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씨의 식탁> _가족의 식탁, 생명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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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이 글은 흑백으로 그려진 단행본 <마당 씨의 식탁>을 기준으로 쓰인 비평글로, 레진코믹스에 컬러로 연재 중인 <마당 씨의 식탁>와는 차이가 있으며, 연재작을 보는 독자에게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즘 ‘먹방’과 ‘쿡방’이 대세다. TV를 틀면 쉐프라 불리는 요리사들이 나와 음식 솜씨를 뽐내고, 사람들은 온갖 미사여구로 맛을 표현하기에 여념이 없다. 준비된 음식은 다양한 각도에서 비춰지며, 실제보다 더 맛있게 연출된다. 어디 TV 뿐인가, 인터넷 개인 방송에서는 무엇이든 먹어대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대리 만족을 느낀다. 만화에서도 음식 만화는 장르는 인기 장르 중 하나이다. <미스터 초밥왕>, <중화일미>, <맛의 달인>, <식객> 같은 전문 요리만화부터 <심야식당>, <고독한 미식가> 같은 음식만화까지,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음식만화가 넘쳐난다. 이들 음식만화들은 하나같이 현란한 요리 기술을 뽐내거나 밥알 한 알 한 알에 윤기가 보일 정도로 음식 표현에 공을 들인다. 또한 맛 표현을 위해 온갖 과장된 표현과 은유를 동원하기 일쑤다. 그런데 여기 화려한 요리 실력도, 먹음직스런 음식도, 과장된 맛 표현도 없는 음식 만화가 있다. 바로 <마당 씨의 식탁>이다.

그림 1-마당씨의 식탁 표지

사실 <마당 씨의 식탁>은 요리만화나 음식만화가 아니다. <마당 씨의 식탁>은 작가 홍연식이 귀농하면서 겪는 서툰 시골살이와 부모님과의 애환을 다룬 자전 만화이다. 그래서 제목만 보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 그림이나 화려한 요리기술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물론 전원생활에서의 힐링도, 텃밭 가꾸는 방법도 없다. <마당 씨의 식탁>은 우리가 늘 마주하는 식탁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야기는 만화가 마당 씨가 한적한 시골 마을에 이사를 가면서 시작한다. 도시의 높은 전세 값에 쫓기듯 얻은 시골집이지만, 작은 텃밭이 딸린 아담한 집에서 마당 씨는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과 함께 단란한 가족을 이루며 살아간다. 이사 후, 마당 씨가 첫 식탁을 차리는 데는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마당 씨는 집에서 30분이나 걸리는 읍내까지 걸어가 사온 어묵으로 어묵탕을 끓인다. 추위와 눈보라로 온 몸은 눈사람처럼 꽁꽁 얼어버린다. 그렇게 어렵게 차려진 밥상, 알맞게 잘 익은 어묵에 따뜻한 김이라도 탐스럽게 그려줄 만도 하건만, 만화는 먹음직스런 어묵 그림 대신 어묵 한 젓가락에 마당 씨가 눈사람 옷에서 벗어나는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그림 2) 마당 씨는 마당에 있는 작은 텃밭을 일구어 가족의 먹을거리를 준비한다. 소박하지만 건강한 식탁은 마당 씨 가족에 활기와 생명을 불어넣어준다. 하지만 이런 마당 씨의 소중한 가족을 위협하는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서울 지하 단칸방에 사는 병든 노부모이다.

그림 2-마당씨의 시골 첫 식탁
마당 씨의 시골집에서의 첫 식탁
그림 3-어머니의 식탁
어머니의 식탁

한 달에 한 번 마당 씨는 심장병을 앓는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기 위해 서울 지하 단칸방으로 향한다. 그는 늙고 병들다 못해 무기력해진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없는 살림에도 맛있는 음식을 차려주던 젊은 시절 어머니를 그리워한다.(그림 3) 사실 마당 씨의 어린 시절 기억은 그리 아름다운 것이 못된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로 인해 온통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 세계다. 아버지의 세계는 커다란 행성으로 표현된다. 마당 씨는 어른이 되어 아버지의 행성에서 분리되어 나옴으로써 탈출에 성공하고, 아내라는 행성을 만나 가족을 이룸으로서 비로소 자신의 행성, 자기만의 식탁을 차리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악몽 같은 그 세계가 못 견디게 그리워 질 때가 있다. 바로 어머니가 차려준 소박한 밥상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행성으로 멀리 떨어져 살다가도 어머니가 끓여 놓은 김치찌개는 마당 씨를 다시금 집으로 향하게 한다.

그림 4-텃밭의 농약더미 자리
텃밭 구석의 농약 더미 자리

하지만 아버지가 만든 폭력의 세계는 어머니를 병들게 한다. 마당 씨는 어머니의 심장병의 원인이 아버지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마당 한 구석에 방치된 농약 더미처럼, 아버지란 존재는 어머니의 육신을 썩게 만들면서, 마당 씨의 가족과 세계를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마당 씨는 자신의 텃밭을 지키기 위해 농약 더미를 치우지만, 농약 더미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한다. 마치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처럼.(그림4)

그림 5-부모님이 사는 지하단칸방
부모님이 사는 지하 단칸방

한편, 지하 단칸방의 음습하고 눅눅한 기운은 병든 어머니를 더더욱 무기력하게 만든다. 마당 씨는 도시의 지하 단칸방이 어머니의 생기를 빨아 먹는다고 생각하여, 임대 아파트를 얻어 그것으로부터 탈출시키고자 한다.(그림 5) 하지만 어머니를 자신의 행성-가족 안으로 데려오지는 않는다. 자신이 이룬 완벽한 세계가 무너질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결국 어머니의 건강은 악화되고, 끝을 모를 병원 생활과 비싼 치료비는 마당 씨의 식탁을 위협한다. 마당 씨는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정작 자신은 자기 건강을 챙기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마당 씨는 어머니처럼 병원 침대 위에서 생을 마감하지 않기 위해 살을 빼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시절 어머니가 차려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꿈을 꾸고 깨어난 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임대 아파트의 입주가 결정되고, 그리도 간절히 바라던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임대 아파트에 들어선다. 그리고 아버지의 병세가 회복되면서, 아버지는 미뤄둔 수술을 하겠다고 나선다. 어머니의 죽음과 가해자인 아버지의 생에 대한 집착 앞에 마당 씨의 원망은 극에 달한다. 그러나 “다 당신 때문이야!”라는 손가락질의 끝이 자기 자신에게 향해 있음을 발견하고 만다. 그제야 마당 씨는 그 동안 어머니가 자신에게 보냈던 수많은 신호와 바램들을 모두 외면했음을 기억해낸다. 어머니를 병들게 한 것은 아버지도, 지하 단칸방도 아닌, 바로 자신의 무관심과 외면이었던 것이다.

오랜 절망과 그리움 끝에 마당 씨는 자신의 만드는 음식 안에 어머니가 살아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기 가족의 식탁 위에 어머니의 밥그릇도 함께 올리며, “밥…먹을까요?”하고 말을 건네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마당 씨의 식탁, 가족의 식탁, 생명의 식탁
인간은 하루에 2~3번 식사를 해야 살아갈 수 있다. 식사가 생존이 아닌, 의미를 가지는 순간은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할 때이다. 혼자 식사할 때가 돼야 비로소 우리는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하루 종일 흩어져 바삐 살아가다가도, 밥 먹을 때가 되면 식탁에 둘러 앉아 다시금 가족이 된다. 이렇듯 식탁은 단순이 음식을 올려놓는 탁자가 아닌, 가족을 의미한다. 그런 식탁에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요리를 해서 식탁에 올리는 것은 대부분 어머니의 몫이다.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든다. 밖에서 뛰어놀다가도 어머니의 “밥 먹어~” 외침에 집으로 돌아오듯, 어머니의 음식은 가족의 고향이며, 마음의 안식처이다.

마당 씨가 마당의 텃밭을 일궈 나간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 가족을 일궈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밭을 일구고, 닭 우리로 만들고, 울타리를 치고, 마당 씨의 텃밭은 생명력으로 채워져 간다. 그러므로 마당 씨의 텃밭은 생명의 원천이며, 텃밭에서 기른 채소로 만든 음식은 생명 그 자체이다. 마당 씨는 텃밭에서 기른 채소로 가족의 식탁을 차림으로서 진정한 가족을 완성해간다. 하지만, 자신만의 식탁-가족을 일군 마당 씨는 늘 어머니의 식탁을 그리워한다. 엄마가 끓여준 김치찌개, 막 버무려서 입에 넣어주던 나물 반찬. 어머니의 손맛이 깃든 음식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었으며, 마음 둘 곳 없는 각박한 도시 생활에 위로가 되어 준다.

<마당 씨의 식탁>에는 먹음직스런 음식도 게걸스럽게 먹는 ‘먹방’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가족과 함께 하는 따스한 식사 뿐. 식탁 위는 화려하게 그려진 음식 그림은 없지만, 텃밭에서 채소들로 인한 생명력이 가득하다. <마당 씨의 식탁>은 어머니와 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고, 위로해주는 치유의 밥상이다.

 

명료한 선(線)과 흑과 백으로 그려진 생명과 죽음의 세계
<마당 씨의 식탁>에서 눈여겨 볼 것은 명료한 선(線)과 흑과 백으로 만들어진 세계이다. 거짓 없이 일정한 선 굵기로 그려진 명료한 선(線)은 음식을 그저 음식으로 그릴 뿐, 독자를 현혹하려 하지 않는다. 작가 홍연식은 정직한 선(線)으로 어머니를 외면했던 자신의 치부를 담담하고 가감 없이 드러낸다. <마당 씨의 식탁>에서 카툰화법으로 그려진 고양이 의인화는 아트 슈필겔만의 <쥐>처럼, 고양이의 속성을 보여 준다기보다는 독자로 하여금 마당 씨를 타자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받아드리도록 한다. <마당 씨의 식탁>은 결점 많은 우리네 식탁이며, 이야기인 것이다.

한편 흑과 백으로 그려진 그림은 도시와 시골, 기계문명과 자연, 죽음과 생명을 대비해서 보여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는 지하 단칸방은 어둠(흑)의 세계이자 죽음의 공간이다. 부모님이 사는 도시는 남성적 질서가 가득한 폭력의 세계이기도 하다. 도시의 지하 단칸방은 생명심이 가득하던 어머니를 죽음의 세계로 이끈다. 폭력과 죽음이 가득한 도시에서 가족은 해체된다. 작은 단칸방에서조차 부모님은 서로 등을 돌리며 산다. 반면, 마당 씨가 살고 있는 시골 텃밭 집은 밝음(백)의 세계이자, 생명이 넘치는 공간이다. 아이는 텃밭을 놀이터 삼아 건강하게 자라난다. 그래서 찬바람이 가득한 시골집은 가족이 있기에 춥지만 따뜻하다.

그림 6-흑백으로 표현된
흑백으로 표현된 삶과 죽음의 세계

<마당 씨의 식탁>은 흑과 백이라는 색을 통해 도시와 자연, 죽음과 생명의 세계를 그려낸다. 지하 단칸방과 병원은 죽음이 가득한 검은 색으로 표현되며, 시골과 텃밭은 생명력이 가득한 흰 색으로 그려진다. 이처럼 <마당 씨의 식탁>은 흑과 백, 색을 통해 폭력과 죽음이 가득한 도시 생활을 보여줌으로써, 생명력 가득한 자연으로의 회귀를 역설하고 있다.

 

엄마의 젖가슴, 인간 최초의 식사
그럼 인간 최초의 식사는 언제일까? 그렇다. 어머니의 모유다. 우리는 어머니를 통해 생명을 부여받고, 어머니의 모유로 생명을 연장한다. 마당 씨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아내를 보며 자신의 첫 식사, 어머니를 떠올린다.(그림 7) 아이를 배불리 먹이느라 늙고 처진 어머니의 젖가슴은 그래서 왠지 슬프고 서글프기만 하다.

그림 7-아내의 모유수유 장면
아내의 모유 수유 장면
그림 8-탯줄 분리 장면
어머니 죽음의 순간을 탯줄과의 분리로 표현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마당 씨는 탯줄이 잘리는 고통과 절망을 맛보게 된다.(그림 8) 어른이 되어 어머니로부터 독립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늘 어머니의 품 안에서 위로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란 존재는 어른이 되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탯줄로 이어진 것처럼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이다. 어머니의 젖가슴은 최초의 음식이면서 최초의 식탁인 셈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생명을 부여 받고, 위로 받는다. 그런 어머니의 죽음은 마당 씨가 애써 일군 세계(가족과 텃밭)를 사라지게 하고, 그는 어둠뿐인 우주 속에 홀로 남겨진다.

그러나 처절한 자기반성 후 마당 씨는 자신의 식탁에 어머니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깨닫는다. 텃밭을 일궈 가족에게 건강한 식탁을 차리는 것도 실은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다.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을 식탁에 차리고 가족이 둘러 앉아 먹는 것. 마당 씨의 건강한 식탁은 어머니가 물려준 소중한 유산이다. 죽음이 삶으로 연결되듯, 어머니의 식탁은 마당 씨의 식탁으로 이어진다. 이 식탁은 다시금 아들에게로 이어질 것이다.

그림 9-마당씨의 식탁
마당 씨의 식탁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먹방’과 ‘쿡방’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요리 방송과 음식 방송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수십 년 전부터 요리방송은 있어 왔다. 그런데, 왜 요즘 유독 먹방과 쿡방에 열광하는 것일까? 먹방과 쿡방 열풍의 이면에는 도시화로 인한 맞벌이 부부와 1인 가구의 증가, 정신적 굶주림이 있다. 요리는커녕 음식 해먹기에도 턱없이 바쁜 현대인들은 ‘만능 XX’같은 쉬운 요리법에 열광하고, 먹고 있으면서 늘 배고픈 우리는 남이 먹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포만감을 느낀다. 화려한 음식 화면에서 ‘음식’의 실재는 사라지고 시뮬라크르만이 남아, 미각은 타인을 통해 충족된다. 풍요의 시대, 우리는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배고픔의 원인은 어디 있을까?

급격한 도시화는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와 함께 정신적 빈곤도 주었다. 빽빽한 빌딩 숲에서 내 몸 하나 누울 집구하기란 하늘의 별 땋기보다 힘들고, 집을 구한다 해도 정신없이 살다보면 요리할 시간도 없다. 요리할 시간도 없는데, 가족끼리 마주 앉아 밥 먹을 시간인들 있을까? 도시 속 가족은 함께 있어도 외롭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늘 배가 고프다. 풍요의 시대, <마당 씨의 식탁>은 가족이 둘러앉은 소박한 식탁을 이야기한다. 어머니가 끓여준 김치찌개에 따뜻한 밥 한 그릇에서 우리는 비로소 허기를 달랜다. 그래서 <마당 씨의 식탁>은 어머니의 밥상이고, 생명의 식탁이며 치유와 위로의 식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