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화 이야기 Ⅱ─ 몸이 떨리는 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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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만화 체험
1990년대 초반 대한민국은 만화 잡지 전성기였고, 나는 만화소년이었다. 다행히 부모님도 만화를 보거나 사는 데 크게 반대하지 않았으나, 다른 조건이 너무 안 좋았다. 용돈은 거의 없었고, 군인가족이라 사는 곳이 산 속 군인 아파트나 관사라 서점이 멀었다. 이사도 잦았다. 스무 번은 했다. 책은 무겁고 부피도 크다. 그래서 이삿짐센터 직원이 싫어하고, 요금도 높아진다. 그래서 책은 1순위로 버려지고, 우리가 안 버려도 직원이 맘대로 버리는 경우도 당시엔 있었다. 그렇게 사라진 책이 몇 권인지.

어머니는 그런 내가 측은하셨던 모양이다. 단골 냉면집 아들이 몰래 사 모으다 걸린 <아이큐 점프>, <소년 챔프>, <보물섬>의 과월호나, 이사가는 다른 집의 1970~80년대 ‘심의필’ 도장이 찍힌 대본소 만화나 해적판 일본 만화를 얻어다 주시곤 했다. 책장의 만화는 2, 5, 13권 하는 식으로 대부분 이가 빠져 있었고, 맥락도 없이 뒤섞여 있었다. 마블의 헐크와 DC의 배트맨이 동시에 출연한 이슈를 무단 번역한 <블랙맨>이라는 미국 만화라던가, <땡땡>이나 <아스테릭스> 같은 프랑스 만화도 있었고, 이케가미 료이치의 그림을 무단으로 베껴 일본 격투 게임을 만화로 옮긴 무단 해적판 홍콩 만화도 있었다. 지역마다 유행하는 만화가 다르거나 지역 출판사가 제 멋대로 찍어낸 해적판 만화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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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프게 만화에 대해 알게 된 이후로는 테즈카 오사무, 이시노모리 쇼타로, 나가이 고, 후지코 후지오 같은 거장의 초기 작품을 구해 읽었다. 중학교 때는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만화 교과서를 죄다 사다 열심히 ‘대갈치기’를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일본어를 읽을 수 있게 됐고, 인터넷 서점을 통해 일본의 만화 원서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무질서한 남독이었다.

 

내 ‘몸’의 떨림이 작화다.

나의작화이야기_02내 ‘몸(mom)’(1)에는 시대착오적이면서 왜곡되고 뒤틀려있다. 허풍 섞인 말로 표현하자면, 각 지역의 만화 문화가 혼재되어 있는 셈이다. 그 중 내 ‘몸’을 가장 떨리게 만들었던 작화 체험은 <드래곤볼>이었다. 당시 <아이큐 점프>에서 번역연재하면서 대대적으로 “정식번역판”이라고 광고하던 시절이었다. 정확한 비례, 세밀한 배경, 자연스러운 움직임, 속도감과 타격감, 그림의 완성도는 물론 엄청났다. 그러나 그 뒤에 더 큰 그림이 보였다. 마치 높은 산을 정복했더니 그 뒤에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던 훨씬 높은 산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의작화이야기_03<드래곤볼>을 읽던 시기에 읽었던 장태산의 <스카이 레슬러>, 이두호의 <장독대>, 허영만의 <망치>와 <날아라 슈퍼보드 1, 2>에서도 비슷한 체험을 했다. 장태산과 이두호의 그림은 선 하나하나가 꿈틀대는 근육 같았다. 허영만의 작품은 간결한 선으로 그린 배경의 세계나 잔혹묘사가 선명히 남아있다. <망치>에서 망치가 개조수술을 받으면서도 자아를 지키려고 자해하는 장면은 그 선이 아니었다면 거짓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나는 내 ‘몸’을 떨리게 만드는 만화에는 모두 공통적인 느낌이 있었다. ‘통일감’과 ‘흐름’. 물 흐르듯 넘어가는 독서체험. 나는 그 느낌을 ‘작화’라고 부른다.

최근 나는 만화 스토리 작가를 준비하며 열심히 스토리를 쓰고 콘티를 공부하며 어떻게 하면 내 원고에 이 느낌을 담을 수 있을 지를 고민하고 있다. 앞으로의 논의는 이 고민 끝에 얻은 몇 가지 영감이다.

 

만화를 보게 만드는 힘, 프라이밍(priming)
나는 만화에서 작화가 매우 중요하며 중요도가 70% 이상 된다고 생각한다.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서사∈작화∈그림이 될 것이다. 맥락이 작화와 그림을 구분한다. 독자의 독서체험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림은 ‘칸 안’에서 벌어지는 객관적 현상이다. 그림은 구도, 선, 묘사 등 감각으로 파악하는 시각적 이미지를 말한다. 반면 작화는 그림 그 자체와 칸과 칸 사이의 연결로 형성된 맥락이 만드는 ‘뇌 안’에서 벌어지는 주관적 현상이다. 작화는 그림을 포섭하는 더 큰 범주의 개념이며, 그림과 그림이 모여 만드는 ‘몽타주’이자, 그림과 서사를 이어주는 ‘인터페이스’고, ‘문체(style)’ 다. 우리는 일상에서 익숙한 물건을 일일이 따져 보지 않는다. 익숙한 물건은 뇌 속에서 추상화 되어 상징이나 기호로 변하고 역할과 기능만 인식하게 된다. 작화가 형성되면 그림은 맥락을 위해 추상화되어 활자나 상징으로 변한다. 정보량이 줄어들어 그림 자체의 질은 익숙해지고 무시된다. 따라서 그림의 질은 작화 자체의 질과 꼭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림이 아무리 예뻐도 다음 그림과 연결이 부자연스러우면 작화로서는 높은 질을 유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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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밍(priming)이라는 현상이 있다. 번역하면 점화효과라고 한다. 본능적으로 ‘쾌’에 속하는 자극을 접하면 뇌는 그 결과가 보상(rewarding)일 것이라 기대한다. 그 결과 쾌감과 운동을 담당하는 뇌내전달물질인 도파민이 분비되어 행동에 나서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로 얻을 결과를 기대할 때 도파민이 분비된다. 비유하자면 도박에서 돈을 따서 즐거운 게 아니라 돈을 따리라 기대하는 도박 행위 그 자체의 ‘쪼는 맛’이 훨씬 기분 좋다는 말이다. 프라이밍은 반복하면 할수록 강화된다. 그리고 보통 말초적인 자극으로 촉발된다. 만화의 그림은 말초적 시각에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만화 그 자체를 보게 하는 데에는 그림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림이 마음에 들면 프라이밍으로 도파민이 분비되어 ‘만화를 읽는 행위’에 필요한 에너지가 발생한다. 나의작화이야기_06만화를 읽으며 재미를 느꼈다면 프라이밍은 더욱 강화되고 만화가의 그림체만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 그림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프라이밍을 강화하는 중요한 포인트는 만화를 읽은 ‘독후감이 기분 좋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림이 예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만화는 그림과 그림의 연결로 구성되어 있기에 통일감과 흐름이 좋지 못하면 기껏 얻은 프라이밍을 다음 만화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반대로 그림의 질이 조금 떨어져도 ‘연출’(=통일감과 흐름)이 좋은 만화는 그림에서 얻지 못한 프라이밍을 독후감을 통해 얻어낸다. 연출은 작화에서 중요한 맥락을 만드는 행위다.

 

‘죽은 몸’은 ‘2 프레임 늦다’
초보 애니메이터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가 “움직임이 완전히 멈춘 상태”에서 작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를 일본 영상 업계에서는 ‘죽은 몸(死に体)’이라 부르는 데, 본래 스모 용어로 밸런스가 무너져 스스로는 회복이 불가능한 멈춘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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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피겨 전문 업체 카이요도(海洋堂)가 오오츠카 야스오(大塚康夫)에게 피겨 원형의 감수를 부탁한 일이 있다. 오오츠카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스승이자 천재 애니메이터로 유명한 사람으로, 그는 모든 원형이 “2 프레임 늦다.”라며 리테이크 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죽은 몸’이라는 것이다. 영화 편집에서는 배우의 연기가 시작하는 앞부분 2 프레임을 잘라내어 연기가 ‘죽은 몸’이 되어 영상 전체의 흐름을 멈추지 않도록 한다. 애니메이션에서는 편집 되는 부분도 작화를 해야 하기에 아예 처음부터 ‘2 프레임 빠른’ 상태로 작화를 해야 한다. 이는 <기동전사 건담>으로 유명한 토미노 요시유키(富野由悠季)가 쓴 교과서 <영상의 원칙(映像の原則) 개정판>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의자에서 일어나는 연기라면 의자에 앉아있는 상태로 시작하는 게 아니라, 막 일어나기 시작한 ‘2 프레임 뒤’부터 영상이 시작하도록 해야 한다. 카이요도의 원형사가 ‘죽은 몸’ 피겨를 만든 이유는 포즈를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스틸 사진 같은 것이라 생각해서다. 스틸 사진은 사진으로써 ‘포즈’가 나오는 순간을 잘라내기에 ‘죽은 몸’이 된다.

‘죽은 몸’ 때문에 작화가 잘 형성되지 않는 문제는 일러스트레이터 출신 만화가에게서 자주 일어난다. 일러스트레이터는 그림을 잘 그리니 프라이밍이 쉽게 일어난다. 그러나 ‘포즈’를 취하는 일러스트레이션처럼 칸의 그림을 ‘2 프레임 늦게’ 그리면 맥락 형성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애니메이터 출신 만화가의 그림에서는 ‘죽은 몸’ 문제는 비교적 적다. 그림 자체의 문제나 그림과 그림의 연결은 자연스럽다. 한 페이지 안의 연출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읽다보면 흐름이 막히거나 어색한 느낌이 든다.

애니메이터 출신 만화가가 작화 형성에 실패하는 이유는 연출보다 층위가 높은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의 연결” 혹은 “장면과 장면의 연결”에서 지점에서 문제가 나타난다. 이 연결은 일본 만화에서 방법론으로 발달했는데, 오쓰카 에이지는 ‘몽타주’라고 부른다. 몽타주는 서사와 그림의 인터페이스인 작화 고유의 영역이다. 일반적으로 서사는 활자(=플롯)로 환원이 가능하다. 반면 몽타주는 서사보다 추상도가 낮은 이미지로 환원된다. 추상도를 낮추면 정보량이 늘어나기에(2), 몽타주는 서사로 환원할 경우 활자로 표현하기에 지리멸렬해진다. 일본의 경우 애니메이터는 보통 장면 내의 움직임만을 담당하고, 그 보다 높은 층위는 작화감독이나 콘티맨, 혹은 총감독이 담당하게 된다.

애니메이터 출신 만화가는 움직임을 표현하지 못해 흐름이 생기지 않는 게 아니라, 적절한 생략과 비약이 없어 흐름이 단조로워지는 것이 문제다. 몽타주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오쓰카 에이지의 <세계만화학원>(북바이북 간)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작화는 만화 고유의 힘
일본에서는 나이 많은 독자들이 “만화가 읽기 힘들다.”는 불평을 한다고 한다. 이들의 말을 빌리면 “미국 만화를 보는 느낌이다.” 라고 한다. 미국 만화는 그림 자체의 정밀도를 높여 짧은 분량 안에 서사를 압축해야 하는 제약이 있었다. 때문에 작화의 흐름이 그림과 그림의 연결이 아니라, 그림 내부에서 마치 콜라주처럼 모인 정보로 구축된다. 이 과정에서 각 칸은 독립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변한다.나의작화이야기_08나의작화이야기_09

반면 일본 만화는 한 칸 한 칸의 정보량을 줄여 전체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기호’로 만들려고 했다. 일본 만화의 ‘그림’은 트렌드의 흐름이 있다. 일본의 만화 평론가는 이를 ‘선’의 변화로 설명한다. 소년 만화에서의 경우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1950~60년대 데즈카 오사무의 둥글고 세련된 ‘디즈니 애니메이션’ 같은 선을 시작으로, 1970년대 데즈카의 안티테제로 나타난 게키가(劇画)의 거칠고 과잉된 ‘스틸 사진’ 같은 선, 1980년대 오토모 카츠히로의 데즈카와 게키가를 융합한 세밀하나 세련된 ‘스크린샷’ 같은 선, 1990년대 애니메이션의 영향으로 균일한 선과 톤으로 표현된 ‘셀 에니메이션’ 같은 선이 있었다. 2000년대 이후 특정한 트렌드가 지배하는 경향은 줄어들었다. 일본 만화의 그림은 점차 미국 만화와 가까운 영역으로 나아갔다. 일러스트레이션처럼 세밀해지고 각 칸의 밀도가 높아졌다는 점이다. 그 결과 ‘죽은 몸’ 문제가 대두되었다.

나의작화이야기_10그런데도 ‘뉴타입 현역 독자’는 아무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이는 독자의 취향이 점차 작화의 ‘통일성’이나 ‘흐름’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만화의 발달과 함께 진화해온 독자의 뇌가 ‘죽은 몸’인 그림 간의 흐름을 보완해 작화를 구축하는 능력이 강해져서라고 추측한다.(3) 그림 자체가 흐름을 만들지 않아도 독자가 스스로 흐름을 구축할 수 있으니, 변수는 그림이 주는 프라이밍만이 남는다.(4) 최근 캐릭터 중심으로 전개되는 다양한 현상(보컬로이드나 가상 아이돌 등의 캐릭터 산업, 2차 창작 등)도 이와 관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작화 구축 능력의 차이가 (나를 포함한) ‘올드 타입 독자’와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작화는 작품을 읽게 만드는 매력, 작품 내의 통일감과 흐름, 그리고 서사까지 모두 뒷받침하는 만화의 인터페이스다. 다른 매체에는 존재하지 않는 ‘독자와의 협력’을 가능케 한다. 이 인터페이스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개인적인 목표기도 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인터페이스로 만화의 세계와 연결되는 것이고, 연결이 주는 ‘몸’의 떨림과 함께 우리는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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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올 김용옥의 미학이론 용어. 내 신체와 기억, 감정, 경험 등이 모인 삶의 흐름과 사회적, 역사적, 거시적 흐름이 모여 교차하는 ‘그 지점’을 가리킨다. (김용옥, <아름다움과 추함>, 통나무 출판사. 참조)

(2) 예를 들어 <포유류>의 추상도를 낮추면 <개>, <고양이>, <돼지> 등 무수히 많은 정보가 탄생한다. 추상도를 비교한다면 <포유류>가 서사의 층위라고 한다면 나머지 하위 개념 간의 연결은 작화의 층위에서 몽타주(=연출)가 된다.

(3) 비슷한 논의를 아즈마 히로키가 <동물화 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등에서 전개하고 있다. 나 자신은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나, 참고를 위해 읽어보기를 권한다.

(4) 독단적인 인상이라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지만, 그림의 질이 높으나 스틸사진처럼 ‘죽은 몸’인 대표적인 만화로, 나는 이케가미 료이치의 작품 전반, 그리고 무라타 유스케의 <원펀맨>을 꼽는다. 이케가미 료이치는 본래 스틸 사진을 콜라쥬해 모사하는 스타일이기에 당연한 결과라 볼 수 있고, 무라타 유스케의 <원펀맨>의 경우 칸을 잘라 이어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영상도 존재할 만큼 높은 그림의 질로 유명한 것은 사실이다. 일러스트레이션으로써도 상당한 수준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는 칸 속 그림은 ‘2 프레임 늦은 죽은 몸’으로, 내게는 느껴진다. 특히 액션 장면에서 심하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애니메이션에서 스틸 사진과 유사한 포즈를 잡아 동화를 채우는 기준이 되는 ‘키 프레임’과 처럼 포즈를 잡고 있는 경우가 많아 나 같은 구닥다리 만화 독자는 흐름이 끊긴다고 느낀다.

손지상

소설가, 만화평론가, 칼럼니스트, 번역가.

주요 출간:
단편집 [당신의 苦를 삽니다], [데스매치로 속죄하라 - 국회의사당 학살사건], [스쿨 하프보일드], [일만킬로미터 너머 그대. 스토리 작법서 [스토리 트레이닝: 이론편], [스토리 트레이닝:실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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