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 – 양영순, 희대의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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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무엇을 ‘저주받은 걸작’이라 부르는가.

어떤 작품을 ‘저주받은 걸작’이라 칭하려면 먼저 그 작품이 걸작임을 논증해야 한다. 이 칭호의 형용모순은 걸작의 비장한 운명을 기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작품을 저주받은 걸작으로 거론하자면 먼저 그 작품이 수작을 넘어 걸작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작품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걸작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비평가의 눈에 걸작으로 포착되는 작품이라면, 당해 작품에 대해 나름 설득력 있는 걸작의 품성을 논증하는 것은 오히려 수월하다.

문제는 ‘저주’의 의미이다. 저주라 부를 때 우리는 어떤 것을 머리에 떠올리는가. 작품과 관련된 기이한 사건이나 작가의 비참한 운명인가? 아니면 작품이 끼친 (물론 바람직하지 않다고 평가되는) 심리적, 사회적 영향인가? 이 모든 것이 저주의 구성요소로 불가한 것은 아니지만 특히 대중문화에 있어, 예컨대, 영화나 만화 등에 있어서는 ‘흥행 여부’를 주요 기준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작품의 위대함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관객, 독자의 반응.

걸작으로 평가됨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상 밖의 결과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는가?

먼저 ‘걸작’을 못 알아보는 대중 독자들을 떠올릴 수 있다. 즉, 걸작으로 평하는 주체는 사계의 전문가들인데, 대중 독자들은 그러한 전문가들과는 다른 심미적 취향을 가질 수 있으므로 이러한 괴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작품의 뚜껑이 열리기도 전에 미리 ‘저주’를 예견하는 평자도 있는 바, 이는 이러한 괴리 현상이 충분히 인지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성에 있어 평자와 독자의 이러한 판단 차이에 기인한 ‘저주’를 우리는 이를 ‘내적 원인’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작품의 ‘외적 원인’이 있다. 작품을 소개하고 돋보이게 하는 마케팅에 있어 제작자의 재원이나 노력이 부족하거나 전략이 성공하지 못해 독자나 미디어의 관심을 유발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작품이 시대적 조류나 이슈 또는 유행에 부합하지 못하는 경우도 이러한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지만, 오히려 시대적 조류나 이슈 또는 유행은 저주받은 걸작이 아니라 ‘축복받은 졸작’의 산파 역할을 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저주받은 걸작의 외적 원인으로서 시대적 흐름을 열거하는 것은, 그 작품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등장했다면 엄청난 이슈가 되었을 것이 확실하다는 ‘가정적 논증’ 하에서만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대적 흐름과 유사한 외적 원인으로 하나 더 거론할 수 있는 것은 작품이 태어난 장소이다. 똑같은 작품이 사회적 환경과 독자층을 달리하는 다른 곳, 다른 나라에서 발표되었을 경우를, 마찬가지로 ‘가정적 논증’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이때, 그 다른 가정적 환경 하에서 당해 작품이 분명 엄청난 관심과 파장을 유발할 수 있었다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면 우리는 ‘못 이룬 흥행’의 아쉬움을 ‘저주’로 되새김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관련 산업계의 관심이 또 하나의 외적 원인으로 거론될 만하다. 만화계가 영화계나 방송계의 콘텐츠 제공자로 대두되면서 영화화되거나 드라마화된 작품이 세간의 조명을 받는 반면, 이에 실패한 작품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걸작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계나 방송계의 러브콜을 받지 못한다면 이는 또 다른 ‘저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관심과 흥행을 얻는 것에 실패한 걸작은 비록 ‘저주’를 받았지만 이를 알아본 사람들의 이야기 본능을 자극한다. 여기저기 저주받은 걸작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다. 저주받은 걸작을 언급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엔 비록 작품 자체의 생명력은 소진되었더라도 그냥 잊히기에는 아까운 작품의 문화적 가치를 발굴해 세상에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는 것이다. 그리하여 행여 자신의 애정이 묻은 그 작품이 ‘무덤에서 걸어 나오기’를 희망하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이러한 욕망의 끝자락에 작은 조각 하나를 더하려 한다.

 

2. 작품 <덴마>의 소개 및 걸작 논증

(1) 작품 선정의 변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필자가 이 글을 통해, ‘저주받은 걸작’으로 거론하려는 작품은 작가 양영순이 야심차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 <덴마>다.

여전히 그려지고 있는 미완의 작품에 대해 비평의 렌즈를 들이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혹여 비평을 통해 작가의 창작 정신에 다소의 간섭을 일으킬 위험이 있는데다, 가장 맛깔난 결말 부분을 경험하지 않은 채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맥이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 비평의 대상으로서 미완의 작품이 등장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삶의 시간적 한계, 즉, 죽음이 예기치 않게 작품의 완성을 방해하는 경우와, 반대로 자서전과 같이 오히려 살아 있음으로 인해 미완인 경우가 있으며, 의도적 미완성을 통한 미적 심상 형성을 기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사회윤리를 잣대로 들이대는 사회적 세력의 공격이나 창작을 위한 재원 부족 -세속을 초월한 작가이더라도 결코 극복하기 힘든 세속의 족쇄-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압박에 기인한 창작 중단과, 작가의 열정이나 아이디어의 소진, 이와 반대로 의욕 과잉 등 개인적 역량의 한계로 인한 창작 포기도 목격할 수 있다.

123다른 창작 활동에 비해 장기 연재가 상례인 만화의 경우, 아직 갈무리되지 않은 작품을 비평의 대상으로 해야 하는 사례는 도리어 상례에 속한다. 따라서 이 글이 미완성인 작품을 다룬다고 하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굳이 변명을 늘여놓을 일이 아니나, 미완성작을 대상으로 비평을 하는 자리에 뭔가 불편함이 있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이 글은 아직 완결되지 않은, 게다가 2014년 7월 29일 2-393화를 끝으로 휴재에 들어가 2015년 7월 6일 2-394화로 다시 등장하기까지 무려 1년 남짓 연재 중단의 질곡을 겪었던 <덴마>를 무대에 올리려 한다. 비록 상당한 기간의 연재중단으로 만화계와 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덴마>지만 연재 중단 전 5년 가까운 연재기간 동안 강력한 팬덤을 보유한 채, 한국 만화 사상 그 유례가 없는 원대한 세계관과 감탄할만한 연출능력을 바탕으로 풍부하고 기발한 스토리텔링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만화계에서 보기 드문 걸작이라 평할 수 있는 <덴마>는 마땅히 관심과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미완의 작품을 앞에 두고 살아있는 생명을 해부하는 자의 조심스러움으로 작품 <덴마>가 왜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지 살펴본다.

(2) <덴마>로 오기까지 작가 양영순의 자취 – 양영순에게 <덴마>란?
<덴마>의 작가 양영순은 1990년대 중반 데뷔작 <누들누드>로 단숨에 대한민국을 뒤흔든다. 본격적인 코믹 에로물인 <누들누드>는 당시의 시대상과 맞물려 만화 역사에 있어 중대한 상징성을 가진다. 즉, 유교전통의 엄숙함과 군사정권의 경직성 속에서 금기시되어 왔던 에로스적 판타지가 자유롭게 표출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물론 그전에도 일정한 한계 속에 자유로운 성애를 묘사한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악한 내용과 아마추어적 그림체로 저질 삼류의 모습에 머물러 주류 사회의 관심 밖이었을 뿐이다.

00-00-42-TCV000023이에 반해 양영순의 <누들누드>는 소재의 기발한 착상과 이야기의 생동감 있는 전개, 깔끔하고 세련된 연출과 매력적인 그림체로 우리의 내밀한 욕망을 거침없이 대변해 준다. 다소 파격적인 내용과 표현이 논란이 되기도 했으나, 당시 우리 사회는 이를 감당할 만큼 충분히 성숙해 있었다. 만약 발표 시기가 5년 앞당겨졌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금서목록에서 <누들누드>를 발견했을지도 모르며 법정에 선 양영순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누들누드>의 발표와 이의 수용을 통해 우리는 인간 본연의 성적 욕망이 골방에서 은밀히 처리되어야 할 천박한 치부가 아니라, 인간의 정당하고도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서 유쾌하고 공공연한 이야기 소재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건강한 대한민국을 확인한 것이다.

콩트 형식의 파격적인 에로 코믹인 <누들누드>의 성공은 작가에게 두 가지 숙제를 안겨준다. 첫째, 에로 작가로서의 이미지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둘째, 본격적인 장편 만화가로서의 길은 어떻게 모색할 것인가?

첫 번째 숙제에 대한 양영순의 대응은 지혜롭다. <아색기가>를 통해 에로물이 가져다주는 흥행 상의 유익을 마저 누리는 한편, <천일야화>나 <플루타크 영웅전> 등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고 구성한 작품을 통해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 변신은 굳이 종전의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에로 대가’로서의 아우라를 그대로 간직한 채 다양한 이야기를 구사하는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새로운 상품성을 개척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두 번째 숙제에 있어 양영순의 도전은 번번이 실패로 드러난다. <플루타크 영웅전>을 위시해 <철견무적>, <라미레코드> 등의 연재 중단은 ‘장편 불가’라는 오명과 함께 이제는 작가 생명을 걸고 장기 연재의 성공적 마무리를 보여주어야만 하는 한층 더 무거운 숙제를 양영순에게 떠안긴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재기발랄한 에로적 발상을 넘어 원대한 세계관을 가진 풍부한 스토리텔링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과시함과 동시에 ‘장편’에 대한 트라우마를 일거에 해소시켜야 하는 ‘목숨을 건’ 도전으로 이 작품 <덴마>가 탄생한 것이다.

(3) <덴마> 개요 – 전략적 이점들과 그 한계들, 그리고 한계 탈출
“특수능력을 지닌 악당 덴마가 꼬마의 몸에 갇혀 우주택배 업무를 하며 겪는 기상천외한 모험이야기”

작가 자신이 <덴마>에 대해 소개하는 위 글은 <덴마>의 전략적 구상을 잘 드러내 준다. ‘우주 택배’란 표현에서 우리는 이 작품이 광활한 우주를 무대로 제시하는 SF물이라는 것을, ‘특수능력’을 언급한 부분에서는 판타지적 요소가 강한 ‘능력자 만화’일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주인공 덴마가 ‘악당’이라는 소개는 이 작품이 피카레스크식 스토리를 염두에 두었다는 점을 시사하며 ‘택배 업무를 하며 겪는 기상천외한 모험’에서는 독립적 에피소드 중심으로 한 옴니버스식 구성을 기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꼬마의 몸에 갇혀”있다는 표현에서 뭔가 해소되어야 할 음모와 사연이 각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중요한 테마로서 작품을 이끌어갈 단서가 될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작가의 구상은 요긴한 전략적 이점들을 제공함과 함께 일정한 한계를 노정하는데, 이에 대해 양영순의 대응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먼저, 판타지적 SF는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무한대로 허용되는 장르다. 여기에서는 우리를 제약하는 물리적, 생물적, 윤리적인 모든 구속이 상당 부분 해제된다. 시공간의 제약 없이 광대한 은하와 행성 사이를 부담 없이 넘나들기에 상상 가능한 모든 곳이 작품의 배경이 될 수 있으며, 우주의 다양한 족속들은 비록 그 기본 구성요소들 자체야 우리 주변의 형상들을 초월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러한 형상들의 무한한 조합, 콜라주를 통해 상상 가능한 모든 형태를 띨 수 있다. 아무리 이단적인 종교라도 문제될 것이 없으며, 우리를 옭아맨 모든 정의도 거리낌 없이 무시된다. 자타가 공인하는 이단적 상상력의 대가인 양영순에게 이보다 더 유쾌한 환경은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SF물에 대한 수요층이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독자 확보에 난점이 있는데, 이는 만화를 수용하는 우리나라 독자들의 다수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보다 현실감 있는 이야기를 선호한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성향에 발맞춰 작가들이 SF에 대한 도전을 꺼려옴으로써 이 분야의 발전이 더디었다는 점에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난점의 극복은 SF물이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의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바(공전의 히트를 친 TV 만화 <은하철도 999>는 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냄으로써 우리나라에서도 SF물이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덴마>의 각 에피소드들은 이러한 역할을 훌륭히 이행하고 있고, 이로써 독자들은 <이솝우화>가 삶의 다양한 군상에 대한 유비로서 가지는 심미적 가치를 <덴마>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악한, 혹은 사회적 비호감 계층이 주인공이 되는 피카레스크식 스토리는 독자들에게 상식과 도덕의 굴레를 벗어던지도록 해줌으로써 사회적, 개인적 터부로 억압된 욕망에 편안한 배출구를 마련해준다. 거기에 옴니버스식 구성을 통해 각 에피소드 별로 주인공 덴마에 의존하지 않고 별개의 주인공을 등장시킴으로써 다양한 삶의 변주를 부담 없이 울릴 수 있게 해주며, 이로써 작위적이고 억지스런 설정(살인 사건을 몰고 다니는 ‘코난’)으로부터 스토리의 타당성과 설득력을 확보해주고, 나아가 스토리의 경직성과 단순함을 피하게 해준다. 다만, 이에 있어 독자들 사이에서 덴마라는 주인공의 존재감이 상당 부분 퇴색되어 버리는데, 하나의 에피소드가 1년 넘게 진행되는 경우가 있다 보니 각 에피소드의 주요 인물들이 덴마의 존재를 망각시켜 버릴 만큼 인상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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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대표적으로 ‘이델’과 ‘롯’은 인기투표를 한다면 덴마보다 높은 점수를 얻을 것이 분명한 캐릭터로 독자들 사이에 상당히 높은 인지도와 선호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덴마의 주인공답지 못함은 주연의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주연의 탄생으로서 환영할 만한 일로 본다. 도대체 이 넓은 우주에서 왜 덴마 혼자 주인공이어야 하느냔 말이다. 그보다 억지스런 설정이 어디에 있는가? 각 인물이 자신의 삶에서 당당한 주연으로 드러나는 점은 오히려 이야기에 대한 가치 부여와 몰입이 가능하게 해주는 장치가 된다. 작가와 독자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주연-조연-엑스트라의 작위적 도식은 단선적 성격의 단편에서라면 모를까 복합적 성격의 장편에서는 폐기되어야 할 선입견이다. 결론적으로 각 에피소드의 전개와 매력적 등장인물의 창조는 <덴마>를 보는 가장 큰 즐거움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양영순의 전략은 멋지게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비밀스런 음모와 사연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독자의 흥미와 관심을 지속시키는 전략은 모든 이야기꾼들이 가장 선호하는 플롯으로 성공적으로 구사될 경우 작품성과 흥행성을 보장해준다. 그러나 자칫 스토리의 폭주로 인해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될 경우 자신마저 삼켜버리는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전략은 파괴적 본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며, 혹시 지금의 양영순은 그 괴물의 목구멍 바로 앞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투쟁의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양영순이 구사하는 이러한 전략의 공과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다. 연재중단 시기에 혹자는 <덴마>의 실패를 운위했지만, 그건 정해진 주기로 정해진 시간에 나오는 웹툰의 논리가 아닐까? 비록 양영순이 웹툰의 생리에 일견 부적응 증세를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덴마>를 웹툰의 틀 안에서만 바라보아야 할 필연적 근거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실제로 <덴마> 시리즈가 서적으로 출간되고 있다. 양영순에게는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인가?), 그리고 예전 출판 만화 전성기에 언제 나올지 모를 후속편을 몇 개월이고 기다리던 독자의 입장에서라면 <덴마>는 아직 진행형이다.

이와 같이 <덴마>의 기본 설정과 구성은 작가와 독자, 그리고 스토리 모두에게 강력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으며, 실제로 이러한 전략적 이점들은 각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통해 충분히 구현된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연재중단이라는 사태가 <덴마>의 많은 성과를 상당부분 잠식하고 있는 점은 부인할 수 없으며, 이러한 점에서 누구보다도 연재중단 사태로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작가 양영순이 1년의 충전기간을 뒤로 하고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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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의 외모를 보면 양영순 특유의 성적 코드도 비친다. 전체 시청가인 점을 감안할 때 아슬아슬하다 ^^

(4) 그림체 – 해소 불가능한 양면성
양영순의 그림체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다소 유아적인 그림체가 코믹 에로물에서는 묘한 성적 코드(예컨대, 롤리타 콤플렉스)를 울림으로써 장점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드라마틱한 SF 장편 만화의 진지함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이 작품이 영화 등 다른 매체를 통해 구현된다면 더 나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없진 않다. 그러나 그림체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로 환원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심각한 스토리를 경쾌하게 끌어나갈 수 있는 양영순의 그림체가 <덴마>의 장점으로 부각될 수도 있다.

단선적 라인을 기조로 하는 화면 구성이 밋밋한 것 아니냐는 평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능력자 만화인 <원피스>나 <나루토>가 보여주는 화려한 그림체의 이면에는, 독자의 가독성을 방해하고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정신집중을 요하는 이미지 과잉이 시각적 피로를 야기한다는 불만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결국 그림체의 평가는 철저하게 개인적 취향에 의존하며 그 우열에 대한 판단은 유보될 수밖에 없지 않나 한다.

(5) 스토리텔링 – 캐릭터 너머 캐릭터, 반전 너머 반전
양영순의 이야기 전개능력을 엿보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캐릭터와 이들의 활약과 역학관계로 이루어지는 스토리라인이 그것이다.

앞서 언급한 SF 장르의 특성상 다양한 개성과 특질의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된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양영순은 특유의 콜라주 능력을 발휘하여 매력 있고 개성적인 캐릭터들을 맘껏 창조하는데, 그야말로 캐릭터 너머 캐릭터다. 지면의 제약으로 캐릭터들의 개성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추후로 미뤄야 하는 점이 아쉽다.

종교적 코드도 많이 드러나는데, 이는 <덴마>의 주요 배경이 ‘태모신교’라는 종교단체인 점을 반영한다. 이러한 종교적 유희는 종교인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SF의 장르 특성상 용인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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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에 대한 명칭은 종교나 신화에서 차용한 경우가 많고(야와, 조슈아, 발락, 아비가일, 엘, 롯, 하데스, 아세라 등), 간혹 오마주(해적선장 하독)인 경우도 있는데, 세련되고 상징적인 점에서 양영순의 언어감각과 독서량이 상당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덴마>는 현재 제1부(에피소드 1부터 에피소드 15까지)를 마치고 제2부(현재 에피소드 2)가 진행 중이다. 초기의 에피소드들은 단편적이고(실제로 분량도 적다), 메인 스토리와의 특별한 연관성이 없는 경우가 많으나, 11번째 에피소드인 ‘사보이 가알’부터 에피소드들과 메인 스토리 사이에 본격적인 연결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각 에피소드의 연재기간이 6개월을 훌쩍 뛰어넘기도 한다(이때부터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주인공 덴마보다 더욱 돋보이는 매력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각 에피소드들과 메인 스토리가 연결점을 찾으면서 이제 <덴마>의 독자들은 양영순이 베풀어준(?) ‘떡밥’을 찾아내고 이의 ‘회수’를 기다리면서 ‘덴마 폐인’ 혹은 ‘덴경대(극중 고산 공작의 호위부대인 ’백경대‘를 패러디)’가 되어 간다. 더불어 양영순의 연출 능력과 감동적인 대사들도 절정에 이르는데, 안정적인 장기 연재를 통해 작가의 역량이 성장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점은 이미 일본의 만화연재를 통해 목격한 바이다(대표적으로 <슬램덩크>. 초반과 후반의 그림체를 비교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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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의 에피소드들은 대부분 뚜렷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과 관계 회복’ – 파마나의 개, ‘옛 친구의 반목과 우정 회복, 상류층의 폭압과 하류층의 기지에 찬 반격’ – 해적선장 하독, ‘사회경제적 신분 차별과 세습,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개인의 분투’ – 야엘 로드, ‘종교인의 절망과 그 극복 및 헌신’ – 만드라고라, ‘남매간의 우애 회복’ – 사보이 가알,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는 청춘의 불같은 사랑’ – 식스틴, ‘죽어서도 사랑의 끈을 놓치 못하는 부부’ – 마리오네트, ‘무기력하나 자식을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강인해지는 아버지’ – 피기어, ‘차가운 마음에 단 한번 꽃핀 사랑을 위한 헌신’ – God’s lover 등이 그것이며, 다소 무거운 주제의 경우에도 양영순 특유의 경쾌한 유머와 함께 감동적으로 풀어간다. 대부분의 에피소드들은 막다른 궁지에 몰린 인간 존재의 나약함과 삶의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는 내용으로 희망적인 여운을 남긴다.

제2부에 이르러 이야기의 초점이 메인 스토리로 모아지면서 제1부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보여준다. 제1부에서는 ‘퀑’으로 불리는 초능력자들의 능력 발휘가 평범한 인간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스토리를 극적으로 돋보이게 하는 정도의 역할에 머문다면, 제2부에서는 가히 초능력의 향연이라 할 만큼 다양한 능력들, 게다가 제1부에서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무시무시한 능력의 초능력자들이 독자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그러면서 역시 매력적인 능력자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한다. 아쉬운 것은 능력자들 사이의 대결이 신나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동안, 많은 능력자들, 그리고 꽤 비중 있어 보이던 등장인물들이 보다 강한 능력자들에 의해, 또는 손쉬운 암살에 의해 너무도 쉽게 죽어간다는 사실이다. 제1부에 비해 ‘인명경시’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이는 거대한 음모와 복잡하게 얽힌 플롯으로 점철된 메인 스토리가 많은 캐릭터들의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명경시’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움베르토 에코의 아이디어를 빌려 말한다면 만화의 책장을 넘기는 순간 우리는 만화 속의 허구를 진실로 받아들이겠다는 묵언의 약속을 작가와 맺는 것이며, 이에 따라 작가가 규정하는 모든 상황을 ‘진짜인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작가가 창조한 세계에 발을 딛는 것이며 그곳에서 모든 건 현실이 된다. 따라서 만화 속 캐릭터는 우리와 동일시되며 우리는 그러한 캐릭터의 눈으로 만화 속 세상을 거닐고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관심을 기울여 동일시하고 있는 캐릭터들이 번번이 사라져 버리면 독자는 만화 속 세상에서 삶의 덧없음과 우주의 무의미성에 빠져들어 작가가 준비해 둔 기발한 반전과 거창한 음모에 공감하기 힘들어진다. 캐릭터에 투영된 나의 존재 자체가 말할 수 없이 가벼운 세상에서 무슨 대단한 일이 벌어지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런 점에서 같은 능력자 만화지만 웬만해선 캐릭터들이 죽지 않는 <원피스>와 대비된다. <나루토>의 경우는 조금 심했지만(아예 몇 번이고 죽었다 살아난다), 어쨌든 <원피스>에서 루피 일행이 꿈꾸는 ‘원피스’가 소중한 건 우리가 그 세상 안에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며, 영원불멸의 존재 가치가 허구의 세상 안에서나마 시현됨으로써 현실에서는 맛볼 수 없는 살아있음의 충만함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캐릭터를 통해서 말이다. 결국 작가가 얼마든지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캐릭터들을 소중히 다루지 않으면, 이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작가는 수많은 캐릭터들의 망령을 달래줄 기막힌 반전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반전 너머 반전이 계속되는 양영순식 스토리텔링은 독자에게 새로운 흥미와 희열을 끊임없이 제공해준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러한 반전은 더욱 빈번해지며 새로운 복선도 다수 등장하는데, 이와 함께 독자들 사이에서는 어느새 묘한 기류가 형성된다. 플롯들이 여러 방향으로 얽히고설키면서 그 수습 여부에 대해, 일부에서는 여전히 양영순의 능력을 신봉하지만, 다른 일부에서는 아무리 양영순이라도 ‘너무 나갔다’라는 불안을 내비친 것이다. 연재중단 사건은 후자의 느낌이 맞아떨어진 상황이었는데, 연재 재개로 인해 이에 대한 결론을 다시 유보해야 할 듯싶다.

위에서 지적한 아쉬움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에 있어 양영순만의 독창성과 독자에 대한 배려를 느낄 수 있는 것은 A.E., 즉, after episode들이다. 새로운 에피소드가 시작되기 전 직전에 끝난 에피소드에 대한 ‘그 후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는(가끔은 장난스런 ‘비틀기’도 등장한다) A.E.는, 각 에피소드들에 대한 뒷얘기를 본래의 이야기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들려줌으로써 독자에게 포만감을 주고 다음 에피소드를 관람하기 전 종전 에피소드의 여운을 마무리할 시간적 여유를 제공한다. 참으로 획기적인 발상인데, 종전에 보기 힘든 이러한 구성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최초의 작품이 바로 <덴마>가 아닌가 한다. 이 A.E.라는 것도 적당히 그려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맛깔나고 감동적인 스토리가 추가됨으로써 이제는 A.E.가 더욱 기다려진다는 독자가 생길 정도다. 이러한 참신하고 과감한 구성력까지 가세함으로써 양영순의 스토리텔링은 독자의 마음을 훔치는 뇌쇄적 매력을 한층 더 배가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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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연출 – 시각적 효과의 극대화, 신기(神技)에 가까운…
이야기를 지향하면서 만화보다 고급(?)인 창작활동으로 평가받는 소설로서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것은 만화의 연출력이다. 글로 아무리 설명해 봐야 자신의 심상을 정확히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설의 독자는 문자라는 기호를 통해 자신만의 심상을 형성해야 하는 의무를 부담한다(한편으로 이는 독자의 권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개방성이 작가를 떠나 소설 자체의 독자성과 생명력으로 옹호되는 측면도 있다). 이에 비해 뛰어난 연출력을 가진 만화 작가라면 소설의 몇 페이지를 대신할 수 있는 단 한 컷으로 독자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한편, 다른 시각적 창작활동인 영화나 애니메이션과 달리 만화는 독특한 연출기법상의 특성을 가진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시각적으로 연속성을 가지는 반면, 만화는 컷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발생한다. 뛰어난 만화 연출은, 바로 이러한 시간적 간격이 가독성을 방해하지 않은 채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능가하는 독특한 미학적 심상과 장면 전환 효과를 뿜어낼 수 있도록 해준다.

우리는 <누들누드>를 보면서 그저 야하면서 웃긴 꽤 괜찮은 만화 정도로 치부할 수 없다. 기껏 말초적 자극 정도의 자기 역할에 충실한 코믹 에로물임에도 감탄어린 마음으로 바라보게 하는 힘은 양영순의 참신하고 뛰어난 연출능력에서 나온다. 상황 전달을 극대화하는 샷 및 앵글의 선택과 장면의 자연스런 흐름, 종전의 만화에서 볼 수 없는(물론 지금은 많은 작가들이 이에 못지않은 기량을 보여주지만 20년 전을 생각해보라) 등장인물의 풍부한 표정들. 표정 하나하나가 몇 줄의 대사보다 더욱 강한 의미를 전달한다. 이러한 연출능력은 부단히 진화하여 <덴마>에 이르러 완전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 이게 가능한 거였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절묘한 장면구성과 표정들. 값비싼 술의 진짜 가치는 술맛 못지않게 술을 담고 있는 술병에도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의 연출 감각은 모방을 기초로 한 노력을 통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의 핵심을 걸러낼 수 있는 뛰어난 눈썰미와 미묘한 차이를 두드러지게 부각시킬 수 있는 타고난 감각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킨 채 태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천재라 불리는 자들 말이다! 물론 양영순의 입장에서 이러한 평가는 억울할 것이다. 천재라는 호칭도 불편할뿐더러 이러한 능력을 배태하고 조용히 사라져간 자신의 많은 습작들을 폄하시키는 것이기에.

신기(神技)! 이 한마디 말로 양영순의 연출능력을 평하고자 하며, 아래 몇 가지 컷으로 더 이상의 논의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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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 비례가 이상하다고 느끼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다. 수십 일에 걸쳐 수백만의 가사상태 인간들 중에 기적처럼 사랑하는 연인을 찾아냈을 때, 자신의 심장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터질 듯한 내적 흥분. 그것을 과장된 근육의 크기로 표현했다고 보이지는 않는가?
06
독자는 피기어 암컷의 모습을 끝내 볼 수 없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오감으로 경험할 수 없듯이 완전한 아름다움은 표현하는 순간 불완전하게 된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아니 보여줄 수 없음으로써 지고의 미를 표현하는 것. 어떤가. 정답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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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 여동생이 자신을 위해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내고 그간 냉대했던 여동생을 대신해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죽으러 간다. 이제 마지막이 될 동생과의 전화 대화. 만감이 교차한다. 그간 해주지 못했던 따뜻한 한마디가 입에 맴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갈무리할 수밖에 없는 저 표정을 보라.

(7) 소결 – ‘걸작’의 칭호를 허하라!
완벽한 작품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걸작’으로 거론하며 그에 걸맞은 관심과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사실들은 왜 우리가 <덴마>에게 그러한 칭호를 부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거로서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 <덴마>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슈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상대적 무관심을 ‘저주’로 규정하고 그 원인을 살펴볼 때가 되었다.

 

3. ‘저주’의 원인 논증

글의 도입부분에서 ‘저주’의 내적 원인과 외적 원인을 언급했다. 그에 맞춰 <덴마>가 겪고 있는 저주의 원인을 파헤쳐보자.

(1) 내적 원인
내적 원인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 독자의 성향 및 평단의 소극성이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우리나라의 전통적 만화 독자들은 가상에 비해 현실에 호의를 보임으로써 SF는 불모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물론 이러한 현실 우위는 요즘 대세를 이루고 있는 판타지물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나, SF물에는 그만큼의 관심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는 생산자측도 일조한 것으로 평가된다. 같은 공상의 세계를 펼치더라도 전형적인 판타지물과 SF물은 그 기반이 다르다. 전형적인 판타지물은 어떠한 물리적 법칙에도 구속되지 않으며 과학적 설득력도 요구받지 않는다. 그야말로 ‘작가 마음대로’다. 이에 반해 SF물은 미래의 어느 시대, 아니면 우주의 다른 곳에서는 가능함직 한 것을 꺼내야 한다(이에 있어 <덴마>가 엄격한 의미의 SF물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초능력이라는 판타지적 요소가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능력의 발현 근거에 대해 작가가 나름 치밀하게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 <덴마>를 본격 SF물은 아니어도 최소한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된 SF물’로 규정하기에 충분하다). ‘실현 불가능한’ 환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과 ‘후대의 누군가는 겪을 듯한’ 미래를 엿보는 것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SF 작가에게는 다량의 독서를 통한 과학적 소양과 이에 대한 연구, 거기에 덧붙여 뛰어난 상상력까지 요구된다. SF물에 있어 이러한 난점은 결국 좀 더 제작하기 수월한 판타지 쪽에 추가 기울어지게 만든다.

결국 판타지물의 만연에 비해 SF물은 작품 자체가 희박하다. 이는 필연적으로 독자가 SF물에 대해 감수성을 발달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함으로써 제작자에게 ‘독자의 무관심’으로 피드백 되는 악순환을 야기한다. 우리나라 만화계의 공급 및 수요 측에 있어 노정된 이러한 한계는 SF 작품에 대해 독자의 정당한 관심과 평가를 기대하기 어렵게 한다.

한편 평단의 소극성과 관련해서는 한국 만화계에 작품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이슈를 제공해줄 만화 평론가 집단 자체가 활성화되어 있는지 문제된다. 이슈화를 통해 만화의 발전을 견인해 줄 평단이 취약한 상태에서 가뜩이나 열악한 환경의 SF물이 세상의 관심을 끄는 일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덴마>에 대해서는 이를 정당하게 평가해주는 평단도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독자층도 모두 취약하며, 따라서 <덴마>를 걸작으로 평가하는 논자들의 목소리도 그리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다.

(2) 외적 원인
일단 마케팅에 있어서는 ‘네이버 웹툰’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최선의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본다. 제작자 측의 추가적 재원이나 노력이 필요 없다. 결국 작품의 플랫폼에 있어서는 최적의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한 셈이다.

그러나 미디어의 관심을 보자. 미디어의 관심은 당대의 이슈와 작품의 상징성이 서로 맞아 떨어질 때 극대화된다. 비정규직이 이슈화되면서 <미생>이 거둔 흥행성적이 이를 대변해준다. SF물로서는 이러한 관심 획득이 요원하다. 과학을 선도하는 미국이나 일본에서라면 모를까 과학적 주제 자체의 담론이 취약한 국내 여건상 당분간 이러한 무관심은 지속될 것이다.

한편 관련 산업계를 보자. 최근 영화계와 방송계가 앞 다투어 만화계를 아이디어 은행 및 흥행 가늠자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만화의 효용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활용하여 생산되는 만화는 막대한 자본을 투여하고 그 리스크를 감당해야 하는 영화계나 방송계 입장에서 리스크를 감소시킬 투자지표로 활용될 수 있다. 즉, 만화에 대한 독자와 사회의 관심을 안전장치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독특한 아이디어와 세계관을 제시하는 만화, 관심 끌기에 성공한 만화를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고 최소한의 흥행성과를 보장받으려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시도가 실패한 사례도 누적되면서 영화계나 방송계와 만화계의 밀월에 대한 지나친 낙관을 경계하게 한다). SF물은 여기서도 푸대접이다. 우리나라 영화나 방송에 있어 SF에 대한 관객 및 시청자의 선호가 높지 않은데다가 SF 제작에는 거대한 자본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SF는 미국 꺼 보면 되지.”라는 풍토 또한 이 땅에서 SF 영화나 드라마가 뿌리 내릴 수 없게 하는 슬픈 현실이다.

<덴마>가 과학문명의 발달에 대한 기대와 상상을 즐거워하는 시대, 그러한 발달의 실현에 대한 기대감이 충만한 장소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축복받은 걸작’이 되었을까?

결론적으로 <덴마>는 ‘네이버 웹툰’이라는 막강한 화력을 등에 업었지만, SF가 이슈화되기 힘든 사회적 환경과 관련 산업계의 외면 속에서 공허한 포성만 울리고 있다.

 

4. 결론 – 꼬마의 몸에 갇힌 <덴마>. 탈출은 가능할까?

작품 속 덴마는 꼬마의 몸에 갇혀 있다. 탈출을 꿈꾸며. <덴마> 또한 열악한 환경에 갇혀 있다. 탈출은 가능할까? 지금처럼 몇몇 팬들이 웅성거리는 정도가 아닌 대중의 열렬한 환호를 누릴 날이 올까? 희대의 작품으로 우리나라 SF계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을까? 시대와 장소를 잘못 안고 태어난 <덴마>. 그러나 영원한 저주는 없다. 저주를 풀 마법은 우주 어딘가에서 해피엔딩을 꾸미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법을 소환하려는 가녀린 목소리 하나가 여기 있다.

현울림

만화의 문화적 가치를 세상에 널리 알리려는 나름의 소명을 가지고 만화를 통한 소통과 만화의 사회적 기능을 키워드로 삼아 글을 쓰고 있다. 만화 속 유쾌한 캐릭터들이 사각의 틀을 벗어나 현실 속에 거닐기를 바라며, 현실의 사람들은 만화속 세상에서 다양한 세계관과 원대한 꿈에 마주치고 평생 간직할 친구들과 사귀기를 희망한다. 2015년, 언제가 세상을 지배할 만화 왕국의 깐깐한 문지기 자리라도 꿰차기 위해 더 늦기 전에 만화판에 숟가락을 얹었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도전적이고 뜨거운 글쓰기를 좋아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린 경험이 만화계에 작은 보탬이 될 것이라는 소신 하에 오늘도 키보드를 다독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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