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채움의 욕망 <쿨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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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핫>은 어떤 만화인가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쿨핫>은… <쿨핫>은… <쿨핫>은… 너무나 많은 얘기가 저마다 한꺼번에 튀어나오려고 해서 목구멍에서 온갖 감상의 병목현상이 일어날 것만 같다. 냉정하게 책 소개 단신처럼 우선 말해보자. <쿨핫>은 유시진이 만화잡지 <윙크>에 95년부터 연재하다 만화 웹사이트 <코믹스 투데이>로 옮겨 2001년 까지 연재한 순정학원물로서 총 12권 분량 중 절반쯤 완성된 미완의 작품이다. 한 회 보고나면 천년같이 2주를 기다렸지만 2주 후에도 안 나올 때는 또다시 2주를 기다리는 것에 독자들이 익숙해졌던 작품이고 그나마도 띄엄띄엄 양이 들쭉날쭉하여 아쉬움을 넘어서 분노가 폭발하다가도 아냐 이러다가 아예 안 그려 주면 어떡해, 얼마가 걸려도 좋으니 그냥 그려만 주세요, 하며 한 회 한 회 아끼며 은혜롭게 보던 작품이다. <쿨핫>은 한란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독서토론 동아리 가디록을 중심에 놓고 가디록 회원들 몇과 그들의 인간관계 몇 개를 들여다보는 캐릭터물이다. 유시진의 최고의 미소녀와 매우 독특한 교복으로 기억되는 만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매회 보고 나면 가슴이 저리고 심장에 균열이 나서 한동안 멍하게 있어야 했던 작품이다. <쿨핫>은 베프에게도 말 못할─베프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내가 차마 표현력이 없어 말로 꺼내지 못 했던─모든 생각과 감정을 말과 그림으로 정리해주며 불안정한 시절의 우리를 다독여주던 각자의 일기장이었다. 내가 기록하지 않은 나의 일기장.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 그러나 내 마음속에 느끼고 있던 결핍, 아쉬움, 그리고 어떤 기억들을 내 눈앞에 보여주던 작품.. 그렇다. 바로 이것이다. <쿨핫>은 평생을 두고 우리를 미혹시키지만 아무리 다가가도 절대 소유할 수 없는 어떤 것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간절히 원하지만 내게는 결핍돼있는 어떤 것을 끝없이 쫓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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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가 아닌 ‘루다를 통해 비치는 본인의 이상형’을 좋아하는 민정에게 일침을 날리는 루다

 

이것은 그래서 결국 사람들의 ‘관계’에 관한 얘기며 남녀 간이 아닌, 젠더를 뛰어넘은, ‘사람들’ 사이의 러브스토리다. 성이라는 바운더리를 벗어난 인간으로서 정체성의 문제, 다시 말해 남자다움 여자다움이라는 범주를 벗어나는 성 스펙트럼 이슈가 소재가 되기도 하고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난 엄마와 따뜻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소재가 되기도 하며 서로에 대한 관심을 한 꺼풀씩의 막을 제치면서 확인해가는 과정이 소재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주인공들은 저마다, 저 너머의 실체, 진실이라는 것에 가닿고자 한다. 네가 강인한 외모로 시크한 분위기로 따뜻한 친절로 차가운 지성으로 가려놓은 그 겉 울타리를 넘어선, 말해질 수 없었던, 저 안쪽에 가닿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쿨핫>의 핵심적 소재는 소통이라는 욕망이다. 너의 진실에 가닿고 싶다는, 그 진실을 품고 있는 내밀한 곳에 나도 함께 들어가고 싶다는, 그래서 그곳에 너와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에 관한 판타지다. 그렇다. <쿨핫>은 판타지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일상의 학교를 배경으로 한 듯하지만, 여기서 벌어지는 관계들, 관계의 벗겨짐들, 그리고 그래서 마침내 이루어지는 소통은, 결국 우리의 꿈일 뿐이며, 현실 속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이라는 점에서 <쿨핫>은 판타지다.

 

 

‘Objet petit a (오브제 쁘띠 아)’ 와 동경이, 람이, 준휘의 욕망
라캉이라는 프랑스 정신분석학자가 있다. 하도 어렵게 말해서 읽다 보면 여러 번 정신이 혼란스러워지지만, 많은 이들이 꼬마 때부터 각자 애타게 궁금하고 그리워했던 어떤 개념을 규명하려 했고 그 개념은 많은 사람들의 그리고 작품들의 설명 안되는 어떤 부분, 즉 “정체 모를 그리움과 동경”이라는 감정을 설명해내는데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언급하고 논의에 들어가려고 한다. 왜냐면 정체 모를 그리움과 동경이야말로 동경이의 마음의 여정의 핵심이고 또한 람이의 마음을 일순간에 앗아간 사건의 핵심이며 그런 람이를 바라보는 준휘가 느끼는 감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김동경의 이름이 동경인 것은 작가의 의도겠지만, 이 글에서 자주 언급될 ”동경“이라는 낱말과 한글 표기가 같으므로 헛갈림을 피하기 위해 김동경을 지칭할 때는 동경 대신 ”동경이“를 사용하기로 하겠다.) 그리고 또 실은, 정체 모를 그리움과 동경은 루다로 하여금 자기에게 호의적이지도 않은 (심지어는 적대적인) 동경이를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싶게 만든 동력이며 금성이가 (언뜻 봐서는 대단히 이질적인) 루다에게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다. <쿨핫> 전체에 이 정체 모를 동경과 그리움이 흩뿌려져 있어 모든 변화의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의식이다. 사람에 있어서, 보이는 것, 자명하게 인식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이다. 인간 정신은 거대한 암흑의 대륙인데 거기를, 의식이라는 가느다란 서치라이트가 비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느끼는 부분은 이 조명이 비치는 아주 일부의 영역에 불과하단 거고, 그보다 훨씬 넓은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알 수 없는 무의식이라는 세계가 있다고 상정하고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탐사를 시작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신경정신과 의사였으니 주로 신경증 환자의 무의식을 다루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무엇보다 히스테리 등 여러 가지 정신질환의 치료를 위해 시작한 것이었고, 잘 알려져 있듯이 이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섹슈얼 드라이브야말로 우리 무의식의, 그리고 거기서 일어난 병적 증상들의 동력이고 핵심임을 주장했다.

그런데 라캉은 이러한 정신병동 병실에서 다루던 무의식과 섹슈얼 드라이브 등 여러 개념을 인문학적 비평의 세계로 본격 옮겨와서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과 방식을 해명하는 데에, 그리고 독자가 그것을 즐기고 해석하는 과정과 방식을 해명하는 데에 집중적으로 쓸 수 있게 했다. 어떻게 해서 인간이 ‘욕망’이라는 걸 갖게 되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고 다스리는 법을 배우며 혹은 배우려 노력하며, 이런 자아와 주변(사회 혹은 가치체계 혹은 언어의 세계)의 상호작용과 갈등이 어떻게 작품에 무의식적으로 구현되는지를 설명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 바로 이 ‘오브제 쁘띠 아’ 다. 이것은 한마디로 우리가 엄마 뱃속에서 충일감 완벽한 일체감을 느끼게 했던 그 상태, 그 기억, 그러나 태어남과 동시에 영영 잃어버린 한 조각, 그래서 그 충일감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하는, 그 영원히 놓쳐버린 한 조각을 말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것을 향해 달려가지만 절대로 잡을 수 없는, 잡았다 생각한 순간 이미 그것이 아니었던 것을 깨닫게 되는, 그런 결핍, 그리움.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진정 충족되고 완벽했던 그 시원의 기억을 찾아 평생 뭔가를 쫓는 것이다, 저것만 있으면 나는 행복할 것 같고 만족할 것 같고 순정한 기쁨일 것 같은 여러 가지 것들, 그러나 결국 내 손을 벗어나고, 실은 실체로 존재한 적조차 없었던 그것, 그게 바로 ‘오브제 쁘띠 아’다.

라캉에 따르면 우리가 사랑하고 욕망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어떤 대상이다. 텅 빈 대상, 잡았다 생각하는 순간 빠져나가버리는, 그래서 애초에 비어있었던 어떤 것, 실체가 아니었던 것…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라고 이름을 우리가 붙였을 따름인 우리의 욕망 자체이고 즉 우리의 결핍 자체인 것이다 (우리에게 결핍된 것을 우리는 욕망하므로). 그래서 우리는, 그가 갖고 있지도 않은 어떤 장점에 반해버리기도 하고, 나는 갖고 있지도 않은 어떤 장점을 알고보니 그는 나로부터 계속 받고 있었기도 한다. 그리하여 ‘오브제 쁘띠 아’ 란 평생을 미혹시키지만 다가가도 절대 소유할 수 없는 어떤 것이며, 이것이 바로 동경이가 동경하는, 동경이가 영전에게서 동경하는 바로 그 실체다. 언젠가는 자기 것이었을 것만 같은데 이제는 날아가 버린, 그래서 너무나 그리웠는데 어느 날 영전에게서 발견된 (발견했다 느낀) 바로 그 정서와 가능성, 관계의 가능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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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여자인 루다가 봐도 예쁜 동경이

 

동경이는 작가도 밝혔듯이 유시진 만화에서 드물게 보는 대단한 미소녀다. 까만 긴 머리에 흰 피부, 그리고 귓불에는 핏방울 같은 빨간 귀걸이. 사랑스러운 몸매에 기다란 손가락을 가진 동경이는 바람둥이 아빠 때문에 괴로워하다 목숨을 잃은 엄마 때문에 어려서부터 아빠를 그리고 남자를, 더 나아가 인간을 증오하는 아이다. 젊은 시절 가난한 영화감독 지망생과 음악도로 만난 이 커플은 남자가 성공가도를 걷기 시작하면서 끝없는 여자 편력을 시작하고 신참 피아니스트로 자기 활동을 시작하던 여자는 아기를 낳고 외면당한 채 술만을 친구로 삼는 고립된 삶을 살다가 운전 중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다. 어린 동경이에게 아빠란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도도함과 자기중심적인 성격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를 아빠에게 받았지만 그 에고와 오만함을 누구보다 혐오하는 아이이기도 하다. 성적도 좋고 책도 많이 읽지만 동경이에게 음악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소리는 잦아들고 빛은 통과하는” 물 속 세계처럼 음악은 동경이에게 숨을 곳을 제공해준다. 동경이는 “다수결을 신봉하는 족속들”에게는 애당초 아무런 관심이 없다. 자기의 깊은 슬픔과 외로움을 감춘 채 겹겹의 벽으로 자신을 둘러 감싸고 세상과 자신 사이를 차단한다. 슬픔이 무엇인지 모를 것 같은 아이들, 슬픔이라는 정서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모를 것 같은 어른들. 이런 속에서 나의 슬픔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 소통하고 싶으나 꺼려진다. 그러고는 먼 옛날 언젠가 잃어버린 그 어떤 것을 찾아 촉수를 세우고 있다. 눈 감고 사색에 잠겨있을 때도 음악을 들을 때도 피아노를 연주할 때도.

그러던 어린 고1 여학생 동경이에게 우연처럼 어떤 만남이 날아온다. 쌓여있던 작년 교지, 즉 동경이가 입학하기 전 발행된 묵은 교지를 나눠주는데 별 기대 없이 죽죽 넘기던 페이지 사이로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었다. <인간이 귀를 감을 수 없는 이유>라는 독특한 제목의 단편소설은 단단한 구성과 따뜻한 주제만으로도 눈에 띄는 작품이었지만 그 외에 무언가가 동경이의 관심을 더욱 끌었다. 그게 대체 무얼까? 알 수 없는 그 무엇의 정체를 알고 싶어 몇 번이나 더 읽었고 마침내 동경이는 그 무엇의 정체가 바로 슬픔임을 알게 된다. 작품에 대놓고 섞어 흘려 넣은 슬픔이 아니라, 동경이 표현을 빌자면, 정제해서 흩뿌려놓은 가루였다. 아무나 알아보라고 넣어놓은 게 아니고, 바로 자기 같은 족속들만 알아보라고 오로지 그들만 알아볼 수 있게 세심하게 뿌려놓은 사금파리였던 것이다.

다가오는 친구들도 뒤에서 흉보는 친구들도, 호감을 드러내는 선생님도 음흉한 어른들도, 다 보기 싫고 무관심해 시야 밖에 둔 채 모든 걸 닫아걸고 살아오던 동경이에게, 거의 처음으로 관심이 가는 사람이 한 명 생긴 것이다. 치렁치렁 올블랙 헤어에 검은 보석 같은 눈을 가진 동경이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어 처음 바라본 영전이는 눈매가 서늘하면서도 시원 소탈한 2학년 언니였다. 담수진주를 품은 듯 크고 깊은 우물 같은, 동경이 눈에 비친 백자 같고 난초 같은 영전은 거침없고 털털했다. 그리고 옆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어린 시절 마지막으로 본 엄마의 모습과 닮아보였다.

유시진은 사실, 그림 실력으로 날고 기는 작가는 아니다. 인물 그림은 종종 배경과 따로 존재하며 인물들 사이의 관계도 부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동작들 하나하나는 여러 번 고민해 정성껏 그린 것 같은데 어딘가 어색하다. 그래서 어디가 도대체 문제인 걸까 싶어 유심히 살피다가 아, 이런 각도도 다 면밀히 관찰한 것이구나, 이런 비율 이런 방향도 다 세심하게 연구한 것이구나, 하고 새삼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또 갸우뚱하게 된다. 하나하나 보면 다 정확해 보이는데 대체 어디가 어색한 것일까? 그래서 오히려 그림을 더 찬찬히 감상하게 되는 효과가 있다고 할 수있을 정도다. 주로 큰 프레임에 클로즈업으로 강조된 정적인 장면은 안정돼 보이지만 이 외에 걷고 뛰고 팔을 뻗는 동적인 동작들은 자주 부자연스러워 보여서 이 바지주름이 문제인 것인가 이 허리 각도가 어긋난 것인가 한참을 반추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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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중 보너스 페이지, 누가 누굴까?

 

그런데 이런 어색한 그림체를 상쇄하는 것이 그의 아름다운 인물들이다. 그 어떤 작가의 인물들과도 비슷하지 않은 대단히 독특한 이목구비를 가진 인물들은 눈 크기가 얼굴의 반이라는 식으로 과장되지 않고도 지극히 아름다운 미소녀 미소년들을 만들어낸다. 다른 순정만화 주인공들에 비해 오히려 많이 작은 편인 눈 크기 특히 동공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눈매의 깊이감이 남김없이 표현된다. 그리고 유시진은 주요 인물들 모두가 서로 다 분명히 구분되는 눈을 가진 아주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눈에 대한 표현이 사실 눈에서만 시작되고 완결될 수는 없다. 눈의 깊이와 모양을 달리 표현하기 위해 실은 이 작가는 두상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각자의 두개골은 어떤 다른 모양일까, 그래서 어떤 다른 머리통과 광대뼈를 만들며 어떻게 턱에서 마무리되고 다시 목뼈와 연결될까 하는 스터디를 세심히 한 듯, 작가는 참으로 드물게 계란형이 아닌데도 광대뼈의 존재가 확연한데도 눈이 크지 않은데도 지극히 아름다운 인물들을 남자고 여자고 간에 다채롭게 만들어낸다.

머리스타일이 다 같다고 해도 옷이 다 똑같다고 해도 이목구비만으로 인물들을 구분할 수 있게 만드는 참으로 드문 순정만화 작가고 그래서 유시진의 그림은 찬찬히 컷 하나하나, 아니 한 컷 안에서도 인물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읽어가는 즐거움을 준다. 클로즈업된 얼굴 표정 한 컷만으로도 기나긴 이야기 하나를 다 할 수 있을 듯 한 것이 순정만화의 특징이긴 하지만 유시진의 꿈꾸는 듯 한 때론 무심한 듯 한 표정 하나하나는 수많은 말과 그 사람의 인생사 전체를 담고 있어 보인다.

영전과 동경이 학교 옥상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이러한 유시진 그림스타일의 백미다. 둘이 함께 있는 장면의 배경처리와 배경과의 관계가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작품 어떤 인물과도 전혀 비슷하지 않은, 정말 지적이고 서늘한 영전의 눈매와 동경의 간절함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둘 사이의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 모두를 넘나들며 서로에 대한 애절한 감정을 쓸쓸한 표정의 아름다운 시선에 담아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으로 독자 가슴에 남는다. 도저히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사람의 얼굴, 간절함을 담아 보내던 그 시선은 우주의 끝까지 확장되어 저 몇억광년 넘어 어떤 생물체의 눈에까지 그리움으로 감지될지도 모른다는 그 나레이션은 수천가지 말을 하는 듯한 영전의 옆모습과 함께, 영원히 손에 넣을 수 없을 아련한 그리움을 독자에게 남긴다.

 

 

눈으로 읽히는 BGM
<쿨핫>의 구조는 마치 음악CD 자켓 마냥 여러 개의 트랙들로 구성돼 있는데 몇 개는 겹치기도 하고 같은 사건을 다른 시점에서 보며 다시 이야기하기도 한다. 트랙마다 화자는 다르고 따라서 빛깔도 다른데, 이 다른 빛깔들이 저마다 다른 톤의 노래 제목들로 표현된다. 트랙은 잘 알다시피 음반의 곡들을 표현하는 말인데, <쿨핫> 각 에피소드들을 음악처럼 표현하고 싶은 작가의 생각일 것 같다. 즉 그 챕터 전체를 지배하는 이미지 같은 것일 게다. 첫 트랙은 루다의 씩씩하고 경쾌한 세계를 담은 티렉스의 <Bang a Gong Get It On>이다. 좌충우돌 저돌적이면서 밝고 유쾌한 루다를 묘사하기 위해 적절한 노래다. 블루지하고 로큰롤이 묻어나는 경쾌하고 신나는 곡이다. 트랙2의 <Paint in black (페인트 인 블랙)>은 롤링 스톤즈의 노래로서, 모든 것을 다 까맣게 칠해버리고 싶다는, 내 심장도 머릿속도 주변도, 그래서 그 어떤 사실도 다 묻혀버리게, 아무것도 마주할 필요 없게, 다 검은색으로 덮어버리고 싶다는 동경의 절망적 바람이 묻어나는 곡이다. 세 번째 트랙 <Let it grow(렛 잇 그로우)>는 여러 주인공들이 세상과 인간을 배워가면서 내딛는 성장의 발걸음을 표현한다.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선택의 문제들과 맞닥뜨릴 때 실은 0과 1 사이에만 해도 셀 수 없이 엄청나게 많은 실수(實數)가 있듯이, 넓고 다양한 선택의 세계에 눈을 뜨며 성장하는 주인공들의 여정을, 그리고 그들의 젊음과 싱그러움과 무한한 가능성을 따뜻한 멜로디와 가사의 <Let it grow(렛 잇 그로우)>로 표현했다. 한편, 두 개의 진실된 러브스토리에는 비틀즈의 노래들이 선택됐다. 지극히 달달하고 유쾌한 루리와 재련의 러브스토리는 마침내 그녀를 발견하고 기쁨에 젖는 <Till There Was You>, 그리고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애절하고 복잡하고 가슴 아픈 람이 그리고 준휘의 사랑이야기 트랙은 내가 쓰러졌을 때 네가 도와주겠느냐는 <If I Fell>이다.

<쿨핫>에서 가장 인상적인 그리고 강렬한 에피소드는 동경이와 영전의 교감과 갈등이겠지만 이것은 연재와 책이 묶어지는 속도 때문에 오랫동안 트랙 2가 <쿨핫>의 중심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트랙들과 인물들도 이에 못잖게 애절하고 생생하다. 전체 구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단순화를 해본다면 이야기의 중심에는 동아리 가디록이 있다. <쿨핫>전체가 가디록 회원들의 이야기이거나 그들 친구, 가족의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본다면 예외적인 부분도 있긴 하지만 루리 재련 커플을 가운데에 두고 관계도를 그리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루리 재련 커플이 있고, 루리를 사랑하는 람이가 있고, 람이를 사랑하는 준휘가 있다. 재련인 또 람이를 안타깝게 지켜본다. 루리의 씩씩한 여동생 루다가 있고, 루다가 흠모하는 동경이가 있고, 동경이가 사랑하는 영전이 있다.

많은 독자들에게 가장 달달하고 유쾌한 에피소드는 재련이와 루리의 트랙3일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눈에 들어온, 아니, 첫눈에 반해버린 그 소녀. ‘여왕’ 재련이는 느슨하고 자유롭게 살아온 루리의 맘을 온통 흔들어 놓으며 단박에 ‘모델 있는 이상형’이 되어버린다.

자유롭고 싶어서 미술을 자기 세계로 정한 루리에게, 언제나 바람처럼 무정형의 자유로운 떠도는 구름 같은 루리에게, 단단한 뿌리식물 같은 재련은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는 소녀였다.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하는 야무지고 우아한 소녀는 언제나 루리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소년 같은 장난꾸러기 모습 역시 가지고 있는 재련은 자신을 향한 루리의 관심을 가지고 놀려댄다. 마치 어린 시절 예쁘고 사랑스러운 람이를 데리고 장난치는 게 즐거웠듯이, 그래서 당황하고 상처받은 그 속살을 발견하는 걸 재밌어했듯이, 좋아하는 마음은 괴롭히는 것으로 표현해온 재련이는 어느 날부터 루리가 왜 자기 눈에 들어온 것인지도 모른 채 손등에 돌출한 사마귀를 발견한 듯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밀어보며 갖고 놀기 시작한다. 루리 기억에도 오랫동안 아프게 남아있듯이, 미술부 선배들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면서 루리만 빼놓는다든지 모두의 말에 반응해주면서 루리의 말에만 반응하지 않아 썰렁하고 뻘쭘하게 만든다든지 그러다가 급기야는 대놓고 면전에서 밟아버리는 수준의 공격을 감행하고 이에 루리가 정말 무방비상태로 상처 입은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자 그제야 만족을 한다. 재련이는 저 너머,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저 너머의 진짜 내면, 속살에 가닿고 싶었던 것이다.

느슨하고 자유롭고 남의 시선 같은 것 결코 신경 안쓰는 타입이지만 재련에게만큼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채 패잔병이 되어 말도 꺼내보지 못하고 루리는 학교를 떠나는데, 그 앞에 어느 날 재련이가 기적같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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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내어 데이트를 신청한 뒤 재련이의 연락을 기다리는 루리의 모습은 당시의 삐삐문화와 어우러져 코믹하고도 간절한 장면들을 연출한다. 서울대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는 기상대, 미대에서 학생회관까지 버스 한 두 정류장은 될 듯한 거리를 단숨에 뛰어가 삐삐 멘트를 확인하는 루리는, 친구들 말대로 달리기라기보다 도움닫기 멀리뛰기 같은 기세로 공중전화기에 돌진한다. 그러고는 마침내 연인이 된 두 사람. 루리 말대로, 두 사람이 한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것은 전 우주적인 이벤트다. 지극히 아름답고 우아한 소녀와 근사하고 심지 굳은 청년이 연인이 되어가는 모습은 <쿨핫>을 통틀어 가장 후련하고 행복하고 따뜻한 마음이 들게 하는 에피소드 아닌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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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에만 느낄 수 있었던 ‘삐삐’의 향수

그러나 이런 싱그럽고 아름답고 편안한 사랑 이야기도 실은 몇 걸음만 떨어져 보면 복잡하고 애절한 또 다른 사랑 이야기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 된다. 애초에 재련이가 미술부를 찾은 것도 뭔가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생기를 갖게 된 십년지기 람이의 변화가 눈길을 끌어서였다. 그림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람이에게 이런 변화를 준 것이 뭘까 하는 호기심도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어딘가 달라진 눈빛. 공기가 달라진 듯 숨 쉬는 게 달라진 듯, 아니면 람이를 둘러싼 빛이 바람이 다 달라진 듯하다. 소란스럽지 않고 조용하지만 분명한 변화. 루리에 대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를 재련 스스로가 깨닫고는 이제 좀 더 어른스러운 방식으로 정당하게 다가서려고 하는 찰나, 재련이는 루리를 향한 람이의 시선을 느끼고 만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동성애고 우정이고를 떠나서, 사랑에 빠진 십년지기 소중한 친구에게 기회를 주려는, 먼저 사랑을 시작한 친구에게 양보를 하려는, 이미 늦었다 생각하고 물러나려는 재련이. 결국 재련이는 미술부를 탈퇴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고, 람이 역시 루리형이 졸업하고 없는 미술부는 아무 의미가 없었던지라 그만두고 재련이와 함께 가디록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는, 이 모든 것이 일단 지나가기를 바라며 소용돌이 같은 마음을 다독여온 재련이에게 그래서 이제 다 잊고 포기한 재련이에게 기적같이 루리가 다가온 것이다. 둘은 정말 옆에서만 봐도, 그냥 엿보는 독자의 마음에도 너무 예쁘고 맘 후련한 사랑을 나누는데, 이것은 실은, ‘필요한 것은 다 있으되 원하는 건 가질 수 없는’ 람이의 희생과 슬픔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동성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생애 최초로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너무나 커다란 고민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도저히 도와줄 길이 없는 것 같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람이는 어려서부터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예쁨 받는 소년이지만 그 누구에게도 특별하게 마음을 열어놓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람이는 어떤 형에게 마음을 온통 뺏기게 된다. 저 녀석이 좋아하는 상대가 있다니. 오랜 간 옆에 친구로 있어온 재련이는 이것이 람이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임을 알아챈다. 남자사람친구와 여자사람친구가 동시에 똑같은 인물을 사랑하게 된 이 기이한 상황에서 재련이는 사랑보다 친구를 택하고 자신의 감정을 묻어버린다. 그러나 혼란스럽고 용기가 없는 람이는 오히려 미술부를 탈퇴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물러나버린다. 이런 람이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또 한 사람의 인물이 있으니 그것이 준휘다. 람이에 대한 준휘의 감정은 과연 무엇일까?

늘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어 밝고 환해 보이는데도 어느 순간 보았던 공허, 슬픔. 그 일별이 가슴에 날아와 박혀 준휘는 람이 옆에서 자기 영역을 만들어 나간다. 그다지 내키지는 않지만 람이의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시답잖은 놀이나 대화도 함께 하면서 람이 옆자리를 자기 것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람이에게만 지극히 예민하게 움직이는 준휘의 촉수는 당연히 어느 날부터 닥친 람이의 변화를 정확히 감지한다. 엉뚱방뚱한 미술부 루리 형이 신입생을 모집하러 교실에 쳐들어온 그날부터 람이는 마음을 뺏기고, 그 변화는 준휘에게 크디크게 다가온다. 옷이 젖었다고 그 형 옷을 빌려입고는 황홀한듯 행복해하는 람이. 람이의 모든 것에 관심 있는 만큼 준휘는 람이 미술 실력이 형편없단 것도 아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부 사생대회에 들떠있는 람이라니. 그러나 준휘는 친구의 사랑을 응원해줄 뿐 아니라, 용기 있게 부딪히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다가 빚어진 CD사건은 준휘 뿐 아니라 독자의 맘도 온통 뒤흔든다. ‘유비포티’가 누군지 알고나 빌렸을까 싶은 CD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 사람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 물건까지 좋아지는 경험, 그 물건이 그 사람인 양 좋아지는 경험. 람이는 아마 유비포티가 뭔지 그게 누군지, 이 만화의 배경 시기를 감안할 때 어쩌면 PC통신에서 물어봤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이 레게 그룹이란 걸 알고는 역시 루리형의 느슨한 분위기랑 잘 어울린다며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켓을 넘기며 노래 몇 개는 가사도 해석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연처럼 행운처럼 발견한 루리형의 낙서. 그 낙서들을 보며 람이는 얼마나 짜릿하고 행복했을까? 별것 아닌, 아무리 자유로운 사람이라도 어떻게 CD자켓을 메모지 삼아 사인펜으로 쓸 수 있을까 싶은 참 별것 아닌 낙서지만, 언제 몇 시에 만나자 준비물은 뭐 뭐 정도의 아무 내용도 아닌 낙서지만, 형이 전화를 받으면서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웃으며 이 메모를 했을까 하여 이 종이 쪼가리가 보물처럼 사랑스러운 것이다. 사실 사랑이란 그런 것 아닌가, 그 사람의 의미 없는 몇 줄 낙서만 보고도 그 사람의 그 상황과 하루가 다 떠올려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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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람이를 보면서 준휘는 또 람이의 어느 순간을 상상한다. 람이네 집에 언젠가 놀러갔을 때 들었던 노래, 람이가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왜 이 노래를 좋아하게 됐을까? 이 노래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던걸까? 그 생각에 가닿고 싶어서 준휘는 비틀즈 CD를 산다. 어떻게든 다가갈 수 없지만 그래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그 실체에 가닿기 위해서, 실체에 가닿았다는 느낌이라도 갖기 위해서, 아니, 그런 노력조차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이 뜨거운 마음을 안고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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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잃어버린 한 조각, 로스트 오브젝트를 찾아 평생을 헤맨다. 루다가 동경이에게서 본 것, 동경이가 영전에게서 본 것, 루리가 재련이에게서 본 것, 람이가 루리에게서 본 것, 준휘가 람이에게서 본 것, 아니, 그들이 보았다고 생각한 것. 평생을 미혹시키지만 다가가도 절대 소유할 수 없는 어떤 것, 그러나 보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이 쫓아갈 수밖에 없는 바로 그것, 세상 끝날 까지 간절히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그것. <쿨핫>에서 말하는 ‘실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들이 모두 가닿고 싶어하는 ‘진실’, ‘속살’, ‘실체’란 바로 그것이다.

<쿨핫>은 걸작임에는 이견이 있기 어렵지만 저주받았다는 수식어는 어떻게 붙여야 할지 망설여진다. 실은 저주받은 쪽은 작품이 아니라 독자다. 6권 이래 십년 넘게 기다려왔어도 7권을 만날 수 없는 독자들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미완으로 끝난 것까지도 <쿨핫>의 <쿨핫>다움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팬심이요 ‘쉴드’일까?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애절하게 그리워할 뿐인 미완의, 미혹의 욕망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해석과 수용은 어차피 처음부터 각자의 몫이었다는 점 때문에, <쿨핫>은 더욱 <쿨핫>답다. 나는 이 작품이 유시진의 손에 완결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이미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포기와 체념과 끝없는 나만의 재해석 속에서 <쿨핫>은 그 자체로 완성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우리 모두의 욕망이 결국 그러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