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인 감동, 디테일의 힘, 하가의 <시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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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랑 이야기의 모범 답안은 해피엔딩이다. 진부하지만 익숙하기 때문이다. 또 모두가 수긍하는 안전한 길이다. “남자와 여자는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옛날이야기의 판에 박힌 마지막 문장은 ‘그런데’라는 접속사와 연결되면 새로운 이야기의 첫머리가 되기도 한다.

<시타를 위하여>는 훈훈한 결말 그 이후, 불편한 비극의 한 가운데를 출발점으로 잡았다. “남자와 여자는 첫 눈에 사랑에 빠졌다. 둘은 결혼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남자는…?” 해피엔딩까지 여정은 순식간에 건너뛰고 이별 이후가 본격적인 이야기다.

남자의 선택은 여전히 ‘그녀’였다. 남자는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 목숨을 걸고 아내를 살려달라고 절규한다. 놀랍게도 그는 시간을 거슬러 십여 년 전 어린 시절의 아내와 만난다. 그는 그녀를 살릴 수 있을까. 다시 해피엔딩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케케묵은 레퍼토리, 남자의 순애보가 과연 독자들에게 통할까.

<시타를 위하여>는 작가 하가의 데뷔작이다. 2013년 네이버와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주최로 열린 ‘2013 대학만화 최강자전’ 8강전에 오른 작품이다. 2014년 6~9월 네이버 웹툰에 연재됐으며 단행본은 2권 완결로 2015년 5월 발행됐다.

 

남자의 순애보, 이국적인 색채로 부활
<시타를 위하여>는 신비한 전설로 포문을 연다.

“여신 타레루가 네팔에 현신해 내려온 적이 있는데, 아름다운 여신에게 반한 왕이 여신을 범하려는 실수를 저질렀고 여신은 크게 분노해 저주를 남기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훗날 왕이 잘못을 뉘우치고 여신을 위한 사원을 짓고 간절히 기도하자 여신은 어린 소녀를 선택해 자신의 분신으로 섬길 것을 명하였고 왕은 3세에서 5세 사이의 순수한 어린아이를 뽑아 섬기며 쿠마리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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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네팔의 쿠마리 전설이다. 쿠마리는 태생부터 신체조건, 마음가짐 등 32개의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한 단 한 명의 소녀로 살아 있는 신으로 왕보다 높게 받들어진다. 시타는 쿠마리로 뽑힌 소녀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존귀한 쿠마리가 됐다가 이후 세상의 가장 밑바닥을 경험한다. 전설의 끝자락은 현재의 쿠마리라는 소녀들로 이어지고 여자 주인공 시타의 삶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그녀를 운명적인 사랑으로 이끈다.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이야기의 유형은 크게 뱃사람 이야기와 농사꾼 이야기로 구분된다. 전자는 아무도 간 적 없는 아주 먼 곳에 대한 이야기,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후자는 계절의 순환처럼 언제나 되풀이되는 일상, 주변에서 일어나는 친숙하고 평범한 사건들을 다룬다. 뱃사람처럼 낯설음을 강조하느냐, 농사꾼처럼 익숙함을 부각시키느냐의 문제인 셈이다.

작가 하가는 뱃사람처럼 농사꾼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낯선 네팔의 여신 이야기, 순탄치 않은 시타의 인생으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알맹이는 사랑이다. 너무나 익숙하고 대중적인 소재, 때론 유치하고 지루할 수 있으며 자칫하면 신파로 흐를 수 있는 그것이다. 게다가 목숨까지 건 진지한 사랑이다.

작가는 이러한 만만찮은 장애물을 이국적인 색채를 지렛대 삼아 훌쩍 뛰어넘는다. 새로운 순애보를 부활시킨다. 그 흔한 사랑 이야기는 쿠마리 전설과 결합돼 ‘박탈당한 신’과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로 신선하게 재탄생한다. 쿠마리 전설은 작품의 주요 테마인 운명적인 사랑의 배경인 한편 남자의 초현실적인 시간 이동에도 설득력을 부여한다. 마지막 반전의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또 보는 내내 눈길을 사로잡는 붉은 색감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제대로 살린다. 때론 화려하게, 때론 불길하게, 밝음과 어둠을 넘나들며 숨은 조연 역할을 톡톡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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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인 이야기의 매력은 작가의 최신작 <공주는 잠 못 이루고>에도 이어진다. <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모티브로 한 내용으로 중국을 배경으로 한다. 중국을 대표하는 빨강으로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 가운데 장대한 사랑 이야기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감성적인 연출, 서사의 재발견
<시타를 위하여>는 본편 12회, 에필로그와 프롤로그를 포함해서 총 14회로 완결됐다. 과거로 돌아간 남자가 어린 시타를 만나 그녀의 인생을 되짚는 게 주요 내용이다. 가까운 미래 그녀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다. 시간 흐름상 십 여 년을 아우르는데도 시종일관 빠르게 전개된다. 동시에 섬세한 감정선도 살아 있다. 장편으로도 손색없는 서사가 짧게 압축됐는데도 오히려 몰입감은 높다.

비결은 디테일이다. 작가는 반복되는 장치들을 통해 남자의 추억과 현재 그녀의 삶이 겹쳐질 때 감성의 폭발을 섬세하게 잡아낸다. 남자의 현재는 그녀의 과거이고 그녀의 현재는 남자의 미래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어긋난 시간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접점의 순간은 늘 애절하다.

① 골목, 이야기의 시작

작품에서 골목은 남자와 시타의 인연이 시작되는 곳이다. 맨 처음 남자가 시타를 만나 사랑에 빠진 곳은 어두침침한 골목이다. 경이로운 경험은 과거로 돌아간 뒤에도 되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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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어린 시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도 골목이다. 십 여 년 뒤 그 골목으로 시타가 돌아온다. 쿠마리 이후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절, 어릴 적 골목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다시 남자를 만나고 삶의 용기를 얻는다.

두 번의 의미 있는 만남 동안 시타는 매번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연인이 아닌 그저 고마운 아저씨, 할아버지로 기억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그는 눈앞의 그녀에게 보답 없는 사랑을 되돌려준다. 골목은 그가 몰랐던 시타의 삶을 공유할 수 있는 드라마틱한 공간인 동시에 늘 그녀에게 타인으로 다가설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공간이다.

 

② 팔찌, 끊어지지 않는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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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왼쪽 팔목에는 항상 빨간 끈이 감겨 있다. 시타가 선물해준 팔찌다.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다는 ‘빨간 실의 인연’을 그는 한때 신이였던 여자로부터 받은 셈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팔찌의 매듭은 낡아간다. 때맞춰 시타와 그가 헤어질 순간도 코앞으로 다가온다. 그와 그녀의 인연이 끝나가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곧 끊어질 것 같던 팔찌는 시타가 팔찌를 선물하면서 새로운 수명을 이어간다. 여전히 그녀는 그를 알아채지 못하지만 빨간 표식의 의미를 모른 채, 그에게 한 번 더 ‘인연’을 확인시켜 준다.

 

③ 손, 운명을 바꾸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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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시타를 손잡는 장면도 변주되는 디테일 중 하나다. 단순한 애정표현을 넘어선 운명의 순간이다. 첫 번째로 남자가 시타의 손을 잡은 건 그녀를 인생의 동반자로 맞이할 때다. 그녀 역시 굳게 잡은 손으로 이에 화답한다. 두 번째는 과거로 돌아간 남자가 성장한 시타와 재회했을 때다. 슬픈 미래를 막기 위해 그녀를 붙잡지만 이후 그는 시타의 사랑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더 큰 슬픔을 겪게 된다.

마지막으로 그는 다시 시타와 손을 잡는다. 앞서 그가 먼저 내밀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시타가 그에게 손을 건넨다. 시공을 초월한 운명은 재확인된다.

 

사랑이 그대를 구원할 것이다
쿠마리 시험을 앞두고 피를 두려워하는 어린 시타에게 그는 오래 전 그녀가 해줬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심장이 뛰면, 피가 온 몸을 돌고, 몸 밖으로 새 버리면, 그건 무서운 게 아니라 그저 아프고 슬픈 거예요.” 그가 그랬던 것처럼, 시타는 피를 죽음이 아니라 생명력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덕분에 시타가 변화한 것은 물론이다.

작가는 후기를 통해 “‘운명이 바뀌게 되는 한 소녀와, 그녀를 구하고 싶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에 걸맞게, 결국 이 만화는 ‘상민’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남자는 그녀와 추억을 동력삼아 다시 만난 시타의 미래를 바로잡으려고 한다.

그는 그녀에게서 받았던 따뜻함을 어린 시타에게 되돌려준다. 그녀가 했던 말은 그의 입을 통해 또 다른 그녀에게 되돌아가고 이는 새로운 따뜻함으로 그녀를 구한다. 동시에 그도 다시 시타에게 구원받는다. 시타는 예전처럼 그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준다.

이야기의 마지막, 과거로 갔던 남자는 다시 돌아온다. 동시에 프롤로그에 언급됐던 여신은 에필로그에 재등장한다. 이러한 완결된 구조는 막판 반전을 완성시키고 남자의 구원에도 방점을 찍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고 했다. 남자와 시타의 세계를 구원한 것은 굳건한 사랑이다. 아마도 분명 우리에게도.

 

김경임

​만화문화연구소 엇지 연구위원, 네이버 캐스트 만화대백과 필진으로 활동 중이다. 재밌는 만화, 뜻 깊은 만화, 특이한 만화 중 재밌는 만화가 으뜸이라고 생각. 통섭의 시각으로 만화를 다양한 분야와 연결시키는 작업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루이 세폴베다의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주인공처럼, ‘순정만화 읽는 노인’이 되는 게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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