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장소로 읽기] 만화에 서린 또 다른 독재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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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 일대, 그리고 신촌대통령

매캐한 독재의 냄새

 

시대를 풍미한 최루탄 SY-44

어린 시절 신촌을 아버지가 모는 차 안에서 지나친 적이 있다. 나기만 서울에서 났지 대학생 시기까지 지방에서 자란 내게 서울 풍경은 모든 게 생소하기만 했는데, 그 시기 신촌은 어린 시절 내게 어렴풋이 나던 매캐한 최루탄 냄새와 시위대를 향해 욕하던 아버지의 짜증 섞인 목소리로 기억되던 곳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1980년 후반 그 시기 즈음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단 사실을. 또 어쩌면 역사적 순간들에 나 또한 근처에서 함께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단 사실을 말이다.

시간이 흘러 신촌역과 홍대 사이 즈음의 고시원방에서 첫 독립생활과 사실상 첫 서울살이를 시작하면서 어린 시절 아버지 차 안에서 지나쳤던 곳들 근처를 곧잘 돌아다니게 됐다. 이른바 ‘신촌 일대’는 발을 디딜 때면 괜히 가슴 두근대는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물론 1987년을 기억할 수 있는 장소로는 명동이나 남영동이 앞설 수 있지만 이 역사와 나의 첫 만남이 신촌이었던 터라 괜히 각별했다.

어릴 적 기억을 되짚어 보자면, 비록 내 아버지 세대는 혀를 차셨지만 실제 이 자리에서 있었던 젊은 외침들이 조금이나마 다른 역사를 만들지 않았던가. 독재가 무엇이고 민주란 무엇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시점에 서서 생각이 복잡해질 때면 당시 신촌에서 어렴풋이 맡았던 최루탄 냄새를 떠올리곤 한다. 최루탄을 직접 정면에서 맞닥뜨리지는 못 했던 나이라 조금은 내멋대로의 어쭙잖은 부채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또 전두환 시대를 끝냈더니 노태우가 오더라는 웃지 못 할 현실의 한계에 짙은 기시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신촌 일대는 현대사의 한 자락으로서만이 아니라 내 분야인 만화 쪽에서도 상당히 깊이 연이 닿아 있는 공간이었다. 놀랍게도 거의 2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신촌은 한국 만화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만화가들은 이 신촌 시대를 영광이나 기쁨이 아닌 절망과 암흑으로 기억하며, 독재기라는 표현을 붙이길 주저하지 않는다. 독재를 끝내기 위해 대학생들이 뛰쳐나왔던 그 자리에 또 다른 독재가 있었던 셈이다.

이름하여 ‘신촌 공화국,’ ‘신촌 대통령’으로 불리던 만화 출판의 최대 권력자, 합동 출판사의 이야기다.

 

합동 출현 직전 ① 단행본 시장에서 대본 중심 시장으로
합동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합동이 등장하기 전인 1950~1960대의 만화계 상황에 관해 잠시 언급해 보자.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재앙 속에서도 만화는 피난지인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만화 노점이라는 형태로 대중들을 만나며 어려운 시기 몇 안 되는 오락거리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나고는 잡지들의 복간과 새 잡지 창간 붐 속에서 점차 수요를 늘려 나갔고 이윽고 단행본 출간도 줄을 이었다. 이 가운데 <엄마 찾아 삼만리>는 김종래가 1958년에 발표한 고전 사극 만화로 한국전쟁을 전후한 사회의 모습을 조선시대에 빗대 묘사해내며 1964년에 이르기까지 10쇄를 찍은 한국 만화계 첫 베스트셀러다. 당시 단행본 만화의 시장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대표작 <엄마 찾아 삼만리>는 2013년 등록문화재 539호로 지정돼 김용환의 <토끼와 원숭이>에 이어 만화 문화재 2호로 기록되고 있다.

<엄마 찾아 삼만리> (김종래, 1958)

<엄마 찾아 삼만리>를 발행한 만화세계사는 1956년 한국 첫 청소년 만화 월간지 <만화세계>를 낸 출판사다. 잡지도 창간호부터 매진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는데, 225쪽짜리 양장본으로 출간했다는 <엄마 찾아 삼만리>가 시쳇말로 대박을 내자 여러 출판사들이 대거 달려들어 단행본 전성기를 열었다. 지금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악동이>의 이희재는 이 시기의 단행본들이 “만화가 소설처럼 책으로 단아하게 나왔다. 책 장정도 제대로 돼 사볼 만 하고 지금 봐도 도서로는 가치가 있다. 60~70년대 만화보다는 훨씬 격이 있었다.”라고 증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흐름이 오래는 못 가는데, 1960년대 들어 만화의 대중 노출 창구가 길거리나 서점에서 대본소(만화방)로 급속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만화가이자 만화 편집자로 클로버문고를 이끌었던 박기준은 <박기준의 한국만화 야사> 74쪽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러나 잡지에서 단행본으로 작가들이 몰리다 보니 공급이 수요를 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단행본의 발행 부수가 폭주하다 보니 서점에서는 만화 취급을 거부했다. 자연히 궁여지책으로 출판사에서는 쪽수를 줄여서 서점용이 아닌 대본용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판매 부수도 크게 줄었으므로 인기 작가들은 여러 명의 보조를 두고 다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인기를 얻지 못한 어중간한 작가들은 인기 작가의 어시스턴트로 들어가려고 애썼다”

1958년 무렵부터 등장한 대본소는 언론 보도에 따르면 1960년대 초중반에 이미 서울시내 900여 개소, 전국 4500여 개소로 늘어나 있었다. 이 시기 만화방은 핵가족화로 형제도 몇 없던 아이들의 유일한 문화공간이었다. 만화방은 당시 막 보급되던 흑백 TV를 들여놓고 프로레슬링과 복싱 등 인기 스포츠 프로그램들을 보여주며 관람료를 별도로 받기도 했다. 대본소를 통해 안정적으로 물량을 내보낼 수 있게 되자 늘어난 만큼의 공급을 받쳐줄 수 있는 시스템이 자리하게 되는데, 부엉이문고와 제일문고, 클로버문고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출판사들이다.

1960~1970년대 대본소 풍경을 재현해 놓은 부천의 한국만화박물관 전시실 풍경

 

합동 출현 직전 ② 독재 정권 뒤의 독재 정권, 불량만화 논쟁
이 시기 출판사들은 각기 특색 있는 작가들을 자사에 소속시킴으로써 경쟁구도의 막을 올렸다. 부엉이 문고는 <라이파이> 시리즈의 산호와 <칠성이> 시리즈의 김경언을, 제일문고는 앞서 단행본인 <엄마 찾아 삼만리>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김종래와 <만리종>의 박기당, <탕>의 오영천과 <땡이> 시리즈의 임창 등을 대표 작가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도 언급한 박기준의 클로버문고는 박기준 스스로가 <두통이> 시리즈를 그리는 작가였고 박기준의 형이기도 한 박기정이 <도전자>를 그려내고 있었으며 <명견 루비>의 박부성, <약동이와 영팔이>의 방영진 등도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박기준에 따르면 제일문고가 작가진은 최고였지만 극화 작품들이 많아 탈고 기간이 길었고 부엉이문고나 클로버문고는 대부분 간단한 그림체여서 탈고가 빨라 기동력에서 큰 이점이 있었다고 한다.

1950년대를 넘어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만화계가 완연하게 대본소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자 출판사들을 짧은 주기로 빨리 다음 권을 시리즈로 내어 독자들을 계속 붙잡아두는 전략을 쓰게 되는데, 전국에 기본으로 확보한 만화방 수만큼의 물량을 효과적이고 지속적으로 내보내며 회전율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중반에 이르기까지 만화방 만화는 전쟁 후 주머니 사정이 좋지 못 했던 어린이들에게 비교적 싼값에 많은 작품들을 접할 수 있게 해 주는 역할을 했고, 출판사들은 회전율이라는 한계 속에서도 SF, 스포츠, 영웅, 시대극, 탐정물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쏟아냈다. 판매형 시장이 완전하게 정착하지 못한 채 대여 중심으로 흘러가긴 했지만 전후라는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지 않을 순 없었고, 한편으로는 장르와 소비층의 일대 확장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에 출판사 사장들을 중심으로 인기작, 인기 캐릭터를 베껴 출시하는 관행들이 만연했음은 분명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지만 말이다.

그러던 중 이승만이 3·15(1960.0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가 4·19 혁명(1960.04.19)을 맞아 쫓겨난 뒤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1961.05.16)을 일으켰다. 박정희는 실권을 잡자마자 정치 깡패를 잡아다 처형시키는 등 사회 분위기를 다잡으려 들었다. 그리고 만화는 이 박정희 독재정권기에 끊임없이 불량 시비에 시달렸다. 1966년엔 연초부터 동대문서가 만화를 2만 권 압수했고(1966.01.12) 당시 흑백 TV를 들여놓고 아이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던 대본소에서 자리다툼 끝에 칼부림이 났다며 만화가 불량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기사가 나왔다. (<불량만화로 멍드는 동심>, 동아일보, 196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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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만화로 멍드는 동심>(동아일보, 1966.05.12) 대본소 안 흑백 TV 주변에 몰려 들어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급기야 1968년부터 한국아동만화 윤리위원회가 창립(1968.08.31)해 본격적인 만화 사전심의가 시작됐으며 1970년엔 한국도서잡지 윤리위원회(1970.01.21)가 설치돼 ‘다루어선 안 될 내용’을 막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공산주의를 상징한다는 붉은색을 쓸 수 없다거나 남녀 연애를 다룰 수 없다는 식의 조항을 들이댔고 한때 이념과 거리가 멀다며 용인된 덕에 곧잘 등장했던 반일 영웅 만화 종류도 폭력적이라는 판단을 받게 됐다. 이렇게 검열과 단속이 심각해지자 내용 면에서 다양성을 꾀하며 양적 확장세를 보이던 만화계는 일거에 숨을 죽이게 됐다. 2014년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 주제 전시 <만화, 시대의 울림>전에서 큐레이터를 맡았던 백정숙은 이 시기의 특징을 “만화는 완전히 오락적 매체로 규정되었고 반공 만화 일색이었지만 유능한 어린이 주인공을 내세워 능력 있고, 운동 잘 하고,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인간상을 만화 속에서 구현해 냈다.”라고 정리한다. 이러한 압박은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단행한 1972년에 이르러서는 대대적인 화형식과 언론을 동원한 불량만화 논쟁으로 나타난다.

1960년대 후반은 이렇듯 정권 차원에서 만화를 사회 분위기 다잡기용으로 십분 활용하던 시기로, 만화가 다양성을 지니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정부 차원에서 막아섰다 볼 수 있다. 하지만 표현 범위를 문제 삼아 만화를 옥죄어 오던 정부와는 상관없이 만화를 둘러싼 환경 변화를 큰 돈을 벌 기회로 받아들인 이들도 있었다. “전국 대본소를 대상으로 한 만화 유통을 틀어쥐면 내용이야 어쨌든 큰 돈을 벌 수 있다.” 따라서 목표는 간단했다. 이 ‘유통 독점으로 큰 돈 벌기’를 최우선과제로 삼고 등장한 곳이 바로 ‘합동’이다.

 

1967년, 합동의 등장과 전횡
세상 어떤 것에도 명과 암은 있게 마련이라지만, 합동은 어느 곳에라도 인연들이 얽혀 있어 싫은 소리가 쉬 안 나오는 만화 업계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이 없는 집단이었다. 그런 집단이 거의 20년 가까운 기간에 걸쳐 한국 만화계를 쥐락펴락했으니, 가히 한국의 현대만화사 최대의 암흑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합동은 합동 출판사, 또는 합동문화사, 합동 동우회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정확하게는 한 회사라기보다 여러 출판사들이 지분 관계로 얽힌 출판 그룹이라 할 수 있다. 최대 주주로 꼽히는 이영래 회장이 절반가량을 쥐고 나머지 소 사장들이 10%씩 쥐어 출판사를 나누고 구역에 따라 작가를 관리했다고 한다.

합동의 최대 주주인 이영래는 직함을 ‘회장’이라 붙이고 있었는데, 본래는 북에서 내려온 월남자 출신으로 신촌에서 방앗간을 하던 사람이었다. 방앗간의 위치는 지금의 경의중앙선 신촌 기차역에서 이대입구역 사이의 도로쯤이었다고 하는데 그 시기 이영래와 같은 월남자들이 방앗간 주변에서 장사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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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의 중심이었던 이영래의 진영출판사 위치는 대략 원 안이었을 것으로 추정

 

이영래는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살아남기 위해 북에서 내려왔기에 생활력이 강했다고 한다. 특히 돈을 벌어들이는 데에 기민했는데, 자기 방앗간 옆집이던 인쇄소를 인수하면서 인쇄물, 그 가운데에서도 만화에 눈을 뜨게 된다. 만화를 인쇄해 대본소를 통해 대중들에게 유통하는 과정을 읽어낸 이영래는 이윽고 제작과 유통을 모두 틀어쥐면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구상을 실행에 옮겼다. 이영래의 진영출판사를 중심으로 당시 만화방용 만화를 내던 주요 출판사 대여섯 곳이 1967년 7월 한 이름 아래 묶인 것이다. 이는 만화가들이 만화로 먹고 살 수 있었던 주요 창구가 한 곳으로 한정된 셈인데,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독점 지위를 점하게 되었는지에 관해 박기준은 <박기준의 한국만화 야사> 108쪽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만화제작 공정을 모두 갖추고서 기존 출판사의 전속 작가들을 회유, 빼앗아가는 물론 도작, 모작, 사이비 작가 이용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인기 작가를 확보하고 난 다음 전국 총판을 통한 독점 판매권까지 확보하자 기존 출판사들은 모두 손들어 버리고 말았다.”

한편 허영만은 1997년 3월 경향신문에 연이어 실었던 <나의 젊음, 나의 사랑 – 만화가 허영만> 에서 합동 출판사에 관한 언급을 상당히 길게 전하고 있다. 동물 만화로 널리 이름을 날린 이향원 문하에 있을 때의 일화다.

“7년이란 세월 동안 이향원 선생 밑에 있으면서 나는 당시 한국 만화계 돌아가는 사정을 대강 알게 되었다. 만화 시장에는 거대한 괴물이 하나 있었다. ‘합동 출판사.’ 스타 작가는 물론 비인기 작가까지 한 손에 쥐고 만화계를 떡 주무르듯이 휘두르던 큰손. 덩치만큼 횡포도 심해서 만화가에게로 돌아와야 할 수익금을 중간에서 다 거둬갔다. 이른바 ‘세트 판매’ 때문이었다. 그들은 A급 B급 C급 작가들을 세트로 묶어 팔았다. A급 작가의 명성을 빌어 C급 작가들 책까지 한꺼번에 팔아먹은 것이다. 해가 바뀌고 명성이 높아져도 만화가의 원고료는 오를 줄 몰랐다” (<나의 젊음, 나의 사랑 – 만화가 허영만 ④>, 경향신문, 1997.03.18.)

“합동 출판사에 맞서 이향원 선생은 숱하게 싸웠다. 매번 싸움에 지면서도 3번씩이나 뛰쳐나가 경쟁 출판사를 차렸다. 싸움에 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만화가들은 대부분 동조해주지 않았다. 거물 출판사에 밉보이면 그나마 책도 못 내고 영원히 매장될까 싶어 몸을 사렸기 때문이다. 분개하는 선생을 보니 나도 덩달아 화가 치밀었다. 만화가에게 이렇게 힘이 없다니…… 출판사에 잘못 보이면 아무리 좋은 작품도 세상의 빛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나의 젊음, 나의 사랑 – 만화가 허영만 ④>, 경향신문, 1997.03.18)

 

반 합동 움직임 전개와 야합, 그리고 좌절
이향원을 비롯해 합동 출판사에 반기를 든 군소 출판사나 작가들 또한 적지 않았으나 대부분 회유와 방해공작으로 실패하고 쓴 잔을 마셔야 했다. 한데 이와 같은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일보다. 한국일보는 박정희 정권 초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한 바 있는 사주 장기영이 일본을 드나들며 만화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게다가 한국일보는 자매지 일간스포츠에 실었던 고우영의 극화 만화로 쏠쏠한 재미를 봐 왔던 터라 그냥 합동 혼자 재미를 보게 두기는 아까웠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한국일보는 1971년 합동에 맞설 것을 선언하고 1973년 1월 7일자 회사 알림을 통해 만화책을 발매하겠다고 알린다.

“‘건전한 만화로 건전한 어린이를 기르자’는 뜻 아래 소년한국일보는 우수만화 출판사업을 벌이기로 하여, 그 첫 시리즈가 오는 11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일제히 발매됩니다. 4×6배판 100페이지의 부피에 ‘오프세트’ 인쇄로 매일 15종씩 발간될 이 만화책은 재미있고 명랑하고 밝은 내용을 참신한 ‘스타일’로 꾸며 6백만 독자의 어린이만화책에 ‘새롭고 즐겁고 건전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보다 혁신적인 우수 만화의 제작을 위해 만화 작가 50여명과 아동문학가, 극작가 20여 명을 동원한 황금의 집필진이 갖추어졌으며 전국의 영업소 및 한국일보의 각 지사, 지국, 보급소를 통해 어린이 만화 도서실에 배본됩니다. 명랑한 어린이의 양식으로뿐 아니라 사회의 명랑화를 위해서도 보탬이 될 이 소년한국일보의 만화를 일반가정과 교육계에서 안심하고 권장해주시고 또한 적극 성원해주시길 바랍니다.”

인쇄 기술과 분량을 상향하고 만화 총판이 아닌 신문 보급소를 이용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저질 종이에 분량도 적고 인쇄 질도 좋지 않았던 합동을 하나하나 꼬집은 셈이다. 한국일보사의 소년한국도서는 출범 초기인 1973년부터 공모전을 여는가 하면 박기준, 박기정 형제를 비롯한 일련의 유명 작가들을 전속으로 들이는 등 브랜드 전략에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영세함을 가장한 어둠의 권력 합동과 부총리에 장관 출신인 사주까지 나선 한국일보는 치열하게 치받다 1년이 채 안 된 1973년 합의를 통해 만화 시장을 반씩 나누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작가들에게는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 이어지게 됐다. 말 그대로 독점이 독과점이 됐을 뿐이다.

신문뿐 아니라 작가들 차원에서 의미 있는 대응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대표 격인 사례가 <땡이> 시리즈를 그린 임창의 땡이문고다. 임창은 합동에 속하지 않은 만화 출판을 꾀하고자 1969년에 한 차례 땡이문고 설립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한국일보가 판을 나눠먹은 뒤인 1974년에 다시 한 번 시도한다. 이때의 대표 작가는 1970년대 최고의 스타였던 <독고탁>의 이상무와 1974년 소년한국도서 2회 공모전에서 입선 없는 가작을 받으며 막 데뷔한 허영만을 비롯해 김영하, 김철호, 김민 등이다. 이와 관련해 허영만은 경향신문에 실은 회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어느 날 이들이 나를 찾아왔다. 이상무, 김영하, 김철호. 스스로를 ‘삼총사’라고 한다며 내게 달타냥이 돼 주기를 요청했다. 데뷔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신참내기에게 그럴 자격이 있나 싶으면서도 수 년 전 이향원 선생이 무참히 깨지던 기억이 떠올라 흔쾌히 승낙했다. 데뷔를 시켜준 소년한국도서를 박차고 나와 ‘땡이문고’로 적을 옮겼다. 원고료는 한 푼도 못 받았지만 열심히 만화를 그렸고 뜻이 있는 신진 작가들을 우리 쪽으로 규합해 두 거물 출판사에 대항하는 ‘투쟁집단’을 만들어갔다. 지금도 만화가들은 그 시기를 일컬어 ‘독립운동시기’라고 부른다. 창작 주체인 만화가의 정당한 권리 찾기….” (<나의 젊음, 나의 사랑 – 만화가 허영만 ⑤>, 경향신문, 199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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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이문고에서 출간한 허영만의 <각시탈>

하지만 이 싸움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사무실에 도둑이 들어 원고들이 모조리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쟁은 8개월 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어느 날 새벽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려 받아보니 출판사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캐비닛 안에 들어 있던 원고들이 다 털리고 없었다. 곧 드러난 일이지만 도둑은 바로 출판사의 물주였다. 그동안 투자한 돈은 다 보상해줄 테니 원고를 가지고 오라는 합동 출판사의 유혹에 넘어가버린 것이다. 그때의 배신감과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의 젊음, 나의 사랑 – 만화가 허영만 ⑤>, 경향신문, 1997.03.19.)

이 일화와 관련해 이희재는 허영만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출판사는 원고만 있으면 돼. 좋은 원고만 있으면 돼. 사무실 하나 얻어서 하면 되거든. 총판 같은 데도 좋은 책 주면 선불을 당겨 올려주거든. 그러면 출판사가 돌아갈 수 있어. 그런데 어느 날 땡이문고가 다 털린 거야. 캐비닛이 열려 있고 원고가 하나도 없어. 출간하려고 새 출판사 캐비닛에 넣어놨던 원고가 싹 사라져버린 거야. 도적질 한 거지. 그렇게 해서 덤벼드는 자들을 분쇄시킨 거지. 이영래 같은 사람은 서대문 경찰서 정도는 대충 삶아 놓고 있는 정도니까. 그렇게 해서 땡이문고가 자생도모를 하다가 희생양이 됐어. 땡이문고가 넘어지면서 영만이 형은 한국일보로 배속됐는데, 한국일보 12층에서 땡이문고 사라지던 날인가에 남산 쪽으로 고개를 내밀면서 뭔가 작가들이 해보려 도모했는데 궤멸되는 상황이 되니까 참담해서……. 형이 유리 창문으로 남산 쪽을 내려다보면서 있는데 얼굴에 눈물이 주륵 흐르더라는 거야. 신기해. 그 양반 눈물이 참 없거든. 근데 눈물이 쫙 흘러내리더라 이거지….”

 

합동의 끝없는 전횡, 그리고 종말
경향신문 회고에서 허영만은 이 땡이문고 독립운동 시기를 가장 가난했던 때라 이야기한다. 심지어는 시계, 다리미까지 전당포에 갖다 주며 쌀을 얻어먹을 만큼 쪼들렸었다고 한다. 한데 허영만뿐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독점 또는 독과점 권력 앞에서 창작자로서의 기본 권리를 침해당했다.

소년한국문고 2회 공모전 당선자인 허영만은 원래 1회 공모전 때 원고를 들고 갔지만 “탈락해도 원고를 돌려주지 않는다.”라는 조건에 돌아섰다고 회고했는데, 합동의 경우는 아예 작가들과 이른바 ‘매절’ 계약을 했다. 매절은 일정 금액을 받고 해당 작품의 전 권리를 양도하는 개념이어서, 작가는 이후에 작품에 관한 어떤 권리도 행사할 수 없다. 물론 매절 자체가 무조건 나쁜 건 아니지만 양도 계약이 되려면 매우 많은 계약금을 제시해야 하는 게 현재의 관례다. 당시 합동이 제시한 조건은 숫제 노예계약이라 할 법한 수준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쉬이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 합동 측은 금액도 많이 주지 않았지만 만들어 내야 하는 작품의 분량과 내용도 멋대로 지정해주는가 하면, 심지어는 필명까지도 직접 ‘하사’했다. 이영래가 직접 남제주라는 필명을 붙였던 <모래알>의 작가 이희재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당시 이희재는 20대 초중반, 서울에 올라와 이정문 문하에서 만화를 배우다 잡지 등에 이름을 싣게 됐는데 수익 문제로 다른 선배나 선생들의 데셍이나 펜 터치를 도왔다고 한다.

집에 있기 껄끄러웠던 이희재는 이상무와 비슷한 풍의 명랑만화를 그리던 남서울의 작업실에서 일 도우며 밥벌이를 하고 자기 벌이도 했다. 남서울은 합동 소속 출판사에 복속된 이른바 주주 작가였는데 이희재에게 도움을 부탁해 오며 도와주면 이후에 자기가 도와주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 문하생으로만 쓰길 원하는 눈치를 보이자 이희재는 화실을 나와 출판사 가운데 한 곳을 직접 찾아갔다. 주주 작가의 핵심이 빠져나가면 안 좋잖느냐는 질문에 그 문제는 해결됐다고 응수하자 이영래를 직접 만나게 해 주었는데, 이영래가 남서울에게 전화로 확인해 본 후 대뜸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라고 했단다. 이소룡이 한창 뜰 때니까 이소룡 비슷한 걸 하라는 주문을 받기도 했지만 그려오라는 걸 그냥 자기 그림으로 내니, 이번엔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했단다.

당시 이미 53~4세쯤이었던 이영래는 이희재에게 “너는 출판사에서 좌지우지 하는 주주 작가야. 내가 하라 해서 하는 주주 작가야. 나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갈 수 없는, 내가 알아서 하는 작가야 넌 ”이라 했다. 싫다고 거부를 하니 ‘이름을 받을래 만화 안 할래’ 해서 어쩔 수 없이 받은 게 남제주였다고 한다. 이희재의 회고에 따르면 이북에서 월남해 온 이영래 일파는 돈에 눈이 밝아 일찍이 부동산 투자 정보에도 훤했다는데, 남서울도 강남 개발 붐이 막 일어나던 시기에 지어준 이름이었다고 한다. 남제주는 말 그대로 현재의 제주도 중문 단지 쪽으로 5·16 도로를 놓으며 한창 개발 논의가 오가던 곳이다. 재밌는 건 이렇게 이영래가 하사한 이름들이 졸지에 정부에서 문제 제기를 받았다는 데 있다. 갈수록 작가 이름들이 어딘지 이상해지자 유신 정권이 “작가 이름을 다시 정해 오라”라는 명령을 내린다.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선언되고 그 해 12월 공포된 이래 외래어 이름을 쓰던 가수들이 이름을 바꿨던 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당시 심의실은 만화가 이름도 사람이름 같이 지어 오라며 반려하는가 하면 주인공 이름에도 한자를 다 적어오라는 식으로 요구해 왔다. 이런 연유로 남서울은 남서운으로 바꾸고 운의 ㄴ자 끝을 살짝 구부리는 편법을 썼다고 한다. 이영래가 지은 또 다른 필명의 소유자 서남북의 경우는 서남국으로 어정쩡하게 바꾸었다. 이희재는 남제주에서 도로 본명인 이희재로 바꾸었는데, 이영래 회장 아들이 이게 뭐냐고 묻길래 “저는 제 이름으로 할게요.”라고 답하고 곧 합동출판사에서 일이 끊겼다고 한다.

이렇게 끝나지 않을 듯하던 신촌 대통령의 치세는 1970년 중후반 들어 점차 힘이 빠져가기 시작했다. 손상익의 <한국만화통사> 하권이 기록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땡이문고로 고초를 겪었던 임창이 1976년 8월 잡지 <뿌리 깊은 나무>에 합동 출판의 전횡을 고발한 <더러운 어린이 만화장사>란 글을 실었고 만화계와 만화방 영업자들도 청와대 등에 진정서와 호소문을 발송했다. 1982년엔 한국일보의 소년한국문고와 합동출판사가 결별했다.

이 시기 육영재단의 만화 잡지 <보물섬>이 당시 전두환 정권의 특혜성 허가를 등에 업고 창간해 어린이 독자층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여기에 과거 무협지를 만화가게를 통해 주로 내던 대룡이라는 출판사가 만화 시장이 무협지보다 크다는 걸 알고는 작가에게 합동의 두 배에서 네 배를 제시하면서 합동의 지위가 크게 흔들린다. 이희재의 증언에 따르면 <독고탁>시리즈의 이상무는 1970년대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작가였으면서도 비용은 주는 대로 받았다고 하는데, 1970년대 중반쯤 냈던 책을 재판하면 고료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그리했더니 1980년대 들어 벌어들인 1~2년치 수익이 1970년대 10년 동안 번 수익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작가들이 흔들리고, 1986년 대한출판협회 산하에 한국만화 출판인협회가 발족하면서 ‘신촌 대통령’ 합동의 독점 권력은 사실상 끝을 맞았다.

 

마무리하며
이상과 같이 이영래의 경영 철학(?)은 굉장히 간단했다. 작품의 질이나 창작자의 길은 전혀 상관없이, 확실하게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이라면 거리낌 없이 선택하는 것이다. 실제로 합동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들은 품질이 정말 최악이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영래는 여기에도 나름대로의 이유를 댔다. 바로 “제본도 허술하게 해서 책이 빨리 파손돼야 구간으로 소모되고 신간과 구간의 차이가 빨리 생겨 회전율을 높일 수 있다.” 다시 말해, 만화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이 어느 정도일까 하면, 이영래 회장의 자택의 넓이가 1500평에 달했다고 한다. 합동을 영세 출판사 여럿으로 나눠서 운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줄이기 위해 면적 대부분을 과수원으로 신고해 앞마당에 사과가 주렁주렁 달렸다나. 또한 20대 중반쯤 되는 여비서가 수행했다고 하니 당시 나름의 권세를 즐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작가들은 철저히 착취당했다. 당시 합동이 만화로 벌어들인 수익을 대략 엿볼 수 있는 기사가 1970년 11월 28일자 경향신문에 실리는데, 만화를 공해라 비판하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참고해 볼만하다. 기사에 나오는 액수가 1970년 기준임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자. 1970년과 2014년 물가 변동폭은 짜장면 값에 빗대 보자면 100원과 5000원으로 약 50배라 볼 수 있겠다.

“현재 서울서 나오고 있는 신종 만화는 하루에 20종. 1종당 2천 부 이상 찍어내며 이 숫자는 아동만화작가협회에 속한 120명의 만화제작가가 매일 또는 이틀에 한 작품을 그려내야 한다는 이야기. (중략) 이렇게 그려진 만화는 출판사에서 먼저 가져가 검토하고 명목만 심사위원회에 넘겼다가 인쇄하여 각 지방별 총판에 넘기면 여기서 전국의 대본소에 공급하는 것. 현재 아동만화 출판사는 합동 출판사 한 군데뿐인데 여기서의 1년 출판량은 1천 3백 14만부. 한 권에 80원으로 치면 무려 11억 7천만 원의 이익이 돌아가게 된다. 또한 점점 늘어나고 있는 만화 대본업소는 현재 전국에 1만 2천여 개, 신간의 한 권 대본료 3원, 구간 2원으로 쳐 한 집의 1일 수입을 5백 원으로 잡으면 1년에 9억 1천여만 원이라는 돈이 대본소를 중심하여 나돌게 되며 결과적으로 만화 주변에 나도는 코 묻은 돈은 1년에 20억 원, 순이익만 6억 원이나 되며 덤핑 시장의 이익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엄청나다.” (<동심을 좀먹는 만화 공해>, 경향신문, 197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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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을 좀먹는 만화 공해>(경향신문, 1970.11.28)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다는 점은 어떤 면에서는 지금까지도 시장성을 추구하는 데 어려워하는 우리 만화계에서 일면 챙겨야 할 덕목일 수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모든 이익을 오로지 자기만을 위했다는 점, 작가와 대여점 업주를 비롯한 업계 관계자들을 강압적으로 수탈함으로써 얻어낸 이득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경쟁자를 무너뜨리기 위해 폭력적인 방식조차 거리낌 없이 이용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할 일말의 여지를 완전히 앗아간다. 합동은 이렇게 사라졌지만 이들의 전횡을 가능케 했던 만화 총판 유통망은 사라지지 않았고 1980년대 말 이후 등장했던 판매형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1990년대 중후반 번져가기 시작한 도서대여점을 통해 낙후된 만화 유통의 맥을 다시 이어나가게 된다. 웹툰 시대로 접어들어서는 합동과 마찬가지로 만화를 오로지 소모품으로만 취급하려는 업주들의 등장이 다시금 빈번하게 등장해 물의를 빚고 있기도 하니, 엄밀히 말해 2015년 현재까지도 책으로서의 만화 유통이든 웹툰이든 한국 만화계 자체가 합동 시기를 완전히 벗어나진 못한 셈이다.

좀 생뚱맞을 순 있지만 신촌과 관련한 조선 시대 이야기로 마무리를 해 보도록 하자.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5권에서 6권에 이르는 태조 3년(1394 갑술년)의 기록에 따르면 신촌은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옮기려 할 때 새 도읍지 후보 가운데 하나로 꼽혔던 곳이다. 하지만 궁궐 짓기엔 터가 좁고 뒷산인 무악산(지금의 서대문 안산)이 약하고 낮다는 이유로 관리들과 대신들의 반대가 심했다. 태조 이성계는 ‘명당으로는 송경(개경) 다음이 남경’이라는 의견에 따라 남경을 둘러보고 그 자리를 도읍으로 삼으니 지금의 경복궁 자리다. 무악 남쪽은 새 도읍지가 될 뻔했다는 뜻으로 새터말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이를 한자로 적은 게 신촌(新村)이다.

이렇듯 새 도읍지가 될 뻔했던 자리였던 신촌이 훗날 합동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전체의 만화판을 쥐락펴락하는 곳이 됐고 그 중심에 서 있던 이가 다른 말도 아닌 ‘신촌 대통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만화판 안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단 사실은 실로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한다. 궁궐이 들어서기엔 터가 좁다더니 과연 왕도의 그릇은 아니고 한 분야의 토호 노릇에 족한 곳이었나 하는 우스운 생각도 들지만, 막상 그 토호 노릇에 나선 자가 폭군 정치를 펼쳤고 결과물도 몹시 참혹했으니 마냥 웃기만 하기도 어렵다. 책으로서의 만화가 합동의 전횡을 가능케 했던 후진적 유통체계를 아직까지도 못 벗어나고 있으니 더욱이. 언제쯤 우리는 신촌 대통령의 치세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하긴, 실제 정치에서도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는 마당에 지나친 바람일까.

 

 

<별첨 : 신촌과 만화, 또 다른 이야기>

1. 이한열과 신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01.14)과 더불어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로 작용한 이한열 직사최루탄 피격 사건(1987.06.09)이 신촌에 자리한 연세대 정문 앞에서 일어났다. 전두환 정권과 집권당이던 민정당이 12·12 군사반란의 주역이던 노태우에게 정권을 물려주기 위해 개헌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에 따른 정부 이양 계획을 담은 4·13 호헌조치(1987.04.13)를 발표하자 범국민적인 민주 투쟁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축소·은폐됐음을 폭로했고(1987.05.18) 재야 세력과 통일민주당의 연대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이 출범(1987.05.27)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규탄과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위한 투쟁이 연계된다.

국본은 6월 10일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에 맞춰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그 하루 전인 6월 9일,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 학생이었던 이한열은 이튿날 열릴 국민대회에 출정하기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하고 연세대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가운데 경찰이 직사한 SY-44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유언은 “내일 시청에 가야 하는데…….”였고, 바로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뇌손상으로 말미암은 심폐 기능 정지로 7월 5일 숨졌다. 향년 22세. 이한열의 장례는 사후 4일만인 7월 9일 100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고 시신은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됐다.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린 채 부축 받고 있는 유명한 사진은 로이터 통신의 특파원이었던 정태원이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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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에 피격당해 피를 흘린 채 부축 받고 있는 이한열 ⓒ 정태원

이한열은 사회 풍자적인 만화를 그리는 연세대 교내 동아리였던 ‘만화사랑’에 가입해 활동한 바 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한열기념사업회에서 <이한열 만화상>을 제정해 2012년부터 카툰·만평과 이야기만화 두 부문에 걸쳐 응모작을 받았다. 수상작은 이한열의 유족이 받은 배상금과 국민 모금으로 설립된 이한열기념관(서울특별시 마포구 노고산동 54-38)에 전시됐다. 촌철살인으로 유명한 네 칸 시사만화 <장도리>의 작가 박순찬이 이 동아리 출신이다.

한편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와 <대한민국 원주민> 등으로 사회 문제를 만화 속에서 묵직하게 다뤄 온 최규석은 1987년 6월항쟁의 과정을 만화로 생생하게 풀어낸 <100도씨>를 2008년 발표했다. 민중이 끓어오르는 온도를 상징하는 <100도씨>는 6월 민주항쟁 계승사업회의 의뢰를 받아 그린 작품이지만, 치밀하면서도 일말의 재미를 놓지 않는 극 구성으로 평범하던 사람들이 왜 어째서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하다 이야기 될 법한 가치’를 쟁취하기 위해 생활은 물론 목숨까지 버려가며 싸웠는지를 ‘기념물’스럽지 않게 그려냈다.

 

 

2. 한국 만화 데이터베이스의 시발지, 신촌
지금이야 인터넷 서점에서 클릭 몇 번이면 만화책이 어떤 출판사에서 언제 얼마만큼 나왔는지 쉬 알 수 있지만 초고속 인터넷이 가정에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1997년 직후에는 그러한 정보를 제공하는 곳이 없었다. 국내 최초로 출간된 만화책을 검색할 수 있었던 데이터베이스는 1998년 무렵부터 운영을 시작한 마니였는데, 그 작업을 진행했던 곳이 신촌의 터줏대감과도 같았던 만화방 ‘연세랑’이었다.

마니는 본래 김일수가 개인적으로 받은 요청에 따라 그날그날 출간된 만화 목록을 작성해 오던 것을 웹 서비스로 확대한 것이다. 연세랑이 들여오는 만화를 기반으로 하여 당시로서는 전수조사에 준하는 신뢰도로 만화 출간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 특징이다.

마니는 해당 시기 초고속 인터넷망 초창기 만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여서, 사설 사이트이면서도 동시에 한동안 공식적인 만화 데이터베이스로서의 역할을 해 왔다. 1998년부터는 일반 이용자들의 참여가 늘어나며 초고속 인터넷 가정 보급 초창기 만화 정보 커뮤니티의 역할을 해냈다.

이후 김일수는 부천만화정보센터(훗날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실무협의위원으로도 활동하며 만화 통계 연감 작업 등에도 참여했고, 2003년에는 낙후된 만화 유통을 전산화하고 자동화하기 위한 회사인 (주)만화정보를 정부지원과 업계 투자를 통해 설립했다. 이 시기 (주)만화정보의 사무실도 신촌의 연세랑 점포 가운데 한 곳에 있었으며, 만화 독자 시민운동의 정수라 할 수 있었던 독자만화대상의 회의가 2003년 무렵부터 이 (주)만화정보 사무실 한 켠에서 종종 열린 바 있다. 이 사무실의 주소는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13-33.

안타깝게도 (주)만화정보는 본래 목표였던 유통 전산화와 자동화는 이뤄내지 못한 채 좌절했다. 좌절 이후 연세랑은 문을 닫았고 마니에 쌓여 있던 신간 데이터베이스는 현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홈페이지로 이전돼 있다. 비록 성공 사례를 만들어내진 못했지만 김일수의 마니는 이 시기 우리나라 만화계에 데이터베이스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첫 사례였으며, 만화계에서 비로소 ‘데이터에 기초해’ 말하고 논쟁할 수 있는 게 있음을 알려준 첫 사례기도 하다.

 

Mani 사이트를 담당하고 있는 C&N(Cartoon & Network) 운영자 김일수 입니다.

먼저, 저희 Mani (Manhwa + Animation)사이트에 방문해 주신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존재의 이유…
우리 만화는 예전에는 밀물처럼 유입되는 일본, 대만 등의 만화의 높은 파도 속에서 언제 실종되어 버릴지도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몰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떳떳한 자생력을 갖추고 혁신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이제 국내 만화시장은 외국 작품에 잠식되는 것이 아니라 국내외 만화 시장에서 확고히 자리 매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에서 만화는, 사회 저변 문화(文化)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천대를 받아왔습니다. 업계 내부적으로는 수십 년 간 이어져 온 낙후된 유통구조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게다가 인터넷과 각종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하는 현실과는 무관하게 만화와 관련된 체계적인 데이터 베이스 또한 전무한 실정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진 젊은이들이 신념을 갖고 한데 뭉쳤습니다.

 

■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사이트는 국내에 정식으로 출시되는 “출판 만화 관련 정보”를 소개하여 만화 출판/유통의 체계적인 발전을 포함한 전체 만화 시장의 건전한 발전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국내 출판되고 있는 “정품” 만화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를 지속적으로 소개하며, 국내 작가들의 작품은 물론 번역되어 출시되는 해외 작품들도 포괄합니다. 다만 불법적인 경로를 통해 출시되는 해적판은 제외합니다. 출판사에서 출시되는 작품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하는 많은 독자들을 위해 매일 출시되는 만화의 전체 목록을 소개하며, 그중 일부 작품은 자체적으로 작성한 짤막한 글과 함께 소개합니다.
또한 매일 제공되는 신간만화 정보 외에 이미 출시된 만화의 정보를 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저희 사이트의 자료가 체계 있게 정리된 데이터베이스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있습니다.
차후 계획으로는 만화와 관련된 중요한 소식/자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제공할 것이며 연재를 원하는 국내 작가를 발굴하여 저희 사이트에 직접 연재도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용자 여러분이 참여할 수 있는 여러 코너들을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 이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사이트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내 만화 시장의 활성화”입니다. 저희의 바램대로 많은 독자들이 본 사이트의 정보를 활용하여 만화책을 “빌려”보지 않고 “구입”해서 보게 된다면, 건전한 유통과 소비가 이루어져서 작가와 출판사들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를 통해 독자나 출판사, 작가, 유통에 종사하는 사람들 모두를 포함한 “한국 만화 업계”가 발전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런 과정 중에 미약하나마 저희의 역할이 도움이 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저희가 바라는 바입니다.
지금 당장은 많은 부분이 부족하지만, 꾸준한 개선을 통해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알차고 유익한 정보의 제공을 위해서 항상 열린 자세로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Site를 이용하시면서 궁금한 점이나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방명록에 적어 주시거나 rinsoo@thrunet.com로 E-mail을 보내주시면 항상 기쁘게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찬휘

만화 칼럼니스트이자 만화정보저널 사이트 '만화인' (http://manhwain.com) 운영자. 글쓰기와 만화를 좋아하던 프로그래머 지망생이었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만화와 얽힌 글을 쓰면서 만화 정보를 묶어내는 컴퓨터 프로그램들을 짜고 있다. 자생한 1.5~2세대 한국형 오덕으로 덕업일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내츄럴 본 프리랜서. 칼럼, 연구, 비평, 강의, 방송, 캘리그라피 등 만화와 관련해서는 오는 의뢰 안 막는 자판기형 용병의 삶을 구가 중이다. 최근엔 열심히 애 아빠로 클래스 체인지 시도 중. 봄이야, 힘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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