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다른 웃음’이 존재할 수 있을까‘ _ 여성혐오와 <레바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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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을 수 있는 장소
유머는 무성적인 것처럼 보인다. 유머는 그것이 목표하고 있는 단 하나의 반응인 웃음을 이끌어내기 위해 존재한다. 웃음은 차마 숨겨지지 못한 채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웃음 앞에서 모든 질문들은 무력해진다. 이 분명하고 강한 신체적 반응에는 어떤 논리적 설명도 필요하지 않다. 웃음의 원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는 순간 최초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린다. 어깨를 들썩이고 고개를 들어재껴 시원하게 웃기 시작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그가 열광하는 축제에 동참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웃음이 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들어 적과 아군을 구별한다. 때문에 웃음은 필연적으로 선택의 문제를 수반한다. 웃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제 유머라는 미학적 체계와는 분리된 비언어적 반응으로서, 웃음은 사회적인 제스처의 역할을 수행한다. 자연스럽게, 또 자발적으로 웃기 위해 우리는 유머를 학습한다. 함께 웃는 얼굴들은 곧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인다. 이 얼굴들은 친밀하고 익숙한 것이 된다.

‘인간적인’ 얼굴들. 웃음은 당사자의 위치-권력관계, 젠더, 성 정체성 외부에 위치해 작동하는 인간적인 반응으로 간주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웃을 줄 안다. 하지만 문득 웃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자 내가 웃음의 이유였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는 갑작스럽게 ‘우리’에서 내쫓겨 웃을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한다. 어디에도 내가 웃을 수 있는 장소는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처에 이미, 언제나 웃음거리였던 내가 있다. 유머는 더 이상 무성적이지 않다. 무성적이라는 착각이 가능할 뿐이다.

웃음은 이제 유대감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된다. 당신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웃음. 그러나 웃음에 대한 판단이 곧장 윤리적인 태도와 연결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나를 언제나 불유쾌한 타자의 위치로 끌어내리고야 마는 이 웃음들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웃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어떤 유머 속에 내재된 비웃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애써 무시한 채 웃어넘기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배신감과 향수병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설프게 웃는 상황이 지속된다. 나를 향한 웃음들을 비웃음으로 되갚아주는 것조차 그들의 웃음이 도착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권력과 공모하지 않는 유머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히 권력의 위치를 재배치할 수 없다면, 나의 ‘무성적’ 언어에서 내가 탈출할 수 없다면 어떤 것에도 웃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한 윤리적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안전함에는 웃음이 없다. 이제 어떤 웃음이 가능할 것인가?

 

‘병맛 만화’를 본다는 것 – ‘씹선비’가 되지 않기 위해
여성/레즈비언 독자로서 개그 만화를 소비할 때마다 마주치는 곤란함에 대해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나에게도, 여러분에게도 꽤 피곤한 일이 될 것이다. 거슬리는 장면마다 브레이크를 건다면 내가 마음 놓고 볼 수 있는 콘텐츠는 전무해진다. 소위 ‘병맛’ 만화라고 분류되는 일군의 웹툰들을 떠올려보자면 더욱 그러하다.

병맛 만화의 ‘기승전병’이라는 서사적 특징은, 기존의 윤리와 관습을 무정부주의적으로 교란하고 파괴함으로써 해방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병맛이 다루는 소재가 무엇이든 그것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은 탈각되어 단지 표면만이 유희적으로 소비된다(패스티시 – pastiche, 패러디 등의 작품 모방). 다루기 민감하고 위험한 소재일수록 낭비하는 쾌감은 배가 된다. 여기서 도덕적 비판은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상황들이 논리와 인과를 결여한 채 제시되기에, 현실과 유리된 상상적 공간으로서 방어적 지위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결국 ‘만화는 만화일 뿐’ 아닌가. 그런데 이 같은 반사적인 구호가 필요한 이유는, 병맛 만화가 그만큼 현실의 윤리적 질문들과 맞닿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병맛 코드에 웃음으로 반응하기 위해서는 가장 위험하고, 민감하고, 진지한 것들과 자기 자신을 양 극단에 위치시킨 채 납작하게 엎드려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비웃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가장 낮은 곳에 위치시켜야만 한다. 대상과의 거리감은 유머에 있어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병맛은 우리를 가장 아래, 가장 바닥의 위치로 초대한다. 병맛 만화에 대한 진지한 반응이 ‘노잼’을 넘어 ‘씹선비질(유머를 유머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인에게 훈계하는 온라인상의 행동을 일컬음)’이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는 괘씸하게도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이다. ‘씹선비’는 병맛의 세계에서 추방당한다. 다시 한 번, 웃음 앞에서 모든 질문은 무력해진다. 웃는 얼굴들은 일시적으로 ‘우리’로 묶인다.

이 글에서 나는 병맛 코드를 즐기는 사람들과 병맛 자체에 대해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병맛은 분명 아래에서 위로, 거대한 서사-역사를 부정하고 파편화함으로써 모든 종류의 질서와 권력을 전복하는 힘을 가진다. 병맛의 세계에서는 그 어떤 것도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고, 역설적으로 모든 것에 공정한 세계다. 따라서 병맛에서는 성별도 없다. 병맛은 무성적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안타깝게도, 병맛 코드를 소비하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높이의 바닥에 엎드린 채 낄낄거리고 있지는 않다. 병맛 만화는 자연스럽게 헤테로 남성 화자/독자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지 않고서 우리는 웃을 수 없다. 이 일방적인 계약은 언제든 파기될 위기에 놓여 있다. 웃음은 거리두기가 실패하는 순간 멈춘다. 최근 여성 혐오적 표현으로 논란이 된 레진코믹스의 <레바툰>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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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가 되었던 레바툰<Trans(상)>의 한 장면. 현재는 수정되어 있다.

지난 5월 1일자로 업데이트 된 <Trans(상)>편은, 유일한 여성 캐릭터의 멍청함을 묘사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여성 캐릭터가 외계인에게 뺨을 맞은 후 ‘썸을 타러’ 질질 끌려가는 표현 방식의 폭력성이 논란이 되자, 다음 화인 <Trans(하)>편은 간단한 방식으로 스스로의 결백함을 증명한다. 바로 캐릭터의 성별을 상징하는 ‘꽃’을 제거한 것이다. 이제 이 여성 캐릭터는 기본 캐릭터, 즉 남성 캐릭터로 바뀌었다. 때문에 이 캐릭터에게 가해지는 어떤 폭력도 여성 혐오가 아닌 것이다(라고 <레바툰>은 주장한다). 이렇듯 단순한 방식으로 성차에서 오는 권력 구조의 문제를 소각하려드는 시도는 그 유아적 발상으로 인해 실소를 머금게 하지만, 한편으로 안타까운 기분이 들게 했다. 그것은 레바 작가에 대한 동정이라기보다는, 나 스스로를 향한 것에 가까웠다.

이 일이 있기 전 누군가가 내게 익명으로 물었던 “레바 만화의 호모포빅한 면이 불편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간 <레바툰>의 모든 등장인물은 성별이 무시된 상태로 제시됐기에, 웃음이 유발되는 형식, 즉 병맛 코드 자체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그의 만화에서 그토록 비의도적으로 암시된, 그러나 뚜렷한 전조를 무시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내게 있어 병맛 만화를 즐긴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나를 무성적이고 의식 없는 주체의 위치로 옮겨 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시점의 이동 없이 내가 점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표면적으로 ‘읭읭이’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성적인 특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레즈비언 독자로서 나는 이 오래된 기호가 사실은 이성애자 남성을 지시한다는 것을 알지만, 모른 척 하기로 한다. 내가 무엇에도 웃을 수 없다는, 웃어서는 안 된다는 정언명령과 비판적 시선의 스위치를 꺼놓는다. 나는 그 모호한(사실은 남성일) 인물의 자리에 나를 올려 둔다. 이 같은 위치 바꿈은 아주 오래전부터 나에게 익숙한 일종의 습관이며, ‘제2의 천성’과도 같이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레바툰>에서 꽃을 단 캐릭터가 ‘여성’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 동일시의 ‘가면’은 박살나고 만다. 이 웃음은 무성적이지 않고, 이 캐릭터들도 마찬가지다. 나의 위치는 다름 아닌 꽃 단 캐릭터, 즉 병맛의 세계에서조차 손쉽게 혐오의 대상으로 놓이는 ‘여성’임이 폭로된다. 나는 갑자기 끌어내려진다. 웃음들은 나를 둘러싼 채 터져 나온다. 다름 아닌 내가 웃음의 이유인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웃을 수 없게 된다.

 

우리에게 ‘다른 웃음’이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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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서 캡쳐한 댓글들의 일부

분명히 <레바툰>은 무의식적으로 여성 혐오적인 시선을 내재하고 있다. 문제가 된 편에서는 그 시선이 명백하고 가시적인 방식으로 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레바 작가뿐만 아니라 <레바툰>을 옹호하는 대다수의 독자들은 이 같은 비판에 대해 여러 버전의 반박을 내놓았다. “레진 코믹스라는 웹툰 플랫폼에 연재하기 전부터 레바는 ‘원래’ 그랬다”, 혹은 “만화는 만화일 뿐이다”, 혹은 “여자 캐릭터가 맞으면 여성 혐오고 남성 캐릭터가 맞으면 당연한거냐” 등등(이 같은 반응은 내 블로그의 <레바툰>과 관련된 포스팅에 달린 댓글들로부터 추출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씹선비짓 말아라’ 정도일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간 레바 작가가 그려온 만화들에 비해, <레바툰>은 자신의 주특기인 무절제한 폭력성을 새 발의 피 수준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현재 레진코믹스에 연재되는 작품은 추측건대 이미 검열을 거쳐 ‘무난한’ 수위로 조정된 결과물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여성 혐오’라는 라벨을 붙이게 되었으니, 레바 작가로서는 억울함을 넘어 분노스러운 상황이리라.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같은 라벨링에 나 역시 찝찝함을 느끼고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언젠가 레바 작가의 팬이라는 누군가가 내게 “저도 여잔데 별로 기분 안 나쁘던데요?”라는 의견을 보내온 적이 있다. <레바툰>을 둘러싼 페미니즘 담론은 많은 부분 ‘여성’과 ‘<레바툰>’을 대립항으로 설정하기 쉬운 본질주의적인 프레임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도식 아래서 여성 독자가 <레바툰>을 옹호하는 행위는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를 체화한 피학적인 희생자의 자기 옹호로 해석되곤 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여성 혐오적 재현에 익숙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올바름을 견지하는 입장에서, 발화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레즈비언이든 게이든 그 내용이 혐오적이라면 그것은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자신이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사실을 밝힌다고 해서 어떤 재현이 여성 혐오적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는 절대적인 권위를 할당받는 것은 아니다. 바꿔 말해, <레바툰>의 작가가 여성이었다고 해도 실재하는 성차로 인한 위계와 그로 인한 차별과 폭력을 무시한 채 왜곡된 방식의 재현을 시도했다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자신을 ‘여성 독자’로 밝힌 익명의 누군가에게 이 같은 구체적인 맥락을 언급하고 ‘계몽’을 시도하는 대신, 나는 “저도 레바 작가의 팬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자포자기라기보단, 그가 마주하고 또 앞으로도 마주해야 할 딜레마에서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병맛 코드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가 이미 남성 중심적이고 이성애 중심적인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레바툰>을 ‘여성 혐오적’이라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병맛 코드를 즐기는 것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내게 쾌락을 제공하는 모든 형식들은 곧 투쟁의 장소가 된다. ‘여성 혐오적 재현’을 발견하고 대항하는 동안, <레바툰>이 제공했던 카타르시스를 즐길만한 에너지는 모두 소진된다. 여성을 대상화하고, 여성에 대한 비틀린 편견을 강화하고, 여성을 무차별한 폭력의 희생자로 묘사하는 재현에 대해 ‘여성 혐오적’이라는 낙인을 붙이자는 주장은, 여성/레즈비언 독자로서 내가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장소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다.

하나의 재현이 단 하나의 기준-그것이 여성 혐오적인가, 아닌가-에 의해서만 평가될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여성 혐오이고 여성 혐오가 아닌가? 화면에 여성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레바툰>이 비판받는 지점을 피해 가는 작품은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물론 그 가능성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지만, ‘여성 혐오적’이라는 라벨을 붙이는 일이 우선순위가 된다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병크’를 기대하느라 작품에게서 얻어질 수 있는 쾌락을 의도적으로 무시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레바툰>과 같은 ‘병맛 만화’에만 해당되는 논의가 아니다. 물론, (시각)예술은 정치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특정한 대상이 재현될 때,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학적으로 ‘순수한’ 대상이 있을 수 없다는 관점에 동의한다면, ‘만화는 만화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얼마나 순진해빠진 말인가. 하지만 (시각)예술은 각자의 그 소통 양식이 있고, 단순히 이데올로기가 육화된 대상으로 환원될 수 없다. ‘여성 혐오적이다‘와 ’아니다‘와 같은 단순한 평가 기준 하에서 매체와 장르의 물적 속성들은 소거된다.

우리가 쾌락을 얻는 바로 그 장소가 ’여성 혐오적 재현‘이 등장하는 장소와 같다는 사실로 인해, 만화라는 매체를 감상하고 즐기는 문제는 곧 특정한 재현을 ’지지‘하거나 ’금지‘하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축소된다. <레바툰>을 레진코믹스에서 내려야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있어도, 그 같은 재현물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이 같은 금지가 자칫 여성에 대한 모든 종류의 재현을 회피하게 만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레바툰>이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 혐오적인 관점을 드러내고 있고, 뒤틀린 편견으로 뒤범벅되어있다(심지어 그게 재미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게 후진 재현일지언정, 단 하나의 기준에 의해 단순히 금지되기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인가? ‘금지’ 자체는 기획의 목적과는 별개로, (결과적으로) 보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이념들에 봉사한다. 완벽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상적인 재현을 가정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재현 자체가 재현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쾌락의 장소, 웃음의 장소가 재현 자체에 달라붙어 있다면 여성에게 가능한 웃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웃음은 무성적이지 않다. <레바툰> 역시 무성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불안한 전조를 안은 채, 내 발 밑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웃고 있는 것인가? 내가 발 디디고 있는 위치를 인식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내게서 웃을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한다. 그러나 그 같은 추락이 내게서 영원히 웃음을 빼앗아가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성적으로 가장하는 위치로부터 어떤 웃음이 발생할 수 있느냐다. 웃음은 누군가의 정체성에 부착된 채 따라 나오지 않는다. 내게서 웃음이 출발할 수 없다면, 웃음을 발견할 수 있는 장소로 옮겨 다닐 수밖에 없다. 여성에게 ’위험한‘ 웃음과 ’안전한‘ 웃음을 구분하고 이상적 대안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결국 여성이라는 범주를 생물학적 본질로서 고착화하고, 결코 ’남성적‘ 역사에 편입되지 못할 부록으로서 고립시킬 뿐이다.

이 글은 <레바툰>을 비롯해 병맛 코드나 시각 예술 일반에서 드러나는, 약자에 대한 폭력이 유머로 소비되는 상황을 ‘일단 즐기라’고 부추길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현재 트위터를 중심으로 재기되는 질문들과 같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유머에 대한 고민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혐오적 재현’에 대한 대립항으로서 ‘이상적 재현’이 전제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힘들다. 이 같은 이항 대립이 공고해질수록, 여성에게 허락되는 웃음은 제한될 것이다. 그렇다면 뭐 어떻게 하자는 말인가? 대안적 웃음을 발명하는 대신, 우리의 정체성을 특정한 재현에 정박시켜 놓는 대신, 우리의 웃음이 공기 중에 산포된 채로 떠다니게 하는 것. 웃기 위해 무성적으로 가장하는 것과, 그 동일시가 부서지는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다른 웃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웃음은 여기에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다른 방식’들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