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만화가 인연이 되어 맺어진 오랜 친구 모임이 몇 개 있습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취향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지, 여전히 만화를 읽고 추천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그런데 웹툰보다는 출판만화 위주로 콜렉션을 하고, 그림 못 그린 만화는 절대 보지 않는다는 아주 확고한 선택기준을 가진 친구가 있습니다. 추천하는 만화마다 하도 얼마나 잘 그렸는지를 따지는 바람에 종내 다른 이들이 입 모아 외치고야 말았습니다.

 

“아니, 못 그린 만화 중에 좋은 만화가 얼마나 많은데?????!!!!!!!”

 

아주 깊은 안타까움을 실어서 말이죠^^.

결국 만화에서의 ‘못 그린 그림’과 ‘잘 그린 그림’에 대한 갑론을박이 한참을 이어졌지만, 취향이란 생각보다 질기고 완고한 것이어서 그 친구를 설득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웹툰을 보지 않는 (혹은 거부하는?) 친구의 고집이 한 몫 하기도 했고, 그렇게 오래된 자신의 기준을 그리 쉽게 바꿀 리 없다는 사실을 역시 각자 한 고집하는 우리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그 안타까움(라기보다는 제 고집이겠지만) 때문에 그때 못 다한 얘기를 좀 더 해보려 합니다.

 

‘잘 그린 그림’?
사실 최근 몇 년간 겪은 가장 당혹스러운 사건 중 하나가 만화를 한 번도 책으로 접하지 않고 오직 웹툰으로만 보고 자란 세대와 조우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에야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이지만 처음에는 쉽사리 믿겨지지 않는, 그야말로 강력한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웹툰의 속도감과 다양성을 즐기기는 하지만 오래된 만화책의 정교한 펜선에 쾌감을 느끼고, 침대 주위에 만화책으로 성을 쌓고 한 권씩 해치우는 일로 스트레스를 푸는 자신이 어느새 만화계의 구세대, 출판시대의 올드보이가 돼버린 듯한 복잡 미묘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만화책 전집을 쌓아놓았을 때의 뿌듯함이나 마지막 장을 탁 닫을 때의 감촉 같은, 책의 물성에 관련된 공감 따위는 기대할 수 없는 건가? 그런 경험은 이제 신작 업데이트 알림버튼이나 마우스휠의 스크롤로 대체되는 것인가? 펜촉과 종이의 예민한 접점을 탐구하는 대신 최신 입력도구와 소프트웨어에 발 빠르게 적응해야 하는가? 마치 영원히 과거로 돌아갈 수 없도록 누군가 불태워버린 다리를 보는 심정으로, 이렇게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질문들에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이처럼 만화가 보여지는 플랫폼과 만화를 그리는 저작도구가 변하는 상황에서 과거 우리가 ‘만화’라 정의했던 것 중 많은 부분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겠죠.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만화를 규정하는 ‘본질’일 텐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그림’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그림은 만화에서 대사와 설명 및 효과음 등의 텍스트를 제외한 모든 그림요소를 말합니다.

만화가 글과 그림이 가장 유기적으로 결합된 매체라는 데는 대개 큰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림’이 보다 본질적인지는 ‘글 없는 만화’는 꽤 있어도 ‘그림 없는 만화’는 성립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칸과 말풍선만 있는 만화도 존재할 수 있지만 칸과 말풍선 역시 그림(기호)의 일부분이라고 친다면 역시 그림요소가 전무한 만화란 상상하기 어렵죠.

 

‘못 그린 그림’ 그러나 ‘잘 그린 만화’
그렇다면 만화에서 ‘못 그린 그림’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여기서의 기준이란 테크닉의 수준, 즉 ‘기술적 숙련도에 따른 미학적 완성도’에 대한 평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데생의 정확성과 정밀도, 도구에 대한 지식 및 활용도, 색채와 조명에 대한 감각 등 기술적 숙련도란 단지 타고난 재능에 더해진 장기간의 도구자적 훈련에서 기인합니다. 이런 장인적인 연습의 결과는 감상자에게 정신적 고양과 더불어 인간적 감동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미적 대상입니다. 여타 예술 영역에서도 이런 기술적 숙련도를 무시한 천재의 폭발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칸딘스키나 피카소처럼 언뜻 보기에 단순하고 거칠어 보이는 그림도 오랜 기간 연마한 탄탄한 기초 훈련 위에 구축된 것이며,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음악신동 역시 중노동에 가까운 부단한 연습으로 인해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화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기준으로 ‘못 그린 그림’을 규정한다 해도 그림의 질이 만화의 완성도와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못 그린 그림’이 ‘잘된’ 혹은 ‘좋은 만화’에는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림’이 만화에서 본질적인 부분임은 틀림없지만 그 기술적 완성도에 대한 허용범위는 너무나 넓어서, ‘내용의 몰입에 방해가 되지 않는 수준’이라면 용인될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수준은 기술적 수준이라기보다는 스토리의 메시지나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기능적’ 수준에 훨씬 큰 방점이 있습니다. 즉 그림의 데생이 ‘얼마나’ 정확하고 정교한가가 아니라, ‘왜’ 정확하고 정교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요리만화라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 전체의 고른 완성도가 아니라, 스토리의 핵심을 차지하는 요리 그림의 생생한 묘사입니다(단순한 인물묘사와 섬세한 요리그림이 대조되는 조경규 작가의 작품 <오무라이스 잼잼>이 좋은 예!). 코믹 만화라면 유머를 자아내는 표정과 행동의 과장된 표현이 우선일 것이고, 심리만화라면 숨겨진 상징, 대사와 침묵의 간격 등 그림 그 자체보다는 칸과 그림기호들의 배치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엄연히 말해 만화에서는 인물과 배경만이 ‘그림’이 아닙니다. ‘실재감’을 살리기 위해 사용되는 각종 효과기호들을 비롯해서, 화면을 담는 칸의 형태는 물론, 칸과 칸 사이의 간격이나 모양까지도 모두 ‘연출’을 돕는 그림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만화가의 능력은 단지 데생력만이 아니라 화면 전체의 그림요소를 적절히 배치하고 활용하는 구성력까지 보아야 합니다.

이렇듯 그림은 분명 만화의 완성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지만 ‘결정적’ 요소는 아닙니다. 그림 못 그린 만화도 좋은 만화가 될 수 있지만 스토리가 부실한 만화가 좋은 만화일 수 없듯이, 그림의 기술적 숙련도는 내러티브의 충실한 구현에 기여하는 중요하되 필수는 아닌, 부수적 요소일 뿐입니다. 만화의 전체적 완성도는 내러티브에 몰입하게 하는 글과 그림의 균형에 달려있으며, 그에 필요한 것은 완벽한 그림이 아니라 ‘효과적인’ 그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효과적일지는 몰라도 도무지 뛰어나다고는 볼 수 없는 <졸라맨>, <보노보노>의 성공이나 <마스다 미리 시리즈>의 인기, 40 넘어 만화를 시작한 중년 작가의 <심야식당>이나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의 소박한 그림들이 지금 같은 압도적인 사랑을 받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술 더 떠, 미국 작가인 셰인 시몬즈(Shane Simmons)는 그림스타일을 아예 미니멀리즘의 극단으로 끌고 가 모든 등장인물을 점으로 표현하고, 데이비드 리즈(David Rees)는 웹상에 떠다니는 무료 클립아트들을 이용해 만화를 그립(?)니다. 사진이나 화면캡처를 활용한 포토툰도 등장한지 오래입니다. 이런 경우 사실 만화는 작가의 데생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만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했느냐의 능력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캡처1
Shane Simmons’, The Long and Unlearned Life of Roland Gethers
캡처2
David Rees, My New Fighting Technique is Unstoppable.
캡처3
오늘닷컴, 이슈닷컴‘s 스타 포토툰

 

물론 만화의 본질과는 별개로, 산업적인 측면에서 이런 만화들이 등장하고 유통될 수 있는 이유는 만화환경의 변화와 연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잡지연재와 단행본이 산업을 양분했던 출판만화시대에는 만화의 그림에 대한 기준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았습니다. 최고의 웹툰 작가인 강풀 역시 한 군데도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정도로, 현재 웹상에서는 버젓이 연재되는 상당수 작품들이 예전이라면 출판사 문턱을 넘기도 어려웠으리라 짐작됩니다. 지면이 제한되기도 했었고, 펜과 붓이라는 메인 도구 자체가 어느 정도의 훈련 없이 연마하기 어려웠던 탓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화 읽기의 변화 = 만화 연출의 변화
하지만 웹툰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그림에 대한 기대수준은 양극화됩니다. 대학을 비롯한 전문기관을 거친 지망생들의 실력이 월등히 향상된 한편, 채널의 확대 및 접근의 용이성으로 인해 화풍의 외연은 급격히 넓어집니다. 즉 컴퓨터의 도입 등으로 인해 그림의 기술적 수준이 급격히 발전된 반면, 소위 ‘못 그린 그림’들의 유입 역시 늘어난 것입니다.

이는 만화를 읽는 패턴의 변화로 인해 잡지시대의 장기연재물에서 웹상에서의 소수의 컷으로 이뤄진 단편 형식의 일상툰이나 소위 병맛 만화로 인기가 옮겨간 현상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장르의 인기로 인해 상대적으로 그림의 숙련도나 완성도에 느슨해졌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못 그린 그림을 작가만의 개성으로 인정하는 경향이 강해진 것입니다. 또 책장 넘기기가 아닌 스크롤을 이용한 세로방향 만화읽기로 인해, 화면에 머무르는 시간이 단축되면서 그림 세부묘사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만화읽기의 변화로 인해 예전처럼 양쪽 페이지를 모두 활용한 스펙타클한 장면 연출 등은 힘들어졌지만 (전쟁만화의 너른 평야를 가득 메운 전장의 모습이나 <슬램덩크>의 농구장 풀샷 등의 명장면을 생각해보시길), 양영순이 <천일야화>에서 보여준 심해바다로의 탁월한 세로컷 연출 등을 보면 어쨌든 매체가 바뀌면서 새로운 표현 및 감상의 방법을 찾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변화인 듯합니다.

사실 작가의 고유한 데생력만으로 본다면 만화에서의 그림 수준은 몇 백년간의 역사 동안 크게 변한 것이 없습니다. 20세기 초 윈저 맥케이의 <리틀 니모>에서의 데생력은 현재에 와서도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훌륭합니다. 만화의 역사상 변해온 것은 ‘연출’입니다. 그리고 그 연출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연출의 의도에 부합하는 ‘효과적인 그림’입니다.

물론 작가의 치열한 노력과 고민이 느껴지는, 내공 깊은 그림에서 얻는 미적 충족감 역시 만화 감상의 큰 부분입니다. 특히 이제 해외진출이 더욱 활발해질 만화계에서 첫눈을 압도하는 그림실력은 큰 무기가 될 것입니다. 작가 자신을 위해서도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가공할 수 있는 그림실력은 원작의 이차적 부가사업 등에 직결되는 요소일 테고요.

하지만 역시 만화의 매력은 일반적 기준에 못 미치는 소위 ‘못 그린’ 그림이라도 내러티브와 연출의 힘에 의해 생명을 입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 ‘마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림의 미적 기준에 엄격한 어느 편집자에 의해 사이바라 리에코나 미역의효능(<아 지갑놓고 나왔다> 작가이름입니다. 아직 안보셨다면 강추!) 등 수많은 훌륭한 작가의 작품을 아예 차단당했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그들의 작품을 읽으며 느꼈던 그 가슴 뻐근한 감동의 순간을 놓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명작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졌을지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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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제 친구도 그렇게나 완고하게 거부하는 ‘못 그린 만화’의 세계로 하루빨리 들어와 그 단정치 못한 선이나 말도 안 되게 이상한 형상이 더도 덜도 아닌 딱 그 캐릭터가 되어 이야기 속에서 살아 숨쉬는 ‘마술’의 순간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그림 실력 때문에 만화가의 길을 망설이는 지망생들에게도 만화가를 직업으로 삼는데 대한 두려움을 그런 이유 뒤에 숨기지 말고, 고민할 시간에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입고 표현해줄 자신만의 그림을 찾으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잘 그린 그림’이 어떤 것이든, 만화는 점 두 개와 작대기 하나(혹은 그 이하)만으로도 아무 문제없이 인간의 얼굴을 그려내고, 상상하고 몰입하게 할 수 있는 상징의 세계입니다. 그 넓고 열린 세계에서 굳이 ‘잘 그린’ 그림이라는 기준으로 창작이나 감상의 한계를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세계는 이야기와 결합하여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좋은’ 그림을 연구하는 작가와, 그 노력의 결과인 뻔뻔하고, 당당하며, 소위 ‘깨는’ 그림을 알아보는 독자들이 행복하게 공존함으로써 번영할 것입니다.

유목인

운 좋게 만화가가 됐으나 자리 지킬 주제가 아님을 깨닫고 어느 봄빛 수상한 날에 뛰쳐나와 지금까지 허랑방탕한 경험주의자로 살고 있음. 어쨌든 만화에 기여한 바에 비해 얻은 게 많아 항상 빚진 마음임. 정체불명의 인간이 되는 것이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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