가다. 사실 보통의 우리에게는 그렇게 내일의 빛나는 재테크나 식스팩보다 지금 당장 한 걸음을 밀어줄 그 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시트콤이나 일상툰의 단골 레퍼토리인, 소위 루저에 가까운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 바보짓하며 위무하는 이런 소소한 이야기들에 우리가 계속 끌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당장의 고단함을 위로하기엔 술이란 가장 빠르고, 그래서 안일한 방식인지 모른다. 그것이 지나쳐 술 속에서 (아즈마 히데오처럼) 자신이 ‘실종’돼버리는 사태까지 가지는 말아야겠지만, 그렇잖아도 마음 바쁘고 스트레스 많은 현대인에게 좋은 술자리 정도는 허해도 되지 않을까. 그 마음을 알아주고 함께 욕하며 언제라도 서로를 위해 지갑을 뒤집어줄 친구가 있는 세상이라면, 또 그 정도는 갖고 있는 자신이라면 그래도 살 만하다고 위로받아도 좋지 않을까. 제정신으로만 살아가기엔 아직 살날도 많고, 겪을 일도 많고, 무엇보다 맛있는 술과 안주가 너무 많으니까!

 

 

유목인

운 좋게 만화가가 됐으나 자리 지킬 주제가 아님을 깨닫고 어느 봄빛 수상한 날에 뛰쳐나와 지금까지 허랑방탕한 경험주의자로 살고 있음. 어쨌든 만화에 기여한 바에 비해 얻은 게 많아 항상 빚진 마음임. 정체불명의 인간이 되는 것이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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