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의 시대>와 ‘우리’시대 사이

by -
0 534

타고난 악동 기질 때문에 어릴 적부터 나는 갖은 말썽을 다 부리고 다녔다. …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겠지만 딱히 이렇다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츠메 소세키, <도련님> 中

 

Introduction. What time is it?
우리는 지금 몇 시를 살고 있는가? 혹은 조금 더 직관적인 질문으로 옮겨보자면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은 ‘우리’라는 다소 모호한, 혹은 폭력적인 단어를 어떤 관계 속에 위치해 제한시키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바뀔 것이다. 이 글이 실릴 매체를 고려하여 ‘우리’를 만화라는 매체를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데 참여하고 있는 이들로 제한해보도록 하자. 만화를 보고, 그리고, 엮어내는 이들에게 지금은 어떤 시대일까?

오늘날 한국의 만화계가 보내고 있는 시간을 웹툰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시대의 한 면의 모양새를 가늠할 만한 사건이 얼마 전에 일어났었다. 한국 웹툰의 주요 서비스 공급업체 중 하나인 레진코믹스에서 작가들을 부당하게 대우했다는 스캔들이 터진 것이다. 레진코믹스에서 기본 고료를 책정했다는 소식으로 레진코믹스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던 독자들에게는 나름 충격적인 사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슬프게도 레진코믹스가 여전히 작가 복지에 있어서 다른 경쟁 업체에 비해 한 발자국 앞서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힘들 듯하다. 절망스럽게도 한국의 웹툰 시장에서 작가의 대우는, 이번에 화제가 되었던 레진코믹스의 대우에 비해서도 형편없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작가들은 일주일 1회 투고라는 격무에 시달리고 있고 늦으면 지각을 성토하는 댓글과 함께 별점 테러를 당하고, 전개가 느리거나 작화가 어그러졌다는 ‘고나리질’에 노출돼 있다.

이번 특집의 주제인 ‘작화’로 눈길을 돌려보자. 우선, 한국 웹툰의 작화가 일정한 한계선 위에 놓여 있다면 이것은 웹툰 혹은 만화의 완성도라는 관점에서 볼 때 문제적인가? 이 질문은 다시 만화에서 빼어난 작화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독특한 지점이 있느냐는 질문과 맥을 같이 한다. 빼어난 작화로 유명한 작품을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다니구치 지로와 세키가와 나츠오가 그리고 쓴 〈도련님의 시대〉를 되돌아봄으로써 답변을 찾고자 시도할 것이다.

 

메이지, 도련님들의 시대
다니구치 지로와 세키가와 나츠오의 〈도련님의 시대〉의 부제는 “혹독한 근대 및 생기 넘치는 메이지인”이다. 부제가 가리키듯 이 작품은 인물에 머물지 않고 일본의 ‘혹독한 근대’를 주인공으로서 무대에 올리고 있으며, 이 작품이 묘사하는 인물들 역시 ‘메이지인’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시대와의 상호 관계 속에서만 그려진다. 그렇다면 메이지 시대라는 렌즈를 통해 새롭게 바라보고자 하는 인간 군상들은 어떤 이들인가? 우선 부제를 기준으로 보자면 나츠메 소세키로 시작해, 모리 오가이와 하세가와 후타바테이를 거쳐 이사카와 다쿠보쿠, 사회주의자 청년들, 그리고 다시 나츠메 소세키를 조명한다. 즉 〈도련님의 시대〉가 그려내는 메이지 시대의 근대인들은 대개 문인들이다.

00 (4)

그렇다면 메이지 시대의 문인들은 왜 ‘도련님’들인가? 1부에서 작가들이 밝히고 있는 바에 따르면 소세키의 소설 <도련님>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름 모를 도련님이 처한 곤경이야말로 메이지 시대, 근대화에 속절없이 노출된 일본인, 특히 문인과 지식인들이 처했던 상황을 적확하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도련님의 시대〉라는 작품은 메이지 시대 엘리트들이 근대화 및 서구화라는 파도에 부딪혔을 때 보여주는 반응들을 보여주고자 한다. 1부에서 나츠메 소세키가 <도련님>을 구상하게 된 이유도, 오가이가 무희 앨리스와 이어질 수 없었던 것도 이러한 근대화·서구화에 대한 도련님들의 반응인 것이다. 〈도련님의 시대〉의 서사구조는 이와 같은 프레임워크를 기반으로, 다양한 인물 군상의 삶을 불러와 한데 모음으로써 끊임없이 반복한다. “메이지 시대 도쿄의 언덕은 다양한 인연을 낳았다.”(2부, 92면)라는 말처럼 오밀조밀하게 연결된(혹은 작가가 다소 작위적으로 연결한) 메이지 시대 문인들의 삶은 근대화에 대한 대응이라는 렌즈를 통해 형상화되어 있다.

반복적인 서사구조 외에도 이 만화가 일본의 근대를 무대 위에 올리기 위해 시도하고 있는 또 다른 노력은 바로 작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1부의 표지를 넘기자마자 우리는 다니구치 지로가 세세하게 그려낸 메이지 시대 일본의 정경을 만날 수 있다. 첫 컷부터 두 면을 하나로 이어 붙여 시대상을 그려내려 했던 것은 다분히 계획적으로 보인다. 각 권을 펼치면 어렵지 않게 한 면, 혹은 두 면 전체에 걸쳐 그려져 있는 메이지 시대 도쿄의 풍경을 찾아볼 수 있다.00 (1)00 (3)

이러한 조망하기가 가장 강조되는 단락은 〈도련님의 시대〉전체를 정리하는 5부의 마지막 부분이다. 다니구치 지로는 일본 열도로부터 시작해 스코프를 좁혀 점차 메이지 시대 도쿄의 거리, 그리고 그 거리에서 걸어 다니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나츠메 소세키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면서 시리즈 전체를 마무리 짓는다. 이 마지막 10여 장에 걸쳐 무척이나 체계적이고 계산적으로 배치된 컷들은 1부 말미에 “시대는 소세키를 감싸고, 소세키는 시대를 꿰뚫는다.”라는 아포리즘을 작화의 층위에서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00 (5)

여기까지 봤을 때, 〈도련님의 시대〉의 특징적인 작화 기법은 분명히 그 서사 구조와 조응하여 주제 의식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또한 메이지 시대의 생활상을 믿음직스럽게 재현하고 있는 다니구치 지로의 절묘한 데생 능력이 조망하기라는 작화 기법의 완성도를 높여놓는다는 사실을, 혹은 애초에 그의 수준급 작화 능력이 없었다면 그러한 대담한 기법을 시도할 수 없었으리란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다니구치 지로는 먼 곳에서 내려다보는 거대한 스케일의 묘사 외에도 인물과 같이 작지만 까다로운 물체를 그릴 때도 비례, 균형, 동세, 근육의 움직임 등을 모두 고려하여 그림을 그리고, 서사와 버무려 만화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림과 서사가 연속된 컷으로 모여 완성된 한 편의 만화를 접하다보면 만화에 있어서 작화나 서사 어느 한구석이라도 ‘빠져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한다.〈도련님의 시대〉라는 작품에 있어서 이는 물론 사실이다. 세키가와 나츠오가 구상한 전반적인 이야기의 주제 의식, 진행 방향 및 콘티와 다니구치 지로의 표현력이 어우러지지 않았다면 〈도련님의 시대〉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가정을 모든 만화에 일반화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니까 훌륭한 작화 표현력은 훌륭한 만화에 필요한 것일까?

훌륭한 만화가 무엇인지 논의하는 것은 이 글의 일차적인 목적이 아니기에 이 글에서는 만화의 훌륭함을 정의하는 작업에 지면을 소모하지 않고자 한다. 대신 ‘재미있는가,’라는 기준으로 훌륭함이라는 까다로운 기준을 에둘러가는 편법을 사용하고자 한다. 위의 질문은 따라서 다음과 같이 수정될 수 있겠다. 훌륭한 작화 없이 재미있는 만화는 성립할 수 없는가?

 

훌륭한 작화와 훌륭한 스토리
그렇지만 훌륭한 만화가 무엇인지 답하는 것이 까다로운 만큼이나 훌륭한 작화가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것 역시 무척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비례나 균형을 맞추고, 적절하게 동세를 표현하며, 뼈와 근육의 위치와 움직임을 염두에 둔 자연스러운 인체 묘사가 훌륭한 작화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까? 더욱이 그것이 만화라는 장르의 견고한 기준점이 될 수 있을까?

반례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미지의 세계〉나 〈먹는 존재〉는 많은 젊은이에게 재미있는 만화로 인정받고 있으나, 그 작화가 앞서 말한 전통적인 의미의 완성도 있는 작화라고 말하긴 어렵다. 펜으로 대충 휘갈겼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거친 선으로 완성된 그림에서 우리는 굳이 인체의 비례가 맞는지 따져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이런 만화들을 안 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런 만화들이 ‘그림이 별로라서 재미없는 만화’라고 말하는 것이 난센스라는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정확히 그 반대로, 우리는 이 만화들을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훌륭한 만화라고 여겨 상을 주기도 한다(〈먹는 존재>는 한국만화가협회가 주최하는 오늘의 우리만화상 2014년도 수상작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조악한’ 혹은 비전형적인 작화로 그려진 만화를 재미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작화를 어떤 식으로 평가하고 있는가? 어쩌면 ‘잘 어울린다.’라는 무척 직관적이고 즉각적인 반응 속에 만화에서의 작화를 어떻게 보면 되는가에 대한제법 그럴듯한 답변이 구겨져 담겨 있는 듯하다. ‘잘 어울린다’는 피상적 답안을 한 꺼풀 벗겨 펼쳐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터이다. 재미있는 만화의 작화란, 정해진 작화의 문법을 반복함으로써 계획된 서사(혹은 서사의 해체)를 어색함을 드러내지 않고 버벅거림 없이 재현하는 마법을 부린다는 것이다.

〈도련님의 시대〉의 ‘각본가’를 담당했던 세키가와 나츠오의 후기에서도 이러한 생각에 견주어 볼만한 견해를 발견할 수 있다.

당초부터 나는, … 스토리 만화에 각본가는 필요 없지 않나 하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 재능 있는 작가가 혼자 자유자재로 전개하는 상상력, 그것을 뒷받침하는 시각 표현 기술과 일본어 표현의 힘을 종합한 것이 스토리 만화라는 심증은 현장에서 일하는 동안 더 강해졌다. 그래도 내가 다니구치 지로와의 작업에 집착한 것은 그의 보기 드문 재능을 곁에서 볼 수 있는 즐거움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스토리 만화에도 각본가의 참견을 허락하는 몇 가지 틈새가 있다는 생각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하드보일드라면 각본이 필요 없다. 유머 책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둘을 조합하여 실행할 때 각본가도 아슬아슬하게 활로를 찾을 수 있었는데 또 하나의 틈새인 도련님의 시대 5부작도 그러했다 (제4부 298-99, sic)

다시 말해, 하드보일드함과 유머러스함 모두를 놓치지 않기 위한 절묘하고 정확한 계산과 설계 능력이 요구될 때 각본가의 활로를 모색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시각 표현 기술만으로는 훌륭한 설계도를 그리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설계도만으로는 작품이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도련님들, 다시 한국으로
다니구치 지로와 세키가와 나츠오가 말하듯, 주어진 시대적 삶의 조건 또는 한계를 자신의 삶 안에 주체적으로 재위치시키는 것이 ‘도련님’이라면 다니구치와 세키가와 또한 이 시대의 도련님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없지 않을까? 그들은 분명히 현대의 스토리 만화 생산시장의 물적 조건을 자신의 삶 속에서 재배치시키고 있다. 이 만화가 완성될 때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이 요구됐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만화 시장에 있어서도 (세키가와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당히 하드보일드한 작품이었다.

다시 한국의 만화 시장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웹에 의해 매개되고 유통 경로를 소수의 회사에서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일주일에 1회 연재라는 살인적인 스케줄에 대부분의 작가가 노동의 시간에 비해 과하게 적은 보수를 받고 있으며, 때문에 어시를 쓰는 것도 어렵다. 평가나 보상 역시 온당치 못하다. 100자 남짓한 짤막한 코멘트외의 평가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환경에 자신의 노동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작가들이 있다.
이 글은 ‘한국 웹툰의 작화가 일정한 한계선 위에 놓여 있다면 이것은 웹툰 혹은 만화의 완성도라는 관점에서 볼 때 문제적이냐’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질문 자체가 제대로 주조된 질문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매체 내적으로는 전통적으로 좋은 작화의 기준으로 여겨져 왔던 몇 가지 기준을 웹툰/만화에 적용하기에 어렵다. 외적 조건은 이러한 질문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인지 되물어보게 할 정도로 열악하다. 오히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할 것 같다. 한국 웹툰에서 작화의 한계가 드러날 때 그 책임이 작가에게 되돌려지고, 작가의 역량이나 프로페셔널리즘의 부족을 문제 삼는 경향은 어떤 결과를 낳는가? 그 결과는 요즘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