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화 이야기 Ⅰ─ 김정기, 석정현이 그림을 잘그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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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없는 만화는 가능하지만 그림이 없는 만화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굳이 그것을 만화라고 부를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 명제가 만화를 구성하는 요소 중 무엇이 우선하는가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다. 몇몇 실험적인 작품들은 ‘글이 없이’ 그림만을 이용해 창작되기도 한다. 언뜻 보기에 이런 작품들은 특별한 위상을 지니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특별하게 존재할 수 있는 까닭은 다름 아닌 ‘글이 있는’ 999개의 만화 덕분이다. <데미지 오버 타임>의 특수한 작화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만약 도트로 그려진 만화가 주목받는다면, 그것은 도트로 그려진 만화가 드물기 때문이다. 사실 도트로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한계가 많은 일이다. 등장인물 개개인에 몰입하지 않고 전체를 조망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그와 동시에 감정이입할 여지가 적어 다룰 수 있는 스토리와 연출이 한정되고 만다. <데미지 오버 타임>은 왜 굳이 도트로 그려져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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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지 오버 타임>을 픽셀/도트로 그린 까닭은, 후기에서 밝혔듯 점으로 이뤄진 세계를 표현하고 내가 전달하려는 내용과 형식의 합치를 추구한 결과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인 의도는, 전에 없던 작화를 이용해 주목받아 연재의 기회를 얻고, 노동 및 노력에 큰 가치를 두고 만화를 감상하는 사람들의 비난을 피할 수 있는 가림막으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도트로 이뤄진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그림에 노동력을 최소로 투입하면서도 그것을 들키지 않은 채 스토리를 전개할 수 있는 작업 방식이기 때문이다. 쿼터뷰 픽셀은 처음에 준비하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밀도를 잃지 않은 채 영원히 복사-붙여넣기가 가능해 게으르게 작업할 수 있다. 연재하는 동안, 점을 하나하나 그려 넣었으리라 상상하는 사람들이 나의 노력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낸 게으름의 시간으로 더 좋은 만화를 고민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독자가 원하는 바를 충실히 따라가는 것보다는, 여유를 갖고 결과물을 최종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고민하는 것이 내게 있어 ‘더 좋은 만화’를 위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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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먼저냐, 그림이 먼저냐.
학창시절 친구들과 만화책을 읽다 만화에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 그림인지 글인지 종종 논쟁하곤 했다. 매번 갑론을박 끝에 정답은 없다거나 그저 독자 취향의 문제라는 결론으로 끝이 났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 것은, “만화에서 중요한 건 글도 그림도 아니고, 연출이야.”라고 먼저 말하는 사람이 이긴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말 ‘연출’이 답일까?

만화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공정을 생각해보자. 만화가는 할 일이 많다. 이야기와 연출, 대사와 그림을 모두 해내야 하는 노동 집약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주간 연재라면 더욱 그렇다.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글과 그림으로 나누어 협업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어시스트를 쓰는 일도 많다. 생산성을 위해 일정 부분 외주를 주는 셈인데, 그렇다면 그림이나 스토리, 연출도 외주를 맡길 수 있지 않을까? 외주는 어디까지 가능한 영역일까? 어떤 영역이 만화가를 만화가이게 하는가? 스토리도, 연출도, 대사도, 그림도, 캐릭터 디자인도, 폰트와 로고 제작도 아니다. 당연히 모든 요소의 조합을 총괄하는 것, 감독으로서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만화가들이 추구할 가치 아닐까?

어쩌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는 편이 좀 더 쉬울 수도 있겠다. 영화감독은 촬영이나 조명, 연기나 각본 등의 세부 역할을 잘 해낼 필요는 없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들고자 하는 영화의 의도에 부합하도록 배치하고 조율해 내는 것이 감독의 역량이다. 만화/웹툰의 창작에도 만화를 구성하는 요소를 통제하는 감독적 역할이 분명히 필요할 텐데, 조사가 부족했기 때문이겠지만 만화 비평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다루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한두 명이 만화의 모든 것을 창작하는 체제란, 만화라는 형식이 필연적으로 요구한 것이라기보다는, 만화가가 (아마도 고료나 산업 규모 등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 ‘아직 모든 것을 외주 맡기지 않은 상태’에 가깝다는 판단을 내렸다. 따라서 내가 만화를 생산하는 일은, 글, 그림, 연출 등 요소의 총괄을 통해 만화가 어떻게 보이게/읽히게 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이후에는 결정한 목표에 부합하도록 각 요소의 비중과 방향을 조율해나가는 순서로 – 저예산 독립영화를 찍듯이 각 역할을 맡은 다른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 진행되었다. 풀어쓰자면 복잡하지만 요약하면 뻔하다. 최종적으로 그려낼 만화를 위한 설계를 하고, 그에 맞춰 실행했다. 대부분 만화가들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noname01다시 처음 논쟁으로 돌아가 보자. 만화가는 각 요소의 배치를 결정하는 사람이며, 요소 간의 중요도는 작가의 의도에 달렸다. 그렇다면 독자의 입장에서 만화를 보거나 평가할 때는 어떤 요소를 앞에 두어야 하는가? 글이 중요할까 그림이 중요할까? 글과 그림, 연출과 스토리 모두 계획의 일부이자 의도에 부합하는 수단일 뿐인데, 글과 그림, 연출과 스토리 등의 각 요소가 어떻게 다른 요소보다 앞설 수 있는가? 기본적으로 평가는 상대적이다. “만화는 좋은데, 이러저러한 지향점을 보여주기엔 그림이 부족했어.”, “연출이 뚝뚝 끊겨서 읽기는 힘든데, 인물의 행동들과 그 결과가 너무 놀라워서 좋은 스토리라고 생각해.”, “애초에 고민 없이 쾌감만을 주려고 했다면 인물의 성격이나 대사들을….” 등등.

총체적 결과물인 만화가 뛰어나다는 것은, 적절한 안배를 포함한 각 요소의 역할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그래서 독자들의 질문은 또다시 바뀌게 된다. ‘그 뛰어난 요소들과 조합’으로 어떤 지향점을 갖고 있으며, 무엇을 보여주는 작품을 고를 것인가?’ 이는 수용자의 입장에선 다시 취향의 문제로 귀결되겠지만, 그 대답은 작품을 이루는 각 요소 간의 이해 없이 아무렇게나 뭉뚱그리는 질문에 대한 대답과는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쓸데없는 노력을 강요받는 작가들
만화가 어떠한 요소들의 총합이라면, 작화라는 요소는 만화에서 어떠한 역할과 의미를 지니는가. 실은 이 문제 제기는 대중이 서사구조와 스토리텔링에만 집중하는 것이 요즘의 트렌드라는 <크리틱엠>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의식에, 정확히는 그 전제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대중이 스토리텔링과 서사구조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사람들이 작화보다 서사라는 요소를 우선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작화를 잘 해내는 것이 만화의 기본이자 첫 번째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잘 그린 작화’라는 허들을 이미 마련해둔 셈이다.

noname012웹툰 시대에 이르러 기존 출판만화가 요구하는 형식을 충족하지 못할 듯한 작품들이 상당히 늘어났으므로 언뜻 동의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웹툰에 대해서도 이러한 기준은 여지없이 적용된다. 단지 예외의 경우가 조금 늘어났을 뿐이다. 게다가 웹툰 같은 경우, 작가들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다는 점으로 인해 작품과 작가를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독자들이 웹툰을 소비하는 측면에는, 우리 모두가 웹상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특정 인물이 도대체 어떤 작품을 만들고, 작품을 만들기 위해 얼마큼의 노력을 하는지를 구경하는 지점이 반드시 포함된다. 이렇게 웹툰 작가를 ‘준 연예인’ 취급하는 태도는 작가의 외모, 인성, 태도 등을 평가하는 수많은 댓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조금 힘을 뺀 듯한 그림이 주를 이루는 생활툰, 감성툰, 병맛, 개그만화, 치유물 등에 기존 출판만화와 같은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 이유 역시 이러한 태도의 연장선에 존재하는 것이다. 상기한 특정 장르의 만화들은 ‘준 연예인’의 세계에서, ‘재미있으니 일반인과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외모가 준수할 필요는 없는 개그맨’noname013 정도의 위상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림을 잘 그려야만 한다는 관습적인 요구가 희석되어, 특기가
있으니 준 연예인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을 따로 문제 삼지 않겠다는 태도로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진다.

포털의 조회 수 경쟁 체제가 주를 차지하는 웹툰계에서 평균보다 연재 분량이 적거나 장르적 면죄부인 ‘준 개그맨’의 위상을 얻지 못한 작품에선, ‘그림 잘, 분량 많이’를 요구하는 댓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연예인에게 그의 본업이 가수이든 연기자이든 ‘대중이 원하고 기대하는 방향’으로 잘생기고 예쁠 것을 요구하듯이, 만화가에게는 언제나 ‘대중이 원하고 기대하는 방향’으로 그림을 잘 그릴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국 만화의 차력사 작법, “’망가’는 벗어버려!!”
그렇다면 소위 ‘대중’이 원하는 잘 그린 그림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사실적 재현과 노력이 투사된 흔적들이 포착되기 쉬운 그림을 지칭하는 듯하다. 이는 독자 외에도 만화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지망생들에게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미술을 시작할 무렵, 만화를 좋아해 미술학원에 다니게 된 친구들이 꽤 많았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인체 해부학과 빛과 그림자를 연필로 그리는 법을 배우면서 하나둘 보이는 것이 늘어난 뒤로는 그동안 봐왔던 일본 출판만화들이 근본을 잊은 채 잘못된 지향점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만화에 필요한 그림 실력을 향상하기 위해 인터넷 카페 ‘방.사.’를 기웃거리던 것도 그쯤의 일인데, 당시 ‘방배동 사람들’ 회원들의 활동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던 것은 운영진이었던 만화가 석정현과 김정기의 그림이었다. ‘이게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라고?’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실사를 방불케 하는 석정현의 모사 능력과 제자리에서 마치 한 붓 그리기를 하듯 스케치 없이 투시까지 맞춰가며 만화의 한 장면을 그려내는 김정기의 퍼포먼스는 입시만화를 배우는 입장에서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석정현 작가는 그림 실력을 늘리는 방법으로 잡지를 펼쳐 인물이 등장하는 사진을 모사하는 ‘잡지 떼기’를 제시했고, 이는 그림을 잘 그리려고 노력깨나 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생활 크로키와 더불어 인체를 이해하고 그림 그리는 능력을 신장할 수 있는 연습법으로 널리 알려졌었다. 하지만 미술대학에 입학한 순간, 아직도 ‘만화적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으로 꼽히는 이들의 기술적 면모가, 도구를 통해 아주 쉽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들이 보여주는 능력은 차력에 불과하며, 잡지 떼기와 같은 방향성 없는 수련 방법은 효율적으로 이미지에 대해 배우고 그 재현 방법을 익히는 쪽보다는 스스로를 대견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을 연출하는 데 더 적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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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체에 대한 맹목적인 옹호, 만화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그림과 데포르메에 대한 몰이해를 국수적 시각과 섞어버린 석정현 작가의 예전 그림. 당시에도 많은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대상을 우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이 가진 휴대전화의 카메라 기능으로 사진을 찍기만 하면 된다. 사람의 손으로 그린 느낌이 필요하다면, 크게 출력해 일정 간격의 격자를 그린 뒤 종이 위에 조금씩 옮기거나 프로젝터를 이용해 그리고자 하는 면에 투사한 뒤 대고 그리면 된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훨씬 간편하게 동일한 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 사진을 컴퓨터에 옮긴 뒤 그 위에 대고 따라 그리면 그만이다. 수많은 웹툰의 배경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된다.

일부 독자들은 이렇게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작가를 비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만화를 그릴 때 도구를 사용하지 말라는 계율은 어디에도 없다. 그림을 그리는 기술 자체는 자연의 빛을 종이로 베껴내는 방법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을 불필요한 노동 없이 간편하게 해낼 수 있을 만큼 기술이 발전하고 시대가 바뀌었을 뿐이다.

석정현 작가와 김정기 작가는 만화를 그리는 대신 만화의 재료인 작화를 수련하는 길을 통해, 과정의 순수성을 신성시하며 선망의 눈빛을 받는 길을 걷게 되었다. 그들의 창작물은 만화도, 일러스트도, 디자인도, 회화도 아닌 어떤 잠재적 상태로 ─“참 쉽죠?”로 유명한 밥 로스의 그림처럼─ 사랑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도구의 도움 없이 눈으로만 베껴내는 경기를 치르는 것이 아니며, 사진을 참조하지 않고 상상에만 의존해 풍경을 그려내는 시합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의 그림을 보고 “와! 저 그림으로 만화를 그리면 얼마나 멋질까!?”라는 감탄을 내뱉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결국 ‘와 저 그림으로 만화를 그리면 얼마나 멋질까 그림체’와 그 추종집단을 만들어 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달리 없어 보인다. 게다가 이 그림들은 만화에서 그림이 갖는 비중을 왜곡하는 인식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언젠가는 두 작가도 좋은 만화를 그려낼지 모를 일이나, 굳이 이렇게나 멀고 험난한 길을 돌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표적인 두 인물을 통해 만화와 그림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언급했지만, 이들이 없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차력’을 통해 대중의 사랑을 받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단 만화시장 내부의 얘기만도 아니다. 트릭아트나 벽화 마을의 사실적 재현에 언제나 놀라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미술에 대한 대중의 기계적인 반응이 거의 시각문화 전반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 현상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만화가로서 이러한 대중들의 인식에 문제의식을 느끼지만, 일일이 이들을 계몽하는 대신 작품으로서 나름의 방법을 탐색하려 노력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두 가지 오해에 대처하기
웹툰 작가들은 앞으로도 계속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누군가로서 작품 외의 생활까지 준 연예인처럼 소비될 것이며, 현대미술의 열화 된 이미지가 “이런 건 나도 그릴 수 있겠다!”라는 감상과 함께 인터넷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듯이 그림에 대한 오해 역시 쉽사리 풀리지 않을 것이다. 두 가지 오해는 서로 뒤섞이기까지 한다.

“웹툰 작가는 그림과 스토리텔링으로 수백만 독자층을 가진 채널에서 개인 방송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준 연예인이므로, 그림은 당연히 잘 그려야 하고 그것은 혹독한 노력과 눈물 나는 수련을 통해 이뤄진 결과여야만 한다.”

어떠한 요소의 조합이 좋은 만화이며, 어떠한 작화가 좋은 만화가 되도록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최소한 합리적이지 못한 비판을 피하는 방법은 있다. 계속 ‘웹툰’을 그리게 된다면, 조금 더 게으르게 그리되 ‘노력한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만화의 마감이 하루 걸리든 일주일 걸리든, 가시적 노력의 가치가 곧 작품의 가치는 아니라는 사실에 수긍하는 사람들이 대다수가 되지 않는 이상은.

선우 훈

웹툰을 읽어왔고 웹툰을 그리게 되었다. 조회 수가 곧 작품의 가치인 환경에서 거의 의미가 없는 작품 [데미지 오버 타임]을 연재했다. 실은 나도 내 조회 수를 모른다. 이쪽이 그렇다. 연재하게 해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딴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괘씸하다고 느끼실지도 모르니까. 언젠가 노블레스처럼 가치 있는 만화를 생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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