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의 저주 받은 걸작에 드러난 디스토피아 세계관 

 

 

신세대 성인만화가들의 탄생 : 양영순 VS 윤태호 VS 이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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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이유정

만화가 이유정은 1994년 만화잡지 <주간만화> 공모전에서 단편 만화 <혈류>로 데뷔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이름을 독자들에게 알리게 된 계기는 그 이듬해 1995년, 국내 최초로 ‘완전 성인 만화’와 ‘남성 에너지가 폭발하는 쾌감 무한대 성인지’라는 슬로건을 내건 성인만화 잡지 <미스터블루>(1995년 5월 창간)에 섹시한 여자 뱀파이어를 사랑하는 평범한 직장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요동의 뱀파이어>를 연재하면서다. 이 당시 이유정은 국내 독자들에게 낯설었던 뱀파이어, 그것도 섹시한 여자 뱀파이어를 끌어들여 호러를 성인만화에 접촉하면서 X세대 성인만화 작가로서 신선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 이듬해인 1996년, 이유정보다 1년 빠른 1993년 월간 만화 <점프>에 만화 <비상착륙>으로 데뷔한 만화가 윤태호가 같은 만화잡지 <미스터블루>에 <흥부놀부전>의 뻔하디 뻔한 이야기를 확 뒤집은 고전 해학 패러디 만화 <연씨별곡>을 연재하면서 상업적으로 인기를 얻는다. 윤태호는 이 여세를 몰아 고전해학 패러디 만화 시즌2로 <춘향전>과 <별주부전>의 고전 패러디 성인만화 <춘향별곡>, <수궁별곡>을 연달아 내놓았다. 풍자와 해학, 패러디와 언어유희, 여기에 에로티시즘까지 오락적 재미를 완벽하게 보여준 윤태호의 만화는 이현세, 허영만, 박봉성, 이상세 등과 다른 노선의 성인만화 장르를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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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정의 <요동의 뱀파이어> 양영순의 <누들누드> 윤태호의 <연씨별곡>

이렇게 만화가 윤태호가 만화가 이유정의 복병이 될 것 같았지만, 이유정의 진짜 복병은 같은 만화잡지에 이미 따로 존재했다. 이 괴물 같은 한 신인 만화가의 등장은 만화잡지 <미스터블루>를 넘어 한국 만화계에서 이유정, 윤태호 등 신세대 성인만화작가의 탄생 부싯돌에 확실하게 기름을 붓는 사건이 되었다. 그가 다름 아닌, 1995년에 <미스터블루> 만화공모전에서 당선한 기존의 성인만화 틀을 깡그리 깨부순 엑스맨 양영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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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성인만화 <미스터 블루> 창간호 (1995년 5월 25일)

“뛰어난 데생력, 독특한 연출방식, 최근 몇 년간 나타난 신인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신인이다(허영만),” “외설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자기의 성(城)을 구축했다. 빈틈없는 구성과 연출, 단단한 데생, 풍부한 상상력이 무너짐 없는 성을 만든 것이다(이현세),” “성인만화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시험작이다. 굳은 틀을 깨고 다양한 사고를 보여줘 바람직하다(권영섭).”

이런 찬사를 한몸에 받으면서 데뷔한 양영순은 코믹에로 만화 <누들누드>(1997년 1권 발간) 단 한 작품으로 1990년대 중반 가장 영향력 있는 만화가로 등극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한국만화사에서 한 획을 긋는 신세대 성인만화가로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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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에 실린 양영순 인터뷰와 만화기사 (1997년 4월 5일)

양영순의 코믹 에로 만화, 윤태호의 고전 패러디 만화 그리고 이유정의 SF 판타지 에로 만화. 이렇듯 세 명의 신세대 성인만화가들이 추구했던 장르는 제각각이었지만, 같은 만화잡지에서 연재했던 이들의 서열은 나이나 데뷔 서열과는 상관없이 양영순, 윤태호 그리고 이유정으로 굳어지는 분위기가 확실했다. 그 뒤 이들은 데뷔 초창기와 마찬가지로 각자만의 노선을 명확히 가져가면서 그들만의 성을 구축해갔다. 양영순은 <누들누드>와 <아색기가> 이후 SF 판타지 장르로, 윤태호는 <야후> 이후로 사회적 비판이 담긴 드라마 장르에 집중했다. 한편 이유정은 <열정의 투페이스> 이후 <가물치전>, <ASIAN>, <MOON>을 등을 쏟아내면서 청소년 독자들을 겨냥한 SF 판타지 액션을 창작했다.

2015년 만화가 이유정의 이름은 독자들에게 낯선 존재다. 그도 그럴 것이, <미생> 등 사회성 짙은 만화를 발표하면서 대한민국 최고의 만화가가 된 윤태호와 단 한 편의 만화로 한국만화사에 족적을 남기면서 ‘누들누드 신드롬’을 만든 양영순의 그늘에서 신세대 성인만화가로서 이유정은 자신만의 색깔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한 채 1990년대에 나타나고 사라진 무수한 만화가들 가운데 한 명이 돼 버렸다. 그럼에도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린 이유정을 1990년대 중반 신세대 성인만화를 추구했던 선두주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저주 받은 그의 걸작들에서 이 X세대 만화가가 추구했던 한국형 성인만화의 스펙트럼을 사회적 ‧ 문화적 관점에서 분석해보려 한다.

 

한국형 성인만화의 탄생과 히어로 캐릭터 신화
먼저 한국형 성인만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해본다. 성인만화의 개념조차 ‘19세 미만 구독 불가법’에 의해 강제로 정리된 마당에, 과연 한국형 성인만화란 무엇인가, 라는 논쟁은 어쩌면 공염불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한국형 성인만화의 본격적인 발화점을 1960년대 후반 성인을 위한 대중잡지 붐을 주도한 주간지 시대에서 찾아야 한다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다. 1964년 9월 27일에 창간된 <주간한국>은 1970년대 주간지 전성시대의 신호탄이 되었다. <주간한국>의 창간에 이어, <주간중앙>(1968년 8월 24일), <선데이서울>(1968년 9월 22일), <주간조선>(1968년 10월 20일), <주간경향>(1968년 11월 17일), <주간여성>(1969년 1월 1일) 등이 속속 창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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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주간지 <선데이 서울> 창간호 (1968년 9월 22일)

이처럼 1960년 말부터 1970년대 대중잡지의 창간 붐에 견인차가 된 요인은 두 가지다. 첫째, 텔레비전 보급이 만든 시각매체의 활성화. 둘째, 경부고속도의 개통에 따른 산업도시로의 인구 이동이다. 먼저, 1961년 12월 31일, ‘박정희 군사혁명 정부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국영 KBS는 텔레비전 문화의 서막을 열었다. 텔레비전은 청각과 활자 매체 위주였던 문화패턴에서 시각매체의 문화패턴으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다음으로, 1968년 2월 1일에 착공되어 1970년 7월 7일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기념비적인 일로 한국 문화사를 뒤흔든 사건이기도 했다.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든 경부고속도로는 산업의 시스템은 물론, 사람의 소비생활 패턴마저도 바꾸어 놓았다. 당시로선 장시간 장거리 여행을 해야 했던 여행객들이 버스에서 무료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간지 읽기였다. 시외버스 정류장마다 가판대에는 주간지들이 넘쳐났다. 여행자들은 대중지를 찾기 때문이다. 1970년대 주간지는 ‘고속도로 문화’나 다름없었다.

1970년대 초반, 대중잡지인 주간지에는 해외 만화가의 성인만화(1컷 혹은 4컷 만평)들이 주로 실렸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점차 주간지에 국내 만화가들의, 성인 독자들이 읽을 만한 성인만화를 연재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런 주간지들 가운데 성인만화 연재를 선도했던 주간지가 바로 <선데이서울>이다. 이 당시 <선데이서울>에 연재된 고두현의 <미스터 기막혀>, 박수동의 <고인돌>, 방학기의 <다모 남순이>, 고우영의 <임꺽정> 등은 한국 성인만화의 서막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형 성인만화 장르의 폭을 넓히고 내용을 살찌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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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제목도 생뚱맞은 <다모 남순이>의 등장이다. 1974년도에 이미 <선데이서울>에 <애사당 홍도>를 연재했던 방학기가 조선시대 여형사 다모의 활약을 그린 추리 활극 <다모 남순이>는 1994년 <스포츠서울>에 <조선 여형사 다모>로 리메이크 되었고, 2003년 7월 28일에 MBC에 드라마로 방영되면서 ‘다모 폐인’이라는 신드롬을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방학기의 주인공 캐릭터는 남성이 아니라는 데 있다. 애사당 홍도는 그러하지만, 조선 여형사 다모의 등장은 사뭇 그 의미가 남다르다.

첫째, 남성이 주 독자층이었던 <선데이서울>의 독자층에 여성들의 유입이 반영되었다. 1974년을 기점으로 <선데이서울>은 여성 독자층(주로 여공, 여자 접대부, 가정부 등)을 흡수하기 위해서 다양한 만화뿐만 아니라, 여성 취향의 기사(메이크업 관리, 패션, 연예인 소식 등)도 실었다. 이런 독자층의 변화를 의도하고 기획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모 남순이>의 등장은 여성 독자들에게 재미난 읽을거리였다.

둘째, 주인공은 남자이어야 하며 남자는 곧 히어로다, 라는 명제를 깨버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1950년대 김용환의 ‘코주부’와 김성환의 ‘고바우’는 지식과 지혜는 물론, 나이와 유머마저 갖춘 연륜 있는 남자 어르신, 1960년대 산호의 ‘라이파이’와 손의성의 ‘혁’, 1970년대 고우영의 ‘일지매’ 캐릭터는 강력한 체력과 무한한 힘을 바탕으로 불의에 맞서는 정의의 기사를 대표한다. 이런 명제는 1980년대에도 이어진다. 이상무의 독고탁은 이 시대 최고의 휴머니스트로, 허영만의 ‘이강토’는 다양하고 복잡한 현대 젊은이의 상징으로, 이두호의 ‘독대’는 반골기질이 가득한 혁명가로, 이현세의 ‘오혜성’과 박봉성의 ‘최강타’는 고독과 우수가 가득한 광기의 청년으로 등장한다. 결론적으로 1950~80년대부터 엎치락뒤치락했던 ‘남자 히어로의 맹목적 환상’은 ‘오혜성 캐릭터’에 이르러 ‘최고 정점’을 찍는다.

1960~80년대 만화 속 남자 캐릭터는 가부장적 사고에 입각한 반항적 남성우월의식과 강력한 카리스마 리더십이 구비된 신화 속 영웅상이었으며, 권선징악의 플롯 속에서 세상을 구원하고 심판해야 할 그리스도적인 고독한 남성상으로 규정되었다. 한국현대사에서 이러한 남성상은 한국전쟁, 산업근대화, 민주화운동 등의 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된 남성만의 성, 즉 남성적 패거리 심리가 만든 주체적 우상화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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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여형사 다모>의 한 장면

1960~70년대의 ‘남자 히어로 캐릭터에 대한 열병’ 속에서 불쑥 등장한 방학기의 다모 남순이는 당시로서 혁명적인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양반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다소곳한 어린 소녀를 뜻하는 다모는 그 단어의 의미와는 딴이하게 다른 조건을 갖춘 여성이었다. 키 150센티미터 이상은 되어야 했으며, 쌀 40킬로그램을 들어 올릴 수 있어야 했고, 막걸리를 5사발을 먹을 수 있는 주량에 발차기 등 격투기와 체력을 골고루 갖춘 여장부나 다름없었다. 부패한 사대부까지 체포할 수 있었던 다모는 조선 판 여자 히어로(히로인)이었다.

 

1990년대에 등장한 신세대 히로인
1980년대에 정치사회적으로 통제와 폭압의 독재정책을 폈던 신군부세력은 문화적으로 3S(screen, sports, sex) 정책전술을 펴면서 국민들의 시선과 관점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애썼다. 이 시대의 만화 속 여성 이미지는 다모 남순이처럼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성을 가진 캐릭터로 그려지기보다 여전히 가부장적 남성의 시각에 의해 왜곡되고 가공된 나약한 캐릭터로 설정되고 있었다. 일편단신 민들레처럼 한 남성만 바라보며 기대는 의존형 캐릭터(이현세의 ‘엄지’)이거나 유교적 성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애쓰는 성 해방론자(한희작의 여자들), 사회적 남성우월주의에 희생된 육체적 · 정신적 피해자(배금택의 ‘변금련’), 유교적 가치관에 따른 현모양처와 신사임당의 모습을 갖춘 누이(김동화의 ‘이화’) 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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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의 까치와 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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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작의 <여자야 여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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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화의 <향토빛 이야기>

하지만 1987년 민주화 항쟁과 대통령 직선제를 거치면서 1980년대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고, 1992년 봄 혜성같이 등장한 X세대 뮤지션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한 열풍은 1990년대 사회 전반에 대중문화 트렌드를 양산했다. 이처럼 X세대 열풍은 성인만화계에도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고우영, 박수동, 강철수, 이현세, 허영만, 한희작 등으로 한정된 성인만화 작가군에도 신선한 피를 가진, 소재나 주제에도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신세대 성인만화 작가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신세대 성인만화가들로 이유정, 윤태호, 양영순, 박성훈, 정원, 박무직, 김행장, 강주배, 김연서, 홍승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신세대 성인만화가들 가운데 이유정은 다른 신세대 성인만화 작가들과는 색다른 스타일을 추구하는 만화 장르를 보여주었다. 이름 하여, ‘SF + 판타지 + 섹스 + 폭력 + 호러 + 디스토피아 = 사이버펑크 성인만화’이다. 만화평론가 박석환은 “이유정 만화를 구축하는 키워드를 1)미소녀로 대표되는 에로틱한 신체 묘사, 2)남자 주인공에게 부여되는 성도착증적 시선 그리고 3)이 둘을 이어서 이야기를 이끄는 황당한 설정(개그)”으로 압축했다.

이 특징 가운데 미소녀 캐릭터,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글래머의 미소녀 캐릭터’는 이유정 만화의 색깔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키워드다. 1998년 단편집 <웃긴 걸>에서 반항기 많은 여고생을 시작으로 <가물치전>(1998년), <ASIAN>(1998년), <MOON>(2001년), <변태가 되자>(2002년) 등과 같이 청소년을 대상하는 만화에 주로 등장했던 글래머 미소녀 캐릭터는 1996~7년까지 연재한 단편 성인만화에 등장한 팔색조 같은 20대 젊은 여자 캐릭터에서 완성되었다.

이유정의 초기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는 롤리타가 아닌, 빵빵한 가슴, 잘록한 허리의 글래머, 눈빛에서 색기마저 물씬 풍기는 젊은 여자나 여전사의 모습이었다. <요동의 뱀파이어>에서는 처녀 뱀파이어, <열정의 투페이스>에서는 스무 살 짝사랑, <러브 머신>에서는 매춘하는 사이보그, <와일드 스트레스>에서는 여자 킬러가 되어 찌질한 남자들의 혼을 빼놓는다. 이들은 섹시하고 글래머러스하면서도 청순한 이미지 또한 간직하고 있으며, 거침없이 남자를 응징하지만 정작 자신의 남자에게는 순종하는 ‘현모양처형 여전사’다.

여전사의 모습을 한 히로인 캐릭터는 -우리에겐 조금은 낯설게 느껴질 지도 모르지만- 그리스 신화에서 이미 등장했다. 칼리돈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멧돼지를 잡기 위해서 남자 영웅들이 모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의 여자 영웅 아탈란테가 있었다. 남자 영웅들의 온갖 멸시와 희롱을 이겨내고 멧돼지를 잡은 자는 정작 아탈란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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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스트레스>의 여전사

이러한 여전사 이미지는 19세기 유럽 화가들에게는 팜므파탈(femme fatale)의 모습으로 재등장하게 되는데, 팜므파탈은 ‘치명적인 여자’라는 의미로 남성을 죽음이나 절망적인 상태로 몰고 가는 요부, 창녀 또는 악녀를 지칭하는 말이다. 팜므파탈은 문화적 측면에서는 근대적인 예술정신으로 이해되지만, 사회적 측면에서는 19세기 초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과 여성 간의 계급적 분쟁과 갈등을 담고 있다. 팜므파탈을 소재로 한 그림들은 대부분 남성적 관점에서 그려졌기 때문에 그림 속 여성들은 섹슈얼리티가 부각되어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근대화와 함께 여성의 성적 자유와 사회적 지위 상승이 대두되면서 남성들의 상상력이 극단화되었기 때문이다. 팜므파탈의 화신이 된 여성은 이브, 들릴라, 막달라 마리아, 다나에 유딧 그리고 살로메 등과 같이 요부나 여전사로 나타났다. 결국 팜므파탈은 19세기 남성들이 거세 콤플렉스에 대한 대항으로 만든 여성 판타지였으며, 근대화된 여성에 대한 남성의 혐오증이 기저에 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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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의 뱀파이어>의 현모양처

미국 할리우드 영화나 DC, 마블 코믹스에 등장하는 캣우먼, 원더우먼, 일본 망가에 나오는 쿠사나기, 나우시카 등은 여전사의 모습을 한,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여자 영웅 캐릭터다. 이유정의 히로인도 이들처럼 글래머 몸매, 섹시한 얼굴에 정신적 지혜와 육체적 강건함까지 갖추고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 이유정의 히로인은 다른 여자 영웅들이 갖지 못한 재주를 발휘한다. 그 재주는 다름 아닌, 무능력한 남자들의 콤플렉스를 어루만져주고 보듬어주는 모성애다. 결론적으로 여전사 이미지는 남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성을 보호하는 모성본능을 발휘하며, 더 나아가 대중의 욕망을 창출하고 대리만족을 제공하는 섹슈얼리티로 가득한 상품가치로 평가된다.

이유정의 성인만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섹시한 여전사 이미지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다만, 청소년 만화에서는 미소녀 즉 여고생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만화 <와일드 스트레스>의 스트레스로 괴물이 된 사람을 처단하는 섹시한 여자 킬러는 전형적인 여전사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만화 <요동의 뱀파이어>에서 여자 뱀파이어는 다른 남자에게 위협하는 흡혈귀지만, 정작 자신의 남자에게(그가 무능하든 우유부단하든 상관없다)는 현모양처 이미지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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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의 뱀파이어>에서 요동의 카리스마(?)

 

강박과 결핍의 사생아, 콤플렉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헐크, 앤트맨….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단골 주인공을 휩쓴 마블과 DC 코믹스의 영웅 캐릭터는 전 세계 남자들의 로망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헐리우드와 마블, DC 코믹스는 이토록 비현실적인 영웅을 만들어 냈을까?

헐리우드 스토리 컨설턴트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에서 헐리우드 속 영웅에 대한 의미를 고대 신화와 정신분석학자 칼 융의 집단 심리학에 근거를 두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융은 개인 무의식과 유사한, 집단 무의식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민담과 신화는 집단 무의식에서 솟아 나온 것으로 개인과 집단 모두를 아우르는 캐릭터 원형을 탄생하게 했다. 그 캐릭터 원형은 경이롭게도 시간과 문화를 초월하여 전 인류의 신화적 상상력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의 꿈과 인격에서도 상존한다. 이것이 다름 아닌 ‘영웅’ 캐릭터다.

영웅의 권능은 영웅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되지만, 사실 정신적 스승 즉 신이라는 절대자(혹은 부여자)에게서 증여 받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증여의 방식은 곧 영웅의 신화적 존재에 정당성과 당위성을 부여한다. 결과론적으로 영웅의 권능은 신의 그것을 대변하는 것이며, 신으로부터 성스러운 신탁을 받은 셈이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많은 영웅들이 제우스에게서 그 권능을 부여받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나 만화에 나타나는 영웅의 신격화는 이야기 플롯을 결정하는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영웅은 다수가 아니며 영웅의 힘은 누구나 꿈꿀 수 있지만,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그런 소유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사실 영웅이 되는 과정에는 혹독한 시련과 시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현대인에게 ‘영웅 되기’는 너무나 평범한 어떤 것, 혹은 누구나 꿈꾸면 닿을 수 있는 그곳, 아니면 돈으로 그 대가를 지불하면 장바구니에 담길 수 있는 상품쯤으로 오해되고 소비되고 있다. 사실 영웅은 단 한 명이거나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부여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인과 영웅 사이의 괴리감이 생기게 마련이다. 결국 이 괴리감은 개인은 물론, 집단의 무의식 속에서 강박과 결핍이라는 심리적 증상을 동원하며, 나아가 이 강박과 결핍이 콤플렉스라는 집약적 사생아를 낳는다. 결국 현대인에게 콤플렉스는 신에게 부여받지 못한, 아니면 신에게서 버림받은 아담과 하와의 죗값이며, 호기심을 못 이겨 재앙의 상자를 열고만 판도라의 숙명이며, 가혹한 시련을 감당하지 않으면서도 영웅의 힘을 얻고자 하는 미디어가 낳은 욕망의 허상이다.

이유정 단편집을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가 영웅이 되지 못하는 현대인의 콤플렉스다. 이유정 만화에서 욕망에 대한 허기와 약점에 송곳처럼 파고드는 콤플렉스는 남성성의 결핍에 대한 반감으로 혹은 태생부터 적자생존 논리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나약한 남성 캐릭터에서의 탈출로 이미지화한다. 우화 <왕자와 거지>의 쌍둥이 설정을 따온 만화 <열정의 투페이스>에서 볼품없는 지방 대학생인 주인공은 변태 성향의 변장술사의 도움으로 미남이 되면서 초라한 출신 성분과 태생적으로 나약한 육체에서 비로소 벗어나 원하는 미녀와 그녀의 사랑을 손에 얻게 된다.

우연히 얻은 마스크를 통해서 가공할 만한 힘을 얻게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마스크>(1994)와 마찬가지로, 만화 <열정의 투페이스>에서 미남의 외모는 헐리우드나 마블, DC 영웅의 가면과 동일시된다. 외모라는 가면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영웅의 힘이며, 결국 가면의 힘은 욕망 충족의 매개물로서 작용한다. 이처럼 가면과 욕망의 관계는 개인을 넘어 사회의 오랜 문화에서 인간의 내재적 욕망을 표출하고 그것을 해소하는 과정을 담아내는 중요한 알고리즘이 된다.

만화 <열정의 투페이스>가 남성의 외모 콤플렉스를 부각했다면, 만화 <요동의 뱀파이어>는 우화 <온달과 평강공주>와 <우렁 각시>, <선녀와 나무꾼>의 플롯을 차용한 이야기로 남성의 온달 콤플렉스를 표현한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단다. “성공한 남자의 뒤에는 자랑스러운 아내가 있거나, 놀라운 재주를 지닌 장모가 있다.” 이 속담에서 엿볼 수 있듯이, 여자의 내조가 없다면 대장부의 길이 험난한 골고다의 그것과 다름없다.

만화 <요동의 뱀파이어>에서 평강 공주와 우렁 각시, 선녀 이미지는 미모의 섹시한 뱀파이어로 나타난다. 만화에서 마초의 대표 캐릭터인 드라큘라 백작에게 희생당한 여자 뱀파이어는 이제 가해자 남성에 대한 복수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드라큘라의 남성다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찌질이 이요동에게 반하고 만다. 대체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이 남자가 가진 거라곤 순진무구한 동정심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바로 그 순진무구한 동정심이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작용했으며, 그 덕분에 찌질한 남자 요동은 미모와 섹시미를 겸비하고 강력한 파워마저 갖춘, 그러면서도 자신만을 무조건 내조하는 현모상처를 얻게 된다. 비록 뱀파이어이지만, 아니 이 현모상처가 뱀파이어이기에 직장이나 길에서 위협받는 자신의 남자를 제대로 보호할 수 있다.

 

21세기 죽음에 이르는 병, 스트레스
14세기 중세 유럽 전역을 장악한 죽음의 병은 당연히 흑사병 즉, 페스트다. 야생 들쥐나 벼룩에서 전염되는 이 병은 당시 유럽 인구의 4/5를 죽음에 몰아넣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여기서 아이로니컬한 점은 중세 유럽을 황폐화시킨 페스트는 죽음 우화를 끊임없이 양산했는데, 이 죽음 우화가 오히려 중세 종교의 교리를 더욱 굳건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데 있다. 죽음 우화들의 주제는 ‘죽음의 춤, 혹은 춤추는 죽음’으로 정의된다. 이것은 중세를 지배했던 사회적 상징이며 신비주의 종교관의 핵으로 자리 잡았다. 왜냐하면 페스트가 불러일으킨 죽음을 민중도 왕도 부자도 성직자도 피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중세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 페스트였다면, 전쟁과 식민지 약탈이 난무했던 혼란의 시대였던 19세기 유럽을 장악한 것은 ‘정신의 절망’이었다.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인간을 죽음으로 모는 최고의 병으로 절망을 꼽았다. 불안과 절망은 인간의 영혼에 잠식하여 그것을 갉아먹고 결국 인간을 스스로 죽음으로 내몬다. 이 절망과 불안은 21세기 현대 사회에서 ‘스트레스’라는 이름으로 계승된다.

사실 스트레스는 공룡들의 습격을 피해야 했던 원시인들에게도 존재했을 것이다. 인간은 생존본능을 느끼는 그 순간부터 스트레스를 벗어날 수 없기에, 매 순간 스트레스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무한 경쟁과 급격한 스피드 시대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스트레스 과부하는 원시인들이 부담했던 생존본능의 차원을 이미 넘어섰다. 이제 불안과 우울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는 사람의 뼈를 녹이고 뇌와 심장을 갉아먹는다. 설상가상 원시인들이 공룡을 만났을 때에나 느껴야 했던 스트레스를 현대인에게는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결국 현대인에게 스트레스는 중세인의 페스트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이 스트레스의 원인 제공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이 스트레스와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하며 어떻게 그것을 이겨 내야 할까? 아니면, 스트레스에 복종하면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육신적으로 피멍 속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 이유정의 단편집 가운데 만화 <와일드 스트레스>는 섹시한 스트레스 암살자가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한방에 처단해주는 에피소드로, 현대인이 매일 끌어안고 사는 스트레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과잉 스트레스가 야기하는 사회적 부작용을 블랙유머로 비꼬고 있다.

플라토닉 사랑에 대한 강박감이 만든 순진한 발명가의 스트레스(<와일드 스트레스 등장>), 학생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자격지심에 시달리는 어느 수학 교사의 스트레스(<어느 수학교사의 스트레스>), 학교에서 왕따로 시달리는 학생의 스트레스(<쫄남이의 스트레스>), 여자 친구의 성추행을 막지 못한 소심남의 스트레스(<사랑의 일차방정식>), 서른세 살 노처녀의 스트레스(<노처녀 스트레스와 위기의 남자>), 범인상을 타고났다고 해서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한 남자의 스트레스(<법 그리고 스트레스>), 키 작고 뚱뚱한 아줌마의 스트레스(<비만 스트레스>) 등등.

이처럼 스트레스의 모습은 그 사람이 처한 환경처럼 제각각인데, 정작 그 스트레스를 푸는 그들의 방법은 폭력과 살인, 그리고 성적 행동으로 일관된다. 만화는 스트레스를 받는 자와 그 스트레스의 원인 제공자로 개인에게 주목하지만, 그 스트레스를 푸는 대상은 사회로 확대된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만화가 이유정은 스트레스의 원인과 결과를 이렇게 풀어냈을까? 에피소드 <스트레스에 대한 보고서>에서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작지만 기발한 해답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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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스트레스> 가운데 에피소드 <비만 스트레스>

스트레스의 기원은 언제부터일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즉 조물주 신의 중엄한 명을 거역한 사건에서 시작한다. 이에 신은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신의 그 스트레스 DNA가 고스란히 인간에게 전염된 것이다. 왜? 성경에 따르면 본디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만들었으니까. 선악과를 먹은 후 아담과 하와는 벗은 몸에 대한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그 스트레스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종족 번식 외에도 쾌락을 위해 섹스를 하게 되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이겨내려고 했지만 이러한 작업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가 바로 전쟁이다. 만화가는 여기서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만약 태초에 와일드 스트레스가 존재했다면, 인간은 물론 신도 스트레스를 안 받았을 텐데 말이다. 이 얼마나 명쾌한 결론인가.

 

섹스와 폭력, 그리고 디스토피아
1970년대 성인만화는 대체로 고전문학의 패러디, 역사적 사건, 통속적인 멜로물, 섹스 코미디 등과 같은 소재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1980년대 성인만화는 스포츠, 기업, 정치, 조폭이라는 영역으로 만화의 소재를 확대했다. 이러한 소재의 확대는 복합적인 스토리 라인과 다양한 플롯의 효과를 덤으로 넓혀나갈 수 있었다. 또한 사회적 성취욕망, 남녀의 복잡한 애정관계, 배반과 복수, 신화적 구조 등이 조미료처럼 첨가되면서 이야기의 재미를 더욱 리얼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결국 ‘스포츠 + 기업 + 정치 + 조폭 + 사랑 = 1980년대 성인만화’, 라는 등식을 만들어냈다.

1990년대 성인만화에는 하나가 더 추가된다. 바로 ‘섹스’다. 물론, 1970~80년대 성인만화에도 섹스는 존재했다. 하지만 1980년대 신군부의 3S 정책 가운데 섹스 정책은 영화나 문학에 비해, 만화 분야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박수동, 강철수, 고우영, 한희작, 이현세 등의 만화는 섹스에 대한 인간의 본성과 육체적 욕망을 해학과 풍자, 또는 간접적인 패러디를 괜히 쑥스러운 듯 드러냈다(에로티시즘). 그에 비해, 1990년대 성인만화에서 섹스는 남성독자의 시각적 말초신경을 건드려 성적 충동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오락이 되었다(포르노그래피). 여기에 폭력과 살인은 양념처럼 반드시 끼어 넣는다.

1990년대에 고품격 섹스(?)를 맘껏 표현했던 작품을 꼽는다면 단연코 양영순의 <누들누드> 그리고 이유정의 단편 성인만화들이다. 두 작품 모두 섹스와 폭력, 그리고 위트를 다루고 있는 섹스 코미디 장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섹스와 폭력을 활용한다. 양영순은 섹스와 폭력을 주로 위트와 재미를 이끌어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면, 이유정은 섹스와 폭력을 디스토피아의 원인 혹은 결과물이라는 관점에서 풀어낸다. 그래서 이유정 만화에서 섹스와 폭력은 양영순의 그것처럼 경쾌하거나 기발하거나 밝은 면보다 무겁고 어둡고 엽기적이며 사회성까지 짙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되새김질을 은근히 요구한다. 결국 양영순이 리비도 문제를 개인의 무의적 본성으로 규정했던 프로이트라면, 이유정은 리비도를 개인은 물론,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집단적 본성으로 설명한 칼 융인 셈이다.

남성의 종족본능에 대한 욕구를 성적 퇴폐와 파괴, 그리고 강간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문제를 다룬 만화 <지구별 씨받이>(1996년 <미스터블루> 연재)는 여대생을 겁탈하는 교수들의 모습을 외계인 괴물로 묘사하고 있다. 만화 <와일드 스트레스>는 섹스에 대한 불만족을 개인적 무능함과 사회적 소외라는 기준으로 희화화하면서, 스트레스라는 돌출된 성격장애로 풀어내고 있다. 여기서 정화되지 못하고 폭발해버리는 성적 스트레스는 결국 개인을 넘어 사회적 혼란, 즉 ‘묻지 마 폭력’으로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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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씨받이>

직장 내 여직원에 대한 남자 직원들의 성희롱 문제를 코믹하게 다룬 에피소드 <성감대 양의 스트레스>에서 여직원은 자신의 엉덩이를 함부로 만지고 여성 자위기구를 선물하는 직장 남자들에게 총으로 위협하여 성적 수치심과 성적 언어폭력으로 되돌려준다. 에피소드 <노처녀 스트레스와 위기의 남자>에서는 고등학교 남학생에 성적 흥분을 느끼는 서른세 살의 미혼녀는 노처녀라는 이유로 시달린다. 정신과 의사가 내려준 스트레스 해결 방법은 남자 고등학생과의 강제적 성관계다. 이 만화는 남자들의 원조교제에 대한 우회적 비판을 담고 있다. 결국 이유정은 섹스와 폭력을 사적 범위를 넘어서 공적 범위 내에서 복합적으로 제대로 이해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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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감대 양의 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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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처녀 스트레스와 위기의 남자>

이유정 성인만화에서 성 담론의 결정판을 볼 수 있는 작품은 단편 <러브 머신>(1995년 <미스터블루> 연재)에서다. 미래 도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애인을 섹스 로봇으로 만들어 소유하고자 했던 남자는 결국 그 섹스 머신마저 다른 남자에 관심을 보이자 그녀를 살해한다는 내용의 이 만화는, 섹스와 폭력 그리고 살인을 넘어 성의 왜곡된 소유와 매춘의 미래에 대한 문제까지 거론한다. 카드 만능시대와 기계 만능시대가 인간의 섹스 욕망을 자본주의에 입각한 소비체계로 비판한 이 만화는 더 이상 섹스를 남녀의 인간적 교감이나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단지 배설의 욕망만 충족시키는 물질숭배와 허상의 사랑으로 간주하고 있다. 특히 이 만화는 사이보그 매춘부를 통해 성적 배설을 추구하는 사이버 섹스 시대를 예측하고 있다. 결국 시뮬라크르로 무장된 미래 사회는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다.그림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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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머신>의 섹스 로봇

 

저주 받은 걸작, 아니 대중이 저버린 걸작
1990년대 신세대 성인만화가 이유정은 스타일리시 감각과 사이버펑크 연출로 남성의 성적 판타지, 성적 결핍에 대한 스트레스, 섹스와 폭력에 대한 사회적 비판, 성폭력과 매춘에 대한 고민, 청소년 성폭력에 대한 기성세대의 무책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왜곡된 섹스문화, 직장 내 여직원에게 무심코 가해지는 성희롱, 시뮬라크르가 만든 디스토피아 등을 풀어냈다. 그는 1970~80년대식 성인만화의 한정된 소재를 확장하면서 성인만화에 사회성 짙은 메시지를 담아내려고 노력했으며, 2000년대의 사이버 시대를 예감하는 작품을 창작하면서 한국형 성인만화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유정의 초기 단편 성인만화에는 재미에 목적을 둔 오락적인 스토리보다 실험적인 요소가 자주 눈에 띈다. SF 판타지 성인만화라는 장르도 애매했으며 만화의 주제도 대체로 무거웠다. 더 나아가 비례를 파괴하고 형체마저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한 캐릭터는 독자들의 호불호를 명확히 했다. 그로 인해 이유정의 SF 판타지 성인만화는 비주류나 마니아 취향에나 어울릴 법한 장르 만화로 치부되기도 했다. 여기에 비슷한 시기에 같은 만화잡지에 등장한 라이벌 양영순과 윤태호에게 대중적 인지도마저 밀리면서, 이유정의 SF 판타지 성인만화는 저주 받은 걸작, 아니 대중이 저버린 걸작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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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판타지 성인만화 잡지 <메탈 위를랑> 과 <헤비 메탈>

유럽과 미국에서 이미 1970년대 중반 SF 판타지 성인만화 잡지 <메탈 위를랑(Metal Hurlant>(1975년)과 <헤비메탈(Heavy Metal)>(1977년)을 통해서 SF 판타지 성인만화는 보편적인 장르가 되었지만, 1990년대 한국 만화계에는 낯선 장르였다. 그런 시대에 SF 판타지 성인만화에 사회적 의미를 접목한 이유정은 한국형 성인만화의 변종인 동시에 SF 판타지 성인만화의 신세대 개척자로 인정받을 만하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유정은 SF 장르에 대한 고집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이 고집은 섹스 로봇 시대가 임박한 2015년에 더 유효하지 않을까.

“현실을 기반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고, 미래의 묘사는 바로 작가가 생각하는 지금의 현실이다. 내가 느끼는 SF는 현실적인 만화보다 더 공감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박세현

[만화문화연구소 엇지] 소장. 만화이론가로 활동하면서 상명대학교에서 만화이론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캐리커처의 역사] [미술 속 만화 만화 속 미술] [만화가 사랑한 미술] [비어즐리 또는 세기말의 풍경] [만화로 교양하라] [유럽 에로티시즘 만화를 엿보다] 등이 있다.
http://blog.naver.com/egon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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