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비언의 재현 : 동시대 한국 웹툰의 ‘클로이와 올리비아’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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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메리 카마이클의 소설 <생의 모험>에 대해 언급한다. 그녀는 이 소설을 읽는 것이 마치 ‘갑판도 없는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는 것’ 같다고 적었다. 지나치게 ‘감성적’이라는 라벨이 붙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어딘가 머뭇거리는 문체는 소설에 몰입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소설을 끈기 있게 읽는다. 뭔가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그녀는 말을 멈추고 ‘이곳에 모인 것이 여성들뿐인지’를 확인한 후, 마치 비밀스러운 범죄를 고백하듯 말한다. “클로이는 올리비아를 좋아했다.”라고. 그리고는 뻔뻔하게 덧붙인다. “인정합시다. 때로 여성은 여성을 좋아합니다.” 만약 우리가 버지니아 울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분명히 이 대목에서 떨리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실제로 일어난다. 하지만 ‘클로이는 올리비아를 좋아했다’는 바로 그 문장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일어난 적 없는 사건이다. 그녀는 이 사건 이전에 존재했을지 모르는 다른 ‘클로이’와 ‘올리비아’를 떠올리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실패하고 마는데, 왜냐하면 여성들은 거의 예외 없이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제시되기’ 때문이다. 왜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를 질투하기만 했을까?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았을까? 왜 여태까지 아무도 그것에 대해 쓰지 않았을까?

“(…)대단히 중요한 어떤 일이 발생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만약 클로이가 올리비아를 좋아하고 메리 카마이클이 그것을 표현하는 법을 안다면, 그녀는 지금까지 아무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그 거대한 방에 횃불을 밝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계가 시작된 이래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라고 나는 경탄했지요.”

버지니아 울프는 <생의 모험>이 아마도 ‘문학사상 최초’로 여성이 다른 여성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소설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서 ‘거대한 변화’다.

Toulouse-Lautrec, < two girlfriends >, 미상

 

여전히 더듬어 갈 수 밖에 없는 것
아마도 버지니아 울프는 조금 흥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맨 처음 내가 레즈비언 소설을 읽었을 때 느꼈던 흥분에 비하면, 그녀의 글은 지나치게 절제되어 있는 편에 가깝다. 어쩌면 몇 번이고 지웠다가 썼을지도 모르겠다. 초고에는 “너무 좋아서 아무 말도 못하겠음” 이라고 적혀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 그 소설이 얼마나 형편없고 소박한 것이든 간에, ‘한 여자가 다른 여자를 좋아함’을 활자로 확인했을 때의 짜릿함에 대해서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버지니아 울프는 ‘레즈비언’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그녀에게 이것은 여성 재현의 다양성에 대한 문제다. 하지만 두 문제가 연결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레즈비어니즘적 재현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그 일’이 바로 종이 위에, 모든 의미를 가진 다른 문장들과 마찬가지로, 읽히길 기다리며 놓여 있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암호가 아닌 채로 드러나 있다. 글을 읽을 수 있다면 누구든 사실로서 이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하지만 문득 나는 불안해져서, 여러 번 그 문장이 아직 거기에 있는지 확인해야할 것 같은 초조감을 느낀다. 마치 문자들이 종이에서 튕겨나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매달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행스럽게도 다음 페이지로 넘겨도, 책을 덮어도, “클로이가 올리비아를 좋아한다.”라는 사실을 지시하는 문자들이 어딘가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쓴지 거의 100년 가까이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녀가 묘사한 것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 언어가 재현하는 것 자체가 가진 물질성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완력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나는 여전히 경탄한다. 여전히 감동한다. 그렇기에 모든 ‘클로이와 올리비아’는 내게 있어 언제나 ‘세계가 시작된 것 이래 한 번도 본 적 없는’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두 여성간의 관계를 다룬 작품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셀 수도 없는 이성애 관계를 다룬 작품들의 수에 비해, 레즈비언 혹은 여성들 사이의 친밀함을 소재로 한 작품은 딱히 비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현저히 적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있어 <생의 모험>이 보여준 가능성이 어슴푸레하고 깊은 그림자를 더듬어 마침내 횃불을 켜 어둠을 밝히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더듬어 가고 있는 중이고, 더듬어 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학원 백합물의 절정인 <소녀혁명 우테나>

 

백합물 : 여고생으로 쌓아올린 두터운 성벽
우리는 충분히 다양한 레즈비어니즘적 재현을 보고 있을까? 2015년 9월 현재, 10여 개가 넘는 웹툰 플랫폼에서 정식으로 서비스되고 있는 웹툰 중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보기에 좋아할만한 수준으로 여성 캐릭터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작품은 20개가 채 되지 않는다. 이러한 작품들은 마치 홀로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과 싸우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음’으로써 자동적으로 이성애적 관계, 혹은 남성 중심적인 관계와의 대립항을 형성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클로이는 올리비아를 좋아한다.”라고 고백하기 직전, 과장된 제스처로 “이곳에 남성은 한 명도 없지요?”라고 몇 번이고 확인하던 버지니아 울프처럼, 여성들간의 애정은 전시되는 것만으로도 이성애자 남성에 의해 조롱당하거나 무시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한다. 그들의 말 한마디로 인해 여성들 간의 순수한 애정은 미성숙하고 교정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오염되고 만다. 그러므로 어떤 이성애자 남성도 이 성벽을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백합물’의 주 독자층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사실이 놀랍지도 않다. 백합물이라는 용어는 통상적으로 ‘여성들 사이의 (주로 플라토닉한) 미묘한 감정을 주요한 소재로 하는 장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4

<여고괴담2>의 장면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여기에 ‘여고생’이라는 단어를 덧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여고생’이 표상하는 불안정함, 예민함, 폐쇄성은 영화 <여고괴담>, <소녀혁명 우테나>, <마리아님이 보고계셔>, <교실 뒤편에는 천사가 산다>등 수많은 백합물의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물론 캐릭터들이 여고생이 아니더라도, 플라토닉한 성향이 강하다면 ‘백합물’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백합물’이 지향하는 바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높은 성을 여성 캐릭터들 주변으로 쌓아올리는 것이고, 이와 동시에 성애적인 것은 대체로 추방당하기 때문이다. (뒤에 가서 ‘19금’에 대해 살펴보며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백합물’이 노골적으로 성적 욕망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장르적인 지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단지 여성의 육체가 보인다는 것만으로 ‘남성 응시’에 포획되어 버리는 인상을 떨쳐내기 힘겨워지기 때문이다.) 이 성적 순수함, 무관심함은 ‘백합물’을 유지시켜주는 토대이자 장치가 된다.

마지막으로 ‘백합물’을 정의하는 데 중요한 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레즈비언’과의 거리감이다. ‘백합물’에서 다뤄지는 여성들의 관계는 이미 구획 지어진 정체성이라는 영토 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기보다, 거기서 한 10cm쯤 떨어진 채 판타지로 존재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의 ‘레즈비언’들과 멀어질 수는 없으나(레즈비언들이 어딘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레즈비언’에 대해서 다루지는 않는다. 이것은 끝까지 ‘픽션’이어야만 한다. 등장인물들이 ‘그녀 성애자’로서 “난 여자가 좋은게 아니라 너라서 좋은 거야!”를 외친다고 해도, 그것이 ‘장르적 한계’를 특정 짓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생각해보라. 모든 ‘백합물’이 현실의 ‘레즈비언’을 반영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책임감을 이기지 못하고 캐릭터들을 모조리 커밍아웃 시키거나 동성혼 법제화에 투신하게 만들거나 주말 밤 레즈비언 클럽을 방문하게 만든다면, 도대체 ‘백합물’을 봐야 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일까. 불행한 레즈비언 서사는 이미 차고 넘친다.

쌈바 작가의 <설레는 기분>

아무튼 이와 같은 기준으로 보자면, 완결된 웹툰을 포함해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백합물’은 다음과 같다. 먼저 코미코에서 연재 중인 쌈바 작가의 <설레는 기분>이다. 흥미로운 것은 코미코 전체 순위에서 <설레는 기분>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유료분 46화까지 연재된 현재 여성 순위에서는 2위를, 전체 순위에서는 3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같은 ‘캠퍼스 백합물’에 대한 수요가 적지 않음을 추론할 수 있다. 비교적 신생 플랫폼인 피너툰과 곰툰에서 각각 연재중인 <파티션>(팀티코지), <커밍아웃>(하먹)도 빼놓을 수 없다. <파티션>은 화려한 그림체를 무기로 오피스 로맨스를 다루고 있고, <커밍아웃>은 두 여고생 사이의 막 싹트기 시작한 첫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다.

팀티코지의 <파티션>

마지막으로 레진코믹스를 살펴보자. 사실 레진코믹스는 바짝 말라비틀어진 채 사막을 방황하는 한국의 ‘백합러’들에게 오아시스, 단비와도 같은 존재로 자리 잡아왔다. 우선 완결 웹툰부터 살펴보자. 2013년 여름 연재되기 시작한 피토작가의 <나의 보람>를 시발점으로 <인스턴트 글라스>(가재), <봄빙수>(파노), <줄리엣과 줄리엣>(이삭), <마녀도시 리린이야기>(레드렌)에 이르기까지, 다른 웹툰 플랫폼들에 비해 ‘백합물’의 숫자는 눈에 띄게 많은 편이다.

현재 연재중인 것들을 살펴보자면, <꽃들 속에 숨다>(김계후), <데일리 위치>(성원), <그녀의 암캐>(피토)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판타지물’의 수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이 같은 단단한 장르적 안전장치는 ‘학원물’, 즉 ‘여고생’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데, 여성 캐릭터들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독립적인 세계관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배경이 현실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캐릭터들은 현실의 ‘레즈비언’을 연상시키는 대신 실제 인간에게 가해질 수 있는 모든 위해에서 벗어난 신비한 존재로 보인다. 물론 이 같은 인물들이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보다 ‘사실적’인 서사와 인물을 갈구하는 독자층 역시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사실성’은 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피토 작가의 <그녀의 암캐>

 

보다 ‘사실적인’ 레즈비언 감동 실화의 딜레마
웹툰을 출판만화보다 더 자주 보는 세대라면, 와난 작가의 <어서 오세요, 305호에!>(이하 305호)에 대해 잊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2008년부터 연재를 시작해 다양한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루며 숱한 화제를 낳았던 이 작품은, 대형 포털에서 정식으로 연재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 혹은 위로로 다가왔을 것이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로 꼽는 ‘오윤성’과 ‘오윤아’ 남매의 커밍아웃을 둘러싼 다툼이나 레즈비언 독자에게 복장이 터지는 듯한 답답함을 주었던 ‘오윤아’와 ‘백설’ 사이의 감정싸움은, 기존 ‘백합물’의 기준으로는 분류될 수 없는 또 다른 재현 방식에 가까웠다.

디나이얼 클로짓 레즈비언인 ‘오윤아’는, 여자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데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인물인 반면, 그녀의 파트너가 되는 ‘백설’은 오픈리 레즈비언에 가까운 인물로 ‘오윤아’에게 ‘제발 벽장에서 나올 것’을 충고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오윤아’에게 있어서 커밍아웃은 너무나 큰 각오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에 두 사람은 결국 멀어진다. ‘사실적’이라는 표현이 반드시 ‘비극적’이라는 속성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일어났을 법한 ‘오윤아’와 ‘백설’의 이야기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현실의 한 부분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다.

‘오윤아’와 ‘백설’

<305호>의 결말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알다시피, 결국 두 사람은 행복해질 것이다. 바로 이 점으로 인해 <305호>는 픽션과 ‘감동 실화’의 측면을 동시에 가진다. 두 여성이 마녀 혹은 여고생이 되는 대신, 지상의 평범한 레즈비언이 됨으로써 갑자기 ‘성소수자에게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일반인’을 계몽하는 임무를 떠맡게 된 것이다. 여기서 ‘사실성’은 비교적 확보된 것처럼 보이나, 그것이 모든 레즈비언을 대표할 수 있는 서사인지를 물을 필요가 생긴다. 이것은 대표성의 문제-즉 어느 한 ‘클로이와 올리비아’가 자신만이 진짜라고 주장할 때 생기는 문제다. 물론 ‘오윤아’는 자신이 진짜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것은 등장하자마자 무대 중앙으로 급히 떠밀려지는 것과 비슷하다.

완자 작가의 <모두에게 완자가>(이하 모완) 역시 마찬가지의 딜레마를 안고 있다. <모완>은 바이섹슈얼인 작가가 자신의 일상을 중심으로 성소수자를 둘러싼 편견과 차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는데, 때문에 레즈비언 독자들로부터 쉽게 비난 받고는 했다. 170화에서 ‘레즈비언 커뮤니티’라는 단어를 언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완자 폐지 서명’을 받았을 정도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백설’이나 ‘오윤아’처럼, 성소수자라면 마땅히 어두운 그림자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감히 <모완>은 자기가 얼마나 신나게 잘 살고 있는지를 떠드는 것이다. 이 같은 태도에 익숙하지 않은 레즈비언들이 <모완>에 대해 반사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것에 대해 구태여 타박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레즈비언은 다 그렇다고 남들이 오해하면 어떡하느냐?”라는 비판은 꽤 난처한데, 왜냐하면 커밍아웃한 여성의 일상에 대해 다루는 웹툰이 <모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해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완자 작가가 만화로써 뭔가를 말하기 시작한 탓은 아니다. 어차피 ‘현실적인’ 레즈비언, ‘현실적인’ 여성에 대해 말하게 될 때 우리는 이미 오해받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어떤 재현도 사실을 그대로 반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물과 상황 속에 구체성을 불어넣는 작업은 많은 각오와 부담을 요구한다. 그것은 아마도 불가능함 속에서 말해질 수 없는 우리들, 혹은 누군가의 윤곽을 천천히 그려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모두에게 완자가>

 

“이 욕망이 당신의 욕망입니까?” : 레즈비언을 구출하려는 시도들
여성들의 사이의 관계를 재현함에 있어 곤혹스러운 점은 앞서 열거한 두 가지 이유-가상의 순결하고 안전한 세상에 고립되거나, 현실을 지나치게 반영한 나머지 대표성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외에도 많겠지만, 포르노 이슈로부터 접근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사실 한국 웹툰에서 ‘미성년자 관람불가’로 분류된 백합물은 레진코믹스에서 연재중인 팀 가지의 < What Does the Fox Say? >(이하 WDFS)가 전부이다. 최근 연재를 시작한 아지 작가의 <벤전스> 역시 ‘19금’이긴 하지만, 두 작품은 분명히 분리되는 장르적 차이가 있다. 전자가 뚜렷한 성애묘사로 독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다면, 후자는 기존 백합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었던 장르인 ‘스릴러물’을 표방하며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주인공의 심리적 공황을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 WDFS >가 뭔가를 더 보여주기 때문에 19금이라면, <벤전스>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기 때문에 19금인 셈이다.

최근 연재를 시작한 아지 작가의 <벤전스>

 

팀 가지의 < What Does the Fox Say? >

그렇다면 < WDFS >는 무엇을 ‘더’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레진코믹스 측에서 < WDFS >에 달아놓은 문구를 보자. “단언컨대, 우리나라의 백합은 < WDFS >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입니다.” 분명 < WDFS >는 한국에서는 최초로 여성과 여성 사이의 ‘플라토닉한 교감’을 강조하지 않는 백합물일 것이다. 극화체로 늘씬하게 그려진 인물들의 신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에서 우리는, <소녀 섹트>(쿠로가네 켄)의 그것과는 다른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두 작품은 모두 여성 캐릭터들의 노골적인 섹스 신을 그려내고 있지만, 각각 ‘여성향’과 ‘남성향’ 백합물로 구분되는 경향을 보인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거칠게 정의하자면 1) 얼마나 캐릭터들의 감정에 대해 ‘섬세하게’ 다루고 있느냐와, 2) 섹스 신이 삽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지의 여부라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미소녀 야망가’의 등장인물을 단순히 여성 캐릭터로 대체한 백합물일 경우 ‘남성향’으로 분류된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 WDFS >이 뭔가를 ‘더’ 보여주고 있다면, ‘남성향’이라고 분류되는 19금 백합물들에 비해 좀 더 ‘여성적인’ 섹스신을 연출한다는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팀 가지’가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두 명의 작가임을 고려할 때, < WDFS >가 드러내는 욕망은 불쾌하거나 위협적이지 않다. 그들 사이에 끼어들 어떤 남성도―물론 작가 본인을 포함해서―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성애 규범적인 레즈비언 포르노에서 으레 재현되는, 곧이어 등장할 남자 배우를 위해 레즈비언 연기를 하는 두 명의 여자 배우를 지켜보는 것만큼 서글픈 일도 없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남자 배우의 음성만으로 엉덩이를 걷어차여 화면 바깥으로 추방당하는 것이다. 적어도 < WDFS >에서 그러한 박탈감을 느낄 이유는 전혀 없고, 때문에 레즈비언 독자들은 안심하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쿠로가네 켄의 작품인 <소녀섹트>

그러나 질문은 남는다. <소녀섹트>가 언제든 개입될 수 있는 남성 주체의 응시로 인해 불안하게 흔들리는 쾌락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남성향’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이, 역으로 < WDFS >로 하여금 ‘여성 응시’를 가능하게 하는가? 19금 백합물을 찾는 독자들이 ‘남성향’을 볼 때는 남성이 되어 작품을 즐기다가, 갑자기 ‘여성향’을 보는 순간 여성이 되기라도 한다는 것일까? 도대체 그 경계를 누가,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우리가 수호하고자 하는 바로 그 욕망에는 성별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물론 여기에는 회의적인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애초에 모든 욕망의 주체는 남성이며, 여성은 이 자리를 전유함으로써만 쾌락을 점유할 수 있다는 입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같은 입장에서는 < WDFS >를 비롯한 많은 ‘여성향’ 백합물의 독자들은 남자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일 뿐이며, 흉내를 내지 않고서는 백합물을 즐길 수도 없다. 이러한 결론은 너무나 많은 차이와 실천들을 무력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많은 페미니즘/퀴어 이론 연구자들은 ‘여성 혹은 레즈비언이 어떻게 응시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왔다.

정신분석학적 방법론으로 레즈비언 주체의 가능성을 연구해온 테레사 드 로레티스는 레즈비언 관객이 이중적 응시를 통해 이원적인 젠더 체계를 전복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것은 <소녀섹트>와 < WDFS >에서 동시에 응시의 주체로서 자신을 위치시키는 능력이다. 나아가 발레리 트라웁은 ‘레즈비언의 욕망’이라는 말로 레즈비언이 가질 수 있는 욕망의 가능성을 한정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결국 이러한 주장은, ‘레즈비언적 욕망’, 혹은 ‘여성적 욕망’ 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지 특정한 재현 방식과 재현 대상에 의해 욕망이 촉발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이러한 비평적 틀에서 접근해 볼 때, 19금 백합물에서 재현되는 여성들이 얼마나 섬세하고, 사실적이고, ‘삽입 섹스’를 하는지 마는지 등의 잣대를 가지고 쾌락의 범주를 특정 정체성에 온전히 할당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그러한 분류는 본질주의적인 함정으로 우리를 이끌기 쉽다. 이것은 특정 장르를 ‘소년 만화’, ‘소녀 만화’로 계속해서 부름으로써 내가 느껴야 할 쾌락이 나의 섹스/젠더에 의해 지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 WDFS >가 이룩해낸 성취-한국 최초의 19금 백합 웹툰이라는 점에서-를 상찬하기 위해 동원되는 수사인 ‘여성향 백합’이라는 용어는, ‘남성향 백합’과 마찬가지로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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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지 작가의 <우리는 시간문제>

 

그들이 어떻게 말하건 간에
앞서 발레리 트라웁이 제안한 바와 같이 레즈비언이 바로 거기에 있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레즈비언적인 독해’가 가능할 뿐이라면, ‘클로이와 올리비아’를 찾아내는 일은 이제 전혀 어렵지 않다. 이제 잉크로 새겨진 ‘레즈비언’이라는 네 글자를 찾아다는 대신 그들을 ‘레즈비언’이라고 부르기만 하면 된다. 이런 방식으로 길가의 돌멩이 여럿을 레즈비언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한국의 ‘백합 시장’이 곤궁할지는 몰라도, 백합물을 제외한 나머지 장르들은 차고 넘치기 때문에 우리가 레즈비언으로 부를 가능성이 있는 대상은 무궁무진한 셈이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쉬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여성들이 중심이 되는 서사가 드물뿐더러, 그들 사이의 관계가 남성을 매개하지 않고 이뤄지는 경우는 더욱 드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몇몇 작품들은 레즈비언적 독해를 허용하고 있다.15

네이버에서 연재 중인 <스페이스 차이나 드레스>(최봉수, 원현재)와 레진코믹스에서 완결된 <우리는 시간문제>(하양지), 연재 중인 <자해클럽>(소망), 마지막으로 네이버의 <뷰티풀 군바리>(설이, 윤성원)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이 작품들을 아예 ‘백합물’로 정의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스페이스 차이나 드레스>의 주인공인 ‘메이’는, 맹목적으로 ‘차밍 사저’를 쫓아다니는 것도 모자라 과감한 스킨십이나 사랑 고백 등을 서슴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문제>의 주인공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고 완성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자해클럽>은 역시 <우리는 시간문제>의 폐쇄적인 성격을 공유하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 <뷰티풀 군바리>는 미소녀 캐릭터들의 에로틱한 이미지로 꽉 차 있는 성반전물이면서,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여성 캐릭터들 간의 성적인 긴장감을 형성한다. 물론 해당 작가들은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이 작품들이 백합물이라거나, 레즈비언을 다루고 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들을 ‘레즈비어니즘적 재현’으로 읽어낼 수 있는 상상력이 있다면, 왜 그것을 쓰지 않고 내버려 두겠는가?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면 하는 것이 낫다. 슬프게도, 어차피 ‘클로이와 올리비아’는 마이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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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작가의 <자해클럽>

난처함과 절박함 사이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애타게 무언가를 찾아왔다. 큰 횃불을 들고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길을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더듬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대체 뭘 위해, 어디로 가기 위해 이런 모험을 감행해야 했단 말인가?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어둡고 거대한 방의 어딘가에 출구가 존재하기나 하는 것일까? 어쩌면 눈이 가려진 채로 같은 장소를 빙빙 돌고 있거나, 다른 방향으로 몸을 살짝 비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좀 더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어딘가에 도착하게 되리라는 환상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레즈비어니즘적 재현에 대한 나의 집착이 포기되기 위해서는, 포기할만한 재현이 존재해야 한다.

레즈비언 영화 감독인 바바라 해머가 자신의 영화가 지나치게 본질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을 때를 회고하며 한 에세이에서 했던 말을 인용하자면, “스크린이 안팎으로 비어있었다. 그저 주변화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뭐가 있어야 해체든 분석이든 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이 글은 섬세하게 기획되지 않았다. 다만 동시대 한국의 웹툰에서 어떤 ‘클로이와 올리비아’가 보이는지, 또 그들이 묶일 수 있다면 어떻게 묶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구상되었다. 이 질문은 대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제기된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기대하고 있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웹툰을 보면서 레즈비언을 찾지 않게 되는 일이다. 굳이 찾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레즈비언이 많이 등장해야만 한다는 말이 아니다(그건 오히려 재앙에 가깝다). 최근 번역된 게일 루빈의 <일탈>의 서문에서 그녀는 이렇게 썼다. “나는 언젠가 성이 정말로 주변화되기를 바란다.” 나 역시 내가 고민하는 모든 문제들이 숫자나 비율에 관련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더 이상 여성 캐릭터나 백합물의 개수를 일일이 세어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