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32분의 1>: 흐릿한 서사 위에 채색된 선명한 감정의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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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탄생’의 기획으로 ‘오곡’ 작가의 <그녀와 32분의 1> 원고를 의뢰받았다. 이 경우 작가의 활동부터 작품 분석까지 보다 입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선 오곡 작가의 ‘활동’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작가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에 흩어진 정보를 하나씩 취합하다 보니 다음과 같은 작가 경력이 그려졌다. 오곡 작가는 처음 2007년 ‘네이버 베스트 도전’에서 <엘레프>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2009년에는 다음에서 <To From>으로 데뷔한 후 <나태한 어금니>, <순정 큐피드>를 차례로 발표했다. 이후 오곡 작가는 웹툰 작가로서는 다소 특이하게 만화 잡지 ‘이슈’에서 단편을 연재하다 2014년에 <그녀와 32분의 1>로 다시 웹툰으로 복귀한다.

‘작가의 탄생’은 작가론과 작품론 모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획이다. 작품 분석을 할 경우 작가의 특성도 동시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방법론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데, 이 글에서는 <그녀와 32분의 1>을 종적인 측면과 횡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접근하고자 한다. 우선 횡적인 측면에서 장르 분석을 하고자 한다. 장르 관습의 사용 방식은 곧 작가의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먼저 학교 만화 장르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 후, 학원만화 장르의 지평에서 <그녀와 32분의 1>의 위치를 알아보겠다. 그리고 종적인 측면에서는 <그녀와 32분의 1>과 작가의 이전 작품을 비교분석 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작품의 변화 과정을 추적해보고 이를 통해 작품 사이의 관계 그리고 작가의 특성을 살펴보겠다.

 

학원만화, <그녀와 32분의 1>
<그녀와 32분의 1>은 여교사 민영과 1학년 3반 학생들의 이야기다. 작품 소개에서는 장르를 코믹, 순정으로 분류했지만, 이 작품의 주요 인물들이 교사와 학생이라는 점 그리고 이야기의 사건이 학교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 만화의 장르는 ‘학원만화’로 불리는 것이 보다 적절하겠다.

학원만화 장르를 구성하는 두 개의 큰 축은 ‘교사’와 ‘학생’이다. 학교는 기본적으로 교육 공간으로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학원만화는 교사와 학생 중 어디에 무게중심을 놓느냐에 따라 작품 성격이 결정된다. 우선 교사에 초점을 맞춰보자. 이 경우 90년대에 연재한 <굿모닝 티처>처럼 교사가 무기력한 교육 현실에서 희망을 이끌어내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한편 교사 개인을 확장시켜 학교 시스템을 서사 중심에 놓을 수 있는데, 이 경우 학교는 끊임없이 사건을 만들어내고, 학생들은 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서사가 전개된다. 가령 <웃지 않는 개그반>의 경우 학교 교칙으로 인해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한편 이러한 유형의 만화는 사회 비판 요소와 결합되기 유용한데, <입시명문 사립 정글고>에서는 정글고의 모습을 통해 과열된 입시 경쟁과 서열화된 교육구조를 비판한다.

다음으로 학생에 초점을 맞춘 경우다. 학생 중심 학원만화에서는 교사의 비중이 낮으며 그들은 보통 학생들을 돕는 보조적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학생들은 교사와 대조적으로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이며 또한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심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평범한 8반>의 경우 전형적인 학생 중심의 학원 만화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문을 통과할 수 없을 만큼 큰 머리를 가진 주인공, 몸 크기가 손가락만큼 작아 필통에서도 잠을 잘 수 있는 학생, 길게 늘어진 팔을 쉴 새 없이 휘두르는 학생 등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정상에서 벗어난 학생들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용이한데, <평범한 8반>의 학생들 역시 끊임없이 사건을 발생시킨다.

여기까지가 학원만화 장르의 간략한 정의였다. 그렇다면 <그녀와 32분 1>은 학원만화 장르에서 어느 지점에 위치할까? 우선 <그녀와 32분의 1>의 전반부를 살펴보자. 이 작품은 담임교사를 맡게 되는 첫날, 주인공 민영이 꿈에서 깨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꿈에서 그녀의 친구 ‘채연주’는 “너 같은 년은 절대 교사가 될 수 없어.”라고 말하며, 앞으로 이 작품의 서사를 움직일 근본적인 주제 의식을 던진다.

교사 민영은 이 꿈이 불안하다. 그리고 예감은 곧 현실이 된다. 그녀는 학교를 가는 도중 자신의 반 학생들을 미리 만나게 된 것이다. 습관적으로 소매치기를 하는 ‘최형원’, 항상 사고에 휩쓸리는 ‘왕인재’, 조선 시대 여성이 입는 장옷을 걸치고 다니는 ‘서향단’까지. 하지만 이것은 그녀가 앞으로 본격적으로 겪게 될 시련의 시작에 불과하다. 학교의 나머지 학생들 역시 평범한 학생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학생들과 상담 후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특이한 아이들이 몇 명 있는게 아니라, 아마도 반 아이들 모두가 범인(凡人)은 아닌 것 같아.”라고.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상황에 좌절하지 않는다. 그녀는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누구도 포기하지 않고 1학년 3반을 이끌어 나간다.

지금까지의 설정을 살펴보면 <그녀와 32분의 1>은 교사 민영을 통해 이상적인 교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녀는 소매치기를 하던 학생 최영원을 타이르면서 이렇게 말한다. “반 아이들 한 명, 한 명 누구도 소홀히 하지 않는 선생님이 되겠다고. 난 너희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녀와 32분의 1>은 이렇게 교사 중심의 학원 만화이다. 하지만 교사 민영은 이야기 중반을 지나면서 서사를 이끌어 갈 만큼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녀는 학생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그것을 해결하길 바란다. 하지만 “선생님이 뭐든 다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라는 학생의 말처럼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 이 같은 민영의 제한적 역할은 학교 현실의 반영일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이야기 초반에 제시되었던 주제 ‘민영이 과연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는가?’를 작품 끝까지 일관성 있게 유지하지 못하고, 이야기의 주도권을 학생들에게 넘겨줘 버린데 있다. 그 결과 <그녀와 32분의 1>은 후반부로 진행될수록 교사 민영에게서 벗어난 학생들만의 개인 에피소드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교사 중심의 만화라고 해서 학생들의 다양한 에피소드가 존재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각 학생의 행동들은 궁극적으로 교사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완결된 행동’으로 수렴해야 한다. 그래야만 각 에피소드들이 서사에 무게를 더해주면서 작품 주제를 명확하게 만들 수 있다.

<그녀와 32분의 1>의 느슨한 이야기 구조는 민영과 그녀의 친구 ‘채연주’와 갈등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담임 첫날 민영의 꿈이 상징하듯 그녀는 이 작품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원래 민영과 채연주는 고등학교 시절 친한 친구 사이였다. 하지만 채연주의 오해로 두 사람의 우정은 깨져 버린다. 졸업 후 그들은 교사가 되어 다시 학교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때 채연주는 마치 작품의 주제를 상기시키듯, “3반 담임하기가 어렵지 않으세요?”라고 민영에게 지속적으로 묻는다. 게다가 이야기 후반에는 민영의 반에 특이한 학생들이 모이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님이 밝혀진다. 학교 이사장 손녀인 채연주가 복수심에 3반의 학생 배치를 조작한 것이다. 결국 이야기 전체 사건이 ‘민영’과 ‘채연주’의 갈등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32분의 1>은 두 사람의 갈등을 급작스레 마무리 해버린다. 우선 3반의 학생들은 채연주의 약점을 만들어 아무 어려움 없이 그녀를 학교에서 떠나게 만든다. 그리고 민영과 채연주의 두 사람의 갈등은 민영의 사과로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 같이 <그녀와 32분의 1>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두 사람의 갈등은 고조시키지만, 정작 마지막 순간에 이 문제를 제대로 풀어 내지 못해 극적인 이야기 구성에 실패한다.

그녀 40화 1

 

느슨한 이야기 구조 VS 정교한 감정 묘사
오곡 작가의 데뷔작 <To From>은 지구와 행성 C-1을 배경으로 한 SF만화다. 여기서 지구인들은 지구에서 C-1으로 이동하는 최단 시간 통로를 개발하여 C-1 행성을 공격한다. <To From>은 이렇게 C-1 행성, 최단 통로 등 흥미로운 SF소재를 가지고 있지만 이 요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야기 초반과 중반 이후가 긴밀하게 엮여 있지가 않아 작품의 통일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 두 인물 ‘췐’과 ‘마르키느’가 보여주는 사랑의 갈구, 어쩌면 병적인 집착이라고 불러야 보다 적절한 이 감정을 작품의 쓸쓸한 분위기 속에 잘 녹여냈다.ToFrom 23화 1
ToFrom 23화 2ToFrom 23화 3

다음 작품 <순정 큐피드>역시 개인의 심리와 감정을 표현하는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사랑에 고민하는 사람들을 돕는 천사 즉, 큐피드에 관한 이야기다. 큐피드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은 주지 못한다. 다만 따뜻한 몇 마디의 조언만을 해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순정 큐피드>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과 그 과정에서 겪게 될 감정을 따뜻하게 그려낸다. 특히 마지막에 순수한 주인공 ‘세일’과 피같이 붉은 머리칼을 가진 ‘리아’와의 비극적 사랑은 후에 큐피드가 된 ‘세일’의 독백에 깊은 여운을 준다. 그는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쓸쓸한 눈빛으로 쳐다보면 이렇게 말한다. “사랑에게 지친 사람들에게 연민을, 그리고 축복을….”

 

큐피드 40화 1큐피드 40화 2

<순정 큐피드>는 에피소드 중심의 구성으로 <To From>에서 노출되었던 서사의 약점을 최소화하고, 오로지 각각의 인물들에만 집중함으로써 작가의 장점을 극대화시킨다. <그녀와 32분의 1>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 위치한 작품이다. 그래서 <그녀와 32분의 1>은 1년 동안의 학교생활을 따라가면서 서사를 단순히 하고, 대신 에피소드 내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은 마치 인물들의 관계를 느슨한 플롯 속에 놓아두면서 인물의 개성과 특징을 강조하는 ‘성격비극’의 구조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마이클 티어노, 스토리텔링의 비밀)

<그녀와 32분의 1>의 교사 ‘민영’과 학생 ‘최형원’의 에피소드에서도 역시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형원은 소풍 중에 소매치기를 하다 민영에게 발각된다. 이 때 민영은 “선생님은 너희들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아. 훔친 이유가 뭔지 말해줄 수 있니?”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최성원에게 과거의 아픈 기억을 떠오르게 만든다. 어렸을 때 그는 모범생 형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소극적인 성격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자존감이 낮은 최형원에게 자신감을 찾아준 사건이 우연히 발생한다. 그는 물건을 훔치고도 혼자서만 걸리지 않자 “나도 잘하는 것이 있어!”라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그는 이 소매치기 능력으로 불량 학생들과도 어울리게 된다. 소풍 다음 날 최형원은 결국 과거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학교를 나오지 않는다. 이에 민영은 학교에 나와 최형원을 찾기 시작하고 결국 그를 발견한다. 결국 최형원은 민영의 따뜻한 사랑에 마음을 열고 그동안 억눌러왔던 과거의 상처를 드러낸다. 그는 소매치기를 한 이유를 말한다. “훔친 돈은 중요한게 아니었어요. …그건 아니었어요.”라고. 이후 두 사람의 특별한 유대감은 작품 내내 이어진다. 후반부 최형원이 과거에 어울리던 불량 학생들 때문에 경찰서에 잡혀갔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최형원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감’과 ‘타인에 예속되지 않은 주체적 삶’을 배우면서 서서히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해 간다. 이 같이 ‘민영’과 ‘최형원’의 에피소드는 최형원의 내면을 파고들면서,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최형원의 모습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녀와 32분의 1> 후기에 오곡 작가는 작품의 제목과 설정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작가는 한 반의 학생 수를 32명으로 설정했지만 실제로는 작품 속에 모든 학생을 담아내지 못했다. 또한 1년 동안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1학년 이후의 이야기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작가의 어려움은 안타깝게도 고스란히 작품의 한계로 나타난다. 마지막까지 오곡 작가를 비판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오곡 작가는 정교한 이야기 구성을 보이지 못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력적인 작가다. 매 작품마다 작가는 인물들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담아내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낸다. 인파 속에서 홀로 멈춰져 버린 ‘췐’, 진화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는 눈매 주름이 한없이 쓸쓸해 보이는 ‘리아’ 그리고 그 밖의 작품 속 많은 인물을 통해서. 오곡작가의 작품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자리를 닮아 있다. 처음에 작가는 오로지 하나의 별을 그려내는데 집중할 뿐이다. 하지만 하늘에 별을 하나씩 하나씩 수 놓다보면, 그 별들은 어느새 하나로 이어져 각각의 사연을 가진 별자리가 되어 밤하늘을 비춘다.

그녀 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