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질문에 대한 만화의 대응, <그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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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용과 그의 세계
박흥용은 우리 시대 대표적인 만화 ‘작가’이다. 그가 창조해낸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우리들은 글과 이미지의 화학적 결합을 특징으로 하는 만화가 어떻게 최고의 예술성에 다가갈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걸작 이후 우리들은 박흥용의 작품에 대해 만화에게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기대를 가지고 대해 왔다. 박흥용 작가는 <내 파란 세이버>, <호두나무 왼쪽 길로> 등에서 그 기대에 나름 값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역사물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스포츠 장르 <내 파란 세이버>, 로드물 <호두나무 왼쪽 길로>로 장르가 확장되고 이야기의 호흡이 길어졌지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담겨있던 문제의식, 치열한 형식적 실험과 완성도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러니 그를 사랑하는 독자들은 가장 박흥용다운 작품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가장 최근에 그는 <영년>이라는 작품으로 그다운 작품을 선보이는 듯 보였으나 1권을 낸 이후에 작품의 맥이 끊겨버렸다. 아르코 미술관에서 그의 작가주의를 높이 상찬하여 작품전을 가지기까지 했지만, 그 이후 이렇다 할 작품이 나오지 않으면서, 흔치 않은 만화계의 작가주의 작품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잖이 실망스러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면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피는 중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작품을 발견하게 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이후 그의 이력 속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이 될 뻔한 작품, 그것이 바로 <그의 나라>이다. <그의 나라>는 <영챔프>라는 청소년 만화잡지에 실렸던 작품으로 작품의 밀도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비해 다소 떨어지지만 그 안에 담고 있는 세계관과 서사의 흐름에서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던 작품이다. 작품의 밀도가 떨어지는 것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만화이기 때문에 작가가 의식적으로 창작의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나이 어린 친구들이라는 걸 감안해서 텍스트 위주보다는, 이미지 위주로 작업”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니 텍스트에서 줄 수 있는 밀도는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보다 심오한 메시지를 담는 방식으로 진일보한 만화 세계를 보여줄 수 있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잡지사의 사정으로 단행본 네 권을 발행하고는 더 이상 발간할 수 없었던 불운한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나라>를 살펴보는 것은 박흥용이 어떻게 자기의 작품을 새로운 경지로 끌고 가려 했는지를 파악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이런 작품이기에 <크리틱엠>에서는 그 작품을 ‘저주받은 걸작’ 코너에 올리자고 제안했다. <그의 나라>가 매우 가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에는 이의가 없으나, 그것을 저주 받은 걸작으로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완성되지 않은 작품에 걸작의 칭호를 붙일 수 있느냐는 점 때문이다. 미완성 작품은 걸작이 될 가능성을 품은 작품이지, 걸작일 수는 없다. 아직 그려지지 않은 서사의 뒷부분이 어떻게 표현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나라>는 저주받은 걸작이라기보다는 ‘걸작이 될 뻔한 저주 받은 작품’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합당하다. 그러니 이 글은 <그의 나라>가 저주받은 걸작이라는 것을 밝히기보다는 왜 저주 받은 걸작이 될 가능성이 높았을까를 밝히는 글이 될 것이다.

 

어째서, 걸작이 될 뻔했던 ‘저주 받은 작품’ 인가?
무엇을 <그의 나라>가 걸작이 될 가능성으로 꼽을 수 있을까. 그 실마리는 이 작품을 ‘성경의 메타포’로 창작하겠다던 그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1)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며, 서양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텍스트를 원천으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장대한 기획의 작품이 <그의 나라>이다. 왜 하필 성경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이야기를 만드는 원리와 상징의 활용 등을 성경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물여덟, 스물아홉 무렵에 어떻게 하면 더 작품을 잘 그려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니코스 카자니차키스의 <예수의 마지막 유혹> 같은 것들이 영화로 만들어졌고 <신의 아그네스> 같은 연극도 했었고 그런 걸 보게 될 기회가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야기가 입체적인 겁니다. 저처럼 단순하게 무엇을 표현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고, 이야기가 두텁게 입체적으로 만져지는 거예요. 그런 것에 관심을 갖다보니까 세계적인 문호들이 성경의 언저리에서 놀았더군요. 환경이 그랬더라고요. 그리고 선배로부터 ‘성경은 필독서다’, ‘교과서처럼 한 번 봐라’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때 성경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장치를 구체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죠. 그전에도 그런 작업을 해왔지만 조금 더 깊이 있게 내포되면서, 어려운 느낌이 들지 않는 그런 방법까지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긴 호흡을 가진 이야기들을 찾기 시작한 것 같아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나 <내 파란 세이버>를 그 후에 작업했습니다.”(2)

그는 성경에 기초한 작품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짜는 방식을 배웠다. 그리고 성경 자체에서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을 터득했다. 그것이 내면화되어 작품으로 승화된 것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나 <내 파란 세이버>였고, 아예 성경을 메시지로 삼아 작품에 도전한 것이 <그의 나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그의 나라>는 성경에서 이야기 방법론만이 아니라 메시지 자체를 끌어온 그의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신과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매우 근본적인 질문과 대답이다. <그의 나라>는 바로 그런 심오한 메시지에 도전한 작품이다.

박흥용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서 메시지의 설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스스로 밝힌 이야기 방법론에서 메시지의 중요성을 이미 설파한 적이 있다.

“이야기를 끌고 나갈 때 내가 지금 옳은 방향으로, 제대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가를 알려면 목표물이 있어야 돼요. 그것이 메시지에요. 메시지를 설정해 놓고 이야기를 짜다 보면, 메시지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측정할 수 있습니다. 메시지를 먼저 잡아놓고 그 메시지로 독자를 끌어가도록 로드맵을 설정해요. 이야기의 줄거리를 잡습니다. 줄거리까지 잡아놓으면 필요한 인물이 누구고 어떤 연령대인지 설정이 돼요. 어떤 경우는 캐릭터를 먼저 잡고 그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한 이야기를 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메시지가 있고 로드맵, 즉 이야기 줄거리가 있고, 그리고 그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한 인물들 또는 사건들을 찾아요.
그걸 전봇대라고 표현한 적이 있어요. 인물을 몇 명을 세워야 이 이야기가 버겁지 않게 흘러가겠다는 걸 정하는 거예요. 필요 이상으로 인물이 많아서 메시지를 끌어가는데 산만해서는 안 되고 너무 적어서 스토리가 허전해 보여도 안 되고, 이런 배열들을 하게 되는데 이걸 전봇대에 비교한 거예요. 전봇대를 세울 때 바람에 따라 버틸 수 있는 힘을 감안해서 간격을 계산해서 세운다고 합니다. 이 간격을 ‘이도’라고 하더군요. 너무 촘촘히 세우면 경제적으로 손해고 너무 멀리 세우면 자연환경에 못 이겨내고요. 그래서 적당한 간격을 계산해서 세워야 하는데, 스토리도 똑같아요. 인물 배치를 너무 많이 하면 이야기가 산만해질 수 있고 너무 멀면 이야기의 맥락이 끊어질 수가 있어요. 그 적당한 간격을 찾아 캐릭터를 배치합니다. 사건도 마찬가지예요. 사건이 잦으면 사건 때문에 이야기가 흐려집니다. 또 이야기가 너무 단조롭다면 새로운, 성격이 다른 이야기를 넣어 봐요.” (3)

결국 <그의 나라>는 메시지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박흥용의 입장에서, 자기에게 결정적 도움을 주었던 성경의 메시지를 중심에 놓고 인물과 사건을 잡아나간 작품이다. 그렇기에 <그의 나라>는 성경을 박흥용 식으로 다시 쓰는 작업이었고, 성경이 담고 있는 신학적 질문에 대한 만화적 대응이었다. 구원의 문제를 끈질기게 질문하는 성경이 그렇듯, 당연히 <그의 나라>는 구원의 문제를 계속 파고든다. 그러니 <그의 나라>를 ‘성경의 메타포’라고 한 그의 말은 스스로의 작업에 대한 매우 정확한 표현이다.

구원의 신학적 질문이 <그의 나라>의 메시지일 때,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인물과 사건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구원을 찾아 나서는 인물로 작가가 선택한 사람은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이다. 이 작품이 청소년 대상 잡지에 연재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린이에 가깝게 순수하면서도 어른의 속성을 담은 청소년이야말로, 그 이중성으로 구원을 찾아야 하는 인간을 대표하기에 적합하다. 그 이중성을 박흥용은 이미지로 잘 그려냈다. 주인공은 고성오광대 탈춤에 등장하는 홍백양반탈처럼 얼굴의 반쪽만 햇볕에 그을린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별명이 ‘쌍판’이다.(4) 얼굴이 나뉜 것처럼 그의 자아도 종종 분열하여 두 가지 의견으로 나누어지며 갈등한다.(그림 1 참조) 이는 인간이 지닌 분열성, 자아의 이중성을 표현하는 만화적 방법론이다. 그가 이 이중성을 어떻게 넘어서는가, 이것이 기본적인 인물 층위의 질문이 된다.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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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된 자아, 자아의 이중성

상범을 ‘쌍판’으로 만든 사람은 학교의 ‘섹시한 여자 미술 선생님’이다. 실수로 얼굴 반쪽만 타버린 상범에게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그 모습으로 지내라고 말한다. 상범의 분열을 이끈 사람이 바로 그 여선생이다. 그러면서 선물로 자신의 스카프를 건넨다. 후에 쌍판의 무의식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 여선생은 창세기 속에서 아담을 유혹하는 하와를 떠올리게 한다. 그녀가 건네는 스카프는 그들을 실낙원하게 만든 뱀이 치환된 경우이다. 도입부에서 <그의 나라>는 아담과 하와의 모티프를 활용한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나라>가 성경의 메타포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쌍판은 이 스카프 때문에 수학여행 가던 배에서 떨어져 무인도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절해고도의 유일한 존재라는 점에서 그는 아담과 다를 바 없다.(그림 2 참조) 실제로 그 섬에서 주인공은 종종 알몸의 존재로, 추방 이전의 에덴동산에 살던 존재처럼 살아간다. 거기서 쌍판은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 삶을 성찰하게 된다.

성경 속 태초의 공간을 비틀어 창조한 만화 속 공간은 쌍판을 훈련시키는, 모험을 떠나는 주인공으로 단련시키는 공간으로도 기능한다. 신화학자 조셉 켐벨이 말하는 성장의 1단계인 관문이다. 주인공이 모험을 감당할 만한 존재로 변화하지 않으면 출발하자마자 좌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무인도에서 쌍판은 자연을 활용할 줄 알게 되고, 불우한 환경을 이겨낼 육체를 단련시키고, 무엇보다 모험을 이겨낼 무기로서 물매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다. 여기서 훈련한 물매는 바깥세상에서 살아갈 때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002
벌거벗은 몸, 아담

무인도는 몸이 자라는 공간일 뿐 아니라, 쌍판의 정신도 자라는 곳이다. 무인도에 고립되어 있던 3년 반 동안 쌍판은 성경을 7번 읽는다. 성경을 읽으면서 쌍판은 신학적 질문, 즉 존재의 근원과 구원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접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독서가 쌍판을 이후 모험에서 만나게 될 상황과 사람들을 해석하고 대응하게 하는 기반이 된다.

또 쌍판이 읽는 성경은 이후 전개될 서사의 흐름을 예견하는 역할도 한다. 처음 무인도에 도착했을 때 쌍판은 불을 피우기 위해 가져온 성경의 일부분을 불쏘시개로 써버린다. 그 부분은 요한계시록 6장부터 19장이다. 성경을 7번 독파하는 동안 주인공은 그 부분을 읽을 수가 없었다. 쌍판은 그 부분의 내용이 너무나 궁금해진다. 살만 해진 무인도에서 탈출하는 결정적 계기도 그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설정은 무인도 탈출 이후의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의 망실된 부분에 근거해서 진행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의 나라>는 전체적으로 성경의 알레고리를 활용할 것이지만, 스토리라인은 요한계시록에 근거하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요한계시록 6장에서 19장까지의 내용은 인류 최후의 순간의 재난과 하나님 주권의 회복에 대한 것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곱 천사가 일곱 재난을 몰고 온다. 그 재난에서 인치심을 받은(선택받은) 십사만 사천 명이 살아남는다.(5) 그들을 제외한 모든 제국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된다.” 이때의 재난은 전쟁과 흉년과 기아 등으로 구성된다. 이것에 근거해서 본다면 <그의 나라>가 완성되었을 경우, 일곱 개의 재난을 중심으로, 혹은 일곱 번의 극심한 모험을 중심으로 그 스토리라인이 구획되었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메시지가 성경이고, 거기서 비롯한 인물이 쌍판이고, 이제 사건들은 성경의 재난들로 채워질 것이다.

실제로 <그의 나라>의 이야기는 그렇게 진행된다. 뭍으로 나간 쌍판이 만난 것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반도이다. 이스라엘과 아랍의 전쟁은 세계 3차 대전으로 확전 되었고, 우리나라는 중국과 미국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온갖 피해를 입고 거의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 쌍판이 3년 반 동안 무인도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동안 요한계시록 상의 재난이 현실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3년 반이라는 시간이 절묘하다. 폐허가 되는 시간이 3년 반이고, <그의 나라>에는 곳곳에서 3년 반이라는 시간을 만날 수 있다. 왜일까? 작가가 계시록의 전통을 따르기 때문이다. 계시록에는 3년 반이라는 시간이 재앙의 숫자로 나타난다. 3과 절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길한 숫자로 여기는 7의 절반이기 때문에, 미완성을 대표하는 숫자로서 유대 문화에서 매우 회피한다. 그 불길한 숫자만큼의 세월이 지나자 세상은 재난 속으로 들어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박흥용 작가의 성경 알레고리가 매우 섬세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재난은 이미 세상 복판으로 들어와 있다. 그렇다면 그 재난은 어떤 것일까. 아마 박흥용 작가가 <그의 나라>를 완성했더라면 그것은 7개의 재난적 사건 혹은 재난적 장소나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4권으로 남은 작품 속에서는 쌍판이 인간적 면모를 잃어버린 여러 집단들을 만나며, 그들을 돌파해나가는 구조로 진행된다. 마치 <은하철도 999>의 철이가 여러 행성에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며 모험을 해나가듯이 말이다. 처음에는 기름과 물을 놓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집단들을 만나고, 그 이후에는 먹을 것 때문에 서로를 죽이는 것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다.

재난의 고통 속으로 점차 빠져들던 주인공의 모험이 본격화되는 것은 한 아이 모세를 만나고나서부터다. 모세,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도 유대민족을 이집트로 구원해 낸 사람의 이 이름만큼은 기억한다. 작가는 친절하게도 이 모세의 의미를 독자들에게 되새겨주기 위해서 구약의 내용을 축약하여 설명해준다. 3권 중반 이후와 4권 초반이 출애굽 이전의 구약을 요약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사실 성경의 구약 중 가장 먼저 쓰인 것은 출애굽기이다. 이집트를 탈출하는 것이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는 가장 중대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한 번 구원받았던 그 기억으로 이후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의 나라>가 성경의 메타포라고 한다면 재난으로부터의 구원은 출애굽을 다시 쓰는 것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주인공이 모세라는 아이를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런데 4권에 이르러서야 모세를 만났고 모세가 소속된 집단을 만난다. 이는 4권에 이르러서 박흥용식 출애굽기, 재난에서의 구원 이야기가 본격화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만화 속에서 모세는 아직 취학 이전의 아이처럼 묘사된다. 그런데 그의 등 뒤에는 아이의 아버지가 경작했다는, 모세가 속한 공동체가 3년 반 동안 버틸 수 있는 식량이 있는 장소를 상징하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성경에 묘사된 것처럼 삶을 재생할 수 있는 가나안 땅의 지도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모세 등 뒤에 새겨진 문신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공동체의 장로 한 사람뿐이다. 그런데 그 장로가 그만 동료들의 배신으로 살해당하게 되고, 하필 장소의 비밀을 주인공인 쌍판이 듣게 된다. 이것은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구세대는 들어가지 못하고 새로운 세대만 들어가게 된다고 되어 있는 것의 박흥용다운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파괴 이후, 새 문명을 구축할 만큼의 시간을 벌게 해주는 식량이 있는 곳은 낡은 사고의, 재난 이전의 사고를 가진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 재난으로부터 떨어져 있던 쌍판과 아직 자라지 않은 순수한 존재 모세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제 모세를 데리고 진정한 출애굽기를 써나가는 쌍판의 모험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야기가 끝나고 만다. 박흥용이 재창조할 출애굽기의 실상은 이천년 대 초반 이 만화의 연재가 끝난 다음 아직까지도 독자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막 박진감 넘치는 탈출과 구원의 이야기가 펼쳐져야 할 텐데,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의 상승이 이어질 텐데, 이야기는 멈춰 있다. 이 이후의 장쾌한 이야기가 지속되리라는 것은 쌍판이 무인도에 있을 때의 상상에서 이미 예견된 바 있다. 무인도에 갇힌 쌍판은 바다가 마치 출애굽 당시의 홍해가 갈라지듯이 갈라지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림 3 참조) 바로 홍해가 갈라지듯이 모세 집단을 만난 쌍판의 이야기는 박흥용식 구원을 향해 힘차게 나아갔으리라고 본다.

003
출애굽, 갈라지는 홍해

바로 그런 본격적인 이야기로 상승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나라>는 비극적이다. 성경이 담고 있는 구원의 메시지를 끌어와 그것을 본격화하기 직전에, 한 줄기 가능성으로 만화는 막을 내렸다.

 

미완에서 멈춰버린 장대한 세계
<그의 나라>가 완성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우리는 진지하게 성경을 자기의 이야기 속으로 담아낸 최초의 만화를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박흥용 작가가 스스로 말했듯, 성서에 바탕을 둔 서구의 걸작인 <예수 최후의 날>이나 <신의 아그네스>에 필적하는 토종 이야기가 만화 장르 안에 탄생하게 되었으리라 본다. 그런 점에서 <그의 나라>가 중도에서 마무리되지 못한 것은 더욱 아쉽다.

나아가 <그의 나라>는 심오한 재난 장르 만화로 족적을 남겼을 것이다. 재난을 통해 삶과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작품이 우리 만화 역사에 남았으리라 본다. 4권 이후의 본격적인 출애굽의 과정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박흥용만의 심도 있는 관점이 담겼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에게 출애굽 이후는 헐리우드 식의 해피엔딩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보는 삶과 재난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사실 터놓고 말하면 삶은 재난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재난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이런 얘기를 후배들에게 즐겨해요. 어느 신학자가 한 얘기일 겁니다. 큰 웅덩이가 있습니다. 어쩌다가 발을 잘못 디뎌서 떨어졌는데 나뭇가지를 잡았습니다. 버티고 있는데 아래로 악어들이 입을 적적 벌리고 있고, 나뭇가지를 잡고 있는데 그 뿌리를 쥐가 갉아먹고 있는 거예요. 한편 나뭇잎에는 벌들이 꿀집을 만들어놓아서 꿀이 떨어지는 거죠. 놀랍게도 한 방울의 꿀을 받아먹으며 잠깐의 위안을 얻게 됩니다. 즉, 그 잠시의 미각이 지닌 즐거움 때문에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모두 잊게 되는, 이것이 삶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현존하는 위치는 자기 자신을 건져낼 수 없는 상태이지만 처해진 환경을 잊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강둑에 서 있으면 무엇이 떠내려가나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강물에 빠진 사람은 무엇이 떠내려 오는지, 붙잡아 의지할 무엇이 있는지 살피게 되어있어요. 모든 사람이 강둑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강물에 빠져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작품에 보이니까 구도적이라고 하는 것 같아요.” (6)

성경을 보면 출애굽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의 구원을 믿지 못하고 황금 송아지로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늘 구원 뒤에 다시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박흥용의 구도적 마인드에서 보면 삶 자체가 재난이니, 박흥용의 비관적 세계관을 볼 때, 출애굽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그려졌을지 짐작이 간다. 세계는 다시 파괴로 향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나라>에 등장한 고립에 대한 이미지가 새롭게 다가온다. 무인도에 처음 갇혔을 때 쌍판이 느꼈을 재난 상황에서의 고립감은 수많은 새들에게 둘러싸인 무서운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마치 히치콕의 영화 <새>를 연상시키는 이 장면에서 수많은 생명체들이 오히려 주인공을 위협하는 존재처럼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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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서의 고립

그런데 이 장면은 쌍판이 뭍으로 나와서 이제 화폐가 아무 의미가 없게 된 은행 안에서 돈다발이 날리는 가운데 고립감을 느끼는 장면으로 그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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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에서의 고립

그리고 끝내 이 고립감의 이미지는, 만약 이 작품이 지속되었더라면, 그 마지막을 장식하지 않을까 싶다. 출애굽의 순간보다 출애굽 후의 좌절에 주목할 것 같은 박흥용의 세계관에 기대어 보면 그렇다. 성경이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담는 최초의 만화, 재난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만화가 될 것이었으나, 인간은 삶 자체가 재난이라는 세계관을 담아낼 것이었다면, 아마도 작품에서 희망을 보려는 대중들과 세상의 저주를 받았을 것이다. 결국 <그의 나라>는 연재를 마치고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정말로 ‘저주받은 걸작’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리라 짐작한다. 아마 이것이 상황이 바뀐 다음에도 박흥용 작가가 이 작품을 끝내 완성하지 않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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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인하 인터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 <박흥용 만화: 펜 아래 운율, 길 위의 서사>, 아르코 미술관, 2014, p. 131.

2) ‘작가 인터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 <박흥용 만화: 펜 아래 운율, 길 위의 서사>, 아르코 미술관, 2014, p. 123.

3) 위의 작가 인터뷰, p. 123.

4) 쌍판이 별명인 주인공의 이름인 ‘박상범’이 등장하는 것은 4권에 이르러서이다. 자기 집안으로 이루어진 집성촌에 도달했을 때에야 이름이 드러나는데, 그만큼 이름은 전체 이야기 구조에서 별 필요가 없고, 쌍판이라는 별명이 더 중요한 셈이다.

5) 십사만 사천 명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와 민족들과 연과나여 충만을 나타내는 12와 하나님 영역에 속하는 완전수 1,000이 결합한 숫자다. 셀 수 없이 많은 백성이 하느님의 구원을 얻을 것임을 상징적으로 표시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p. 1363)

6) 앞의 인터뷰, p. 137.

 

최민성

문익환과 장준하가 몸담았던 한신대학교에 재직 중. 2016년에 새로 출발하는 한중문화산업대학 한중문화콘텐츠학과를 열심히 꾸려갈 희망에 부풀어 있다. 스토리텔링과 미디어를 전공했다. 모든 미디어에 관심이 많다. 만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초등학교 때는 만화책 콜렉터로, 그 이후로는 만화방 키즈로 자라왔다. 그래서인지 [멀티미디어 시대의 시적 이미지]라는 박사학위 논문에 만화가 한 챕터를 차지한다. 항상 변방의 상상력으로 살아가려고 애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삶 자체가 변방인 듯도 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변방만이 가지는 창조적 기운을 내뿜어보려고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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