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화축제의 기원과 전개

 

‘만화축제’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참을 생각해 봤다. 한국만화축제의 출발을 어디로 봐야 할까? 문득 고약한 생각이 들었다.

“3일 낮 2시 한국대본업정화협회는 남산어린이놀이터에서 서울시내 2천여 대본업소에서 모은 외설서적과 어린이들에게 해로운 만화 1만여 권을 불태웠다. 동협회는 사회풍기를 정화시키고 명랑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였다.”(1966년 6월 3일자 <동아일보>)

“한국대본업정화협회는 청소년선도의 달을 맞아 청소년의 정서를 해치는 책과 불량만화 8천 권을 수거, 22일 하오 2시 서울남산어린이놀이터에서 소각했다.”(1968년 5월 22일 <경향신문>)

“경찰은 지난 4월 15일부터 한국대본업정화협회와 합동으로 시내 1497개소의 대본업소에서 청소년들의 정서에 해로운 이들 만화 등 5만3천여 권을 수거, 이날 오후 2시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불태운 것이다.” (1969년 5월 9일 <동아일보>)

“10일 낮 12시 서울대학생 1백여명은 동교 4.19탑 앞에서 불량만화, 영화 <내시> , <벽속의 여인> 잡지인기부부 <흑막> 일부 주간지 등 20여 종을 규탄하는 대회를 갖고 불매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학생들은 취지문에서 「불량만화와 잡지, 방송 TV의 탈선영화 등이 현대문명을 좀먹는다」면서「방종한 섹스와 난폭한 레크리에이션은 매스콤을 통해 어린 마음을 타락시키고 사회윤리를 매몰시키고 있다」고 규탄했다. 학생들은 이같은 운동을 계속 벌이기로 다짐했다.” (1969년 6월 10일 <경향신문>)

“오는 11일 하오 6시 남산야외음악당 뜰에서 불량만화를 비롯, 각종 불순결책자를 소각한다. MRA지부는 그동안 청소년 도덕재무장운동의 하나로 불량서적 순화운동을 벌여왔다.”(1969년 6월 7일 <경향신문>)

“서울시경은 청소년들의 정서를 해치는 불량만화 외설서적 등 6천2백48권을 적발, 27일 하오 장충단 공원광장에서 소각했다. 경찰은 아동도서협회, 청소년선도협회 등과 합동으로 지난 1일부터 불량만화 제조업소, 제본소, 만화가게에서 내용이 좋지 않은 만화 5천8백여 권을 임의제출 받고 뒷골목의 노점상들이 몰래 팔던 외국의 외설잡지서적 등 4백여 권을 압수했다.”(1970년 5월 27일 <경향신문>)

“서울남산국민학교 6학년 어린이 1백40명은 25일 하오 1시반 「너도나도 다함께 저질만화 보지 말자」란 플래카드를 들고 학교 앞에서 남산어린이회관까지 불량만화추방시위를 했다”(1970년 11월 26일 <경향신문>)

“청소년의 달을 맞아 15일 오후 2시 서울남산야외음악당에서 서울삼광, 후암, 남대문 등 서울 시내 8개 국민학교 어린이들 800여 명은 불량만화와 불량장난감등의 소각식을 가졌다. 이날 어린이들은 갖고 있던 불량만화 3960여 권과 불량장난감 468점 기타 유해물품 모두 4827점을 불태웠다. 또한 어린이들은 (1)우리 80만 어린이들은 학교주변의 ‘뺑뺑이 뽑기’, ‘공굴리기’ 등을 하지 않을 것 (2)불량만화와 불량장난감을 사지 않을 것 (3)불량식품을 사먹지 않을 것 등 5개 항목의 결의문도 채택했다.” (1971년 5월 15일 <동아일보>)

“전국어린이 만화대본업자들의 모임인 한국아동도서보급협회는 29일 오전 10시 서울남산야외음악당에서 회원 및 여성단체 대표 등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어린이악서 추방대회’를 갖고 저질만화작가, 악덕만화출판사에 대한 화형식과 함께 불량만화 500여 권을 태웠다.”(1971년 6월 29일 <동아일보>)

60-70년대 남산은 만화 화형식의 메카였다. 적게는 500여 권(1971년 6월 29일)에서 많게는 5만3천 여 권(1969년 5월 9일)까지 남산에서 불태웠다. 사람들이 모여 펼침막을 들고, 재물처럼 쌓아놓은 만화책에 불을 당겼다. 활활 불꽃이 하늘로 올라갔고, 사람들은 펼침막을 흔들며 주문을 외웠다. “불량만화 추방하자!”

보통은 (자학적이게도) 만화대본업자들의 모임에서 이벤트를 주최했는데, 가끔은 초등학생 어린이들이 참여하기도 했고, 대학생들이 교정에서 불태우기도 했다. 불량만화를 추방하고 도덕을 재무장하기 위해 제물을 태우고, 도적 재무장을 비는 행위는 ‘빌며(빌 祝), 제사를 올리는(제사 祭)’ 축제(祝祭)의 한자어에 걸맞는 행사이기는 하다. 만화와 관련된 축제는 이렇듯 만화를 불태우고, 추방하자며 시작되었다.

 

만화를 불 태우는 축제와 예술이고 싶었던 전시
만화축제가 아니라 만화전시로 눈을 돌리면 상황이 조금 다르다. 1946년 2월 24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만화가와 삽화가 십여 명이 소묵회(素墨會)를 결성했다. 목표는 전람회 개최 및 잡지발간이었고, 서울시 고려문화사내에 사무실을 두었다. 이승만 선생을 회장으로 윤희순, 김규택, 정현웅, 최영수, 안석주, 김용환, 김의환, 조병덕, 홍우백, 박성규, 한홍택 회원을 두었다. 해방 전 신문, 잡지에서 활동하던 작가들과 해방 이후 새롭게 데뷔한 작가들이 모였지만, 전시회를 개최했는지 여부는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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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Y DSCBICOF 2015 전경

주목할 만한 전시는 1959년 9일부터 15일까지 덕수궁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만화가협회가 주최한 만화합동전이다. 당시 신문과 잡지 등에서 활약한 만화가(한국현대만화가협회는 신문, 잡지 작가들이 결성한 협회다)인 안의섭, 김성환, 정한기, 김봉천, 백인소, 정운경, 길창덕, 이원수, 한성철 등 17명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 전시를 보도한 <동아일보> 1959년 10월 12일자 ‘미술쟝루(장르)로 전진’이라는 기사에서, “매스콤의 한구석을 차지해온 만화가 어엿한 미술의 한 쟝루(장르)라는 것을 데모하는 기세로 화랑에서 작품전을 갖게 된 것은 한국의 만화미술의 성장을 시현하는 현상으로서도 자뭇 주목된다.” 라고 밝혔다. 그런데 만화합동전에 전시된 작품은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된 만화 형식보다는 회화에 가까운 스타일이었다. 만화합동전에 참가한 김성환은 전시회에 관심이 많았다. 1961년 국립도서관 화랑에서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성환 양화전(洋畵展)’을 열었다. 전시명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만화전시’라기보다는 서양화 전시였다. 이후 김성환은 꾸준히 서양화와 동양화를 넘나들며 작품전을 개최했다. <동아일보>에 시사만화 <동아희평>을 그리던 백인수도 1968년 15일부터 21일까지 신문회관 화랑에서 ‘인물희화전(人物戱畵展)’을 열었다. 박정희, 유진오 등 정재계인사 캐리커처를 전시했다. 이처럼 신문시사만화 작가들의 경우 전시회가 종종 열렸다.

1967년 9월 15일부터 25일까지 중앙공보관에서는 만화심의를 담당하던 한국아동만화자율회 주최로 ‘청소년선도 만화전시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이와 유사한 ‘국책과제의 홍보를 위한 만화전시회’는 만화를 불태우던 광기의 카니발이 한창이던 60-70년대에도 꾸준히 개최되었다. 1968년 5월 7일부터 13일까지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반공만화포스터전’이나 1973년 8월 9일부터 17일까지 국립공보관에서 열린 조국의 약진상을 한눈에 보여주는 ‘발전한국만화동인회’ 전시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발전한국만화동인회도 주로 신문, 잡지 등에서 활동한 김성환, 신동헌, 이상호, 백인수, 정운경 등이 참여했다. 만화전시는 민중만화운동이 시작되고, 다양한 만화단체들이 조직된 80년대 후반에 적극적으로 개최되었다. 1981년 6월 17일 프랑스 문화원 주최로 ‘한불만화제’가 개최된다. 프랑스 문화원과 어린이회관에서 열린 한불만화제는 만화전시, 애니메이션상영, 토론회, 강연회 등으로 구성된 명실상부한 ‘만화축제’였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최초의 만화축제를 꼽자면, 1981년에 열린 ‘한불만화제’를 꼽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으로 판단된다. 1974년에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벌 개최한 프랑스는 만화축제도 활성화되었으며, 해외에 자국의 만화를 소개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프랑스 만화전시는 물론 프랑스의 대표적 만화잡지 <필로트(Pilote)> 편집위원인 클로드 몰리테르니(Claude Moliterni) 의 초청강연회가 교보문고 5층 강당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81년 6월 20일자 ‘한불만화제 전시, 토론회 등 다채로운 프로마련’이라는 기사에는 프랑스 만화의 특징을 “사실적이라는 점”으로 꼽았고, “컬러만화가 많”으며, “붓을 사용하고 있으며 자막도 만화가가 직접 쓴 필기체로 그림의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고 보았다. 1981년 개최된 ‘한불만화제’는 만화전시, 애니메이션상영, 토론회와 특강 등 만화축제의 기본 포맷을 선보였으나 이후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7년이 지난 1988년 4월 19일부터 22일까지 종로서적 5층과 프랑스 문화원에서 제1회 만화주간 행사가 개최되었다. 1985년 창간한 성인만화잡지 <만화광장>이 주최한 이 행사에서 벨기에, 프랑스의 9개 출판사가 펴낸 4백50여 권의 만화책과 4백여 권의 국내 만화책 전시가 개최되었다. 이밖에 패널 전시와 국내 만화콘텐츠 테스트 입상작도 전시되었다. 1981년에 개최된 한불만화제가 프랑스에서 자국의 만화를 소개하기 위해 준비한 축제였다면, 1988년 제1회 만화주간 행사는 한국에서 자발적으로 준비된 행사였다. 중심에 만화잡지 <만화광장>이 있다는 데 주목하자. <만화광장>은 “건강한 성인만화문화의 정착”을 내세운 잡지답게 어른들을 위한 다양한 만화를 연재하는 한편, 해외 만화 소개와 평론, 인터뷰 등을 수록했다. 만화문화를 고민하는 잡지가 나오고, 그에 어울리는 만화와 만화책 전시가 개최되었던 것이다.

 

정부의 정책이 종합만화축제를 만들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이다. 우리나라에서 만화전시는 1995년 서울 국제 만화페스티벌(이하sicaf’95, 지금은 서울 국제 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로 불린다) 이후 마치 활화산이 터지듯 폭발한다. 앞서 소개한 1981년 한불만화제나, 1988년 만화주간행사는 축제 형식을 갖추었지만 단발 행사로 끝나버렸고, 참여 인원도 소수였다. 그와 비교하면 sicaf ’95 는 명칭부터 ‘국제’행사를 표방했고, 장소도 한국 최대의 컨벤션 공간인 코엑스(KOEX 현 COEX)였다. 구성도 전시, 기업부스, 영화제, 공모전, 심포지움 등으로 완벽한 종합축제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난데 없는 국제만화페스티벌이었지만 축제는 대성공(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뒤에 다시 다룬다)이었다. 1995년 8월11일부터 16일까지 총 6일간 개최된 SICAF는 총 15만 명(1일 평균 2만5천명)이 관람했으며, 연이어 1996년 개최된 SICAF ’96은 총 40만 명을 동원해 1일 평균 5만 명의 관객동원력을 자랑했다. 뭐가 어떻게 변했길래 sicaf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일까? 변화한 만화업계가 축제를 기획한 것일까? 아니면 만화가들이나 독자들이 간절히 만화축제를 원했을까? sicaf를 주도한 세력을 이해하면 한국에서 만화축제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1993년 문화부와 체육청소년부가 통폐합되어 문화체육부가 신설되었다. 1994년 1월 청와대 보고에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경제부가가치 창출에 문화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문화부는 1995년 5월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문화산업’을 진흥하기 위해 문화산업국을 신설하고, 문화산업진흥이 필요한 이유로 (1)부가가치 (2)국가 브랜드 이미지 제고 (3)문화 정체성 등과 관련한 영향 (4)신기술에 대한 탄력적인 반응을 꼽았고, 이후 정책과제로 (1)문화산업 전반에 대한 이론적 연구의 수행 (2)제도와 법규의 정비 (3)첨단 과학 기술을 활용하는 문화산업의 전략적 육성 (4)고유 문화의 세계화, 상품화를 제시했다. 정부 부서가 신설되면, 해당 부서는 어떤 분야를 다룰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새롭게 신설된 문화산업국의 문화산업기획과는 ‘문화산업정책’에서 다룰 분야를 결정해야 되었다. 경제부가가치창출이라는 측면에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이 지원과 진흥 정책의 대상으로 탈바꿈을 한다. 매년 5월이면 화형대에 올라야 했던 만화가 갑자기 부가가치창출의 대상이 된 것이다. 부서까지 신설하게 된 적극적 정책변화는 1994년 6월 28일 ‘국산만화육성정책’ 발표로 이어진다. 정부는 ‘만화산업의 사회적 기반을 조성한다’는 기본 목표를 설정하고 만화산업지원정책을 시행한다. 이를 위해 (1)우리 만화에 대한 재인식 및 기반조성 사업 (2)기획, 창작력 개발 지원 (3)만화산업 전문우수 인력 양성 (4)만화산업의 세계화추진 (5)만화산업진흥을 위한 관련 법, 제도 정비 등 다섯 분야에 걸쳐 주요 사업을 시행했다.

다섯 가지 주요 사업, 그러니까 만화산업의 사회적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주요 사업으로 대규모 만화축제 개최, 만화를 연구하는 학회 창설, 우수만화를 골라 수상하는 상 제정, 국내 만화관련학과 설치 유도를 구체적으로 추진했다. 이중 가장 대중적이며 파급력이 있는 사업으로 전면에 내세운 것이 바로 ‘만화축제’ 개최다. 1994년 프랑스에서 유학할 때부터 만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벽화 등 공공미술 전문가인 인하대 성완경 교수가 운영하는 (주)상산환경조형 에서 만화축제연구용역을 맡았다. 1993년 11월 29일 개최된 서울정도 600년을 기념 ‘한양에서 서울까지’ 전시의 총감독을 맡아 멀티 슬라이드 전시, 터치 스크린, 만화 등을 활용한 성완경 교수는 1994년 20대 후반의 젊은 연구자 한창완 당시 공주전문대 만화예술과 강사를 연구원으로 sicaf의 기본 틀을 잡았다. 이후 실시행 단계에서 sicaf는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주관은 한국애니메이션제작자협회가 맡았다. 1995년 2월 16일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 추진위원회가 문체부5층 회의실에서 열렸고, 위원장(심수남, 소년한국일보 사장)과 부위원장(이원복 덕성여대교수)을 선출했다. 실질적 행사 기획과 진행은 기획단에서 총괄했다. 문화산업기획과 사무관 오용운은 기획단을 총괄해 sicaf가 정부정책의 하나로 진행되었다는 걸 명확하게 했다. 실질적으로 국가예산 1억원과 간접투자한 문예진흥기금 1억원, 한국마사회 협찬금 1억원을 포함하면 문체부에서 조성한 예산이 3억원으로 전체 9억2천 예산의 32%에 해당한다. 1994년에 (주)상산환경조형에서 만화축제연구를 담당한 한창완은 기획실장 및 수석큐레이터로 행사를 진행했다.

 

sicaf는 오로지 정부의 정책의지에서 시작된 것일까?
sicaf 개최를 전후한 90년대 중반은 80년대 한국만화르네상스를 기반으로 만화가 가장 다양하게 확대되던 시기였다. 만화잡지는 <만화보물섬>의 성공 이후 <만화왕국> 창간, <소년중앙>의 만화잡지화 등으로 70년대 소년잡지 트로이카에 이어 만화잡지 트로이카 시대가 되었고, <만화광장>, <주간만화>, <매주만화> 등 성인만화잡지도 1988년 출판자유화 이후 급격하게 확장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르네상스>의 성공 이후 격주간 순정만화잡지 <댕기>가 크게 히트하고, 연이어 90년대 순정만화잡지 창간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동만화 트로이카는 <아이큐점프>의 등장과 함께 주간만화잡지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고, <아이큐점프>를 내세운 서울문화사나 <소년챔프>를 내세운 대원동화(이후 대원문화출판사로 분사 현 대원CI)라는 중견기업이 새로운 참여자로 시장에 합류하기도 했다. 또한 <스포츠서울>과 <스포츠조선>이 새롭게 스포츠신문 시장에 참여하며, 스포츠신문의 만화연재 경쟁도 격화되었다. 만화방 만화는 80년대 극화만화의 붐이 아직 채 꺼지지 않았고,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에서 만화를 활용한 만화운동도 활발해졌다. 1995년 환경적인 면에서도 ‘만화축제’가 성공할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던 셈이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걸맞게 sicaf에 대한 언론의 관심도 대단했다. 행사 전 일간신문에 25회 기사가 보도되었고, 공중파에는 5회, 케이블TV에는 3회가 보도되었다. 행사가 시작하고 관람객이 쏟아지자 보도열기는 더 뜨거워졌다. 일간신문에는 행사 기간 중에 12회, 행사 후에는 15회의 기사가 보도되었고, 공중파에는 행사 중에 10회, 행사 이후에 4회, 케이블TV에는 행사 중 3회, 행사 이후 4회가 보도되었다. 이밖에 잡지나 라디오 등을 합쳐 총 270회 언론보도가 시행되었다.

만화시장의 확대, 애니메이션에 대한 새로운 관심 증대, 정부의 정책 의지 등이 합쳐지며 만화에 대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호의적 여론이 조성되었고, 그 결과 만화축제가 개최되자 1일 평균 2만5천 명의 관람객이 KOEX를 찾았다. 15만 명의 관람객의 구성비를 보면, 유료 관람객이 91,600명으로 메인 행사장인 1층 태평양관을 찾은 인원이 89,378명이다. 이중 성인이 48%, 초중고생이 52%를 차지했다. 4층 애니메이션 상영관을 찾은 인원은 2,222명. 성인의 비율이 65%를 차지했고, 초중고생은 35였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성인관람객이 50에 달하는, 지금까지 만화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혁명적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sicaf는 코엑스 개장 이후 행사유효단위 면적당 최대 관객을 동원한 행사가 되었다.

 

정부와 애니메이션, 만화, 학계의 사각결합체
sicaf는 정부의 정책의지와 90년대의 변화한 사회적 상황에 뿌리를 내리며 시작되었다. 그런데 애니메이션과 만화는 왜 하나의 축제로 묶였을까? 공모전, 영화제, 만화전시, 기업부스, 이벤트 행사, 학술대회가 공존하는 형태의 한국형 만화 축제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현실적으로 국내의 여건상 한 분야만으로 국제 페스티벌을 열기에는 아직 산업적 축적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또 이 행사의 일차적 목적이 만화에 대한 붐 조성과 국내 만화산업계의 ‘각성’인 만큼 만화산업의 모든 분야를 일단 한 무대로 모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책적 판단도 작용했다.”(<씨네21> 1995년 8월 8일 제16호) 앞서 소개한 sicaf 기획단을 총괄한 실무 책임자 오용운 사무관의 인터뷰다. 만화에 대한 붐 조성과 국내 만화업계의 ‘각성’을 위해 만화산업의 모든 분야를 하나로 모았다는 설명이다. sicaf ’95 한창완 수석큐레이터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출판과 애니메이션을 한 데 묶어 이벤트와 연결한 것”을 축제의 성공요인으로 꼽았다. (<한겨레> 1995년 8월 15일)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묶은 이유는 만화에 대한 붐 조성과 국내 만화업계의 각성,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식개선을 위한 것이고, 다양한 행사를 묶어낸 것은 대형 축제의 성공요인이라는 설명이다. 한국 만화축제의 모델을 제시한 sicaf는 만화 붐 조성과 인식개선을 위해 출발했으며, 여러 행사를 묶어 대중적 호응이라는 축제의 목표에 도달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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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 도록

조직 구성을 살펴보자. 추진위원장과 부위원장은 명예직으로 두었고, 추진위원회에 애니메이션 분야와 만화 분야에서 고르게 참여했다. 주관을 맡기도 한 한국애니메이션제작자협회 회장 정욱과 한국만화가협회 회장 권영섭을 비롯해 애니메이션 분야의 경우 선우엔터테인먼트 강한영 대표, 한호흥업 김석기 대표, 에이콤 넬슨신 대표, 한신코퍼레이션 최신묵 대표, 코코엔터테인먼트 전명옥 대표, 세영애니텔 최안희 대표가 추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한국애니메이션제작자협회의 주축 회사들이었으며, 규모가 큰 애니메이션 제작회사가 모두 참여한 것이다.

만화분야는 80년대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김수정, 이두호, 이현세, 박재동 작가가 추진위원으로 참여했다. 이후 김수정, 이두호, 이현세 작가는 모두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박재동 작가는 우리만화연대 회장을 역임했다. 나머지 한축은 학계였다. 앞서 성완경 인하대 교수, 박세형 공주전문대 교수, 임창영 과학기술원 교수(만화학계라기보다는 뉴미디어 분야로 참여했다), 임청산 공주전문대 교수, 최민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장이 추진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밖에 박준영 KBS영상사업단장과 박중길 OCN투니버스 대표이사, 하진규 문화산업국장, 이돈종 문화산업기획과장이 참여했다.

추진위원회의 위원들의 분포를 분석해 보면, 정책담당자인 문화체육부의 국장과 과장, 애니메이션 플랫폼인 KBS와 투니버스, 그리고 애니메이션 회사의 대표7명, 만화가 4명 그리고 학계에서 4명이 참여했다. sicaf는 인적구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정부, 애니메이션 제작사, 만화가, 관련 학계의 4개 기둥으로 조직, 운영된 행사였다. 이런 배분은 행사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축제는 크게 애니메이션 영화제와 만화 전시, 그리고 기업부스와 학교 부스, 학술행사로 운영되었다. 참여하는 분야별 성격으로 보면 애니메이션은 영화제를 중심으로, 만화는 전시를 중심으로, 관련 학계는 학교 부스와 학술행사를 중심으로 행사에 참여했다. 분야별 안배와 배분은 ‘정부 주도 행사→정부에서 예산이 지원된 민간 주도 행사→서울시에서 예산이 지원된 민간 주도 행사’로 변화하면서도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sicaf가 제시한 만화축제의 틀은 이후 후발 행사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놀라운 성공과 반복되는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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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동아 국제만화페스티벌 도록

1994년 문화산업의 한 분야로 만화를 선택해 지원하기 시작한 정부의 정책은 1995년 sicaf로 구체화되었고, 만화는 골방에서 탈출해 산업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만화관련학과가 신설되었고 , 만화에 대한 언론의 보도가 이어졌다.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둔 만화축제도 다음 해인 1996년으로 이어졌다. 코엑스 1층 태평양관의 일부를 사용했던 1995년과 달리 1996년은 3층 대서양관 전관을 사용했다. 주최는 문화체육부와 sicaf ’96 조직위원회, 한국방송공사, 문화방송. 주관사는 한국애니메이션제작자협회는 1995년과 동일했고, 한국종합전시장과 영화진흥공사가 합류했다. (한국종합전시장은 흥행이 보장된 행사의 경우 직접 주관사로 참여해 대여료를 낮추고 수익을 배분한다. 영화진흥공사는 영화제의 주관을 위해 합류했다.) 행사 규모가 커지면서 기획은 기획운영본부로 확대되었고 문화체육부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이 행사를 진행했고, 민간전문가들은 수석큐레이터 한창완을 중심으로 분야별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1995년 전체 관람객 15만 명, 유료 관람객 91,600명에서 전체 관람객 395,233명에 유료 관람객 232,563명으로 2배 이상 관람객이 늘어났다. 행사장을 찾은 만화가 박재동은 “두 번째 잔치. 하도 사람이 많아 제대로 보지 못하던 작년 페스티벌. 배로 장소를 늘렸으니 좀 숨을 돌릴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마찬가지”라고 행사 규모가 늘어난 만큼 늘어난 관객규모를 증언했다. 1995년 축제와 비교해 “전체적으로는 작년보다 규모 있고 차분해진 느낌”이라며 구체적으로 “상업부스들도 더 정리되고…멀티미디어관이나 사이버스페이스관도 흡족하진 못했지만 작년 같은 망신은 벗어나 발전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국산 장난감 로봇도 반가웠다…한국만화가 30인의 방은 차분하게 꾸며졌고, 세계 각국의 카툰들도 볼 만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겨레> 1996년 8월 18일)
약 40만 명의 관람객. 유료 수익 5억. 확대된 견본시 기능. 초점은 ‘돈’이었다. 뭔가 있는 건가 했던 이들은 일제히 ‘만화, 애니메이션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고 무공해 고부가가치산업이며, 게임과 캐릭터와 같은 파생산업으로 확대된다’는 주술을 외우기 시작했다. 1995년 만화 축제가 처음 시작될 때만 해도 만화산업의 영역이 애니메이션과 캐릭터를 포괄한다는 전략을 세웠지만, 사실 1995년과 1996년 만화축제를 끌어간 주요 동력은 애니메이션이었다. 만화가 TV애니메이션-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이어지며 부가가치를 확대한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한탕의 가능성은 애니메이션을 따라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91년 12월 21일 한국에서 개봉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는 전국 60만 명을 동원하며 애니메이션의 힘을 선보였기 때문이다.(<인어공주>는 미국에서도 80년대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의 연이은 참패를 만회한 히트작이었다) 심지어 1994년 11월 5일 느닷없이 개봉한 함량미달의 성인용 극장판 애니메이션 <블루시걸>이 2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자 막연한 국산 애니메이션의 장미빛 미래가 구체화되었다. 만화축제에 참여한 주체들의 거대한 원동력 중 하나가 애니메이션으로 황금알을 낳고 싶은 욕망이었다. 황금알에 대한 거대한 욕망은 새로운 행사로 구체화되었다.

1997년 7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MBC 주최로 ‘97 서울 애니메이션 엑스포’가 열렸고, 춘천에서는 ’97 춘천만화축제’가 열렸다. 9월 27일부터 10월 5일까지 ‘동아LG국제만화페스티벌’이 열렸다. 애니메이션으로 황금알을 낳고 싶은 욕망이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만화축제로 구체화된 것이다. 물론 어디도 꿈꾸던 황금알에 가까이 가보지도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몇 년 뒤 애니메이션은 황금알을 낳았다. sicaf 조직위원회에 참여한 애니메이션 제작사들 중 상당수는 이후 애니메이션 붐을 타고 상장에 성공한 것이다.                                             

sicaf ’96의 눈부신 성공으로 장미빛 꿈은 더욱 부풀어 올랐다. 정부도, 업계도, 관람객도 모두 행복한 꿈을 꾸던 1996년 9월 4일 여당인 신한국당과 정부는 ‘청소년보호를위한 유매체물 규제 등에 관한 법률안’의 추진을 발표했다. 이 법안은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화를 사전심의하고, 그동안 민간기구로 심의를 하던 간행물윤리위원회가 법적 기구가 될 예정이었다. 만화계는 9월 30일 (사)한국만화가협회를 중심으로 한국만화학회, 우리만화 발전을 위한 연대모임, 시사만화회, 한국애니메이션제작자협회 등 만화 관련 단체 10개가 모여 ‘청소년보호법률안제정을 저지하기 위한 범만화인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꾸리고 9월 30일 법 제정을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그리고 11월 3일 만화가와 만화를 사랑하는 700여 명의 사람들이 여의도 광장에 모여 ‘범 만화인 결의대회’를 개최한다.

만화를 불태우던 나라에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꿈꾸던 화려한 축제로 변화한 순간 순식간에 만화를 규제하는 법안이 추진되었다. 수십만 명을 동원한 만화축제와 황금알을 낳는 만화산업에 대한 꿈도 정부정책을 통해,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만화를 규제하는 법안도 정부정책으로 추진된 것이다. 만화산업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어 만화축제의 분위기는 결국 1997년 3월 7일 일부 독소조항이 빠지기는 했지만 결국 규제법안인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되면서 급변하기 시작한다. 여론은 다시 만화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1997년 6월 중고교 폭력조직인 일진회가 일본만화를 보고 흉내낸 것이라는 기사들이 보도된다. 청소년보호법이 실행되는 7월달이 되자 정부의 단속이 본격화되었다. 7월 9일 만화방 업자와 출판업자 142명이 불량만화 유통혐의로 입건되고, 7월 19일 이현세 작가가 검찰소환통보를 받는다. 간행물윤리위원회는 1,700종 510만 권에 달하는 청소년유해만화목록을 발표한다. 청소년보호법에 의하면 청소년유해만화는 ‘청소년유해매체’라는 표시를 하고, 볼 수 없도록 포장을 해야 하며, 분리하여 진열해야 된다. 서점에서 만화가 사라졌고, 성인만화잡지들이 휴간에 들어갔다.

만화가들은 거리에 나섰고, 최악의 분위기에서 sicaf ’97이 8월 14일부터 21일까지 역시 코엑스에서 개최된다. 1995, 1996년 행사와 달리 1997년도의 행사는 정부에서 공무원이 파견되지 않고 독자적인 조직위원회를 꾸려 준비되었다. 대신 당시 애니메이션 사업에 뛰어들었던 (주)금강기획이 공식기획사로 참여했고, 별도로 사무국이 구성되었다. 금강기획의 애니메이션사업팀과 외부 전문가들이 참여해 기획단이 조직되었고, 조직위 사무국은 별도로 구성되었다. 1995년 ‘애니메이션 역사’ 전시를 진행했고, 1996년에는 PC통신서비스와 인터넷 서비스를 진행했던 필자는 1997년 기획단에 출판만화 큐레이터로 합류했다. sicaf ’97전시는 매년 하나의 장르를 탐구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메인 전시로 ‘순정만화’ 역사와 작가를 다룬 ‘한국순정만화궁전’과 권가야, 문정후, 양영순, 윤태호, 이유정, 홍승우 등 젊은 작가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우리시대 젊은 작가전’, 그리고 전국 200여 개 만화동아리연합체인 ACA, 서울지역 만화동아리 사이닉, 부산만화동아리 연합인 미르두, 광주만화동아리연합인 만화공방, 대구경북만화동아리연합인 053이 참여하는 ‘전국동아리관’이 진행되었다. sicaf ’97이 진행되는 동안 ‘표현의 자유수호를 위한 범만화인 비상대책위원회’는 이현세 작가의 소환조사와 스포츠신문 연재 만화가의 기소에 항의하는 피켓시위와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만화가들은 행사장 안과 바깥을 오가며 행사와 시위에 참여했다. 대대적인 만화규제 분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벌어진 축제 관람객은 201,517명으로, 1996년 대비 49의 관람객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관람객은 감소했으나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1995년부터 꾸준히 제기해 오던 대안인 격년제로 전환되었고, 1998년 11월 (사)sicaf조직위가 설립되었다. sicaf ’99는 주제전으로 ‘SF만화전’을 전면에 내세웠고, 122개의 아마추어 동아리 부스를 유치했다. 하지만 큰 틀에서는 1995, 1996, 1997년 행사와 큰 차이가 없었다.

 

진짜 만화축제는 무엇일까?
2000년 7월 18일 이현세 작가의 <천국의 신화>사건이 1심에서 벌금 3백만 원 유죄판결이 내려진다. 곧바로 항소를 했고, 2001년 6월 2심에서 무죄판결이 난다. 하지만 검찰이 바로 상고를 해 결국 대법원으로 가게 된다. 2001년, 그러니까 21세기가 되어도 만화축제와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격년제 두 번째 행사인 sicaf ’2001은 국문행사명칭에서 애니메이션을 살려 그동안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이라 부르던 행사명이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 되었다.

1994년 정부의 문화산업진흥, 지원 정책이 실시된 이후 만화산업의 확장으로 애니메이션이 다루어졌고, 그 연장선에서 sicaf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포괄하지만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로 불렸다. 만화의 ‘종합행사’였지, 만화전시와 애니메이션 영화제로 분리된 행사가 아니었다. 축제가 시작된 이후 꾸준한 문제제기 끝에 드디어 2001년 행사명에 애니메이션이 표기되었고, 영화제가 시끄러운 코엑스를 떠나 극장(시네큐브2관, A&C)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에 투자 행사인 SPP(SICAF PROJECT PROMOTION)와 만화가와 애니메이션 감독에 대한 수상인 sicaf 어워드가 신설되었다. 한껏 몸집을 불린 sicaf는 2003년 점차 줄어드는 국고지원 대신 서울시와 10년 협약을 맺는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외국의 많은 축제들이 중앙정부보다는 지방정부와 파트너십을 맺고 운영된다. sicaf가 벤치마킹한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이나 안시 애니메이션페스티벌, 히로시마애니메이션페스티벌, 오타와 애니메이션페스티벌 등이 그러하다.

sicaf는 서울시와 협약을 맺어 지역과 함께 하는 축제의 길을 걸어야 했지만,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등을 운영하던 서울시의 관심은 서울형 산업으로 애니메이션이었다. 부족한 입장수익이나 협찬수익을 서울시의 지원금으로 메꾼 sicaf는 지역에 어울리는 ‘축제’를 고민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종합행사로 지속되었다. 그러나 2002년 문화관광부와 산업자원부는 품을 떠난 만화축제 대신 모든 분야를 종합할 수 있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워 대한민국캐릭터페어를 8월에 개최한다.(대한민국캐릭터페어는 서울캐릭터쇼와 통합해 2003년부터 서울캐릭터페어가 된다.) 많은 업체들이 뭔가 애매한 sicaf 대신 캐릭터페어에 부스를 신청했다. sicaf의 가장 큰 힘이었던 관련 업체들이 점차 이탈하고 관람객의 관심도 줄어들자 급기야 2006년 sicaf 행사의 콘셉트를 ‘만화, 애니메이션 산업시장의 성격과 역할 강화’로 정하고, ‘8월은 국제적 휴가철이어서 해외에서 비즈니스 인사를 유치하기 힘드니 5월로 변경’한다는 이유로 코엑스 대신 서울시 소유의 서울무역전시장(SETEC)으로 바꾸는 결정을 내린다.

2006년 5월 24일부터 28일까지 sicaf, 제10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전시, 애니메이션영화제, SPP의 변하지 않는 행사 포맷을 보여주었다. 전시장의 유료 관람객은 16,197명에 불과했지만 조직위원회에서는 결과보고서를 통해 “달라진 여건과 환경을 고려, 장기 전략에 따라 시기와 장소를 변경하여 개최”했으며, “우려와 달리 관객 수, 외국 참여도, 전문가 집단의 전시 평가 등의 행사결과는 잠재적 성장 가능성을 보임”이라고 밝혔으며, “행사 전반의 시스템 전문화 및 홍보강화를 통해 대중적 비즈니스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총평을 했다. 하지만 이런 자평과 달리 <일간스포츠>의 장상용 기자는 2006년 6월 3일자 ‘날림공사에 무릎꿇은 만화잔치’라는 기사에서 “역대 최악의 면모로 관객들을 실망시킨 채 막을 내렸다. 전시의 전체적 디스플레이는 관객들의 편의를 철저하게 외면했고, 각 기획 코너들은 대부분 상상력 부족이었다. 만화•애니메이션•캐릭터 관련 출판사 및 기업들을 유치하는데도 실패했고, 애니메이션 영화제마저도 출품작 수는 많았지만 새로 선보인 것은 별로 없었다. 관객 동원도 어린이 단체 관람객으로 지난해 수준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청소년과 어른들의 발걸음이 뜸한 썰렁한 축제가 되고 말았다”며 혹평을 했다. 이후 sicaf는 캐릭터페어와 동시에 코엑스에서 개최되기도 했지만 업체들은 sicaf를 찾지 않았다. ‘산업’에 대한 욕망을 한참을 방황하던 sicaf는 2013년이 되어 명동에서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있는 남산까지 이어지는 거리로 행사 장소를 옮기게 된다.

한국 최초의 만화축제인 sicaf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축제를 구성하는 세부 프로그램의 변화를 살펴보기 보다는 1995년에 난데 없이 ‘종합만화축제’인 sicaf가 시작된 원인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시 출발을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만화축제는 정책에 의해 등장했다. 60-70년대 정책은 불량만화를 불태우는 만화 화형식과 궐기대회였지만, 90년대 정책은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으로 발견한 만화(애니메이션과 캐릭터와 게임이 모두 포함된)의 종합축제를 여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만화축제는 당연히 새로운 아이디어만 있으면 자신의 것으로 포식했다. 전시, 기업부스, 공모전, 애니메이션 상영에서 시작해 행사가 지속될 수록 전시, 아마추어 마켓, 전공 학생 부스, 기업부스, 국제영화제, 야외애니메이션상영, SPP, 온라인 전시, 온라인 공모전, 시상행사, 대형 이벤트, 야외 이벤트 등 서로 일치되지 않는 그나마 가닥잡기도 어려운 행사들이 한 몸을 이루며 공로상 시상, 다양한 학술행사, 거리행사, 시민참여 행사 등 마치 폭주하는 포식자처럼 모든 것을 삼키며 커져갔지만, 포식 후 증식은 하지 못했다.

만화축제가 정책에 의해 탄생하고, 이후 사단법인이 출범하며 돈을 출자한 기업들이 포진하고, 여러 만화, 애니메이션 관련 단체도 함께 참여하며 뚜렷한 콘셉트나 목표 없이 수치적 목표에 계속 흔들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나마 2013년부터 조금 더 소박하게 서울시민을 위한 행사로 변화해 가고 있어 긍정적이다. 새로운 무언가를 도입하여 프로그램을 확장시키기보다는 축제 자체의 본질적 의미를 고민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새로운 sicaf가 진짜 만화축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의 정책으로 시행된 만화행사가 불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앞서 살펴봤듯 정부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sicaf 같은 대형행사는 시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산업적 필요에 의한 행사가 무의미하다는 뜻도 아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관련 업계들이 참여해 정보를 교환하고, 관람객들에게 비즈니스를 홍보하는 행사도 꼭 필요하고 의미 있다. 그러나 만화축제가 오로지 정부나 지자체의 정책에 의해, 산업적 수요에 의해 신설되고, 운영되는 건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 한계를 한국 최고의 만화축제였고, 무려 40만 명의 관람객을 동원하기도 했던 sicaf가 증언한다.

1974년 프랑스의 작은 지방도시 앙굴렘에서 시작해 2015년 현재까지 계속되며 세계적인 만화축제가 된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Festival international de la bande dessinée d’Angoulême)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프랑시스 그루(francis groux)는 1967년 파리장식미술관에서 열린 ‘만화의 서사적 형상’전의 전시도록을 보고 만화전시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69년 4월 앙굴렘에서 만화주간 행사를 열고, 2년 뒤 앙굴렘의 시의원이 된 후 1972년 클로드 몰리테르니와 함께 ‘천만 개의 이미지 : 만화의 황금시대들’이라는 만화행사를 연다. 만화를 사랑하는 프랑시스 그루의 뜻에 동참해 많은 만화가들와 독자들이 앙굴렘을 찾았다. 첫 행사에 고무된 프랑시스 그루는 다음 해인 1973년 동료 장 마르디키앙(Jean Mardikian)과 이탈리아의 루카만화축제를 찾는다. 앙굴렘으로 돌아와 1974년 국제만화살롱(Salon international de la bande dessinée)이라는 이름으로 첫 만화축제를 연다. 소박하지만 열정이 넘치는 준비에 독자들이 환호한다. 보르도의 작은 도시 앙굴렘의 만화행사에 1만 명이나 되는 만화팬들이 찾아온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의 시작이다. 앙굴렘 만화페스티벌은 전시와 학술행사, 만화출판사들의 부스, 시상식 등 다양한 행사로 구성되어 2015년까지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이 완벽한 축제의 모델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만화축제가 어떻게 시작되어 작가 및 만화팬들과 어떻게 교감했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 2015년 현재 한국에는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와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라는 커다란 만화축제가 있다. 만화축제의 주도권은 sicaf에서 bicof로 넘어왔다. 2015년 8월 12일부터 16일까지 황금연휴 기간에 처음으로 유료화를 선언한 bicof는 만화축제라는 그릇에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과장된 사례지만 폐막식에서 ‘최고의 코스튬 플레이어’, ‘제16회 전국학생만화공모전’, ‘제13회 대한민국창작만화공모전’, ‘제4회 세계어린이만화가대회’, ‘제1회 틴툰(Teen-Toon)공모전’ 등 총 5개 대회의 시상식이 열렸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과 한국만화박물관 그리고 만화작가단체 등의 적극적 참여로 매년 성장하고 있는 bicof 지만 ‘산업진흥’이라는 이슈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하다. 크건 작건 만화축제가 만화축제다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만화가-만화-만화독자로 이어지는 순환의 고리다. 우리가 행사의 규모를 키우고, 다양한 수치에 매달리며 가장 중요한 축제의 본질을 잊고 있는 건 아닐까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프랑시스 그루의 2012년 인터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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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하

누구라도 그렇듯 만화를 보며 자랐다. [소년중앙], [새소년], [어깨동무] 그리고 [보물섬]까지 한국만화잡지를 탐독했으며, 클로버문고의 팬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80년대 만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했고, 허영만과 이현세의 팬이되었다. 세 살 아래 여동생과 함께 순정만화를 보았고, 함께 살았던 삼촌의 서가에서 고우영의 극화를 봤고, 집안에 굴러다니던 선데이서울에서 박수동과 방학기를 만났다. 대학 졸업후 운명적으로 만화를 다시 만나 1995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그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운을 사용해 당선된다. 이후 지금까지 만화와 관련된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지금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전시 기획, 만화 프로젝트 컨설팅, 만화비평 등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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