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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왕따>는 김숭늉 작가가 레진코믹스에서 연재 중인 작품으로, 역설적인 제목에서 암시되듯 결코 유쾌하지 않은 왕따인 동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주인공 동현은 생일이랍시고 축하빵을 맞고, 뒤통수에 점수판을 붙인 채 인간 다트가 되고, 심심하면 삥을 뜯기는 소위 전형적인 왕따로 묘사된다. 거기서 한발 비켜선 채 동현을 무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진국이 있다. 소심한 동현이 적극적인 린치의 대상이 되는 반면, 진국은 자기 자신을 혐오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고립되는 것을 택한다. 그러던 와중 동현은 전학 온 수현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 그의 감정을 모욕하는 것은 바로 진국이다. 희미한 연대 의식으로 묶여 있던 두 사람은 남들 눈에는 비참하고 우스울 뿐인 몸싸움을 벌이게 된다. 자신의 감정이 ‘더럽혀졌다’고 느끼는 순간 동현은 이 세상이 망하기를 간절하게 기도한다.

“모두 죽어버려.”

곧 화면이 캄캄해진다. 동현은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세상이 정말 망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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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모를 재난으로 인해 학교가 무너지고 생존한 아이들이 폐쇄된 공간에 갇혀 패닉에 빠진다는 설정은, 솔직히 말해 달리 특별한 구석이 없다. 이러한 설정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이끌기 적절하다.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고 우리가 알고 있던 법과 질서가 무소용해지는 상황에 놓인다면, 인간은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까?” 만약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유쾌한 왕따>가 제시하는 묘사가 불만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1부가 본격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무너진 학교 내부에서 소수의 생존자들은 동현과 수현, 그리고 진국이 왕따가 되었던 것과 동일한 원리로 내부의 적을 만들고 그들을 향한 거리낌 없는 폭력을 행사한다. 모든 폭력은 그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정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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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생존자들이 서로에게 가하는 폭력은, 팽창된 욕망에서 촉발되는 것이라기보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인해 그저 내질러지는 것처럼 보인다. 희망이 없으며, 희망이 없음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희망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의 폭력은 공허하다. 재난 이전의 위계 서열 속에서 가해지던 폭력은 그 서열 자체를 공고히 드러내주고 강화했기 때문에 (적어도 폭력을 가하는 이들에게는) 유쾌한 것이었다.

그러나 재난 이후의 폭력은, 두려움을 통제하는 원초적인 도구가 된다. 모두가 덜덜 떨고 있으면서도 떨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폭력은 손쉬운 마취제로 기능한다. 때문에 학교가 무너지기 전 ‘동현’에게 가해졌던 폭력의 잔인성과, 18화 <국가의 탄생>에서 반장(이었던) ‘우현’을 차례로 찌르는 생존자들의 잔인성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하기란 힘들다. 전자의 폭력이 도취감을 전제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 폭력 자체에서 폭력을 행하는 개인의 자리는 완전히 박탈된 상태다. ‘우현’을 차례로 찌르는 행위는 폭력을 행사하는 당사자를 지워낸 자리에 ‘우리’를 들여앉히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화해도 협조도 아닌, 폭력만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다. 이것이 <유쾌한 왕따>가 가감 없이 보여주고자 했던 인간의 본성이지 않을까.

 

탈출, 그 후에도 끝나지 않는 재앙

<유쾌한 왕따>의 2부는 진국의 희생으로 탈출에 성공한 동현과 수현이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이웃 주민에게 구조되면서 시작된다. 무대는 이제 동현이 살던 아파트로 옮겨졌지만, 기본적으로 1부가 집약적으로 보여준 주제의식에서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차이점은 있다. 1부의 학교에서 아이들이 서로에게 가했던 폭력은 무너지는 벽 앞에서 결국 아무런 외상도 될 수 없었던 반면, 2부의 경우 더는 무너질 벽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폭력은 다시 강자로부터 약자에게 가해진다.

먼저 ‘바퀴벌레’로 언급되는 아파트 바깥의 존재들을 향한 아파트 내부 사람들의 혐오와 공포를 떠올려보자. 주민 회의에서 ‘바퀴벌레와의 전쟁’에 대해 유일하게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노인이 린치 당하는 장면이나, 동현이 자신의 엄마를 지키려다 결국 참혹하게 실패했던 장면에서 공포의 대상은 결코 ‘바깥’에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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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가 선포한 전쟁은, 전체주의적 세계를 유지하고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발명된 공포일 따름이다. 생존이 더 이상 유일한 문제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표’의 명분은 잘 포장된 권력에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같은 상황 역시 ‘인간의 본성’이기에 그저 순응하고 익숙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2부의 ‘거대한 달’이 상징하는 인간 내면의 비이성적인 광기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대로 그들 중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가 아닐지. 어쨌든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방관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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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회의적인 질문에 대해 <유쾌한 왕따>의 1부 결말을 상기해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다소 감상적인 태도로 돌변한 진국의 변화가 어리둥절하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수현과 동현을 구하고 그들과 친구로 남는 것을 선택한다. 숭고한 희생정신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높고 고결한 본성을 증거해준다는 뻔한 말을 구태여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리의 본성이 그토록 악하고 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때문에 앞으로 동현이 살아남을지, 그렇지 못할지는 궁금하지 않다. 단지 ‘어떻게’ 그가 살아남을지 궁금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