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끈질기게 이해해요_ <우리는 시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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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코 중인 존잘성애자의 모습

 

‘존잘성애자’. 특히 여성향 동인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이 용어는 “존잘님(그림이나 글을 정말 잘 쓰는 사람)의 연성물이 너무나 훌륭하여 존잘님에게 성애를 느낄 정도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만일 존잘성애자가 존재한다면, 그의 고백은 “당신이 쓰는 글이 좋아요.”가 아닌, “글을 쓰는 당신이 좋아요.”에 가까울 것이다. 존잘성애자라는 개념이 성소수자의 하위 범주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페티시의 한 종류가 될 수는 있겠지만, 이 용어가 사용되는 범위는 워낙 다양해서 실제 ‘존잘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을 지시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신 과장된 비유법으로 사용하는 용례가 더욱 두드러지게 관찰된다. 누군가의 연성물에 대한 과격한 애정표현이나 ‘존잘 연성러’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과 같은 언사에서 심심찮게 ‘존잘성애자’라는 표현을 찾아 볼 수 있다. 사실 동인 활동을 하고 있거나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존잘성애자’의 의미를 굳이 파악하지 않더라도 어렵지 않게 주변에서 예시가 될 만한 인물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본인의 이야기일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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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 직전, 아무것도 모르는 배수현과 다 알고 있는 우유진

레진코믹스에서 44화로 완결된 하양지 작가의 <우리는 시간문제>는 바로 이 ‘존잘성애자’와 ‘존잘’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탈모거북’이라는 닉네임으로 아마추어 소설을 쓰는 존잘님 ‘배수현’과, 그런 그녀에게 (의도적으로) 룸메이트를 제안하는 그녀의 오랜 팬인 ‘우유진’이 동거를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우리는 시간문제>의 묘미다. 모든 작가와 팬의 관계가 그러하듯, 애초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우선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의 양적인 차이를 상상해보자. 우유진이 배수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배수현이 우유진을 처음 보는 타인으로 여기는 것에 비해 압도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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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현의 상상 속, 우유진과 그의 동생

1화에서 우유진은 마치 우연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배수현에게 룸메이트를 제안하지만 사실 그것은 우연처럼 연출된 열정적인 고백이다. 2년 전, 고교시절부터 우연히 접하게 된 ‘탈모거북’의 소설인 <이상한 복식의 남학교>에 말 그대로 꽂혀버린 우유진은, 소설을 추천해준 친구가 “괜한 걸 추천해줬다.”라며 타박할 때까지 소설에 푹 빠져버린다. 우유진은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도 ‘탈모거북’의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일기장을 통해 그녀의 사적인 정보들을 수집하는데, 이 과정에서 ‘탈모거북’이 다름 아닌 ‘배수현’임을 알게 된다. 우유진이 배수현에게 룸메이트를 제안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정보의 선점이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작가와 팬의 관계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배수현이 3화에서 “나 너희 집에서 살게 되면 걱정되는 게 있었어….” 라며 제시하는 단편적인 상상에서도 드러난다. 배수현에게 우유진은 낯선 사람, 모르는 사람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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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다의 이름은 뭔가요?’ ‘질투…’

더구나 2년 동안 한 작가의 작품을 지겹도록 읽어온 팬의 마음속에서 작가가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 전 처음 이 독자의 존재를 알게 된 작가의 그것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것이다. 배수현에게 우유진이 ‘진짜 재밌는 애’로 기억되는 존재가 되기 시작했을 무렵, 우유진은 이미 ‘존잘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기쁨으로 충만해 어쩔 줄 모르고 들떠있는 상태인 것이다. 심지어 이 ‘존잘님’을 너무나 경애한 나머지 그림자도 밟지 않을 정도다(8화). 웹상에서 ‘탈모거북’을 찾는 수많은 독자들의 리플을 보며 비밀스러운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는 우유진은, 자신의 애정을 감추거나 우회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무조건적인 애정공세는 두 사람 사이의 온도차를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배수현이 과제를 위해 남자 동기를 집에 데리고 오는 에피소드인 20화에서, 작정하고 두 사람 사이를 훼방 놓은 우유진이 그날 밤 꿈속에서 헤엄치는 바다의 이름은 다름 아닌 ‘질투’다. 이것이 어떤 종류의 질투인지 정의하기는 모호하지만 말이다. 이후 25화에서 배수현 역시 같은 배경의 바다를 건너게 되는데, 이 바다의 이름은 ‘죄책감’이다. 비록 두 상황이 다르기는 하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의 종류는 아예 다른 진폭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마치 출발선이 다른 레이스를 시작하는 것처럼, 이 작가와 팬의 관계는 어쩐지 좁혀질 수 없는 무한한 간격을 사이에 두고 있다. 물론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오래 알았다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애정과 비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유진의 경우, 많은 시간 동안 상상했을 ‘탈모거북’의 모습과 실제 ‘배수현’의 모습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차이를 ‘위대함’으로 승화할 수 있을 만큼, 그 애정은 무조건적이고 견고한 것이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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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잘님의 그림자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자

그들의 ‘불공평한 관계’는, 끈질기게 배수현에게 묻어있는 <이상한 복식의 남학교>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는 우유진의 모습에서도 잘 나타난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교환하는 암호인 ‘파란안경’에 대한 의문을 배수현의 추리닝 바지에서 찾아내고 기뻐하는 우유진의 모습은, 단순한 작품의 팬의 수준을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원작자인 배수현은 “아, 용케 찾았네.” 라며 여유롭게 응수한다. 작품의 창작자로서 그녀의 권위는 대단히 분명하고 자연스럽게 확보되는 것이기에, 우유진은 단지 배수현에게서 작품을 해석할 힌트만을 수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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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안경’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 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듯 보이는 우유진의 모습

표면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뚜렷한 권력관계를 그리고 있다. ‘탈모거북’으로서 배수현이 우유진에게 받는 관심과 애정은 대단히 각별하고 절대적인 것이어서, 배수현은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이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배수현의 세계 역시 우유진에게 기댄 채 천천히 움직이고 있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명해진다. 우유진에 대한 평가는 ‘재미있는 애’로 시작해, ‘차라리 모를 걸’로 변화한다. 누군가를 알게 되고, 그에게 마음을 쏟는다는 것은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26화에서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상상하며 우유진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소설에 대해 무슨 말을 해도, 아무리 어려운 방식으로 설명해도 난 다 이해할 수 있어. 왜냐면 난 다 이해할 자신이 있으니까.” 한편으로 로맨틱한 이 말은, 그렇기에 무시무시한 정복자이자 포식자의 자기 확신이다. 어떻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을 방치한 채, 멋대로 오해하도록 둘 때만 가능한 관용이 아닌가. 어쩌면 우유진이 끊임없이 <이상한 복식의 남학교>에 집착하고, 그에 들어 맞는 증거를 배수현에게서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은 자신의 오해를 진실로 조작하려는 충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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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진의 상상 속 두 사람의 만남

“난 다 이해할 수 있다.”라는 우유진의 말은,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대로 너를 오해 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탈모거북’으로서 배수현은, 자신을 이해할/오해할 준비가 되어있는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해야 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기대하는 대로 자신을 내어주기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완전히 스스로를 내맡긴 채 안전함을 보장받고자 하는 욕망 역시 막을 틈 없이 새어나온다. 나에게 접촉하는 타자에게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오만한 ‘이해’로 포장되었다고 해도, 배수현에게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이고 공격이다. 우유진과 만나기 이전의 상태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우유진이 배수현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갈수록, 서로가 서로에게 노출 될수록 더 이상 ‘작가와 팬’ 사이의 안전한 거리는 확보될 수 없게 된다. 아니, 오히려 그 권력관계는 역전된 것처럼 보인다. 우유진이 어느새 배수현에게 ‘장애물’이 될 만큼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배수현은 ‘편안하고 안락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 인생방식’으로 두 번 다시 되돌아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훼손당한 스스로를 복구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서, 배수현은 우유진의 집에서 나오기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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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링크장에서 배수현은 우유진의 집에서 나오겠노라 선언한다.

이제 이들의 불공평한 관계는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던 어떤 격차도 이제는 무의미해 보인다. 우유진의 의욕적인 룸메이트 제안에 대해 배수현이 수동적으로 휘말리게 되면서 시작된 관계는, 이제 배수현의 의지로 끝나게 되었다. 마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배수현은 자발적으로 작가와 팬으로서의 시작된 동거를 청산한 것이다. 2개월 후, 우연히 타임스퀘어에서 마주친 우유진의 앞에서 배수현은 “네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도망을 쳤다고 고백한다. 그런 배수현 앞에서 우유진은 다시 한 번 말한다. ‘난 다 이해할 자신이 있으니까.’ 이런 그녀의 솔직함은, 이번에는 오만한 자기충족적인 예언이 아닌 어떤 울림으로써 다가온다. 쉽지 않은 말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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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현은 타임스퀘어에서 왜 우유진에게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는지 고백한다.

우유진과 떨어져있던 2개월간 집에서 소설을 쓰던 배수현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그 아이가 너를 참 자세히도 봤구나.’ 우유진에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내게 맞춰 너를 오해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자세하고 정확하게 너를 보겠노라는 고백이었던 것이다. 우유진에게 있어 배수현을 ‘이해한다’고 말함으로써 생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그것에 노출당한 고통만큼 용기를 요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상대를 소화하고 질식시키는 방식의 이해가 아니라, 나를 내려놓고 너를 자세히 보는 방식의 이해. 계속해서 나를 시험대에 올려놓는 고통스러운 이해.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인 두 사람은 끊임없는 오해를 통해서 상대를 견딜 수 있는 존재로 번역할 것이다. 하지만 끝내 용기있는 ‘이해’가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해줄 것이다. <우리는 시간문제>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이 ‘끈질김’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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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다시 돌아오게 될 걸’ ‘헤헤.’

결국 이야기는 ‘존잘성애자’와 ‘존잘’의 이야기로 가볍게 시작해, 결코 가볍지 않은 인간 대 인간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한 우화로 마무리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이 이야기가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묶일 수 있다 한 들, 분명히 우리 눈앞에 제시되는 것은 두 ‘여성’ 캐릭터들의 레즈비어니즘적 재현이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이것은 백합물인가? 이것은 ‘레즈비언’물인가? 그도 아니면 정말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다룬 ‘드라마’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들은 연인 관계인가, 아니면 그저 특별한 친구 사이인가? 이 모든 질문은 결국 ‘존잘성애자’라는 용어가 ‘걸 크래쉬’와 같이 여성들 간의 성적이거나, 로맨틱한 이끌림을 보다 덜 공격적이고 무해한 것으로 구획 지으려는 결벽증적인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유진과 배수현 사이에 흐르는 로맨틱한 기류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에 대해서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그들을 레즈비언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인가? 물론 독자들 중 누구든 이들의 관계에 대해 자의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레즈비언 재현에 목말라 있는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의도적인 모호함과 무의식적 회피 사이에서 떠내려가는 이미지들을 안절 부절하며 바라보고 있는 것은 때로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한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우유진과 배수현을 어떻게든, 그러니까 우정이나 자매애같이 어중간한 거 말고, 반드시 레즈비언으로 읽어내야지 속이 시원할 것 같다는 말이다. 그러지 않고 참기에는, 모니터 안의 레즈비언은 너무나 빈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