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는 왜 문화적 정당화 과정이 필요한가?

    by -
    0 1067

    지난 3월 24일 방송통신심위 위원회는 “레진코믹스가 성기 노출, 성행위 묘사 등 다수의 문제성 음란물을 게재했고, 청소년 보호를 위한 수단도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1)며 적절한 소명 절차 없이 곧바로 사이트를 차단했다. SNS와 시민단체, 언론을 중심으로 사이트 전체를 차단한 것은 과잉 규제라는 비판이 커지자 방심위는 하루 만에 차단을 풀었고, 이후 4월 28일 통신심의소위원회를 열어 레진측에게 의견 진술 기회를 부여하였다. 방심위의 관계자는 “사업자에게 자율규제 기회를 제공하고자 심의 의결을 보류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2) 하지만 이례적인 것은 방심위의 태도가 아니라 수십 년 동안 바뀌지 않은 만화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다. 1996년 9월 문화체육부는 ‘청소년 보호를 위한 유해매체물 규제 등에 관한 법률안’ 추진을 발표하고 음란성과 폭력성을 이유로 스포츠신문 연재만화가들을 조사한 바 있으며, 이듬해인 1997년에는 500여만 권 (1700여 종) 만화에 대해 청소년 유해판정을 내렸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음란성’과 ‘청소년 유해매체’는 만화 검열의 타당성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구성하는 주요한 준거 틀로 작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만화에 대한 사회적 담론은 왜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만화, 정당한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3) 문화 부문을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눈다. 첫째, ‘정당성의 영역(sphere of legitimacy)’은 전통적으로 사회적 권위를 부여받은 영역들로 문학, 음악, 연극, 회화, 조각 등으로 구성된다. 이 영역 내의 문화 장르들은 견고한 상징질서와 내적 원칙, 정당화된 미학적 규칙체계와 상대적으로 높은 자율성을 지닌다. 이 장르들에 대한 지식과 향유는 ‘교양(cultivated)’으로 인정받는다. 반면, ‘자의성의 영역(sphere of arbitrary)’은 의상, 화장술, 실내장식, 요리 등의 일상적인 미의식과 실용적인 문화장르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장르의 소비자들은 객관적인 규칙을 따르거나 의례적인 태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으며, 의미작용은 개인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겨진다. 이러한 문화 장르를 향유하는데에는 체문화계적인 교육이 필요 없으며, 그것에 대한 지식이나 선호는 개인적 취향 혹은 취향의 부재로 여겨진다. 양극을 이루는 두 영역 사이에 ‘정당화 가능한 영역(sphere of legitimizable)’이 존재하는데, 영화, 사진, 재즈, 샹송 (가요) 등의 문화 장르가 이 영역에 속한다.

    i188439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문화 장르들 간의 위계는 장르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정해지는데, 가령 만화의 ‘낮은’ 문화적 위치는 그것이 관계하고 있는 문학이나 회화의 ‘높은’ 지위를 통해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계는 고정되지 않고 특정 시기와 특정 사회에 따라 변화한다. 한 장르의 위치변화는 관련한 타 장르들과의 위계변화를 뜻하며, 문화적으로 정당화된다는 것은 그 장르가 사회적으로 권위를 공인받고 지배적인 위치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또한 정당화된 문화 장르에 대한 지식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되며 문화적 구별짓기의 중요한 기제가 된다.(4)이러한 인정과 정당성의 기반이 되는 것은 특정 문화 장르가 역사적, 제도적으로 확보한 상대적 자율성의 정도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만화는 어떠한 문화영역에 속해있는가? 만화는 정당화 과정을 거친 사회적으로 공인받은 문화 장르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만화 장내의 구조적 변동에 대한 역사적 고찰, 문화 장르들에 상징자본을 분배하는 저널리즘 분석, 만화를 둘러싼 제도들의 형성에 관한 연구, 만화의 지식과 취향이 상징투쟁의 자원으로서 쓰이는가에 대한 연구 등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 레진코믹스 사이트 차단이 예시하는 정부 검열에의 취약함, 경제적 위기 때마다 생산·유통·소비의 구조가 변화한 경제 장에의 예속성 등을 고려하면 한국에서 만화는 아직 ‘정당성의 영역’에 이르지 못 했을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가정과 부르디외의 장이론을 토대로(5) 만화의 문화적 정당화 과정을 위해 요구되는 조건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제한생산의 장 vs. 대량생산의 장
    부르디외에 따르면, ‘문화생산의 장(field of cultural production)’은 경제나 정치와 같은 외부요소에 의해 구조나 실천이 전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진 공간이다. 이 공간 안에서 통속적인 경제논리는 지배적인 힘을 잃고 때로는 정지되거나 전도되기도 한다. 장 내의 고유한 활동과 실천들은 문화가 별개의 신성한 세계라는 신념을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하지만 장 내의 고유한 실천과 생산의 의미가 모든 문화생산의 장들에 균일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의 논리 역시 각각의 장에서 다르게 작용을 한다. 이는 문화생산 장의 내적 구조가 각 장마다 다르게 구성되기 때문인데, 이 내적 구조는 ‘대량생산의 하위장’과 ‘제한생산의 하위장’으로 구성된다.

    제한생산의 하위장에서 생산은 정당성 있는 전문가들에 의해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생산물은 외적 수요가 아닌 내적인 자율적 범주들로 평가된다. 이 장에서 경제논리는 상대적으로 무시되고, 장 내의 고유한 상징논리가 우선시된다. 대량생산의 하위장에서 생산자와 생산물의 위치는 장 내의 상징논리가 아닌 경제적 장과의 관계에 의해 상당한 정도 규정된다. 즉, 생산은 되도록 많은 소비자를 확보하려는 목적을 가지며 생산물은 상업적 성공과 이윤을 토대로 평가되는 것이다. 문학생산 장의 경우, 예술로서의 문학 작품들은 제한생산의 하위장에 속하는 반면 통속소설들은 대량생산의 하위장에 속하는 생산물인 것이다. 각 문화생산의 장들은 두 하위장들 간의 투쟁이 일어나는 장소로서, 장의 상대적 자율성은 그 투쟁의 결과의 의해 역사적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장이 확보한 자율성의 정도는 문화적 정당성의 기반이 된다.

    한국에서 만화 장은 어떤 하위장의 원칙이 지배적인 논리로 작동하는가? 물론 만화 장의 행위자들 역시 장 내의 특수한 상징자본을 획득하기 위해 서로 경합을 한다. 가령, 허영만 화백의 소재 중심주의, 고증에의 강조, 빈틈없는 취재 등은 만화 장 내에 새로운 상징논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전통적으로는 그림체와 스토리 구성 방식, 연출 능력 등이 만화 생산자 혹은 생산물이 상업적 성공과는 별개로 장 내에서 그 위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논리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어 경제논리의 우위에 선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한국 만화 장의 상징논리는 생산자나 소비자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종종 환원되곤 하였다. 또한 ‘만화 공장’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듯 집단적이고 기계화된 한국만화의 생산과정은 만화를 ‘예술’로서 공인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하였다. 만화방과 만화 대여점과 같은 독특한 유통·소비 구조 역시 만화 장이 경제 장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예술 언어의 필요성
    이렇듯 좁은 입지의 제한생산의 하위장을 확장하고 만화를 사회적으로 공인받게 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부르디외는 상징논리의 강화에 있어 이른바 ‘예술 언어’의 형성이 필요하다 지적한다. 이는 생산자와 생산물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장 내의 고유한 언어, 그의 작업의 본질과 기법 등에 관해 말하는 방식과 기준의 설립을 가리킨다. 이러한 예술 언어의 부재는 만화를 타 문화생산 장의 기준에 의해 평가받게 만들며, 외부의 비판과 공격에 취약하게 만든다. 밀라 봉코(Mila Bongco)는 만화에 대한 비판들을 분석하면서, 타 문화생산의 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한 연구들이 만화에 대한 부정적 담론을 형성해왔다고 설명한다.(6)봉코는 만화 고유의 기준과 원칙에 대한 요구가 1940년대부터 있어왔음에도 여전히 그 요구가 채워지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이는 한국 만화 장에도 해당되는 지적이라 생각된다. 예술언어 형성의 필요성은 만화의 본질을 고려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커버
    프랑스 만화연구자이자 이론가인 티에리 그로엔스틴(Thierry Groensteen) – 앞서 크리틱엠에서는 그로엔스틴의 인터뷰를 소개한 바가 있다. (http://criticm.com/?p=1571)

    프랑스 만화연구자이자 이론가인 티에리 그로엔스틴(Thierry Groensteen)은 그의 글 <왜 만화는 여전히 문화적 정당화를 추구하는가(Why are comics still in search of cultural legitimization)?>에서 만화의 예술적 중요성이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만화가 텍스트와 이미지의 혼성(hybrid)을 그 본질로 하기에 문학과 회화라는 두 영역의 상징논리로 평가받고, 그 결과 두 문화 장의 생산물보다 열등한 아류로 인식되기 때문이라 설명한다(7). 그는 만화의 즐거움은 이야기의 즐거움(a story-related pleasure)과 미학적 즐거움(an art-related pleasure)이 함께하는 것이기에, 만화의 가치가 하나의 요소로만 평가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즉, 만화라는 매체는 문학과 회화의 단순한 더하기가 아니기 때문에 변증법적 중간의 즐거움(a medium-related pleasure)으로 그 가치가 결정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만화 장 고유의 기준과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재생산과 신성화를 위한 제도의 확립
    앞서 언급했듯, 대량생산의 하위장에서 생산된 생산물들은 대량소비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그 장에서 생산된 문화재화는 일반 대중들의 지적·문화적 수준에 맞추어져 있고 소비자는 특별한 지식이나 문화 자원이 없어도 향유가 가능하다. 하지만 제한생산 장의 생산물들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미적 성향과 상징 기호의 습득이 요구된다. 따라서 제한생산의 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징원리를 체득한 소비자의 생산을 보장하고 생산물들의 지속적인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가 갖추어져야 한다. 제한생산 장의 (재)생산과 소비의 지속성을 유지하게 하는 이러한 제도의 총체를 부르디외는 ‘재생산과 신성화의 심급’이라고 일컫는다. 여기에는 갤러리나 박물관과 같은 전시장소와 보급제도, 생산자와 생산물의 정당성을 생산하고 전수하는 승인 기구, 생산자와 소비자의 재생산기구 (예술학교 등), 장 고유의 예술 언어를 인지하고 평가기준을 갖춘 전문화된 행위자들 (상인·비평가·예술사가·수집가 등)이 포함된다.

    bart-by-books-1024x764
    캐나다 만화연구가 바트 비티(Bart Beaty)

    캐나다 만화연구가 바트 비티(Bart Beaty)는 그의 책 <만화 대 예술(Comics Versus Art)>에서 유통 네트워크의 변화가 만화의 문화적 정당성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8)한국 만화 장의 유통구조는 이와 반대되는 역할을 해온 것으로 생각된다. 80년대의 총판과 만화방, 90년대의 만화 대여점, 2000년대의 웹툰에 이르기까지 한국 만화의 보급구조는 제한생산 장의 발전을 저해하고 대량생산 장이 전체 만화 장을 구성하게 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예를 들어, 97년 IMF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만화 대여점은 생산자들에게 생산의 가속화를 요구했고 이에 따라 대량생산 장의 장르 중 빠른 생산이 가능한 장르만이 상업적 성공을 목표로 재생산된 것이다. 또한 한국의 만화 보급구조는 만화는 ‘빌려보는 것’이라는 인식을 Beaty2012ComicsVsArtCover-768x1024만들면서 스스로 만화의 사회적 위치를 낮추기도 하였다. 박물관과 갤러리의 경우 예술 만화의 생산을 돕고 그것의 이해와 해석을 위한 지식을 제공해줄 수 있다. (가령, 한국에서 영화 장은 1990년대 구조적 변동을 겪으며 예술로서의 영화를 추구하는 생산자들이 증가하였는데, 예술영화관과 인디영화관 등은 그들의 생산물들이 유통되고 소비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줌으로써 예술영화의 지속적인 재생산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또한 박물관과 갤러리의 큐레이터들은 문화적 매개자로서 만화의 문화적 가치를 세우고 예술 만화의 이해에 요구되는 지식과 자원을 공급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 외에 박물관과 갤러리의 설립이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문화적 권위를 부여받은 제도화된 기관이기 때문이다. 즉, 만화가 사회적으로 공인받은 전시장소에 진입한다는 것은 만화가 저속하고 유치한 것이 아니라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생산물임을 인정받는 과정인 것이다. 지난 4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허영만 화백의 전시회가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만화의 사회적 공인과정을 위해서는 만화의 정당성을 생산하고 강화하며 전수하는 승인기구의 활동이 필요하다. 부르디외가 분류한 세 가지 문화영역에는 각기 다른 승인기구가 존재하는데, 자의성의 영역의 경우 패션 디자이너와 광고와 같은 정당하지 않은 승인 기구(non-legitimate authorities of legitimation)에 의존한다. 반대로 정당성의 영역은 대학이나 아카데미처럼 사회적 권위를 가진 지식 생산기관이 그 역할을 담당하며, 중간에 위치한 정당화 가능한 영역에서는 동호회나 비평가들이 승인기구의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 만화 장이 아직 정당성의 영역에 진입하지 못했다고 가정한다면, 만화의 주요한 승인기구는 바로 동호회나 비평가들이다. 비평가의 활동은 그들이 만화 고유의 예술언어를 발전시키고 만화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울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한국에서 만화는 정치적 검열에 항상 취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만화가 교육의 관점에서 가치판단 되었기 때문이다. 만화는 아이들의 매체라는 인식에 기초해 교육자들은 만화가 유소년과 청소년들에게 가지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 줄곧 논의해왔다. 97년 만화사태때에도 이번 레진코믹스의 경우에도 청소년보호법이 만화 검열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이처럼 만화가 교육적 가치에 의해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화의 선정성과 폭력성은 문학이나 회화, 교육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만화는 타 매체의 아류나 하위 장르가 아니기에 만화의 의미와 가치는 만화의 언어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화 생산자와 생산물을 이해할 수 있는 예술 언어의 확립, 그것들을 주관적 취향이 아닌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상징논리의 강화, 비평가들의 의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평가외에 예술사가나 수집가 역시 제한생산 장의 생산과 소비를 지속시키는데 기여한다. <미국만화연구의 과거와 현재>에서 필자는 개인 수집가들이 미국만화연구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서술한 바 있다. 그들은 만화가 학문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던 1940~1960년대 개별적으로 만화아카이브를 구축함으로써 만화소장을 제도화하였고 후세의 연구자들에게 역사적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훈련된 감식안을 가진 수집가와 예술사가는 생산자와 소비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예술적으로 어떠한 위치에 맥락화될 수 있는 지를 알려주기도 하는 것이다. 만화의 정당화 과정을 위해서는 만화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불가피한데, 이는 대학이나 아카데미가 지식 생산의 영역에 있어 정당성을 지닌 기관으로 공인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화의 정당성과 상대적 자율성을 위해서는 이러한 기관을 주요한 승인 기구로 삼을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도 만화를 주제로 한 학위논문이 적지 않으나, 많은 경우 만화 고유의 지식 생산에 기여하기보다는 만화의 사회적 효용성에 대해 논의한다. 2015년 만화에 관한 학위논문이 총 30편 나왔지만, 절반 정도는 교육적 관점에서 쓰였다. <만화를 활용한 극화활동이 중학생의 영어 말하기 능력 향상에 미치는 영향 연구> 나 <만화매체를 활용한 사전상담교육이 청소년의 상담에 대한 지식, 태도, 기대감에 미치는 영향>과 같은 연구가 그러한 예이다. 아쉽게도 만화만의 문법과 언어를 논의하거나 만화 장의 구조를 분석한 논문은 총 논문수의 20%밖에 되지 않는다. 부르디외는 제한생산 장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배출해내는 또 다른 제도로 예술학교를 지목한다. 한국에도 만화와 관련된 학과가 20개 가까운 4년제 대학에 있지만 대부분은 만화생산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량생산 장이 지배하고 있는 한국 만화 장의 구조변화를 위해서는 만화의 특수한 미적 성향과 상징 기호들을 이해하는 소비자의 생산이 만화생산자의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만화에 관한 지식이 일반적인 교양으로 추구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만화를 향유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쌓는 것이 상징투쟁의 자원으로 쓰이거나 문화적 구별짓기의 중요한 기제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적 정당성, 꼭 필요한가?
    만화가 정치적 검열의 쉬운 희생양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만화가 문화적으로 정당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화의 문화적 정당성을 위해서는 만화 장이 외부 요소들, 가령 경제 장, 정치 장, 타 문화생산의 장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한생산 장의 존속을 보장할 제도의 총제가 필요하며 예술언어의 형성이 요구된다. 이것이 이 글의 중심 생각이다. 혹자는 의심 섞인 목소리로 물어볼 수 있다. 만화에 꼭 구조 변동이 필요한가? 전문가들이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생산하는 제한생산의 장이 꼭 필요한가? 왜 예술 만화를 추구해야 하나? 일리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 글이 모든 만화 생산물이, 모든 만화 생산자가 예술로서의 만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각각의 문화생산의 장은 제한생산의 장과 대량생산의 장의 대립에 의해 구조화된다. 만약 대량생산의 장이 만화 장의 전체 구조를 지배하게 되면, 만화 장은 외부요소에 상대적 자율성을 잃고 경제 장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한국만화산업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는 ‘만약’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제한생산의 장만이 추구된다면 만화 장은 그 활기를 잃을 것이다. 만화는 금세 ‘재미없는 것’이 돼버릴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만화 장이 하나의 하위장에 의해 기형적으로 구조화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제한생산 장에서의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를 통해 만화가 만화의 고유한 기준과 원칙을 설립하고, 그를 통해 문학과 회화로부터, 정치와 경제, 교육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질 수 있을 때 만화는 ‘유해매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

    1. 주영재. (2015년 3월 26일). “일베는 놔두면서 레진코믹스는 차단하나” …방심위 ‘제멋대로’ 심의 논란. 경향비즈n라이프.
    http://bizn.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503261508261&code=920100&med=khan
    2. 이광호. (2015년 5월 8일). 레진코믹스법 논란 ‘앞과 뒤.’ 일요시사.
    http://www.ilyosi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80913
    3. Bourdieu, P. (1990). Photography: A middle-brow art. (S. Whiteside, trans.).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Original work published 1965).
    4. 이상길. (2005). 1990년대 한국 영화장르의 문화적 정당화 과정 연구: 영화장의 구조변동와 영화 저널리즘의 역할을 중심으로. 언론과 사회 봄 13권 2호, p. 63-116.
    5. 부르디외의 장이론에 대한 논의는 위의 이상길의 논문을 토대로 쓰였음을 밝힌다.
    6. Bongco, M. (2000). Reading comics: Language, culture, and the concept of the superhero in comic books. New York: Garland Publication.
    7. Groensteen, T. (2009). Why are comics still in search of cultural legitimization?. In J. Heer & K. Worcester (Eds.). A comics studies reader (pp. 3-12). Jackson: University Press of Mississippi.
    8. Beaty, B. (2012). Comics Versus Art. Toronto, ON: University of Toronto Press.

     


    정재현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 중이다. 초등학교 때 급식으로 나온 우유를 맞바꿔 만화를 본 탓에 ‘키’를 잃었으나,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시작한 만화사랑은 여전하다. 죄책감없이 만화를 읽기 위해 만화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으며 여러 학술 학회에 참여해왔다. 세계화, 정체성, 집단기억, 구별짓기, 지식담론 등과 같은 주제들을 조명하는데 만화가 훌륭한 창구가 되어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현재 음식과 미디어 담론, 국가 정체성 형성에 대한 박사논문을 마치기 위해 지하 연구실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