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호의 나는 왜 그리는가 3_’나는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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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호, 그는 타고난 천재인가, 아니면 그저 운이 좋았던 작가인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략 저런 뉘앙스의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사가 실린 잡지는 <영점프>였다. <영점프>는 내가 첫 장편인 <마이러브>를 연재했던 주간 소년만화잡지 <IQ점프>를 발행하던 서울문화사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1994년 창간한 잡지였다(지금은 폐간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지만). 철저하게 만화 연재 중심인 소년만화잡지와는 달리 <영점프>는 조금은 높아진 독자들의 연령대를 고려해서 만화 관련 소식이나 작품에 대한 평론, 작가 인터뷰 등을 그럭저럭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그 당시 인터뷰 중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갔기에 기자가 저런 뉘앙스의 글을 썼는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당연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기사에 나온 사진이 나의 인물(거울을 볼 때마다 꽤 쓸 만하다고 자족해온)을 제대로 살려주지 못해 짜증이 났었다는 사실과, 당시 인터뷰를 진행하고 기사를 쓴 <영점프>의 기자가 데뷔 2년 차에 불과한 신인작가임에도 홀로 단행본에 ‘인지’ 붙이기를 고집하는 등 거침없이 출판계(주로 서울문화사 내부)의 관행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쓴소리를 해대던 나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술자리에서도 몇 차례 자리를 함께 했던 그 기자의 시선은 일관되게 내게 우호적이지 않았고, 인터뷰 진행은 물론 기사까지도 전체적으로 그가 평한 대로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유명해진’ 어린 만화가인 나에 대해 삐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이러브>를 끝낸 직후 <까꿍>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에 나온 기사니까 1995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이었는데, 당시 20대에 불과한 어린 나이에 장편 데뷔작 단 한 편으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상업적 성공을 거둔 나를 바라보는 만화계의 시선은 <영점프>의 기자와 비슷하게 이분법적이었다.

 

그들은 나에 대해 ‘천재적 재능’이 있거나, 그저 ‘운이 좋았던’ 작가이거나, 둘 중 하나로 결론을 내려고했다.
내가 첫 장편인 <마이러브>를 연재하던 1990년대 초중반 당시의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문화적으로도 변화의 물결이 밀려오던 시기였다. 군사정권이 막을 내렸다는 역사적 성취감 때문이었을까?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문화를 소비하려는 대중들의 욕구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대중음악계에는 문화대통령이라 불리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해서 온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고, <사랑이 뭐길래>와 <모래시계> 같은 드라마는 시청률 60%를 넘기면서 방송시간에 맞춰 사람들을 조기 귀가하게 해 길거리를 한산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대중들의 문화에 대한 소비욕구는 만화산업에도 영향을 미쳐서 일본의 메가 히트작인 <드래곤볼> 같은 만화는 일본문화 개방 이전에 이미 볼 사람은 해적판으로 다 봤다는 말이 돌 정도였고, 우리나라 만화들 중에서도 <진짜사나이>와 <마이러브>를 비롯한 몇몇 작품들이 연이어 밀리언 셀러 타이틀에 그 이름을 올리면서 빌려보는 만화방의 시대는 가고 사서 보는 만화의 시대가 열리는 것처럼 보였다 (안타깝게 너무나도 짧았지만).

수요가 먼저였는지 공급이 먼저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 시기에는 대중들의 소비욕구 이상으로 창작자들의 표현 욕구 역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화계만 놓고 보자면 제2의 황금기─나는 잘 모르지만 제1의 황금기는 1960년대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웹툰이 전성기를 누리는 지금을 제3의 황금기라고 말하기도 한다─였다 라고 말할 정도로 당시 만화산업의 성장은 빠르고 화려해 보였고(결과적으로 문민정부가 무늬만 문민정부였듯이 내실 없이 껍데기만 부풀어 올랐던 시기가 되어버렸지만), 그만큼 다양한 표현 욕구로 무장한 만화가들의 신선한 작품들이 연이어 발표되고 있었다. 1980년대(대본소와 월간 잡지 시대)를 호령하며 이미 한국 만화계의 터줏대감으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고 있던 허영만, 김수정, 이현세 등 기성작가들이 여전히 그 화려한 필력을 자랑하고 있었고, 도제시스템에서 오랜 수련을 거친 후 데뷔한 김준범, 권가야, 윤태호가 수련 기간만큼 묵직한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도제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불쑥 튀어나온 이명진, 양재현, 양영순 등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스타일의 만화로 신세대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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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 화려한 이름들 사이에서 애매하게 도제시스템을 맛만 본(불과 5개월의 수련기간) 이충호라는 개인이 어떤 유사성과 개성을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해서 짧게라도 논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사서 보는 만화의 시대가 열리는 과정 속에서 이충호라는 신인 만화가의 서투른(그 누구보다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는) 장편 데뷔작이 어째서 대중의 지지를 받았는지 진지하게 분석해보려는 전문가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저 풋내기의 당연한 어설픔과 밀리언 셀러라는 상업적 성취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만 시선이 꽂혀 다른 점은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인지 작품의 미숙한 완성도에 비해서 전에 없던 과도한 상업적 성공이 주어졌다는 시샘과 질투의 마음이 개입되면서, 나에 대한 만화계 내부의 평가는 독자들의 열광에 비해 상대적으로 박했고 시선에는 미묘한(?) 적대감이 있었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이충호의 성취는 98%쯤은 ‘운이 좋은’으로 정리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아니, <영점프>의 기자가 썼던 글처럼 ‘운이 좋았던’이라고 아예 과거형으로 정리해버리고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마이러브> 한 작품으로 이충호의 ‘좋았던’ 시대는 끝날 것이라고 예단하고 있었던 듯하다. 또는 그러한 바람을 담고 있었거나.

어쩌면 내가 예민하게 반응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래서 당시의 나는 그들에게 나의 상업적 성취가 ‘운’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천재’가 되기로 한다. 좀 바보 같았지만 나도 그들과 똑같이 이분법적으로. 오기로라도 ‘천재’가 되어야만 했다.

 

사실 가만히 어린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어쩌면 천재였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 한때 나의 라이벌이었던 우리 형님 정도를 제외하고 나면 우리 또래 중에서 나만큼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는 별로 없었다. 동네는 물론이고 같은 반과 학교 전체를 통틀어서도 드물었던 걸로 기억한다. 초등학교를 입학할 즈음부터 이미 웬만한 사물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묘사해냈었는데, 갈수록 그림의 테크닉과 센스가 늘면서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같은 반 여자아이들은 내가 직접 그린 화려하고 예쁜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고 싶어 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얄팍한 재능을 이용해서 여자아이들에게 주목 받는 걸 즐기곤 했었다. 중학생이 되고 머리가 조금 굵어지고 나서 초등학생 때의 얄팍한 행동을 후회한 적이 있었지만, 그 후회 역시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당시 유행하던 팝송 잡지에서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들이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고 나서 나의 얄팍함이 수컷의 본능임을 깨닫게 된 거다. 그날 이후로 주저함 없이 나의 재능을 수컷의 본능에 이용하며 살고 있다.

뭐, 어쨌든 그래서인지 초등학생 시절의 나는 꽤나 말썽쟁이였음에도 미술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만은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하긴 미술 선생님들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나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어른이 되면 피카소처럼 세계적인 화가가 될 거라는 칭찬의 말을 거리낌 없이 했었으니까. 물론 다 알다시피 결과적으로 지금의 난 화가가 아니다. 아마도 그 누구도 미술전공과 가난함의 상관관계에 대해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오류이리라. 우리 집의 경제적 상황이 미술을 전공할 수 없을 만큼(아니,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가난하다는 사실을 나 역시도 중학생이 된 이후에 수채물감을 사는 일조차 쉽지 않은 환경임을 알고 나서야 처음으로 깨달았으니, 남의 인생에 큰 관심 없이 그저 눈앞의 그림만 보고 평가했던 그들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어쨌든 수채물감의 벽에 부딪히기 전까지 나는 천재소년 소리를 자주 들었었다.

 

만화가로 데뷔한 후에도 나는 천재의 길을 걸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데뷔 직후인 20대 중반에 발표한 <마이러브>가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고, 누군가들의 바람처럼 ‘운이 좋았던’으로 끝나지 않고 연이어서 발표한 <까꿍>까지 내가 ‘천재였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밀리언 셀러가 돼버렸다. 불과 3, 4년 사이에 원고료는 다섯 배 이상 올랐고, 캐릭터, 게임, 애니메이션 등의 부가사업이 진행됐다. 그리고 나의 상업적 성취에 대한 보상으로 나에게는 프로스포츠 선수들에 버금가는 전속계약금이 주어졌다. 거칠게 없었던 당시 나의 나이는 불과 서른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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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재임이 분명해 보였다. 보기에는 그랬다.
재능이라는 레이어가 얼마나 얇은지, 또 그 얇은 레이어들이 바벨탑 높이만큼 촘촘하게 쌓여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나는 여러모로 천재 같아 보였다. 아니 천재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천재가 아니었다.
내가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만화가 무엇인지 조금 알고 나자 나의 사이즈가 선명하게 보였고,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은 바벨탑 어디쯤에 내 재능의 레이어가 있는지도 대충은 알게 됐다. 나의 그림은 권가야만 못했고, 나의 스토리는 윤태호만 못했으며, 나의 센스는 양영순을 따라갈 수 없었다. 나는 결코 천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시 그 ‘영점프 기자’의 바람대로 난 그저 ‘운이 좋았던 작가’에 불과했던가?

그 시기에 나는 나의 재능은 물론이고, 뿌리부터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선택한 것, 내가 가진 것, 내가 성취한 모든 것이 가짜 같았다. 그 여파였을까. 나는 개인적으로는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이혼이라는 험난한 길로 들어섰고, 스토리 작가인 엄재경의 반대를 끝내 물리치고 40권을 그리겠다고 장담하던 <까꿍>의 연재를 돌연 중단해버렸다. 그리고는 모든 전화 연락을 끊고 문하생도 없이 홀로 연필 한 자루를 들고 <블라인드 피쉬>를 그렸다. 공교롭게도 내가 나를 의심하던 그 시기에 잡지만화 시장의 몰락이 함께 시작됐고, 나의 방황은 덩달아 길어졌고 깊어졌다. 통장은 바닥을 긁었고, 육체는 피폐해졌으며, 정신과를 다니며 조울증 치료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소문 만들기 좋아하는 인터넷 세상 어딘가에서는 “만화가 이충호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라는 글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나 자신을 의심하며 방황한 시간이 7년을 넘긴 어느 날,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안타깝게도 7년이나 걸렸지만, 다행히도 겨우 7년 만이기도 했다.

그림이 압도적이기는 하지만, 내가 권가야같이 무겁고 복잡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 그 이야기가 한 사람의 독자로서는 상당히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내가 윤태호스러운 시선으로 접근한 이야기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불어서 내가 양영순의 센스와는 다른 차원의 센스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워낙 뛰어난 그들이기에, 당연히 그들이 가진 작가적 역량 중 부러운 지점이 있었지만 내가 ‘그런 만화’를 그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거다.

 

대한민국 땅에서 ‘독자 이충호’가 가장 보고 싶은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만화가 이충호’였다.
그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한 명의 독자로서 ‘만화가 이충호의 작품’을 사랑하는 만큼 아쉬웠던 부분들을 계속 지적해왔다. 그리고 나는 한 명의 작가로서 그 지적을 받아들이고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오늘 이 순간에도 이야기를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러하겠지. 생각해보라. 이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내가 나의 가장 큰 애독자라니 누구나 부러워할 복받을 일이 아닌가. 생각해보라. 내가 나의 가장 강력한 조언자라니 정말 위대한 일 아닌가. 하늘의 선택을 받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그제야 나는 ‘천재라고 우길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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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이자 문학 평론가였던 윌리엄 헤즐릿(William Hazlitt, 1778~1830)은 “천재는 노력하기 때문에 어떤 일에도 탁월하다. 그러나 천재는 탁월하기 때문에 그 일에 노력하는 것이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탁월하지 않음’에도, ‘천재가 아님’에도 노력을 해야만 하는 터프한 세상에 살고 있다.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현세 선생님은 탁월하지 않은 우리들이 탁월한 놈들과 경쟁해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천재를 만나면 정면 승부하지 말고 먼저 보내주는 것이 상책’이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훌륭한 조언의 말씀이지만 나는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천재’라는 존재를 바라보았고 지금까지 끌어안고 극복해왔다. 평범한 나는 만화가로 이십여 년 동안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며 살아가기 위해 ‘나는 천재다’라고 우겨왔다.

 

천재로 태어났으나 천재로 죽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천재로 태어난 자들이 천재로서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고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지금은 복싱 마니아들이나 아는 흘러간 존재로 박제되어버렸지만, 1970~8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윌프레도 베니테스(Wilfredo Benitez, 1958~)는 14살에 프로에 데뷔해 역대 최연소 나이인 17살에 JR웰터급 세계 챔피언이 된, 말 그대로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복서였다. 한때 잠깐 복싱 마니아이자 전설적인 복서인 슈거 레이 레너드(Sugar Ray Leonard / 1956~ )의 광팬 짓을 했던 나도 레너드와 링 위에서 자웅을 겨뤘던 베니테스의 경기를 몇 차례 봤는데, 그의 타고난 기량이 레너드를 능가하고 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Bible of boxing’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릴 정도로 탁월한 기량을 지닌 베니테스는 안타깝게도 천재적 재능 이상으로 게을러서, 세계적인 선수들과의 시합을 앞두고도 나이트클럽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일주일 정도만 대충 연습하고는 링 위에 오르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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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는 슈거 레이 레너드, 토마스 헌즈(Thomas Hearns / 1958~ ) 등에게 패한 후 서서히 복싱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꽤 오래전 그것도 아주 잠시 복싱 마니아 짓을 했던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반발하는 전문가들이 제법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슈거 레이 레너드를 복싱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서(심지어는 무하마드 알리를 능가하는)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복싱팬들이 상식처럼 알고 있는 바와는 달리 나는 레너드가 천재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천재 복서인 윌프레도 베니테스를 비롯한 당대의 걸출한 복서들과의 승부에서 승리하고 천재성을 뛰어넘는 삶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혹시 레너드는 천재로 태어나지 못한 스스로를 ‘천재라고 우기며’ 천재에 대해 철저하게 연구하고, 천재를 뛰어넘기 위해 지독한 훈련을 견뎌낸 것은 아닐까?

작가로 살아가려면(다른 직업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세상이 인정한 보편적인 답과는 거리가 멀지언정 자신만의 답을 가지고 있어야 멈추지 않고 끝까지 달릴 수가 있다. 답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스텝이 엉키고 작품이 흔들리게 되니까, 작품을 지키려면 답을 가진 자의 거침없는 오만함이 필요한 거다. 그러므로 만화를 그리겠다고 작정했다면 이런저런 두려움으로 자신의 재능을 낮추어 보지 말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믿어버리기를. 그 순간 없던 재능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기적을 볼 수도 있으리라.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이명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뜨거운 말을 남겼다.이명세

“내가 가끔씩 천재 운운하면서 농담하는 것은 부족한 사람으로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 같은 거야. 속된 말로 내가 학벌이든 뭐든 내세울 게 무엇이 있어? 결국 이 동네에서 내가 자신 있는 것은 노력밖에 없어. 여기서 밀리면 끝이라는 생각을 항상 해. 그것이 오늘의 나를 만든 거야.”

설령 농담일지언정, 농담이 진담이 될 때까지 나는 오늘도 우긴다. “나는 천재다.” ’라고. 부디 만화가들 사이에서 “나는 천재다.”라는 농담이 유행하기를. 그래서 이 세상에 재미있는 만화가 넘쳐나기를.

이충호

만화가. 철들지 않는 소년의 마음으로 하루하루 늙어가는 육체를 갈군 결과 23년째 주간 마감을 쉬지 않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만화가 중에서는 ‘만화가 이충호’가 가장 내 취향의 만화를 그리고 있어서, 게다가 아직도 서툰 만화가인 내가 다음 작품에서는 얼마나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줄지가 궁금해서, 오늘도 이 짓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완성형 만화가는 꿈꾸지 않는다. 다만 다음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잘 쓰고 잘 그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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