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이야기에 대한 가장 뜨거운 변주_ <바로잡는 순애보>
사람이 되고 싶은 곰과 호랑이가 있다. 쑥과 마늘의 힘으로 사람들 눈을 잠시 속이고 사람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환웅의 선택을 받아야만 진짜 사람이 될 수 있다. 곰 가문과 호랑이 가문은 오랜 세월 동안 자기가 사람이 되기 위해 환웅을 두고 싸우고 있는데, 이번 차례는 예쁘고 착하고 공부까지 잘하는 여고생, 곰 소녀 ‘고순애’와 터프한 상남자 호랑이 소년 ‘양비타’다. 이들을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환웅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번 세대의 환웅은 식용작물 키우기에만 관심이 있는 눈에 안 띄는(안 띄길 바라는) ‘장바로’다. <바로잡는 순애보>는 이 셋이 이끌어가는 개그와 액션이 더해진 ‘학원형 판타지’다.

왜 호랑이가 아니었을까?
단군신화는 줄거리가 필요 없을 만큼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어렸을 때는 실제 있었던 일인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어느 정도 머리가 커서는 ‘곰을 모시는 부족과 호랑이 부족이 있었는데, 다툼에서 곰 부족이 이겼기 때문에 곰이 미화되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정도의 해석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만약 고구려가 통일했다면?’처럼 내내 궁금한 호기심은 “곰이 아니라 호랑이였다면 어땠을까?”다.
호랑이가 앞발을 치켜든 모습의 우리나라 지도는 왠지 우리가 강대국이 된 듯한 생각이 들곤 했다. 쑥과 마늘이라니! 육식동물 호랑이한테는 원래부터 불평등한 시험 아니었냐는, 때늦은 (무려 오천 년쯤) 항변도 해 보았다.
<바로잡는 순애보>는 사람이 된다는 것, 사람답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오랜 질문을, 우리에게 가장 오래된 이야기에 빗대어 세련되게 바꾸어낸다.
얄미울 만큼 잘 짜인 작품
노래는 물론, 패션이나 요리 등 모든 것이 서바이벌 오디션을 거치는 시대인 요즘이다. <바로잡는 순애보>는 네이버가 주관하는 ‘2013 대학만화 최강자전’ 최종 우승 작품이다. 토너먼트 형식으로 매주 승자가 결정되어 올라가는데, 다른 장르의 오디션과 다른 것은 심사위원이 없이 순수하게 대중의 평가만으로 결정된다는 점에 있다. 어떤 점이 아쉽고, 무엇이 부족한지를 지적받지 않고, 또는 작품성에 대한 고매한 평가에 갸우뚱하지 않고 순수하게 독자의 표로만 결정하는 것이다. <바로잡는 순애보>는 이런 시스템과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익숙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변주, 매력적인 캐릭터, 캐릭터들 간의 대결 구조, 시선을 끄는 조연, 속도감 있는 진행, 생각해볼만한 묵직한 주제, 그를 상쇄시키는 개그 요소, 주인공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밝혀지지 않은 음모. 한 주 한 주 경쟁작들과 붙어서 이겨야 하는 오디션의 시스템에 적합했던 것이다.
경연이 아닌 정식으로 연재가 되었을 때, 이야기가 늘어지는 듯 속도감이 떨어진 느낌을 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매주 일요일이 기다려지는 것은 이채영 작가가 독자들이 재미있는 만화에 기대하는 바를 너무나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막 졸업한 새내기 작가의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바로를 잡는 이야기가 아닌 까닭
이 작품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작가만이 알고 있겠지만 제목에서 작가의 의도를 조금은 짐작해볼 수 있다. 만약 제목이 ‘바로 잡는 순애보’였다면, 즉 ‘바로’ 띄고 ‘잡는’ 이었다면, ‘자기를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줄 환웅-장바로를 잡으러(찾아) 다니는 고순애의 이야기’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제목은 ‘바로잡는’이다. 이것은 무언가 그릇된 일을 올바르게 고친다는 말이다. 진짜 사람이 되려고 오랜 시간 싸워왔던 곰과 호랑이. 몇 세대에 걸쳐 곰이 이겨왔는데 그 이유가 석연치 않다. 특히 바로 앞 세대인 순애의 엄마는 큰 의혹을 가지고 있다. 그 의혹을, 또는 이러한 대물림 자체를 바로잡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쓸데없이 덧붙이면. ‘순애보’가 ‘순수한 사랑 이야기’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야기’가 ‘순애보’다. 앗, 안 돼! 아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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