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층정령 미소녀의 정신분석_ 손장원, <달이 내린 산기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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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과학만화가 아니다
손장원 작가는 덕업일치를 이룬 사람이다. (무려) 젊고 촉망받는 지질학자로서 활동하면서도 자신의 연구결과를 기초로 웹툰을 그려내는 놀라운 재능을 보여준다. 그의 본업이 지질학자인지 웹툰작가인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화석을 좋아해 이를 수집하고 분석하길 좋아하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한 소년은 자연스럽게 지질학 박사학위와 웹툰작가의 포지션 모두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학자가 그린 웹툰이라고 해서 <달이 내린 산기슭>은 흔해 빠진 과학만화일 것이라는 편견을 거두자. 그의 작품은 분명 독자에게 지층의 종류와 연대기, 지질학에 대한 기본 개념을 소개하고 있고, 심지어 학술논문 검색 사이트 DBPIA에서 ‘손장원’으로 검색해 그의 연구논문을 읽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과학만화가 아니다.

난해한 과학의 세계를 쉽게 풀어내기 위해 ‘지식’에 그림과 스토리를 입힌 작품들과 그의 작품이 결정적으로 다른 이유는 작품이 품은 ‘지식’이 전달되어야 할 특정한 독자주체를 불러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교육용 만화의 독자라면 스토리가 끊기며, 갑자기 특정 지식을 설명하는 방식의 전개에 갑자기 학생이 되어버리는 기분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때 친절한 설명은 집요한 설득과 다름없는 일이 된다. “너는 이것을 배워야 해.”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손장원의 작품에는 그런 일이 없다. 왜 그럴까? 작품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한 35살 오원경이라는 지질학도의 이야기다. 그는 벼락이 쳐 암석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우연히 흥월리층의 정령 월리를 만나게 된다. 지층의 명칭은 인간이 만든 개념이므로 학계에 새로운 연구보고에 따라 사라지기도 생성되기도 하는 이름들이다. 이 작품은 인간이 이렇게 부여한 이름들에 의해 정령이 살아 숨 쉬고 동시에 그래서 인간에 의해 사라질 수 있다면 어떨까 상상한 끝에 구상한 작품이라고 한다. 조그만 소녀의 모습을 한 이 정령은 자신이 속한 지층 속으로 되돌아가질 못하는데, 그 이유는 흥월리층이라는 개념 자체가 10년 전에 사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령이 존재하는 것도 실은 이상한 일이다. 월리는 사라졌어야 하는 정령이고,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 이런 인연으로 오원경과 정령 월리가 목적 없이 탐사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 이 작품의 기본적인 줄거리이다.

 

캡처

 

학자로서 손장원은 흥월리층을 없앤 장본인이요, 작품 안에서 오원경이라는 페르소나를 사용해 등장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러한 메타 서사를 병행하면서 이 작품을 읽어내고 있으며, 이는 작품의 몰입을 방해하기는커녕 작품의 의도와 방향을 예측하는데 유용한 단서로 사용된다. <달이 내린 산기슭>이 많은 부분 지질학과 관련된 자료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지식을 설명하거나 설득하는 포지션을 취하지 않는 이유는 이 작품의 의도가 애초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는, 그러니까 기존에 정리되고 확정된 학문적 결과를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부정하고 폐기하는 학문의 과정 자체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지질학’에 대한 작품이 아니라 지질‘학’을 향하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시한부 삶을 살게 되는 소녀와 아저씨의 이야기.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다. 하지만 손장원은 이렇게 흔한 스토리를 비범하게 요리한다. 연구논문을 써 본 사람은 이야기의 배면이 연구사 검토의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선행연구에 대한 존중과 반박은 새로운 결론을 도출하려는 학자의 기본적인 자세다. 오원경이 월리를 아끼면서도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남녀간의 애정을 넘어서 학문에 대한 진지한 태도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에로스처럼 보이는 로고스라는 것이다.

연구사 검토
*출처: 고생물학회지 17(1), 2001. 6, p. 12.

 

물론 이 작품에도 기초적 지식에 대한 설명 장면은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스토리와 내재한 지식 사이에 위화감 없는 이유는, 지식에 스토리를 억지로 입힌 것이 아니라 지식 자체가 스토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석사 과정생 조연희가 마차리층과 문곡층 판정 여부로 씨름하는 장면에 오원경이 개입하는 장면은 그 자신의 실제 연구과정을 스토리로 풀어낸 것이다. 급기야 원경은 지층에게 물어보면 사람처럼 대답해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흔히 사물이나 개념에 대한 의인화는 몰입을 깊게 만드는 면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의 의인화는 그러한 스토리텔링 기술이라기보다는 작가가 학문을 대하는 애정에 더 기초한 것처럼 보인다. 진짜 덕후는 자신의 분야에서 사물의 영혼까지 감지한다.

 

공부만화야외조사두드려라 열릴 것이다열린다

 

진리는 여성이다
진리는 때로 여성성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니체는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해보길 권유하고 있다. (<선악의 저편>) 그렇다면 모든 독단적인 철학자들이 소름 끼칠 정도의 진지함과 서툴고 주제넘은 자신감 때문에 여성-진리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진리는 독단적 태도로는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며, 여성을 대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섬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현실의 이성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지층과 화석에 접근할 때는 섬세한 오원경은 진리-여성에 이끌리는 캐릭터다. 이것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미소녀 캐릭터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이 같은 설정은 손장원의 단편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도 반복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년과 소녀가 있다. 영후의 희망은 방학 때 강원도로 친척 집에 머물며 화석을 수집하는 것이다. 해나는 그런 영후가 이상하지만 흥미롭다. 영후가 화석캐기에 집중하다 빗물에 미끄러져 크게 다친다. 영후의 탐구는 금지된다. 다친 영후 대신 해나가 산에 올라 화석을 손에 넣는다. 영후가 서울로 떠나는 마지막 날 해나는 그에게 삼엽충 화석을 주려고 하지만 영후는 언제간 꼭 와서 자신의 손에 넣겠다는 다짐을 한다. 해나는 그런 영후의 마음을 다치거나 어긋나게 하고 싶지 않아 선물로 주려던 화석을 주머니 깊숙이 넣고 작별인사를 한다.

이 러브 스토리의 안타까운 감정은 사랑의 대상이 엇갈리는데 있다. 소녀는 소년이 맘에 든다. 하지만 소년은 삼엽충 화석을 사랑한다. 그런데 아마도 소년에게 화석은 돌덩이가 아니라 미소녀 정령 같이 보였을 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미소녀는 현실의 이성과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소녀 캐릭터에 대한 열망은 이성에 대한 집착과는 다른 것이다. 손장원 작품의 주인공들은 보다 높은 차원의 어떤 힘을 갈망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이토 다마키는 <전투미소녀의 정신분석> 이라는 책에서 전투미소녀의 진짜 의미는 그들이 가공할만한 힘을 가진 존재로 변신하거나 기체에 탑승한다는 것이며, 이들은 궁극적으로 어떤 힘을 가진 존재로서 욕망된다고 보았다. 같은 논리를 들이대면 손장원에게 있어 그러한 존재가 바로 지층의 정령들일 것이다. 현실의 이성보다 아름다운 진리, 힘에의 추구가 모든 망가 애니메이션의 무의식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손장원의 ‘돌 페티시즘’은 단순한 고착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힘에의 의지로까지 음미해볼 사안이다.

 

필드워크

 

<달이 내린 산기슭>는 치유계 웹툰으로 인식된다. 치유계란 캐릭터들의 성격이 순수하고, 대인관계에 무난하며, 그래서 이야기 자체에 심한 갈등이 유발되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자아내는 감동적인 작품들을 의미한다. 작품 속 월리라는 캐릭터는 시간을 초월한 존재로 인간사에 무지하다는 점에서 순수함의 매력을 잘 보여준다. 이야기는 로드무비 형식을 쫓아 함백산, 백운산, 태백산의 산신령들과 몇 몇 여행객들을 조우하는 것으로 진행되니 작품 속에 갈등이 존재할 이유도 없다. 진짜 갈등이라면 흥월리층을 없애기 위한 치열한 연구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이 작품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종결된 것이고, 동시에 이야기 밖의 요소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야기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독자들은 이러한 요소들 덕분에 이 작품을 편안하게 읽게 된다. 동시에 사라질 수밖에 없는 여주인공의 운명을 감지한 채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으므로 비극적인 분위기를 띨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작품이 치유계로 분류될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메타서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화석을 분석하고 지층을 분류하고, 연대기를 추정하는 일은 그 누구도 관심에 없는 일이다. 그것은 학문이라는 틀 속에서 극소수만이 갖는 관심사다. 겉에서 보기에 학문은 직업처럼 보이지만 실은 굉장히 사적인 취미의 영역이다. 손장원은 그러한 세계를 그려내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전공이란 사회적인 쓸모를 인정받는 전문성의 영역이 아니라 지(知)를 담아내는 ‘자아’라는 그릇의 고유성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이 점에서 그는 학문이 아니라 오타쿠의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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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 내의 것은 철저히 알지만 전공 외의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 전공 밖의 것에 대해 기꺼이 모른다고 말하는 이 겸손함은 타자의 앎에 대한 예의 그러니까 타자를 존중하는 태도와 자기 자신의 앎에 대해서는 까다로운 윤리를 기꺼이 감내하려는 태도에서 나온다. 따라서 “난 네 전공 범위였어?”라는 월리의 대사는 그 어떤 러브 스토리의 고백보다 짜릿한 맛을 준다. 이 사랑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월리가 부정의 대상이라는 점이 독자에게는 슬픈 일이 된다.

무엇인가에 골몰하는 사람은 마치 딴 세상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세파에 요동 없이 자신의 진리를 찾고 있는 학자나 오타쿠 같은 존재들이 그러하다. 손장원의 작품에서 지층과 미소녀가 결합되어 나타난 것은 학자나 오타쿠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같은 존재라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칸트를 읽고 베껴 쓰던 애인의 타자소리를 들으면서 한없이 기분이 좋았던 경험이 있다. 그녀가 어느 페이지를 읽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은유와 구체적 지시를 거부하는, 오로지 개념밖에 없는 칸트의 세계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손장원의 작품이 주는 치유는 이러한 숭고함에 있다고 판단한다. 너무나 숭고한 학문, 아니 오타쿠를 위하여.

오영진

초보 글쟁이, 영화, 게임, 인디음악, 웹툰 등 대중문화 이곳 저곳을 누비며 글을 써 보고 있다. 자신의 진짜 전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인증된 전공은 문학이다. 한양대 ERICA에서 실험적인 교양과목을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기도 한다. 작곡도 조금 할 줄 안다. 계간지 [쿨투라] 2014년 봄호를 통해 데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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