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_ ‘촌스러움’이 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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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네이버에서 4부 연재를 재개한 웹툰 <송곳>은 한국의 노동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폭주하는 한국 사회에 튀어나온 다시없을 명작’이라는 출판사의 다소 오글거리는 홍보 문구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만큼, <송곳>은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을 찾기가 힘들다. 일단 <송곳>은 재밌다. 흔히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작품들이 지나치게 진지한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재미’라는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송곳>의 재미 요소 중의 하나는 부당한 현실에 맞닥뜨린 개인들이 고민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주인공인 ‘이수인’이 ‘나는 어쩌다 이런 인간이 되어버린 걸까’하고 고민하는 장면에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감정 이입하게 된다. 남들보다 조금(?) 더 정의로울 뿐인 ‘이수인’이 노조 사무장이 된 까닭은, 그가 폭력적인 무정부주의자나 빨갱이라서가 아니다.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그가 노조원들을 이끌고 싸움을 시작하기 위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 모든 과정들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기 때문에, 마치 ‘이수인 영웅기’를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달리 말하자면, ‘노동 학습 만화’로 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림1
주인공 ‘이수인’, 잘생겼다

 

그림2
노무사 ‘구고신’. 역시 잘생겼다.

 

게다가 탄탄한 데생력을 바탕으로 완성된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외모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규석 작가는 최대한 수작업을 연상시키는 터치를 고수하면서도 ‘팔릴만한’ 스타일로 캐릭터들을 제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좀 더 어린 친구들이 봤으면’ 해서 네이버 연재를 결정한 것(1) 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미형이 되었을 주인공 ‘이수인’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이 상당히 유실된 상태임에도 섹시함을 감출 수 없는 노무사 ‘구고신’, 작정하고 잘생긴 ‘주강민’을 포함해, 심지어 못된 사람이어야 마땅한 점장 ‘갸스통’조차 잘생김을 억누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의 만화적인 미모가 <송곳>에 있어서 그토록 중요한 것일까? 물론이다. 루카치적인 의미에서 ‘전형적’ (2)인 이 캐릭터들이 달성한 위업은, 오직 이들의 ‘실제 노조에는 있을 리가 없는’ 외모와 결합했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알다시피, <송곳>은 분명 실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각 인물들 역시 실존 인물을 모델로 삼고 있다. 만약 <송곳>이 이 같은 ‘사실’을 재료로 아무런 변형이나 재구성을 가하지 않은 채 다큐멘터리처럼 그려졌다면 어떨까. 추측하건대 독자들에게 작품을 ‘재미’로 소비할 가능성은 한 컷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캐릭터들의 보다 만화적인 외모는 작품을 단순히 리얼리즘적 양식에 고정시키지 않으면서 다양한 소비 방식과 해석을 수용한다. 현실에 대해 말하기 위해 현실을 말 그대로 반영할 필요는 없다. 최규석 작가의 전작들과 <송곳>이 구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단순히 사실적인 형상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적 서사를 가진 캐릭터들이 적극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3
극중 현 노조위원장 ‘주강민’. 너무 잘생겼다

고백건대 나는 결코 최규석 작가의 팬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접한 그의 작품인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습지생태 보고서>나 <대한민국 원주민>, <울기엔 좀 애매한> 역시 꼬박꼬박 챙겨보면서도 그가 어떻게 ‘촌스러운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 바빴다. 그것은 단지 그림체가 ‘리얼’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눈이 크고 팔다리가 긴 ‘비현실적’인 그림체가 표상하는 일본 만화의 정체성에 대항하기 위해 비교적 현실적인 인간의 형상에 가까운 그림체를 무조건 ‘한국적’인 것이라 주장하는 입장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 요컨대 <인간극장> 식의 다큐멘터리가 제시하는 재현 방식에 대해 떠올려 보자. 세상에는 이러이러한 인생들이 있고, 그 인생들은 무척 비참하고 곤궁하지만, 어쨌든 오늘도 울고 웃으며 살아간다는 식의 서사. 개별적이고 특수한 하나의 인생이 들이밀어지고, 이것이 ‘진짜’라고 주장하는 재현에 대해 달리 뭐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같은 상황은 재현 대상과 재현 사이의 거리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현실의 구질구질함을 ‘노골적으로’ 재현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리얼리티가 확보되는 것일까? 오히려 노골적인 재현 방식만이 리얼리티를 보여줄 수 있다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실을 꾸밈없이 재현하려는 태도가 단일한 방법론으로 고정될 때, 리얼리티는 경직된 형식으로 박제되고 말 것이다. 미술 이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아방가르드와 키치>에서 비판하고자 했던 바가 그것이고, 70년대 한국 민중미술에 가해졌던 비판 역시 이와 동일한 것이었다.

 

그림4
학교 필독서로 지정되어 있었던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진지함을 ‘촌스럽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어떤 재현은 단지 말해지는 것만으로 충분해서, 가능한 미학적 비판에서 면제된다. 특히 그것이 소수자의 입으로 말해진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최규석 작가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가 분명하고 직설적으로 계급과 소수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것은 현실을 고발하기 위한 하나의 알레고리로서 기능하는 것 같다. 작품의 모든 요소들은 간단하게 이데올로기적 독해를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고, 이미지는 몇 마디 말로 축소되어 이데올로기적 투쟁에 봉사하기 위해 납작해질 따름이다. 이같이 서사와 이미지가 수단으로서 동원될 때 예술은 ‘교과서’ 혹은 ‘프로파간다’로 환원되고 만다. 귀스타프 쿠르베의 작품을 독해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마르크스주의 미술사학자인 T.J.클락과 엘렌느 뚜생 사이의 뚜렷한 견해차는 이 같은 ‘예술의 수단화’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보여준다. (3) 한 작품을 ‘위대한 계급적 성취’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작품의 미학적, 형식적 요소들을 어느 정도 무시할 수밖에 없다. 최규석 작가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부터 <지금은 없는 이야기>를 둘러싼 대부분의 비평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가 ‘얼마나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는지’가 곧 작품의 가치로 점수 매겨진다. 작품의 재미에 대해 말하는 대신 말이다.

물론 <송곳> 역시 이 같은 환원주의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최규석 작가 본인이 밝혔듯 <송곳>은 ‘학습만화’다. 즉 노동 현실에 대한 인식 계몽의 수단으로서 <송곳>의 한 측면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여전히 최규석 작가의 이전 작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판점들은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송곳>을 교과서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읽게 해야 한다.”는 베스트 댓글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은, 결국 앞서 지적한 ‘예술의 수단화’에 대한 논쟁과 <송곳>이 그리 멀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게다가 ‘<송곳>은 만화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홍보 문구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아니, <송곳>을 정말로 ‘재미있게’ 보고 있는 것인지 의문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렇든 저렇든 좋으니 그냥 많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림5
아쉬워서 넣어본 최근 화에서 세 사람의 모습…

 

진짜 <송곳>이 ‘교과서’가 된다고 해도, 뭐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송곳>같은 작품이 이전에 존재하기나 했던가. 한국 사회의 노동 문제에 대한 뚜렷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대중성을 놓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송곳>의 가치는 충분히 증명된다. 더 격하게 말하자면, 계몽 좀 하면 어떤가, 좀 촌스러워지면 어떤가. 어차피 억울하고, 상처받고, 부정당한 사람들은 누군가의 눈에는 언제나 촌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이 싸움을 멈출 이유는 되지는 못한다. 그 진지한 열정만이 싸움을 시작한 사람의 유일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불편한 이야기’로서 <송곳>이 가지는 힘 또한 마찬가지다. <송곳>의 결말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숨을 죽이고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이유는, 온 힘을 다해, 여전히, 작품이 독자들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송곳>을 아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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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소년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다음에는 청소년 사용자들이 적다. 네이버에서는 10대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 보다가 얻어걸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3949)

2. 루카치는 마르크스주의 예술이론가로, 리얼리즘 문학을 중심으로 예술과 사회에 관한 변증법적 논의를 펼쳤다. 여기서 말하는 ‘전형’이란, 한 개별자가 특정한 현실 속에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 특정한 현실이란 사회의 모순을 집약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단면이며, 개별자는 이 단면 속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자이다. 루카치에게 있어서 ‘전형적’ 인물은, 현실의 (물적) 조건들과 자신의 개별적 서사 사이에서 고뇌함으로써 그 시대의 한계와 모순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3. 현시원, “민중미술의 유산과 ‘포스트 민중미술'”, 한국예술종합대학 예술전문사학위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