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퀴어 웹툰에게 불만이었지만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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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웹툰”?

퀴어 웹툰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퀴어? 그냥 그거 동성애자 나오는 거 아니냐?’고 당신은 내게 물을 수 있겠다. 당신이 맞다. 그리고 틀렸다. ‘그럼 뭔데? 성소수자가 퀴어라는 뜻 아니냐?’ 역시 맞다. 그리고 틀렸다. ‘그럼, 퀴어 웹툰이 뭔데? 그냥 너도 모르는 거 아니냐?’ 그렇다. 이번에만 정답이다. 퀴어 웹툰을 뭐라고 정의하기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왜냐면 ‘퀴어’라는 용어 자체가 열린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 용어에 대한 이해들은 많은 경우 단일한 토대나 역사를 참조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퀴어 웹툰’은 자연스럽게 ‘퀴어’라는 단어에 붙은 골치 아픈 여러 문제들을 수반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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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동성애물의 이미지

 

좁은 의미에서의 “퀴어”: THE 정체성 헌터

자, 그전에 우리는 몇 가지 문제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먼저 첫 번째 질문이다. 왜 ‘동성애 웹툰’과 ‘퀴어 웹툰’은 동의어가 아닌가? 이에 대해서는 퀴어 이론가 애너매리 야고스가 ‘퀴어’에 대해 무어라 정의했는지를 들어보면 좀 더 명확해질 것이다.

‘분명히,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퀴어의 정의란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성, 공동체, 정치에 대한 지금까지 받아들여져 온 이해 방식에 가장 차질을 주는 것으로 증명된 퀴어의 변화는 성, 젠더, 섹슈얼리티의 규범적 통합을 문제화한다.’(1)

동성애라는 용어 자체는 분명히 이성애/동성애로 나누어진 이분법적 대립을 전제하고 있다. 동성애는 그 대립을 토대로 해서만 서 있을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동성애자임을 정말로 믿으려면, 우리는 누군가가 정말로 ‘여자’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 여자는 ‘이렇게’ 생겼으며 ‘이런’ 영혼을 가졌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이런 영혼과 생김새의 인간이, 그의 영혼과 생김새와 꼬옥 같은 인간을 만났을 때, 그들의 만남을 ‘동성애’라고 부른다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 믿음은 ‘이성애’라는 대립항을 필요로 하는 허약한 거울상에 불과하다. ‘동성애 웹툰’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동성애’를 하기 위해서는 ‘이성 캐릭터’가, 즉 언제든 이성애를 할 수 있다는 암시가 필요하다. ‘동성애 웹툰’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름아닌 ‘이성애’다. 그렇지만 ‘퀴어 웹툰’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같은 전제에 반드시 동의할 필요가 없다. 꼭 ‘퀴어’=‘동성애’일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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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과 마음으로 여성을 사랑하는 동성애물

그렇다면 ‘성소수자 웹툰’은 어떤가. ‘성소수자 웹툰’은 ‘퀴어 웹툰’과 동의어가 될 수 있을까? 이 경우 ‘퀴어’=/=‘동성애’, ‘성소수자’=/=‘동성애자’이므로 ‘퀴어’=‘성소수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논리적으로 이것은 틀린 증명이다. 더욱이 ‘성소수자’라는 용어는 한국적 맥락에서 ‘퀴어’보다 좀 더 정치적/사회적인 실천의 함의가 포함된 용어로 보인다. 요컨대 야오이, 백합물과 같은 하위장르는 ‘동성애물’이라 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좀 더 진지한 커밍아웃물, 일상물은 ‘성소수자물’이라고 분류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 두 장르 모두 크게 보면 ‘퀴어 웹툰’의 하위 장르에 포함될 수 있으며, 동시에 포함될 수 없기도 하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퀴어’라는 단어가 소비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퀴어’=’성소수자’=’LGBT’=’동성애자’와 같이 여러 단어가 별 차이 없이 수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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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저것도 아니지만 존중은 해줘야 할 것 같은 정체성의 대표주자, 레즈비언 드라마 <  L-word  > 의 등장인물, ‘Max’

따라서, ‘혹시라도 성소수자라는 단어가 놓쳤을지 모르는 아주아주 희귀한 수집가용 정체성’을 포함하고 존중하는 의미로 ‘퀴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매우 정치적이고 주체적이고 전복적이고 횡단적이고 해체적이고 유의미한 행위이다. 이런 사고의 연장선에서 ‘퀴어 웹툰’은 소재로서의 동성애자 혹은 성소수자 혹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지만 존중은 해줘야 할 것 같은 흔들리는 정체성들을 다룬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퀴어 웹툰’은 ‘동성애 웹툰’, ‘성소수자 웹툰’을 포함한다.

 

넓은 의미에서의 “퀴어” : WAYS OF SEEING

그러나 최초의 ‘퀴어’라는 용어가 재기했던 바로 그 질문을 상기해보자. 퀴어 이론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주디스 버틀러가 ‘섹스는 자연적인 것인가?’(2)라고 물었을 때, 분명 그것은 고정불변적으로 여겨지던 인식의 뿌리를 뒤흔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퀴어는 ‘성, 젠더, 섹슈얼리티의 규범적 통합을 문제화하는’ 모든 기획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또한 퀴어는 성의 진화론적이고 단선적인 역사를 찢는 무수한 관점을 산출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퀴어는 단순히 소재로서 ‘특이한 정체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앨리슨 버틀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평적, 이론적, 제도적 구성물’(3)로서의 ‘퀴어’는 현실에 존재하는 희귀한 종족으로서의 인간을 수집하는 장르의 한 분과이기보다, 텍스트가 ‘정상적’ 섹슈얼리티를 재현하는데 있어 어떻게 실패하는지를 탐문하고, 드러내는 비평적 관점에 가깝다. 요컨대 이성애 규범적인 구조를 재생산하는 ‘동성애물’은 전혀 ‘퀴어’하지 않다는 얘기다.

따라서 ‘동성애 웹툰’과 ‘퀴어 웹툰’을 동일한 장르로 취급하는 것은 엄밀하게 따져보자면 불필요한 오해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선 분량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현재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네이버 웹툰을 퀴어하게 읽어내기 등의 시도를 함으로써 무리하게 이성애 규범적 이데올로기를 전복하고 전유하기 보다, 이미 ‘존재하는’ 퀴어 웹툰들의 양상을 분석함으로써 앞으로 어떤 퀴어 웹툰들이 가능해질 것인지를 상상해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자. 이유는 간단한데, 이런 작품들은 이야기를 해도 해도 모자라고 그려도 그려도 모자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넓은 의미에서, 즉 태도로서의 ‘퀴어’를 끊임없이 의식하고는 있을 예정이지만, 분류의 대상이 되는 웹툰들에게 있어서는 그 틀을 적용하지는 않을 예정이며, 오로지 웹툰이 다루는 소재, 내용(서사), 마지막으로 작가의 정체성에 의해서만 동시대 한국 웹툰에 있어서의 ‘퀴어 웹툰’을 분류해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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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네이버 웹툰을 퀴어하게 읽어내기” 후보인 현재 네이버 1위 <복학왕> (게다가 진짜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1. 퀴어적인, 너무나 퀴어적인: 소재로서의 퀴어

단지 넓은 의미에서 퀴어를 따져본다면, 퀴어에는 성소수자=LGBTIAQ=어쩌고저쩌고=이성애자 빼고 전부가 포함되는 셈이므로 여기에는 아주 곤란한 문제가 생기고 만다. 바로 ‘BL’과 ‘백합’을 ‘퀴어’에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이게 뭔 문제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성소수자 진영에서는 다소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아니 그렇게 되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어쩐 정치적인 맥락이라는 게 있는데 그러니까 그런 게 희석되고 어떻게 보면 우리가 대상화되기도 하는 거고 물론 우리도 BL이나 백합을 즐겨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하고 말 끝을 흐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이다. 그렇게 되면 이 글이 다루게 되는 범주가 상당히 넓어지게 된다. 아니 애초에 트랜스젠더, 아님 뭐 드랙(일상에서 여장 혹은 남장하는 사람들) 같은 사람들만 나오는 웹툰을 소개하려고 했는데 게이나 레즈비언같은 뻔하고 흔한 소재가 나와버리면 전혀 ‘퀴어’ 하지 않은거 아니냔 말이다. 대체 긴 생머리를 휘날리는 ‘일틱’한 (일반틱하다는 말로, 한마디로 ‘이성애자 같다’는 뜻이다) 여러 명이 긴 치마를 휘날리며 나와서 백합 꽃밭을 거니는 그런 웹툰이 어떻게 ‘퀴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나는 여장한 남자나 남장한 여자 등 최대한 과격하고 특이한 정체성을 가진 주인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먼저 ‘하렘물’에 가까운 단순한 ‘여장/남장물’ 부터 살펴보자. 첫째로 소개할 올레마켓웹툰에서 연재되는 라뉘 작가의 <밤의 여왕>은, ‘모던 바 바텐더로 일하게 된 웹툰작가 지망생’인 주인공 ‘유권’이 바에서 일하며 겪게 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소재에서 추측할 수 있듯 19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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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 호라이즌> (이소록)

두 번째로 신생 웹툰 플랫폼인 스핀에이에서 연재 중인 <비스트 사인>(해밀, Sodapie)는, 가문을 위해 여장을 한 후 당주로서 살아가야 하는 주인공 ‘한세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코믹GT에서 연재중인 이소록 작가의 <트랜스 호라이즌>은, 또래 남자아이들보다 왜소한 남자 주인공 ‘신재민’이 여장을 하고 아이돌 그룹 ‘ROSE’에 들어가게 되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1. 남자 옷, 여자 옷만 입었다 뿐이지 실상 자기 자신이 그 옷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2. 여장/남장을 하면서도 분명히 ‘이성’에게 흥미를 보인다(안전장치).
3. 때때로 남장/여장한 자신의 모습을 즐긴다.

1번과 2번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이 같은 유형의 작품들이 어쩌면 이 같은 ‘급진적’인 소재를 이용하면서도 호모포비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3번으로 인해 여전히 ‘퀴어’한 틈새가 벌어진다. 흥미로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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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수이야기> (산삼)

또한 다음에서 연재중인 <달수 이야기>는 여타 남장물의 지워낼 수 없는 ‘내…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감수성을 지워내고 ‘완벽하게’ 남성성을 수행하는 주인공 ‘김달수’의 남고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쯤 되면 ‘김달수’가 원래 ‘김주혜’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독자가 과연 몇이나 될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사실 독자들에게는 ‘김달수’의 눈을 통해 남고의 실상에 대해 관음증적으로 훔쳐보는 쾌감이 더 큰 듯하다. 이렇든 저렇든 ‘김달수’는 새로운 남장 모델인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위에서 나열한 특이하고 급진적인 정체성 모델들을 찾다 보니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온다. 그러니까 ‘드랙’과 같은 전복적인 정체성 수행 모델이 아니고서는 퀴어를 말할 수도 없단 말인가? 퀴어 웹툰의 소재가 반드시 특이하고 특별한 것이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백합’이 퀴어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백합은 태생적으로 눈을 가린 채 이성애 규범성이라는 애인을 끌어안아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불행한 레즈비언 서사다. 이 애인을 끌어안는 순간, ‘남자 맛을 못 봐서’ 혹은 ‘남자 흉내를 내는’ 미성숙한 처녀가 될 가능성을 항상 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BL’ 역시 마찬가지의 모순을 안고 있지만, ‘백합’만큼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백합’은 어쩔 수 없이 여성이며 레즈비언이라는 두 개의 ‘텅 빈 기호’와 싸워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합이 ‘이성애 규범성’과 싸우기 위해서는, ‘기호’ 로서 인식되는 일이 먼저다. ‘BL’의 ‘공수’ 구도가 가부장적 남녀 구도를 재생산한다는 비판과 마주치는 것이 통과의례로 여겨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남성 캐릭터로 인해 더럽혀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해 백합물은 다른 장르와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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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큘린 바뱅의 회고록> 푸코가 표지를 고른 것이 아니길 바란다.

따라서 ‘백합’, 즉 단순하게 환원하자면 ‘레즈비언’은 그들이 전복하고자 하는 이성애 규범성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말해질 수조차 없는 불안정한 존재다. 반면 ‘급진적인’ 이 ‘퀴어’ 정체성들은 어떤가. 드랙, 트랜스젠더, 인터섹스(間性, 남녀의 생식기를 다 가지고 있는 제 3의 성), 혹은 이도 저도 아닌 섹슈얼리티를 적극적으로 선택한 이 ‘젠더 무법자’들은, 이성애 규범성이 얼마나 억지스러운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는지를 자기 자신의 온몸으로 증명한다. 그들을 죽이지 않는 한, 아니 ‘에르큘린 바뱅'(4) 등의 여러 사례를 보건대 죽어서도, 그들은 살아 숨 쉬는 훌륭한 표본인 것이다. 이렇듯 그들에게 수여되는 퀴어 투사로서의 무공 훈장 등은 실상 ‘퀴어’라는 개념에 항상 실험적이어야 한다는 충분 조건을 제공하는 것 같다. 마치 초기 아방가르드 미술의 가치처럼 말이다. 혹은 모더니즘 미술의 구호를 조금 변형해, ‘정체성을 위한 정체성’은 어떤가? 무릇 퀴어라면 그 어떤 평가 기준과도 무관하게 오직 최고로 새롭고, 변태적이고, 기이한 수준으로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 터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우리 미래의 ‘퀴어 웹툰’을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분명 다양한 퀴어들의 경합하는 몸이 현시된 세계 만물 퀴어 박람회 같은 모습일 것이다. 더 이상 소수자나 다양성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 상상만 해도 온몸이 짜릿해진다. 기쁜 일이다. 다양성 만세. 젠더 애즈 더 레인보우(Gender as the rainbow) 만만세. 물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내가 몰래 보는 것은 <꽃이 되자>같은 오래된 이성애 중심적 에로 만화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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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비야 울어> (비로)

 

2. 비극의 탄생 : 성소수자 서사

미래의 ‘퀴어 웹툰’에 등장할 인물들이 얼마나 특이할지는 몰라도, 현재로서 그 한계가 있는 것은 자명해 보이고, 무엇보다 몇 가지 지점에서 우리가 더 이상 ‘퀴어’에 대해 비꼴 수 없는 지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현실을 반영했음이 틀림없어 보이는 퀴어들만의 ‘비극 서사’다. 성소수자를 다룬 웹툰 중 최초로 대형 포털에서 정식으로 연재된 <어서오세요! 305호에>(와난)을 상기해보자. 물론 이 글은 연재 중인 작품만을 다루고 있지만, 백설과 윤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물론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복기해볼만하다.

연재 중인 작품으로 말하자면, 먼저 곰툰에서 연재중인 비로 작가의 <숨비야 울어>를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한 섬을 배경으로 여러 실패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동성애자인 ‘신현산’, 몽상가 ‘달리아’, 가출청소년 ‘한빈우’를 주인공으로 펼쳐지는 몽상적인 이야기들도 매력적이지만, 무엇보다 ‘신현산’이 자신의 성정체성과 화해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과정이 문학적 나레이션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롭다.9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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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아, 거울아> (다드래기)

여기에 더해, 최근 필자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웹툰 중 하나인 레진 코믹스의 <거울아, 거울아>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연재되고 있는 ‘정통 퀴어 웹툰’이다. <거울아, 거울아>는 가톨릭 신자인 남성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대학 동아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다룬다. 그들의 삶을 마치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듯 투명하게 재현하려 노력하는 이 작품은, 낯설고 생경한 상황들로 독자들을 밀어 넣음으로써 ‘정상적 섹슈얼리티’를 교란한다. 만화 말미의 감사인사로부터 독자들이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기꺼이 그런 삶에 공감할 준비가 되어있다.

또 같은 레진코믹스에서 연재중인 <카페 로파무드라>를 잊어서는 안되겠다. <카페 로파무드라>는 레진코믹스에서 연재중인 언발란스 작가의 작품으로, 이전작 <이너프>에서도 레즈비어니즘적 코드를 적극적으로 드러냈던 만큼 이번 작품 역시 단순히 여장 코드에 그치지 않는 ‘퀴어’한 서사를 보여준다. 이 웹툰의 인물들은 대부분 이원론적 섹스/젠더 구조 위에 안전하게 착지하는데 실패한다.

마지막으로 며칠 전 레진코믹스에서 연재를 시작한 19금 레즈비언 웹툰 <벤젠스>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섹시한 레즈비언 형사가 등장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지만, 죽은 그녀의 애인은 상징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녀를 괴롭힌다. 이로써 그녀는 곧 클로짓 감수성으로 폭발할 듯한 다이크 (dyke, 남성적인 레즈비언) 드라마의 주인공임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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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로파무드라> (언발란스)

물론 이 모든 웹툰들을 ‘어차피 다 똑같은 디나이얼 클로짓 정서’라며 뭉뚱그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한 단락을 인용할 마음도 전혀 없다(‘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한다’). 그러나 한계는 지적되어야 한다. 어째서 아직까지 ‘퀴어 웹툰’의 성소수자 비극서사는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진화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우리의 ‘프랑켄슈타인’(5)이 모든 소수자들의 원형에 가까운 탓일 것이다.

1. 그는 ‘끔찍스럽게 다르고’ 2. 그 때문에 그의 창조주에게 버림받고, 3.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박해받으며, 4. 심지어 단 한 명의 이해자도 없기에 5. 그는 자살한다. 이 이야기가 성소수자의 비극이 아니라면 이상할 정도다. (이후 <프랑켄슈타인>은 여러 버전의 모방과 패러디를 낳았는데, 가장 대표적이며 훌륭한 버전은 바로 <프랑켄슈타인의 신부>(James whale, 1935)와 <로키 호러 픽처쇼>(jim sharman, 1975)이다. 당연히, 두 감독 모두 게이다.)

물론 프랑켄슈타인은 고통스럽다. 그가 등장하는 순간 소박한 전원 풍경은 순식간에 호러 영화의 한 장면으로 전환되고 만다. 순진한 시골 처녀는 프랑켄슈타인과 말을 채 섞기도 전에 영혼부터 타락한 채 지옥으로 떨어진다. 풀리지 않는 오해는 곪아 곧 증오로 변하고, 그는 살인을 시작한다. 그는 창조주를 증오하고, 그를 박해하는 인간들을 증오하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증오한다. 프랑켄슈타인은 불행하다. 그는 인간의 언어를 알고 있기에 ‘이해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지만, 누구에게서도 그것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아버렸다. 이 이야기는 그래서 고립된다. 프랑켄슈타인은 이해되지 못하고 침몰함으로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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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의 신부>

프랑켄슈타인이 “내가 사라지면 우리 두 사람의 기억도 금방 사라지겠지.”라고 말한 후 바다로 뛰어드는 순간, “침묵은 곧 죽음”이라던 동성애자들의 상징적인 구호를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그는 죽는다. 그와 동일시하거나 그에게 애정을 느낀 다른 작가들이 여러 번 작품을 통해 그를 부활시키지만, 어쨌든 그것은 그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원형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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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 호러 픽처쇼>

아마도 상기의 작품들(<305호>의 윤아, <숨비야 울어>의 신현산, <거울아, 거울아>, <카페 로파무드라>, <벤젠스>)을 동일한 하나의 프리즘-비극적 퀴어 드라마로 읽어내려는 시도는 매우 왜곡되고, 회의적인 시선일는지도 모른다. 나의 문제 제기가 “왜 밝은 퀴어 드라마는 없는 거야?” 라는 조야한 시각의 시비 걸기가 아님을 알아주었음을 한다. 정체성의 정치라는 투쟁의 장에서는 지켜낼 수 있고 또 지켜내야 하는 공통된 서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임을 나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여전히 ‘디나이얼 클로짓’(6)의 비극 서사에서 맴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해받지 못하는 자신’의 아픔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아야만 할까? 언제까지 자신의 연인을 숨긴 채 언제 들킬까 전전긍긍 평생의 비밀로 간직해야 하나? 언제까지 인정받고 싶어서 억지로 연기를 해야 하나? 도대체 만화에서조차 우리가 프랑켄슈타인을 보고 또 볼 이유가 있는가? 물론 강조했듯 웹툰의 이러한 묘사들은, 한국의 성소수자들이 처한 현실과 다르지 않은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일종의 리얼리즘적 배경이며 장치이다. 그렇기에 함부로 비난하기란 힘들다.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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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완자가> (완자)

 

3. 앗! 알고보니 작가가…: 작가는 어떻게 장르가 되었나?

지금까지 웹툰의 내용으로서의 ‘퀴어’를 살펴보았다. 이제 만화의 작가로서 ‘퀴어’ 자신을 살펴볼 차례다. 여기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악한 질문들을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질문1. 작가가 성소수자이며, 자신의 성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만화를 그리는가?
질문2. 작가가 성소수자이지만, 그와 상관없는 만화를 그리는가?

상기의 질문들은 작가에게 여러 정치적이고 사회적인-물론 ‘만화’라는 특수한 문화예술적 범주를 넘어선-특정한 포지션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커밍아웃 하라!”라는 강요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나는 지금 대표성에 따른 책임과 당위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며(사실 별로 관심도 없다), 궁극적으로 독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작가’를 하나의 장르로서 수용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퀴어 웹툰’이 다루는 소재와 서사 외에도 ‘작가’라는 중요한 요소가 장르적 속성의 하나로서 중요한 입지를 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석 대상이 ‘사람’이라는 이유로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할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수자 장르의 특수한 ‘사태’에 가깝다.

작가가 소수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뜬금없이 ‘소수자 장르’로 편입되는 수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어리둥절함을 느껴본 적 있는가? 또한 본인이 소수자라는 이유로 멋대로 “우린 다 그래요~” “넷째 손가락이 길면 레즈비언~”등을 외쳐대는 통에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싸매 본적 있는가? 사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은, 장르의 내적 법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가 커밍아웃 하는 것 외에 ‘퀴어 웹툰’을 그리는 가장 쉬운 방법을, 나로서는 찾기가 힘들다. 그만큼 ‘작가가 성소수자냐, 아니냐’는 ‘퀴어 웹툰’이라는 장르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속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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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지지)

그렇다면 앞서 제기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질문1. 작가가 성소수자 이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한 만화를 그리는가?’ 이는 필연적으로 ‘일상물’이라는 장르와의 연계성을 불러일으킨다. 대표적인 ‘퀴어 웹툰’이면서 ‘일상물’인 예로는 네이버의 완결된 웹툰인 <모두에게 완자를>(완자), 다음의 <이게 뭐야>(지지)가 있을 수 있다. 이 두 웹툰 모두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작품을 연재하는 동력으로 삼는다. 두 만화의 내용은 주로 자신의 성정체성이나 그것을 둘러싼 오해, 일상, 연애사 등이다. 여기서 계몽의 대상으로 외부의 일반인이 전제되는 순간, 일상물은 잠시 학습만화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성소수자가 성소수자를 소재로 만화를 그릴 때 처하는 어려움이다. 거리 두기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들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거나 혹은 동시대 성소수자 운동의 방향성과 다른 이야기를 마치 ‘옳은 것인 양’ 하게 될 경우, 그 대표성으로 인해 성소수자 내/외부 모두에게 지탄받게 되는 곤란함을 겪는다. 그렇다면 성소수자로서, 성소수자가 등장하는 만화를 그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곤란한 상황에 대한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소리다. 만화를 그리는 것은 어쨌든 ‘무슨 말이든지’ 해야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작가들이 그리는 작품들은 ‘퀴어 웹툰’에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용적으로도, 작가의 정체성이라는 측면에서도 ‘퀴어 웹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제목 없음-1
앨리슨 백델의 <재미난 집>과 쥘리 마로의 <파란색은 따듯하다>. 모두 레즈비언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재구성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질문 2’에 해당하는 케이스라면 어떨까? 하지만 과연 한국 웹툰에서 ‘질문2’에 해당하는 사례들을 실제로 찾을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우선 작가가 ‘성소수자’임을 알 수 있으려면 커밍아웃을 해야 할 텐데, 한국에서 작가가, 그것도 ‘웹툰’ 작가가 뜬금없이 커밍아웃을 도대체 왜, 어떻게 한다는 말일까? (물론 성소수자 이슈에 있어서 ‘가십’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지는 두말하면 입이 아픈 수준이다. 성소수자들은 언제나 ‘동일시’에 목말라 있고, 비밀스럽게 공유되는 사생활은 이러한 동일시의 통로가 될 준비가 언제든 되어있다. 내 말은, 커밍아웃을 안 했다고, 안 보인다고 성소수자인 작가가 없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

작품의 해석에 있어 작가의 성정체성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커밍아웃 여부와 상관없이 작품이 발표된 순간 작가의 손에서 작품은 이미 떠난다는 사실이다. 독자는 자기가 좋을 대로 작품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작가는 불안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작품이 오해되길 바라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잘 나가는 무협 활극을 그리는 작가가 갑자기 커밍아웃을 한다면? (정말로 절실한 이유로 인해서 동성혼 법제화 운동에 참여한다고 해두자.) 뭐, BL 2차 창작의 수요가 증가하거나 혹은 호모포비아 독자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거나 할 것이다. 혹은 “어쩐지 선이 여성적이더라….” 운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까지는 ‘남성적 매력’에 대해 칭찬하던 독자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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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는 없다> (이우인)

다만 레진코믹스에서 연재 중인 <로맨스는 없다>의 경우는 무척 흥미로운 포지션을 취하고 있는데, ‘경험담’을 살짝 변형하고 과장한 것이 분명함에도, 만화적 서사와 형식의 완벽함으로 인해 오히려 초현실적인 판타지로서 어필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보다 착취와 창조를 행하는 작가의 성정체성이 ‘게이’라는 사실은 작품을 독해하는데 있어서 오히려 가산점으로 작용한다. 이우인 작가는 ‘게이들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겠으나’ 여성 독자들을 무시할 수는 없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중간지점으로 가는 것이라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7) 이는 그가 작품 활동을 함에 있어 ‘게이’로서의 정체성보다 ‘만화가, 콘텐츠 제공자, 엔터테이너’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는 증거다. 여기서 다른 ‘커밍아웃을 한 작가들’과의 차별점이 생긴다. 하지만 이우인 작가 스스로가 밝혔듯, 그는 그가 ‘좋아하는 주제’인 ‘게이 로맨스’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덕업일치’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탁월한 작화와 연출력, 만화적 센스로 표현될 수 있는 작가로서의 재능과 게이로서의 정체성이 한데 어울려 두고두고 회자될 재미있는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게이 정체성’은 그의 작업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무척이나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질문 2’가 묻고자 하는 ‘작가의 정체성과 무관한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이 태어나 언어를 습득하고 하나의 공동체에 녹아들어 인간들 속에 섞이는 순간, 우리는 이미 물화되고 이데올로기화된다. 예술이 사회를 반영하고,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왜 ‘퀴어’가 하나의 장르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퀴어’는 한 인간, 하나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의 장르가 될 수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에게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망각되지 않기 위해서다. 드러내고 보여주기 위해서다. ‘퀴어 웹툰’ 역시 마찬가지다. ‘퀴어 웹툰’은, ‘퀴어’가 여기에 있고, ‘퀴어’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한다. 촌스럽고 후지다고 해도 그것이 ‘퀴어’라는 장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고 이 존재 자체가 내게 어떤 불만들을 말하게 한다. 다행스럽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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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존재?

 

결론을 대신하는 긴 불만 : 가장 보통의 존재

여기까지 우리는 ‘퀴어 웹툰’을 총 세 가지 기준-소재, 내용, 작가-으로 분류하는 시도를 해보았다.

먼저 소재로서 ‘퀴어’를 끌어들이는 것에 대해, 나로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가장 극단적이고 특이한 정체성을 데리고 와 전시하는 것 외에 아무런 효과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끝내주게 그림이 멋있고 내용이 재밌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둘째로 내용적 측면에서의 ‘퀴어’에 대해서는 비극적이고 고립적인 서사에 대해 벗어날 필요성을 지적한 바가 있다. 하지만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필요성과 작품의 핍진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장르로서의 ‘퀴어’ 작가는, 기본적으로 작가의 정체성이 작품에 녹아들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왜 일군의 작가들이 ‘장르’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뭔가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했다는 답답함이 있다. 미술비평가 니꼴라 부리요는 (전혀 이제껏 전개되어 온 본문과 상관없는) 인용문에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타자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비판적 판단을 생략하는 태도, 일종의 포스트모던 미적 예법의 출현을 목격하고 있다. 당연시되면서, 이 극단의 다문화주의는 선의의 정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말하자면 타자를 타자로 인정하려는 열망이다.”(8)

60억 인구가 60억 젠더가 되는 풍경을 묘사한 수사로서는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으리라 본다. 우리 모두 가장 보통의 ‘인간’이며, 가장 보통의 ‘소수자’인 모순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글을 기획하게 된 이유는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작가들이 어떻게 그려놔도, 무슨 이야기를 해 놔도 결국에는 “이것은 성소수자가 아니라 결국 인간의 이야기입니다.”를 주장하는 짜증나는 몇몇, 아니 주된 의견들에게서 ‘퀴어’라는 장르를 구제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보기엔 독자들뿐만 아니라 작가 본인들도 같은 함정에 빠지는 것 같았다. 물론 수용자들이 받아들이기에 그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라면 내겐 그것을 반대할 필요도, 권리도 없다. 보는 사람들에게 해석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무관심한 일반 독자들에게 ‘웹툰이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잘 알고 감상해야 제대로 보는 것이다’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더 관대하게 말하자면, 작품을 본 후 성소수자도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다행한 일 아니냐는 것이다. 웹툰은 모니터를 경유해, 인물들의 위치와 상황 속으로 독자를 초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매체이다. 공포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대상과 제한적으로나마 동일시할 수 있다는 것은 만화라는 매체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자 즐거움이다. 때문에 비록 ‘단순히 동성애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와 같은 레토릭에 지겨워진다고 해도, 독자 나름의 논리로 만화를 수용한 방식 자체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기란 어렵다.

무엇보다 이 글의 초반부에서 예고한 것처럼, 이러한 수용방식 자체가 바로 ‘퀴어’라는 장르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기타 장르물들이 특정한 서사 구조나 소재, 즉 장르의 문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그림에서는 이견이 없이 하나의 군집을 형성하는 것과는 달리, 퀴어 웹툰은 내적인 형식에서 다른 장르들과 구별될만한 지점을 갖고 있지 않다. ‘퀴어 웹툰’을 정의할만한 어떤 합의점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특정 정체성을 소재로 하는 웹툰=퀴어 웹툰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으로 동의를 얻어왔다. 이 같은 인식은 단순히 등장인물들이 얼마나 게이인지, 얼마나 정상 범주에서 벗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만을 ‘퀴어 웹툰’ 으로서 수용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같은 인물들의 조금 ‘특이한 점’을 제외하고는, 그것은 쉽게 한 인간의 이야기로 환원된다. 여기서 ‘단순히 동성애가 아닌 인간의 이야기’라는 진부한 표현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독자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다. 퀴어를 소재로 다루는 모든 유명한 영화들이 ‘퀴어 영화라기보단…’의 수식으로 주렁주렁 치장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이야기다. 누에가 알에서 깨어나기까지의 과정을 슬로모션으로 담은 영화가 아니라면, 모든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 그 정도로 신기하다면, 기꺼이 참아줄 수 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이해를 해줄 순 없을 것 같다. 퀴어 웹툰이 제작되고 받아들여지는 방식은 결국 현실에서 성소수자가 받아들여지는 방식과 똑같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도 인간이라는 말로 성소수자 내부의 차이를 지워버리는 말도, 혹은 단순히 성소수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식으로 모든 인간의 동일성으로 회귀하는 말도 지겹다. 퀴어가 나오는 모든 만화에 대한 감상문으로 “퀴어 만화라기보다… 이것은 인간의 이야기다.”라는 문장을 되풀이할 셈이 아니라면, 좀 더 자세히, 좀 더 열심히 볼 것을 요구한다. 그게 아니라면 애써 이해자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가장 보통의 존재, 그건 적어도 퀴어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퀴어 웹툰’에게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마지막 말, 우리 모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 툴툴거림이다.

 

남은 말

아쉽게도 여기서 다루지 못한 ‘퀴어 웹툰’들이 있다. 하나는 다음 리그나 베스트 도전, 혹은 개인적인 사이트에서 연재되는 ‘아마추어 웹툰’(예를 들면, ‘mother_a’작가의 <커밍아웃 퍼플>)이며, 다른 하나는 게이 작가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웹툰 플랫폼인 ‘까만 봉지’ (http://www.kkabong.com/)에서 연재되는 작품들이다. 전자의 경우 비평의 대상을 ‘돈을 받고 연재되는 작품’에 한정 지음으로써 다루지 못한 한계가 있었고, 후자의 경우 필자의 자료 조사 능력이 미흡했던 탓이다. 모쪼록 기회가 된다면 해당 사이트에 대해 다룰 수 있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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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너매리 야고스, 박이은실 옮김, <퀴어이론입문>, 여이연, 2012, 158P
2. 주디스 버틀러, 조현준 옮김, <젠더 트러블>, 2008, 96P
3. 앨리슨 버틀러, 김선아, 조혜영 옮김, <여성영화>, 2011, 23P
4. Herculine Barbin. 19세기에 살았던 인터섹스(간성)으로서, 1980년 푸코가 회고록을 발견해 서문을 써주었다. 이 작업을 이후 주디스 버틀러가 인용함으로써 유명해졌다. 매해 11월 8일인 바뱅의 생일은 세계 인터섹스의 기억일이기도 하다.
5. 물론, 여기서 프랑켄슈타인은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편의상 그의 피조물 “the thing”을 지시하는 것이다.
6. 자기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숨기고 부정함
7. 친구사이, “성소수자관련 웹툰작가와의 만남 #1 <로맨스는 없다>, 이우인작가”, 2014.11.28
http://chingusai.net/xe/index.php?mid=newsletter&category=419836&document_srl=419845&listStyle=viewer
8. 니꼴라 부리요, 박정애 옮김, <래디컨트>, 현실문화, 미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