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짐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김수박의 <아날로그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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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는 시기가 있으며 사회적 관습을 따른다. 예를 들어 디지털이라는 말이 사용되면서 굳어진 아날로그의 사회적 의미가 그렇다. 디지털은 기술의 전자적 표현 기회였으나 어느덧 새롭고 빠른 것이라는 가치와 연결되면서 최첨단의 의미를 내포한 단어가 되었다. 따라서 그동안 굳이 사용하지 않았던 아날로그라는 용어가 디지털 기술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 의미도 디지털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면서 낡은 것, 옛 것, 과거라는 의미로 굳어졌다.

때문에 <아날로그 맨>이라는 제목을 만났을 때, 필자 역시 아날로그의 사회적 관습을 결부시키며 향수를 되짚어가는 만화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만화를 읽어가며 김수박 작가가 이야기 하는 아날로그는 옛것도 과거도 낡은 것도 아닌 것을 깨달으며 그가 이야기 하는 아날로그에 귀 기울이게 된다.

<아날로그맨>의 주인공인 헐렝이는 자신의 작은 원룸과 노가다의 터전, 기차 안이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그려내고 있다. 그는 딱히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이어나가길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는 이어지고, 계속적인 흐름을 통해 변화한다.

헐렝이는 돈이 없기 때문에 몇 달이나 월세가 밀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인아저씨 오건택씨에게 당당했으며, 월세를 내려고 마음먹기보다 가정을 파탄시킨 오건택씨의 태도를 비판한다. 그는 오건택씨의 행패로 인해 원룸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지만 다른 세입자인 마담 언니로부터 해결책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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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난은 그를 노가다로 이끌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용역회사의 사장님부터 황씨 아저씨, 병구 형, 재떨이 형, 우주벡, 붕어빵 형, 강간 형, 목수 목사님을 만난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안타까운 직업인 노가다를 하고 있지만 모두 꿈을 좇아가는 길에 들른 배고픈 이들이다. 여기서 꿈은 헐렝이가 칭한 단어가 아니라 필자가 사용한 단어이다.

아마도 만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예술가지만 돈을 벌러 나온 재떨이 형이나 성실한 황 씨의 이야기에는 꿈이라는 단어를 인정해 줄 것이다. 문제는 병구 형이다. 병구 형은 포커에 빠져 있으며 포커로 한 순간에 돈을 벌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모습을 보며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병구형의 모습은 헐렝이가 천원으로 산 로또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헐렝이는 그가 마냥 한심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듯 그가 일군 밭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때문에 병구형의 목표도 꿈이라 볼 수 있게 만들고, 노가다를 하는 사람들은 노가다를 하고 있지만 아마도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게 만들며 그들의 다른 이야기도 들을 수 있기를 막연히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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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렝이의 생각은 기차를 타고 가는 내내 이어진다. 헐렝이는 노가다를 통해 번 돈으로 갑자기 잠적한 친구 칠칠이를 찾아간다. 그가 칠칠이를 찾아가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가 칠칠이를 찾아가기 전에 만난 길잡이 김은 칠칠이에게 가는 것보다 만화가로서 어떤 결실을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말린다. 하지만 그는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결국 칠칠이를 찾아가기로 마음먹고 기차를 타게 된다.

기차를 탄 그는 그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 멋대로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맞은편 플랫폼에 서 있는 여자는 그냥 서 있을 뿐이지만 헐렝이는 그 여자의 목적지를 정선으로 만든다. 헐렝이의 상상에서 그 여자는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자로 변신시키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지어낸다. 또 기차의 통로에서 마주친 다른 아저씨와 오지랖으로 만들어진 어색한 관계에 대해 불편해 하지만 아저씨가 아가씨처럼 예쁜 아줌마에게 뜬금없이 인생의 실패자라 비판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과 대입시키기도 한다. 헐렝이는 그 둘이 같은 역에서 내리는 것을 인연이라 생각했는지 둘 사이가 연인이 되기를 바라는 허황된 바람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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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헐렝이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서울을 떠나는 합당한 이유를 만든다. 그는 기차에 몸을 싣고 자신에게 있었던 수많은 일들을 생각한다. 그 일은 모두 서울에서 일어난 일이고, 기차에서 일어난 일이며, 그가 있었던 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시작되고, 사람의 이야기는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진다.

우습게도 그 이야기에서는 논리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허황되고, 쓸데없으며, 사소한 것들이다. 하지만 그 생각들은 모두 우리가 하는 생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때문에 <아날로그 맨>에 그려진 헐렝이의 삶은 우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지며, 그가 보여주는 망상을 비판하기보다 공감하게 된다.

이승진

만화의, 만화에 의한, 만화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일인.
“만화 너, 뭐니?”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열심히 달려왔다.
어렸을 적에는 만화 읽는 것이 좋았고, 학부때에는 만화 그리는 것이 좋았고,
석․박사 때에는 만화 공부하는 것이 좋았고, 지금은 만화의 인생이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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