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소녀를 만나다_ <고교 약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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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토끼를 쫓다가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앨리스는 현실 세계로 돌아오기까지 색다른 모험을 한다. 그렇게 모험을 끝내고 현실로 다시 돌아온 앨리스에게 세상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나한주, 이상한 나라의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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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시작하자마자 여 주인공 나한주를 다른 세계로 보내버린다. 그녀의 모험은 그렇게 시작된다

<고교 약장수!> 속의 주인공 나한주는 앨리스의 모습과 어쩐지 닮은 꼴이다. 방과 후 복도에서 주운 약병을 주인인 장유건에게 돌려주기 위해 뒤를 쫓아가지만 어느새 장유건의 모습은 사라지고 벽이 그녀를 가로막는다. 예전에 경험했던 느낌이라는 기시감이 드는 순간, 주인공은 벽을 넘어 ‘다른 세계’에 이미 도달해 있다. 마치 토끼를 쫓다가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처럼 한주의 공간이동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곳에서 펼쳐지는 그녀의 모험 또한 이상한 나라에서의 앨리스처럼 신기한 일들로 채워져 있다. 앨리스가 가발 쓴 두꺼비나 담배 피우는 애벌레를 만나는 것처럼 한주 역시 계란 모양의 얼굴을 지닌 도령을 만나고 쌍둥이 도깨비도 만난다. 또한, 앨리스가 약을 잘못 먹고 거인이 되었다면, 한주는 유건에게 돌려주려던 약을 자신의 손에 쏟아서 원치 않는 괴력을 지니게 된다.

이처럼 한주의 경험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묘한 접점을 맞추어나간다. 하지만, 토끼를 따라갔다가 이상한 나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 했던 앨리스와 달리 한주는 현실과 ‘다른 세계’를 수시로 넘나든다. 즉, 다시 학교로 돌아와 일상을 보내다가도 유건과 얽히게 되면 현실을 벗어나 그곳으로 향하고는 한다. 게다가 계란도령까지 현실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니, 어쩌면 다른 세계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것일 수도 있겠다. 앨리스는 잠에서 깨어나며 이상한 나라에서 벗어났지만, 이제 현실로 넘어온 다른 세계 속에서 주인공 나한주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장유건, 소년이 소녀를 좋아할 때

한편, 장유건에게 ‘다른 세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세계다. 그곳에서 훌륭한 약사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그에게 현실보다 다른 세계가 더 친숙해 보인다. 반면, 현실세계에서는 누구와도 어울리는 법이 없기 때문에 학급에서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처지다. 그런 그에게 현실세계에서 처음으로 관심을 보여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나한주다. 화이트데이에 반장이 학급 전체에 뿌린 사탕마저 온전히 얻지 못한 유건에게 사탕을 건네준 이가 그녀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무도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유건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준 것 역시 한주였으니, 유건에게 한주가 특별한 존재로 다가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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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에서는 약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남 주인공 장유건.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친구에게 말 한 마디 건네기도 쉽지 않을 만큼 존재감 제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어느 유명한 시의 구절처럼 유건의 이름이 불렸을 때, 그녀는 그에게로 가서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그 때부터 소년에게 소녀의 존재는 예사롭지 않다.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고, 그녀와 편하게 인사도 나눠보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원래 존재감이 없었던 유건이었기에 한주에게 다가서기란 쉽지 않다. 그랬던 그에게 어느 날 한주와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자신만 알고 있는 ‘다른 세계’에 그녀가 넘어온 것이다. 유건으로서는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고, 그녀에게 어떤 도움이라도 주고 싶다. 하지만 왠지 그녀가 자꾸 자신을 불편해하고 거리감을 두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쩐지 소녀가 소년의 진정성을 알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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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주인공이 보여주는 감정은 또래의 친구들과 소통하길 원하는 평범한 10대 소녀, 소년과 다르지 않다.

작품 속에서 한주와 유건은 각각 자신들만의 특별한 능력이 있다. 한주는 사람들에게 있는 고유한 빛을 볼 수 있으며, 유건은 신비한 효능을 지닌 약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능력과 상관없이 그들이 보여주는 감정은 또래의 친구들과 소통하길 원하는 평범한 10대 소녀, 소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에는 평범함과 신비로움이 교차하고 있다.

김성훈

편집, 기획 등 만화와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즐겁게 일하고 있으며, 관련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만화 속 백수이야기>, <한국 만화비평의 선구자들>, <한국 만화비평의 쟁점>, <한국만화 미디어믹스의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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