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만화평론 20년

1995년 1월, 정확히는 1994년 12월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축하드립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셨습니다.” 운명의 시작이었다. <스포츠서울> 신춘문예 만화평론 부문에서 당선이 된 뒤 이름도 낯선 ‘만화평론가’가 되었다. 만화평론가는 ‘이색평론가’로 다뤄질 정도의 인지도였다. 당선작으로는 1991년 1회 손상익 선배에 이어 두 번째였다. 그 뒤로 꾸준히 만화평론가로 살았다. 그리고 이제 딱 20년이 되었다. 공교롭게 ‘만화 비평의 길, 만화 평론과 나의 만화 비평’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이것도 운명이거니 생각했다. 세상일들은 대개 운명적으로 돌아간다.

만화평론가로 활동을 하며 만화가 선생님들을 여러분 만나 뵐 수 있었다. 박수동 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선생님 제 아버지가 ‘선데이서울’에 기자로 계셨습니다. 선생님 말씀 하시더라구요.”라고 했다. 박수동 선생은 반갑게 “잘 계시는가?”하고 물어오셨다.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랬다. 기자생활을 하셨던 아버지는 1999년, 예순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한참 뒤 박수동 선생을 비롯해 여러 선생님들과 어울리는 자리가 있었다. 그 때, 박수동 선생께서 “아버님 말이야. 참 좋은 분이셨다고.”라고 다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버지는 사학과를 다니던 문학청년이었다. 소설가를 꿈꾸었는데, 기자로 방향을 틀었다. (나중에 기어이 소설가로 데뷔하기는 했지만) 한국일보사와 서울신문사를 다니셨는데, 일간지 기자가 아니라 주간지 기자로 근무했다. 70-80년대 주간지에는 꼭 만화가 연재되었고, 아버지도 만화에 관심이 많았다. 1995년 만화평론가로 데뷔한 이후 아버지는 “취재를 하다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나오면 만화 스토리를 써 보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항상 바쁜 아버지였지만, 매달 새로운 어린이 잡지가 나오는 날이면 그 잡지를 사 들고 들어오셨다. 그러다가 <어깨동무>와 <소년중앙>은 정기구독을 신청해 집으로 배달되어 왔었다. <새소년>도 분명 보기는 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매번 1종 이상의 어린이 잡지를 구독한 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만화문고도 자주 사 오셨다. 아마 1980년대쯤이었을 것 같다.

여원사에서 새로 만든 만화문고 ‘이서방북스’를 한 질로 사오셨다. 며칠을 꼼짝하지 않고 만화를 봐도 괜찮았다. 내 초등학교 시절 만화 독서는 100% 아버지가 구매해 준 잡지와 만화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1982년 <만화보물섬>이 창간되자 이 잡지를 구독해 주셨다. 1982년이면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만화보물섬>을 보고, 이현세와 허영만 선생을 만났다. 처음으로 동네 앞 만화방을 찾았다. <공포의 외인구단>을 비롯해 여러 권의 만화를 빌려 보기 시작했고, 다니던 교회 앞 헌책방에서 만화책을 사 모았다. 자연스럽게 만화 독서의 폭이 확대되었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만화를 자연스럽게 읽었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집안 사정으로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전라남도 무안군 망운면 피서리, 바닷가 집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세 살 아래 동생이 먼저 이사를 갔다. 이삿짐을 꾸리며 제일 큰 문제는 집안에 가득한 책이었다. 내 만화책과 아버지 잡지는 결국 동네 고물상으로 팔려갔다. 느닷없는 아버지의 퇴직, 나는 그때까지 신문사에 다니던 아버지를 꽤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난데없는 퇴직과 이사라니. 혼란스러웠다. 유치원, 초등학교 6년, 그리고 중학교 2년 반을 전학 한번 없이 다니던 사춘기 서울 소년에게 아무 연고도 없는 곳으로 이사 간다는 건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열심히 모았던 만화책이 모두 헌책방으로 사라지는데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유년시절과 이별하듯, 만화책과 이별하고, 중학교 3학년 여름 보충수업을 받고 서울과 이별했다. 면 소재지에 있던 중학교 한 학기를 다니고 나서 광주의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들어가 매달린 건 음악이었다. 록 음악에서 시작해 헤비메탈, 프로그레시브로 갔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친구 덕에 극장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런데 유독 만화를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다. 어쩌면 그렇게 오래도록 함께 했던 만화와 단칼에 이별할 수 있었을까? 록 음악, 영화 그리고 문학을 즐기면서 만화는 어린 시절의 추억쯤으로 멀어졌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의 무덤가 운운하는 시를 교내 백일장에 냈다. 갑자기 문예부를 담당하던 작문 선생님이 날 불렀다. “인하야, 시를 잘 쓰더구나. 이번 교내 백일장에서 특상을 탔다.” 특별히 잘난 특기가 없다 생각했던 나에게 유일한 특기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처럼 기자가 되고 싶던 고등학생은 시를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만화에서 예술성 성취는 가능한가?”

1988년 올림픽이 개최되던 해에 대학에 들어갔다. 우리 학번의 별명은 ‘88꿈나무’였다.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문학 동아리를 만들고, 문학소모임을 만들었다. 열심히 시를 쓰고, 학보에 시를 기고했다. 문제는 시인이 되기에는 감성이 부족했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1993년 대학을 졸업반이 되어 잡지사에 들어가서 기자가 되었다. 다양한 상품의 유래와 정보를 소개하는 잡지였는데, 르포에서 기획, 단신까지 다양한 기사를 썼다. 한편 후배들과 함께 창작모임을 계속했다. 시를 포기하고 소설을 시작했다. 문예지에 시를 응모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문예지가 폐간되며 원고가 그대로 반송되어왔었다. 내가 보낸 원고를 다시 읽어보니 부끄러웠다. 몇 편의 습작 소설을 썼다.

다니던 잡지사의 운영이 점점 어려워졌다.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 두고 프리랜서로 나섰다. 프리랜서 신분으로 이전에 다니던 회사에 기사를 기고했고, 회사에서 만난 선배가 소개해 준 잡지에 글을 썼다. 공교롭게 그 때 막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붐이 불기 시작했던 때였고 마침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기사를 쓰게 되었다. 서점에서 책을 사고,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렸으며, PC통신의 동호회 게시판을 뒤졌다. 문득 다시 만화가 읽고 싶어졌다. 창동역에 있던 서점이었다. 꽤 많은 만화를 팔고 있었는데, <댕기>에서 펴낸 ‘댕기네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김혜린 <불의 검>, 김진 <바람의 나라>였다. 그리고 한길아트북스에서 펴낸 이현세의 <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도 있었다. 유년 시절 항상 옆에 있던 만화와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이후 떨어져 지내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다시 만화와 만났다. 대학에 다닐 때 학교 앞 만화가게에서 몇 번 만화를 본 적이 있었지만, 그리 지속적이지는 못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만화는 나를 사로잡았다. 1994년 난 그동안 못 본 만화를 읽고, 또 읽었다.

어느 날 우연히 스포츠신문에서 신춘문예 공고를 보았다. 난 ‘신춘문예’라는 낭만의 전당에 오르고 싶었다. 영화 평론, 만화 평론 등이 있었다. 그래, 만화 평론을 써 보자. 김혜린의 <불의 검>과 이현세의 <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을 읽고 또 읽었다. ‘만화에서 예술성 성취는 가능한가?’라는 조금은 딱딱한 글을 썼다. 박성봉 선생이 이야기한 통속성과 도식성이라는 대중예술의 미적 특징을 토대로 만화미학의 가능성을 논한 글이었다. 전화를 받고, 수상소감을 적었다.

“기다림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일까? 어렸을 적 아버지가 사다 주시는 만화월간지를 기다리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모든 기다림을 대치시킬 수는 없을까? 모두들 너무 조급해 하는 세상이 돼버렸다. 한글을 깨우치면서 봐온 만화책은 중학교 3학년 까지 내 많은 부분과 함께 했다. 그러다 어찌어찌 그 친구와 헤어졌는데, 그들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돌아가자 반갑게 맞아주었다. 돌아보면 내 유년시절을 함께하던 만화와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중문화의 놀랄만한 파급력, 그 충격적인 힘에 대해 분명한 원인규명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만화에 매달렸다. 만화의 창작과 수용의 두 축에 평론이라는 윤활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러나 만화에 대해 도대체 무엇 하나 정리된 것이 없었고 만화는 늘 통속과 저질 시비에 휘말려야만 했다. 부담이었다. 내가 좋아하고, 내 유년의 기억들이 가득 담겨있는 만화가 도매금으로 휘청거리는 건 친근한 옛 친구가 당하는 고통처럼 보였다. 만화를 쓰레기로 보는 시선들 속에 오기도 생겼다. 예술이라는 이름의 쓰레기는 얼마나 많은가?”

이런 당선소감을 보냈다. 해가 바뀌고, 1995년에 되어 신춘문예 만화평론 부문 당선자가 되었다. 그래도 변한 건 없었다. 나를 위해 준비된 지면은 없었다. 하지만 시대는 1995년이었다.

 

만화 평론의 모퉁이 돌을 놓기 까지

우리나라에서 문화산업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문화부’에 ‘문화산업국’이 신설된 1994년부터이다. 문화산업국의 신설은 1994년 1월 청와대 보고에서 경제 부가가치 창출에 문화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 보라는 대통령 지시의 이행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이 즈음 ‘현대자동차 vs 쥐라기 공원’의 비유가 나왔다. 정부는 지금까지 규제하던 문화를 새로운 산업 영역으로 받아들이며 지원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부서가 신설되는 건 정부의 가장 강력한 정책 의지를 반영한다. 문화를 산업으로 바라보게 되며, 그동안 관심이 없었던 분야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출판, 방송, 영화, 음악 등은 꾸준히 정책의 대상으로 다루어졌다. 시상식도 있었고, 관련 학과도 있었다. 그러나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은 정책 대상이 된 적은 없었다. 정부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산업의 발전을 위해 전시, 컨벤션, 시상식 등이 결합된 종합행사인 SICAF(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을 기획했고, 대한민국영상만화대상을 수상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90년대 본격적인 대중문화 시대가 한국에 도래했다. 만화 주간지를 정점으로 한 만화잡지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고, <드래곤볼>과 <슬램덩크>의 인기는 다른 일본만화의 출판을 가속화시켰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LD나 비디오 등으로 복제되어 보급되었다.

SICAF는 정부의 의도를 뛰어넘는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1995년 8월11일부터 16일까지 총 6일간 KOEX(현 COEX)에서 개최된 SICAF는 총 15만명(1일 평균 2만5천명)이 관람했으며, 1996년 개최된 SICAF 96은 총 40만명을 동원해 1일 평균 5만명의 관객동원력을 자랑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의 조성은 만화 및 애니메이션 관련 학과의 개설로 이어졌다. 1992년 공주전문대에 만화예술과, 1995년 웅진전문대의 만화영화과, 경민전문대의 만화예술과 부산예술전문대의 만화예술과, 계원조형예술전문대의 애니메이션과가 개설되었으며, 1996년에는 청강문화산업대학의 애니메이션과가 개설되었다. 4년제에서도 1996년 세종대에서 영상만화과, 상명대학의 만화예술과, 순천대의 만화예술과가 개설되었고, 199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영상만화과가 개설되었다.

만화에 대한 대중적 인식개선을 위한 대형 페스티벌의 개최, 만화관련학과 설치 등은 만화 및 만화산업에 대한 언론의 관심을 끌어냈다. 만화에 대한 글이 급속도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전에 없는 1995년의 사건이었다. 상장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도 신문사에서 특별한 연락이 없었다. 사실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김이랑’이라는 필명으로 만화평론을 기고하던 선배가 전화를 했다. 한국만화평론가협회(이하 만화평론가협회)를 만들어 활동할 생각인데, 참여하라는 전화였다. 도대체 무엇부터 할지 몰랐던 나에게 선배의 전화는 상투적 표현처럼 한줄기 빛이었다. 인사동 첫 모임에 참여했다. 그리고 제일 어리다는 이유로 총무가 되었다. 손상익 선생이 참여했지만, 지속적이지 않았다. 만화평론가협회의 고정 멤버는 1대 회장인 곽대원을 비롯해 최열, 최석태, 김창남, 하종원, 정준영, 김이랑, 이재현, 백정숙, 한창완 그리고 나였다. 이들은 조금씩 출발이 달랐다. 이 다름은 9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만화비평의 지형을 그대로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열, 곽대원, 최석태 선배는 미술비평에 뿌리를 두고 있다. 김창남, 하종원, 정준영 선배는 언론이나 사회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이었고, 이재현 선배는 문학비평을 했으며, 김이랑 선배는 언론인으로 만화비평을 기고했고, 백정숙 선배는 만화동아리에서, 그리고 한창완 선배는 만화산업을 연구한 학자였다. 관심의 확대는 지면의 확대로 이어졌다. 선배들에게 들어온 청탁은 다시 내게 연결되었다. 대학학보와 교지를 시작으로 조금씩 지면이 들어났다.

만화평론가협회는 적극적인 공동사업을 모색했다. 1995년 1월 만화평론가협회가 발족하자마자 연이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첫 프로젝트는 인터뷰집. 이현세, 허영만, 백성민, 이희재 등의 인터뷰를 묶은 <우리 만화 가까이 보기>(눈빛)가 4월에 출간되었다. 난 백성민, 이희재 선생님의 인터뷰를 맡았다. 두 번째 프로젝트는 열두 명의 작가론을 묶은 <한국만화의 모험가들>(열화당)이었다. 난 여기서 길창덕, 김혜린 선생의 작가론을 썼다. 두 대형 프로젝트가 ‘작가’에 방점이 맞춰졌다면, 1995년 4월 14일 창간된 <씨네21>에는 매호 작품론을 연재했다. 이 지면에는 10명의 협회원이 돌아가면서 참여했고, 몇 개월이 되면 글을 써야 할 차례가 돌아왔다. 아무 것도 변한 건 없던 1995년이었지만, 사실 시대가 변했었다. 변화한 시대의 상징과도 같던 대형행사였던 SICAF 95(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의 큐레이터를 맡았던 한창완 선배의 요청으로 전시 섹션을 하나 맡아 참여했다. 이후 SICAF 96, 97, 99 그리고 2001년까지 큐레이터, 기획팀장 등 이름을 바꿔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평론가가 현장에 참여할 수 있게 된 소중한 계기였다.

사회적 여건과 정부 정책의 변화, 대중문화의 확산과 담론의 등장, 만화잡지시대의 본격화는 비평지면의 확대를 가져왔고, 이 시기에 만화평론가협회가 결성된 것이다. 뭔가가 변할 것처럼 끓어 오르던 시기에 나도 함께 하게 되었다. 그저 어리바리한 얼굴로 말이다. 난 주어진 기회를 무조건 받아들이며 조금씩 체계를 가다듬었다. <우리 만화 가까이 보기>와 <한국만화의 모험가들>에 참여하며 작가 인터뷰와 작가론 쓰기를 연습했다. <씨네21> 만화평론 참여를 통해 원고지 15매 분량의 저널 리뷰 쓰기를 익혔다. 그리고 대학보와 교지, 여러 잡지의 기고를 통해 다양한 영역의 글쓰기를 소화했다.

같은 해 자유기고가로 활동할 때 선배들의 제안으로 회사창업에 참여했다. 당시 PC통신에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회사들이 있었는데, 만화, 애니메이션, 여행, 광고 정보 등을 제공하는 스타트업에 참여했다.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 같은 PC통신에 만화정보를 제공했다. 이를 위해 출판사들을 돌아다니며 기자들과 얼굴을 익히고, 자료를 수집했다. 매주 어린이회관에 있는 육영재단과 용산에 있는 서울문화사, 대원문화출판사(지금 대원CI)를 방문했다. 잡지와 만화책들을 받아왔고, 만화계 사정을 들었다.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매주 만화출판사를 순회했다. 그렇게 모은 만화잡지와 만화책들을 간단한 리뷰를 위해 빼놓지 않고 읽었다.

1995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매주 만나 만화를 이야기하며 친해진 기자들이 자사 잡지에 지면을 제공해 주기 시작했다. 1996년 <이슈>에 ‘애니메이션에 대해 궁금한 몇 가지 이야기’라는 제목의 연재물(연재물의 제목은 ‘영화에 대해 궁금한 몇 가지 이야기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을 1997년까지 총 34회에 걸쳐 연재했다. 1996년에는 <화이트>에 ‘순정만화 다시보기’를 연재했다. 순정만화의 역사를 작가를 중심으로 살펴본 연재물이었다. <화이트>에는 ‘순정만화 다시보기’의 연재를 끝내고, ‘순정만화 이렇게 보면 100배는 재미있다’는 연재물을 이어 연재했다. ‘다시보기’가 역사를 살펴본 연재물이었다면, ‘100배는 재미있다’는 테마별 만화보기에 대한 연재물이었다. 1997년에는 <윙크>에 작품 리뷰와 인터뷰를 함께 수록한 평론을 총 10회 연재했다. 이밖에 1999년 <주니어 챔프>와 <윙크>에 애니메이션 기사를 연재했고, 간혹 <투엔티세븐>이나 <빅점프> 같은 성인만화잡지에는 단발로 기획물을 연재했다.

만화비평의 핵심은 독자들과 소통하는 지면의 창출이다. 1995년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새로운 대중문화로 각광을 받으며 조금씩 지면이 생겨났지만, 안정적인 만화평론 지면은 90년대 중반 이후 대원과 서울문화사의 만화잡지에서 시작되었다. 마치 80년대 만화잡지 <만화광장>이 80년대의 만화, 대중문화 비평가들에게 평론 지면을 내주며 80년대 만화비평이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매주 출판사를 찾아와 만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친해진 평론가에게 기자들은 지면을 내주었다. 이들 지면에 연재된 원고는 이후 <아니메가 보고 싶다>(교보문고), <아니메 미학 에세이>(바다출판사), <누가 캔디를 모함했나>(살림) 등 단행본의 초안이 되었다.

 

만화의 변천사, 그리고 지면의 변천사

대중문화의 시대였던 90년대, 그 한편에 만화평론이 있었다. 만화평론의 핵심지면은 만화잡지였지만, <씨네21>이나 <스크린>, <키노> 같은 영화잡지에서도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비평을 곧잘 수록했다. 이 시기 평론은 인정투쟁과 비슷했다. 인정을 받기 위해서 가장 시급한 건 만화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었다. 근대 미술평론과 만화평론을 했던 최열 선배는 1995년 5월 <한국만화의 역사>(열화당)을 출간했다. 1991년 <스포츠서울> 1회 만화평론 수상자였던 손상익 선배는 1995년 만화역사를 정리하기 위한 한국만화통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연구를 시작했다. 1996년 <한국만화통사 상>이 1998년 <한국만화통사 하>가 출간되었다. 이후 손상익 선배는 <만화가인명사전>을 출간하며 만화연구의 기본 데이터를 구축했다.

인정투쟁의 방향은 ‘다룰 만한 만화’에 대한 선별작업에도 드러난다. 흔히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만화가’라는 수식이 나오기도 하는 까닭이다. 이희재, 오세영, 박흥용처럼 현실주의적 작업을 한 만화가들이 재발견되었고, 이두호, 백성민, 김혜린, 김진처럼 장편 서사에 능숙한 작가들의 만화가 선호되었다. 선배 평론가들이 만화 역사를 포괄적으로 다루거나, 80년대를 기반으로 당대 만화를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어쩌면 지극하게 듣기 싫었던 유치한 만화에 대한 반작용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조금씩 그런 부담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만화가 자신의 영역을 점차 늘려갔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 잡지-단행본 시스템의 등장과 일본만화 출판(해적판과 라이센스 양쪽 모두)은 만화 독서를 은밀한 만화방에서 끄집어 냈다.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 해 벌어진 명예퇴직 사태와 새로운 소자본창업으로 만화 대여점이 등장했다. 만화 대여점은 새롭게 형성된 아파트 단지에 설치되었다. 만화를 와서 읽어야 하는 기존 만화방이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면, 만화를 빌려주기만 하는 만화 대여점은 넓지 않아도 되었다. 작은 가게마다 만화 대여점이 설치되었다. 시장은 놀랍게 변화했다. 화려하게 꽃피웠던 잡지-단행본 시장은 빠르게 변화했다. 만화 대여점이 늘어나자 출판사들은 종수 확대로 대응했다. 잡지를 구매하고, 맘에 드는 만화 단행본을 구매하는 잡지-단행본 시스템은 위기였고, 어떻게든 많은 종수를 찍어야 성공하는 물량의 시대가 되었다. 출판사들은 고민 없이 종수를 늘렸다. 이렇게 늘어난 만화는 대여점을 통해 저렴하게 공급되었다. 미처 비평문화가 자리잡기도 전에 만화는 일상적이고, 가벼운 문화로 흘러갔다. 수십 권을 쌓아놓고 보는 만화방식 독서문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만화왕국 일본의 만화는 90년대 후반부터 끝없이 번역되어 종수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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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만화평론에 적극적으로 지면을 제공해 주던 만화잡지들의 부수가 줄어들었다. 평론이나 기사 등을 소개할 여유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래도 1999년에서 2000년까지는 아직까지 90년대의 활기가 이어지던 시기였다. 정확히 2000년까지 <윙크>, <화이트>에 연재를 했다. 21세기가 되어, 만화잡지가 완연한 위기와 마주하자 비평지면이 먼저 사라졌다.

만화비평의 위기가 시작되던 때, 역설적으로 신문지면은 확대되었다. 90년대 중반 보여주었던 비평의 열기는 90년대 후반 정규 언론 지면으로 이어졌다. 1999년 1월 <일간스포츠>에 고병규의 <파이팅 브라더>를 시작으로 당대의 만화 리뷰를 연재했다. 90년대 중반 ‘다룰 만한 만화’에 대한 고정관념 혹은 압박감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김혜린 <광야>, 이유정 <아시안>, 박흥용 <내 파란 세이버>, 이빈 <ONE>, 오세영 <남생이>, 이강주 <세븐틴락>, 전상영 <미스터 부>, 김혜린 <겨울새 깃털 하나>, 김나경 <빨강머리 앤>, 서영웅 <굿모닝! 티쳐>, 이진영 <쥬피터 블루스>, 한혜연 <또 하나의 환상>, 윤인완, 양경일 <아일랜드>, 강모림 <달래하고 나하고>, 임재원 <짱>, 오경아 <첼로의 오후>, 박무직 <TOON>, 권교정 <적월전기>를 다뤘다.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씨네21>에 썼던 작품이 강경옥 <별빛속에>, 김혜린 <비천무>, 김원빈 <주먹대장>, 신영식 <하나뿐인 지구>, 김진 <바람의 나라>, 신일숙 <아르미안의 네딸들>, 윤승운 <맹꽁이 서당>이다. 물론 <씨네21> 지면이 만화 역사 속에서 걸작들을 골라 다룬다는 목적을 갔고 있었지만, 조금 더 다뤄질 만한 작품에 대한 무게감이 있었던 건 분명하다. 1999년 <조선일보>에 애니메이션 리뷰를, 2000년에는 만화 리뷰를 연재했다. 1999년에 <한겨레>에 만화리뷰, 2001년에 <동아일보>에 만화리뷰, <디지털타임즈>에 애니메이션 리뷰를 연재했다. 일간신문에 만화리뷰 지면이 늘어났지만, 만화잡지 지면처럼 긴 분량의 연재물을 기획할 수는 없었다. 대개 1,000자에서 많아야 2,000자 정도의 짧은 리뷰만 연재할 수 있었다.

21세기가 되어 만화는 우리의 일상적인 문화로 들어섰다. 비록 잡지-단행본 시스템이 망가졌지만, 생태계는 정말 살아있는 생태계처럼 학습만화로, 웹툰으로 변화했다. 그때마다 비평의 자리에 비집고 들어갔다. 1995년 용산과 어린이회관을 만화책 짐을 들고 끙끙거리고 돌아다닌 것처럼, 전장이 온라인으로 변했을 뿐이었다. 2004년 1월 17일 ‘만화가 방울방울’이라는 감성 가득한 이름으로 네이버 블로그를 시작했다. <씨네21> 430호에 기고한 ‘비주류의 혼’이란 글을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2015년까지 운영이 지속되고 있다. 2010년부터 네이버 파워 블로그가 되었고, 2014년까지 5년 연속 파워 블로그가 되었다. 기고한 원고와 기고하지는 않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있다. 페이스북에 페이지를 운영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본진은 블로그다.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사실 난 오래도록 “만화 같은”이라는 수사가 싫었다. <씨네21> 62호에 편집장이 쓴 칼럼에 반발해 반론을 써 <씨네21>에 투고하기도 했다. 반론문에서 「“성인이 되어서 들여다본 한국만화”에서 “많은 매력을 발견”했다는 편집장의 반가운 발언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나는 문장 속에서 우리 만화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발견했기 때문이다.」고 쓰며 발언 하나하나의 문제를 지적했다. 단어 하나에, 문장 하나에 발끈했다. 앞서 내 평론이 내가 좋아한 만화에 대한 인정투쟁에서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인정투쟁에서 조금 자유로워진 건 최근에 들어서다. 그러자 비평의 길이 조금씩 확대되었다. 관심은 두 개의 전혀 상반된 길로 뻗어 나갔다. 만화 역사에 숨겨진 여러 이야기들을 찾아내는 일도 흥미롭다. 난 이를 ‘만화금석학’이라 부른다. 당대에 어떤 작품이 있었는 가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 만화가 어떻게 나왔는지, 이를 다시 일본과 미국만화들과의 연관성에서 찾아내는 일도 흥미롭다. 만화게놈 프로젝트라고 할까? 2013년부터 2014년까지 만화연표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끝없이 나타나는 오류는 예정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게 했지만, 오래된 신문을 뒤지거나 작품 정보를 찾아내 몰랐던 정보에 접근하는 희열은 연구자만 느낄 수 있는 쾌감이었다.

더불어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한국만화의 지형들을 따라가며 예상하는 일도 흥미롭다. 디지털 플랫폼 시대로 이행하면서 한국만화생태계는 놀라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빛의 속도를 따라가고, 예측하는 일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현상들을 읽어서 보이지 않는 구조에 도달했을 때, 이 역시 쾌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 평론은 나의 글쓰기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어떤 작품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전달한다. 독자와 나를 만화 혹은 만화가가 연결해 주는 셈이다. 그러니 결국은 만화평론 역시 창작행위다. 사실 믿기지 않는다. 20년이라니. 만화평론에 정도는 없다. 아무래도 주로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도 하지만, 스토리, 그림, 연출, 장르, 작가, 역사 등 한 편의 만화는 아주 복잡한 맥락에 존재한다. 그걸 모든 지면에 다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난 그저 서로가 한 편의 만화로 공감하는 세상을 위해 글을 쓰고 싶다. 또 그 와중에 만화가 지닌 숨겨진 이야기들을 한자 한자 비석에서 복원하듯 찾아내고 싶다. 여전히 갈 길은 멀다.

박인하

누구라도 그렇듯 만화를 보며 자랐다. [소년중앙], [새소년], [어깨동무] 그리고 [보물섬]까지 한국만화잡지를 탐독했으며, 클로버문고의 팬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 80년대 만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했고, 허영만과 이현세의 팬이되었다. 세 살 아래 여동생과 함께 순정만화를 보았고, 함께 살았던 삼촌의 서가에서 고우영의 극화를 봤고, 집안에 굴러다니던 선데이서울에서 박수동과 방학기를 만났다. 대학 졸업후 운명적으로 만화를 다시 만나 1995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에 그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운을 사용해 당선된다. 이후 지금까지 만화와 관련된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지금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전시 기획, 만화 프로젝트 컨설팅, 만화비평 등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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