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세계_ <자꾸 생각나>

by -
0 1459

글로도 말로도 표현하기 참 힘든 상황들이 있다. 대충 설명해서는 그 기분이 잘 전달되지 않는데,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너무 하찮은데다가 때론 구구절절 설명해봤자 결국 잘 전달도 안 되고 나만 이상한 사람 되어버리는 상황들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오래된 남친이 있다. 당장 헤어지고 싶을 정도로 딱히 싫은 건 아닌데 자꾸 말이 겉돈다. 몸에 닿는 것도 그냥 성가시고 귀찮다. 이런 권태로운 상황일 때 누군가가 가끔 생각나고 관심이 간다. 이게 굳이 정말 좋아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고, 하늘을 우러러 가슴에 손 얹고 생각해봐도 내가 딴생각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자꾸 생각난다. 그러다 정말로 전화가 울려서 어색하게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는데 나가는 사이 전화는 끊기고, 그래서 내가 다시 걸어보니 통화중인데 마침 그때 남친이 밖에 나와 뭐하냐고 물어보고, 나는 결국 통화도 못했는데 의심받는 이 상황이 부담스럽고 귀찮고 그래서 그런 거 아니라고 변명을 하려는데 다시 전화기가 울리고, 그래서 마침내 통화가 이루어졌는데도 상황이 어색하다보니 지금 좀 바쁘다고 하며 끊어버리게 되고, 아깝지만 기껏 끊어버렸는데도 의심을 품기 시작한 남친은 수습이 안 되고, 나는 막 계속 변명하다가 아이 씨 내가 왜 뭘 했다고 쟤가 뭐라고 이런 구차한 변명은 하고 있어? 하고 신경질이 밀려오는데 딱히 신경질을 낼 상대도 없어서 그냥 이불 뒤집어쓰고 잠이나 자고 싶어져 버리는 상황.

이렇게 말로 쓱쓱 쓰려고 해도 잘 표현 안 되는 진짜 이 찌질하고 미묘하고 구질구질하고 하잘것없는 상황을 느슨한 선 몇 개와 툭툭 던지는 듯한 몇 마디로 기가 막히게 표현해내는 작품이 있다. 바로 송아람 작가의 신작 <자꾸 생각나> (레진코믹스 연재중)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표현했지, 싶은 대목들로 가득하다.010203장미래는 만화가 지망생 동료들과 작업실을 함께 쓰며 이름 그대로 내일의 꿈을 키우는 예비만화작가다. 학습지 만화나 일러스트 디자인 등의 불규칙적인 알바로 주 수입을 해결하면서 아직 부모님께 얹혀있는 흔한 젊은 여성이다. 학교는 졸업했지만 부모님의 집에 살 뿐 아니라 생활비와 심지어는 가사노동까지 전적으로 부모님께 의존하는, 아직 아이 같은 성인 처자다. 나는 꿈을 좇고 있을 뿐인데, 본격적으로 추구한지는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쏟아지는 주위의 시선과 부모님의 부담이 보기 괴롭고, 괴롭다 보니 그리고 아직 어리다 보니 그저 눈감고 지내고 싶기도 한다. 어째서 인생은 어른이 되니 갑자기 이리 빨라지는 걸까. 꿈을 향해나아가라고 그렇게 누누이 들으며 컸는데 왜 막상 꿈을 좇으려 하니 본격적으로 좇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독촉을 하고 부담을 주고 루저 취급을 하는 걸까. 그런 시선을 알기 때문에 명절 때도 자리를 피하고, 하루라도 빨리 데뷔하려고 블로그에 연재도 해보지만 애써 용기를 내어 내놓은 습작은 출판사의 외면을 받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미 작품집을 낸 작가들은 아무리 초년생들이라고 해도 한없이 존경스럽고 부러우며, 그렇게 동경하던 한 작가를 직접 만나게 되자 뭐가 뭔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 미래의 마음은 어떤 물살을 타버리고 만다.

04

상상력의 끝을 보여주려는 듯이 사후세계로 미래세계로 범죄세계로 독자들을 끌고 다니는 다이나믹하고 지극히 화려한 스토리로 승부하는 작가들이 있다. 그 기발함과 예리함으로 독자들을 열광시키는 부류다. 미드나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듯한 아드레날린 대방출의 역작들이다. 그러나 반면, 화려한 줄거리 없이도 작가의 섬세한 감수성이 곧 줄거리가 되는 일상만화들 역시 한편에서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작가의 섬세한 안테나로 감지하는 젊은 새댁, 초보엄마, 만화작가로서의 일상이 따뜻하면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난다의 <어쿠스틱 라이프>를 보면, 쓰레기 분리수거와 장보기에서 마주친 모르는 아줌마와의 몇 마디 그리고 그 속에서 느낀 작가의 단상이 그대로 한회의 만화가 된다.

책들이 시리즈로 번역되면서 잔잔한 인기를 얻고 있는 일본작가 마스다 마리도 마찬가지다. 내가 과연 결혼할 수 있을까, 그냥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굵직한(?) 고민들 사이로, 내가 한 말에 저 직장동료가 마음 다쳤을까, 아무래도 사과해야할까. 하지만 나도 마음을 다쳤는데, 저 사람은 혹시 잊었을지도 모르는데, 역시 그냥 두는 게 나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사이 문득 다시 그 사람을 보니, 어라? 저 친구는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 아닌가? 내가 그의 마음 다쳤을까 신경 쓰여 했다는 것 자체가 우습게 생각되면서, 괜히 내가 마치 게임에서 지기라도 한 것처럼 씁쓸해지는 직장에서의 자잘한 일들, 겉으로는 객관적으로는 작은 일들이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질풍노도의 강도로 그리고 몇날며칠을 휩쓸고 지나가는 일들, 그러나 내가 그렇게 고민을 했다는 것을 절대 들키기 싫은 그런 일들을 그려낸다.

그리고 절대 안 울리는 핸드폰이지만 만에 하나 그에게서 혹시라도 전화가 왔는데 주변이 소란해 벨소리를 놓치고 못 받을까봐 진동으로 해놓고 손으로 꼭 쥐고 있어서 언제나 내 체온과 같은 내 핸드폰이라든가, 만약 오늘 밤 데이트가 이어져 모텔에서 옷을 벗었을 때 너무 의식하고 꾸민 것처럼 보일까봐 일부러 브라와 팬티를 대놓고 셋트로 매치되지는 않게 그러나 질감이든 뭐든으로 은근히는 매치가 되게 골라 입는 처자의 고심 등 절대 섬세의 감수성으로 우리가 한때 언젠가 스쳐 지나갔던 기분들, 감정들을 지극히 예민한 붓끝으로 묘사해놓는 것이다.

송아람 작가의 <자꾸 생각나>도 바로 그런 그룹의 작품이다. “맞아, 저 기분.” “알아, 저 기분.” 하면서, 거의 목침 두께와 맞먹는 무려 616쪽 짜리 만화책 한권을 정말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이 섬세한 만화는 무엇보다, 오늘날 수백만을 헤아리는 이삼십대 군상들의 모습 아닌가? 여기서 장미래는 <미생> 장그래의 프리랜서 버전이라고 해야겠다. 취준생으로, 사회초년병으로, 꿈을 앓는 백수로, 열심히 혹은 묵묵히 살아가며 때로는 세상을 혐오하는 젊은이들, 결혼을 앞두고 있거나 결혼결정을 고민 중이거나 오랜 연인과 이별을 예감하고 있거나 마음을 돌려보려 간절히 애쓰거나 새로운 만남을 그리워하는 이들. 삶은 불규칙하고 예측불가능하며 예기치 않은 복병들이 나타나 나를 넘어뜨리고 때로는 진짜 펑펑 울게 만든다.

주위에서는 한심해하고 귀찮아하고 심지어는 창피해 한다고까지 느끼는 그들, 자존심 상하고 죄송하지만 그래도 집을 떠날 자신은 없는 그들, 마침내 떠나고 나서도 가족에 의존하고 그 근처를 맴도는 그들. 그러나 또 그들은 도전하고 거부당하고 시작하고 좌절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고, 옆에서 보기엔 그 경로가 뻔히 보이는 시도고 만남이지만 그들은 당연히 매우 진지하고 끝까지 고민을 한다. 아프고 안쓰럽게 고민하는 사이 그들이 성장하고 있음도 옆에서는 또 보인다. 직업이란 내가 준비가 됐을 때 마침 주어져서 하게 되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그렇다고 주어진 모든 일이 다 내 직업이 되지는 않는다.

사랑이란 역시 내가 외로울 때 바로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랑 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또 옆에 있던 모두와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무엇이 나를 스쳐간 많은 기회 중 하나를 택하게 하는 것일까? 그 무엇이 이 많은 이들 중에 한 사람을 눈여겨보고 마음이 클릭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리고 그 클릭했던 마음은 또 어떻게 어떤 사소한 계기들이 전방위에서 모여들어 상처를 입고 오해를 하고 다른 방향으로 번져나가는 것일까? <자꾸 생각나>는 이렇게 글로 간추려 쓰기에도 참으로 복잡하고 자잘한 이야기들을 그러나 너무나 선명하게, 바로 그거구나 바로 그 얘기를 하는 거구나 내가 바로그때 느꼈던 그 상황과 감정을 말하고 있구나 하며 또렷하게 느끼게 한다.

<자꾸 생각나>에서 눈길을 또 끄는 것은 저 섬세한 감정도 감정이려니와 그 감정을 담아내는 담백한 그림체다.

어떻게 느슨한 선 몇 개가 저렇게 꼼꼼히 묘사할 수가 있을까? 슥슥 그어놓은 듯한 선 몇 개로 새로 시작하는 연인의 떨림이 그대로 느껴지고, 대충 그은 듯한 선 몇 개로 모멸감이 느껴지는 얼굴표정이 완성된다.

0809100607

이런 선 몇 개의 스케치 같은 묘사는 실은 지극히 탄탄한 데생력에 기반 한다. 술 마시고 방에 널부러져 있는 모습, 쭈그리고 앉아 스맛폰을 들여다보는 모습, 짐을 싸다말고 허리를 잠깐 펴는 모습… 인체를 대체 몇 백가지 동작을 몇 천번 그려봤기에 이리도 자연스럽게, 이리도 쉬워보이게, 그릴수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무심한 듯 완벽한 동작과 각도의 압권은 뭐니 뭐니 해도 모텔장면이다. 현관에서 방으로 수줍게 발을 내딛고, 잠시 어색하게 있다가 불현 듯 서로 껴안은 채 옷을 하나씩 벗는 장면, 안고 포개져 나머지 속옷을 내리고 깊이 안는 장면, 그러다가 풀어지는 머리칼과 가끔 바뀌는 체위까지, 몇 개의 슥슥 그은 선들 같은 인체로도 풀 동영상 한편 본 것 같은 충만한 느낌을 주는 정말 내공 가득한 그림실력인 것이다. 게다가 이건 그냥 단순한 묘사가 아니다. 이건 그냥, 진짜다.

새벽에 주섬주섬 챙겨 나와 귀가할 때, 그리고 하루 종일 머릿속을 가득 메우며 한 장면씩 복기되는 모텔장면, 또한 이에 문득문득 창피해하며 진저리치면서도 또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모습이 정말 간단하게, 겨우 색깔 하나 추가해 묘사한 주인공 얼굴 위에 그대로 떠오른다. 이런 빼어난 그림 실력은 이 장면이나 저 장면이나 선을 그냥 비슷하게 보탠 것 같은데 표정이 현격히 달라지는데서 또 드러난다. 곱슬거리는 앞머리와 안경으로 얼굴 절반 이상을 가린 김겨자씨조차 표정과 감정변화가 독자에게 뚜렷이 전달되는 것이다.

이런 탄탄한 그림실력은 인물들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뚜렷한 개성과 처지와 전사를 부각시키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인물들은 저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소우주들이다. 머릿속으로 적당히 만들어낸 인물들이 아니다. 말 한마디 할 때마다 한 번씩 등짝을 때려주고 싶은 김겨자씨도 그렇고, 정말 너도 참 억울하겠구나 하는 맘이 절로 드는 영지도 그렇고, 출판사 사장과 직원 등의 조연이란 이름도 과분한 역할들에게까지도 일관된 저마다의 입장과 성격이 부여된다. 이 사람 앞에서 말 조금 달라지고 저 사람 앞에서 말 조금 달라지는 이 모든 인물들…. 나는 찌질하게 말했으면서도 남에게 옮길 때는 나만큼은 매우 당당했던 것으로 옮기고, 내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으면서도 알고 싶지도 않은데 남이 굳이 알려주었다고, 우연히 그 자리에서 듣고 알게 되었는데 난 관심도 없었다는 식이고…. 이건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내 치부를 들키는 것만 같고 어디 나를 관찰한 CCTV라도 있어서 내 기록을 갖다 쓰고 있나 뜨끔할 정도다. 아아, 이건 진짜 1 나노밀리 두께의 메스로 내 머릿속을 해부한 것만 같아서, 읽다보면 수치심에 부끄러워지고 또 읽다보면 연민에 마음이 뭉클해지는, “나같이 찌질한 이가 도처에 있었네.” 싶어 창피하면서도 위안이 되는,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또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위로가 되는 그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